제희공

 


'''{{{#ece5b6 제(齊)나라 13대 국군
희공
僖公}}}'''
''''''
강(姜)
''''''
여(呂)
''''''
녹보(祿甫)
'''아버지'''
제장공(齊莊公) 강속(姜贖)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98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730년 ~ 기원전 698년
1. 개요
2. 치세


1. 개요


제나라의 제13대 군주. 제장공아들. 제양공, 제환공의 아버지.[1] 이 제 희공의 노력으로 제 환공 때 패자가 되는 기반이 마련된다. 이때부터 강제의 기록이 많아지기 시작한다.[2]

2. 치세


제 희공 9년(기원전 722년), 노은공이 즉위했다.[3]
제 희공 11년(기원전 720년) 겨울, 제 희공은 정장공과 회맹해 정나라의 입지는 더욱 막강해졌다.[4]
제 희공 14년(기원전 717년) 5월 신유일, 제 희공은 노 은공과 애 땅에서 회맹했다.
제 희공 15년(기원전 716년) 여름, 제 희공은 동복 아우 이중년(夷仲年)을 보내 노나라와 우호를 다졌다. [5]
제 희공 16년(기원전 715년) 봄, 제 희공은 송나라위(衛)나라에게 정나라와 강화를 요청했다.[6] 같은 해 가을 7월에 송 상공과 위 선공과 함께 회맹했다. 8월 병술일에 정 장공은 제나라 사신과 함께 주나라의 조회에 참석했다. 겨울에는 제 희공이 노나라에 사람을 보내 송, 위, 정 삼국과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제 희공 17년(기원전 714년) 겨울, 제 희공은 노 은공에게 송나라를 치자고 했다.
제 희공 18년(기원전 713년) 2월, 제 희공은 중구에서 노 은공, 정 장공을 만나 회맹했다. 2월 25일 정나라에서 회맹해 출병 시기를 잡았다. 10월 임오일 제 희공은 정 장공과 함께 성(郕)나라가 송나라를 같이 치자고 해놓고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성나라부터 쳤다.
제 희공 19년(기원전 712년) 7월, 제 희공과 노 은공, 정 장공이 허(許)나라를 쳤다. 첫날부터 허성을 함께 쳤다. 7월 3일 허나라를 점령했고, 허나라 군주 허 장공은 위나라로 도망갔다. 제 희공이 노 은공에게 허나라 땅을 주려 했으나 노 은공이 거절해 정 장공이 가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나라의 공자 궤가 즉 노환공이 노 은공을 죽이고 노나라의 군주가 된다.
제 희공 21년(기원전 710년) 봄, 송나라의 태제 화독이 송 상공을 죽이고 같은 해 3월 노 환공이 제 희공, 정 장공과 함께 송나라를 쳤다.
제 희공 22년(기원전 709년), 노 환공이 영 땅에서 제 희공과 회맹하다가 노 환공이 혼인하겠다는 말을 전해 제 희공은 자신의 딸인 문강을 노 환공에게 시집보낸다. [7] 이 해 여름에 제 희공과 위 선공이 포 땅에서 만났으나 맹세하지는 않았다.
제 희공 24년(기원전 707년), 제 희공은 정 장공과 함께 기(紀)나라에 방문했다.
제 희공 25년(기원전 706년), 북융이 제나라를 치자 제 희공은 정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정 장공은 6월에 태자 홀(忽)[8]을 보내 구원했다. 태자 홀은 북융을 쳐서 300명을 죽였고, 포로도 많이 잡았다. 이에 제 희공은 그 공로를 높이사서 제 희공이 그 딸을 태자
홀에게 시집 보내 주려 했으나 태자 홀이 말했다.
"정나라는 소국이지만, 제나라는 대국입니다. 그러니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아 거절합니다."
그리하여 그 일은 백지화되었다.
제 희공 26년(기원전 705년) 가을, 제 희공은 정나라, 위나라와 함께 맹읍과 상(向)읍[9]을 쳤다. 주 환왕은 맹읍과 상읍의 백성들을 견땅에 옮겼다.
제 희공 29년(기원전 702년) 겨울, 제 희공은 위나라와 정나라와 연합해 노나라를 치니 노나라 군대는 상 땅에서 교전했다.[희공]
제 희공 30년(기원전 701년) 정월[10], 제 희공은 위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함께 악조 땅에서 회맹을 가졌다.
제 희공 32년(기원전 699년) 2월, 기사일 제 희공은 송나라, 위나라, 연나라와 함께 노나라를 쳤다. 그 결과 노나라는 패배했다. 같은 해 동생 이중년이 죽었다. 이에 그 아들인 공손무지를 불러 그에게 태자인 강제아(姜諸兒)[11]와 같은 대우를 해주었다.
제 희공 33년(기원전 698년) 겨울, 제 희공은 송나라, 위나라, 채나라, 조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정나라는 제대로 대비하지 않아서 대패했다. 같은 해 12월 정사일에 제 희공이 죽으니 그 아들 강제아가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제양공(齊襄公)이다.
[1] 열국지에서는 제 환공은 제 양공의 아들로 나온다.[2] 단 무조건 그런 것은 아니고 제환공, 제경공(齊景公) 등 유명한 군주에 한해서 많아진다.[3] 이때부터 춘추에 기록이 시작된다.[4] 그 이유는 춘추 시대 극 초기에 정나라는 소국이지만, 제나라는 나름대로 국력이 상당한 나라기 때문이다.[5] 그는 제 양공을 죽이고 제나라 군주가 된 공손무지의 아버지이다.[6] 이 당시에 이들은 정 장공이 이끄는 정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7] 드립이라 취소선을 사용했지만 실은 맞는게, 제 희공의 아들 제 양공이 문강과 간통을 하고자 노 환공을 죽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제양공, 노환공 문서를 각기 참조.[8] 훗날 정 소공이 된다.[9] 지명이나 성씨로 쓸 때는 向자를 원음인 향이 아닌 상으로 읽는다. 즉 나라 이름, 성씨 상으로 나타낼 수 있다.[희공] 25년 북융의 제나라 침입 때 제희공이 제나라를 구원한 제후들의 군대에 양식을 보냈는데 이를 나누는 일을 맡은 노나라에서 정나라의 순서를 맨 마지막으로 하자 분노한 정나라가 제나라에 노나라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10] 1월이다.[11] 훗날의 제 양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