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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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나라의 제3대 군주. 정무공의 아들이자 공숙 단(公叔 段)의 형, 그리고 정소공, 정여공, 공자 미, 공자 영의 아버지다. 정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다.[1] 그는 단지 나라를 잘 다스렸을 뿐 아니라, 천자를 대신해 제후의 회맹을 주재하고 이를 통해 천하의 패권을 쥔다는 춘추시대의 트렌드, 그 일련의 역사적 흐름에 처음으로 지침을 제시하였으며, 비록 춘추오패에 꼽히지는 못하지만 그들보다 한발 앞서 패권에 다가선 인물로[2] , 진정으로 춘추시대를 개막케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정무공 14년에 정장공이 태어났다. 이름은 오생(寤生)인데 그 의미는 산모가 잠 자는 중에 아이를 낳는 경우,[3] 혹은 태아의 다리가 먼저 나오는,[4] 난산을 뜻한다. 자다가 갑자기 나온 아이여서, 혹은 난산으로 낳아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번역마다 달라진다. 꺼림칙한, 혹은 고통스러운 출산 과정 탓인지 어머니 무강은 장남 오생을 싫어했고 대신 정무공 17년에 낳은 차남 공숙 단을 아꼈다. 정무공 27년 정무공이 중병에 걸려 죽음이 임박하자 그의 아내 무강은 자신이 총애하는 공숙 단을 나라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정무공이 듣지 않아 세자인 정장공이 대를 잇는다.
2.2. 아우를 축출하다
정장공 원년(기원전 743년), 무강이 공숙 단에게 분봉할 것을 청하니, 모사 제중은 나라를 둘로 나누는 일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정장공은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다 하여 이를 듣지 않았고 공숙 단에게 정나라의 큰 고을인 경(京)을 분봉해 준다. 야심이 컸던 공숙 단은 어머니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경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고 이런 불안정한 정국은 22년이나 계속되었다.
정장공 22년(기원전 722년), 정장공이 입조하기 위해 나라를 비우자 공숙 단은 어머니 무강의 부추김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정장공은 이미 한발 앞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공자 려가 정장공의 명을 받아 200량의 전차를 끌고 공숙 단을 치니 공숙 단은 패하여 본거지 경으로 달아난다. 이에 정장공은 경을 쳤는데 반란을 일으킨데다 그 탓에 자신들이 화를 입게 되었으니 경의 백성들이 공숙 단을 배반해 버린다. 공숙 단은 언성으로 도망갔으나 그 언성마저 공격받아 결국 위(衛)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그런데 공숙 단의 아들 공손 활이 위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정나라 늠연(廩延) 지역을 탈취하자 정장공은 천자, 주평왕에게 공숙 단의 반란을 보고했고, 주평왕도 왕의 입장에서 군신 관계를 어지럽히는 공숙 단과 위나라를 내버려둘 수 없으므로 정나라에 주나라의 군대를 지원한다. 천자의 지지라는 명분에 실질적인 무력까지 확보한 정장공은 위군을 몰아냈고 아예 위나라로 쳐들어가 공손 활을 징벌한다. 역사 소설인 열국지에서는 공숙 단이 언성에서 포위를 당해 헛바람을 넣어 준 어머니를 원망하며 자결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에 망명객으로 있다가 죽는다.
내막을 밝히자면 실은 정장공은 즉위할 무렵부터 공숙 단을 제거하고 싶었으나, 그러자면 필연적으로 어머니를 거스르게 되는데다 추방을 하건 죽이건 친동생을 핍박하는 그와 같은 패륜 행위가 국내외에 미칠 크나큰 악영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진심을 숨긴 채 공숙 단에게 중요한 영지를 하사하고 방치 상태로 두어 그가 자신을 얕보고 스스로 반란을 일으키기를 기다려 기나긴 시간 인내했던 것이다. 결국 동생과 어머니를 향한 기만책이 성공을 거두어, 공숙 단이 반란을 일으켰을 땐 20여년 동안 칼을 갈아 온 정장공이 손쉽게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열국지에서는 이렇듯 의뭉스럽다 할 정도로 지독한 그를 간웅이라 평했다.
이렇게 공숙 단의 반란은 수습되었다. 이어서 정장공은 내전의 또 다른 원흉이자 기어이 자식들끼리 상잔하도록 조장한 비정한 어머니, 무강을 영 땅에 유폐한다. 그리고 생모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 그녀에게 분노해 황천에 가기 전에는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래도 자신을 낳아 기른 어머니였기에, 이내 그녀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명색이 군주로서 입밖에 내놓은 말을 가볍게 물릴 수도 없어 고민한다. 그런데 이때 정나라에 하급 관리로 영고숙(穎考叔)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효심이 깊고 충성스러워, 주군인 정장공의 고충을 덜고 그가 효를 행할 수 있게 돕고자 한다. 그리하여 영고숙은 정장공을 찾아가 올빼미 고기를 진상하며 말한다. "올빼미는 어려서는 어미 젖을 먹고 자라지만, 커서는 어미를 쪼아대는 불효한 새라 사람들이 잡아먹습니다." 정장공은 영고숙의 의도를 깨달았지만 그저 묵묵부답이었고, 마침 식사 시간이 되었던지라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한다. 음식으로 염소를 찐 요리가 나왔는데 영고숙은 이를 먹지 않고 맛난 부위만 골라 따로 덜어두었다. 장공이 왜 먹지 않는지 이유를 묻자 "집안이 가난해서 평소 어머니께 고기 반찬을 올리지 못했는데, 이참에 가져가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답한다. 그 효성에 감동한 장공은 "나는 어머니를 봉양하고 싶어도 맹세 때문에 만날 수조차 없네."라고 탄식했고, 영고숙이 맹세의 허점을 찔러 황천에서 모자가 상봉할 계책을 준다. 땅을 파서 샘물(泉)이 솟아나오면 곧 황천이니 거기에 방을 만들고 태부인을 모시라는 것. 그 말을 좇은 정장공은 인공적으로 만든 황천에서 어머니 무강과 만나 화해한다. 모자 사이는 크게 개선되었고, 정장공은 영고숙을 대부로 삼아 중용한다.
2.3. 주환왕과의 갈등, 춘추시대의 트렌드를 이끌다
정장공의 아버지 정무공은 주나라의 경사(卿士, 재상)로서 성실히 맡은 바를 다하였으나, 아버지의 직위를 세습한 정장공은 그 의무는 등한시 한 채 경사의 위세를 이용해 정나라의 국력만을 키우고 있었다. 천자의 중신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다른 나라들을 정벌할 명분을 확보할 수 있는데다, 주나라의 병사를 지원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장공은 경사 지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쇠약해지는 주나라와 대비되는 정나라의 강대함에 위기감을 느낀 주평왕은 신하 괵공 기보(忌父)에게 몰래 정장공이 갖고 있던 권한의 반을 주려 했다. 그러나 어떻게 이 사실이 사전에 정장공의 귀에 들어갔고, 당연히 정장공은 매우 불쾌해 한다. 막상 권신의 분노가 닥쳐오자 당황한 주평왕은 무너진 신뢰 관계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아들 왕자 호(狐)를 정장공의 세자 홀(忽)[5] 과 인질로 교환한다. 왕이 신하에게 쫄아서 자식을 볼모로 보내야 할 정도로 주나라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6]
정장공 24년(기원전 720년), 주평왕의 뒤를 이어 장손인 주환왕이 천자로 즉위한다. 할아버지와 숙부의 일로 정장공에게 불만이 있던 이 젊은 군주는 정말로 정장공의 권력을 괵공에게 나눠 준다. 이에 정장공은 실력 행사로 병사들을 보내 주나라 땅의 곡식을 서리해 간다. 신하가 주군의 재물을 훔치는 막장 상황에 두 사람의 관계는 크게 악화된다.
한편 송나라에서는 송상공이 즉위하는데 선군인 송목공의 아들 공자 빙이 정나라로 도망을 온다. 이유인즉, 송상공의 아버지 대에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는데, 송상공의 아버지 송선공은 유조를 남길 당시 세자였던 송상공이 어렸던 탓에 대신 자신의 아우 화(和)에게 군위(君位)를 잇게 했다. 그 화가 송목공으로 송목공은 자기를 믿어준 형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그래서 그를 따라 아들인 공자 빙 대신 송선공의 아들인 조카 송상공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그런데 용렬한 송상공은 비록 자신이 군위에 오르긴 했으나 선군의 아들의 존재에 부담을 느껴 공자 빙을 죽이려 했고 이에 공자 빙은 위협을 피하고자 국외로 달아난 것이다.[7]
또한 같은 해, 제후들 가운데서도 특히 강대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제나라의 제희공과 결맹(結盟)한다.
정장공 25년(기원전 719년), 위(衛)나라 선대 군주인 위장공(衛莊公)의 서자 주우(州吁)가 당시 위나라에 망명해 있던 공숙 단과 결탁해 형 위환공(衛桓公)을 죽이고 군위를 찬탈한다. 주우는 공숙 단의 협력에 대한 보답으로 정나라로 망명 간 공자 빙을 제거할 궁리를 하던 송나라에, 위나라와 친밀한 관계였던 진(陳)나라, 채(蔡)나라까지 끌어들여 정나라를 친다. 또한 노나라에도 원군을 요청하는데 군주인 노은공은 거절하였으나 대부 우보(羽父)[8] 가 멋대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무려 다섯 나라의 연합군이 결성된다. 이들은 정군을 패퇴시키고 수도 신성을 일시적으로 포위하였으며 그 일대의 작물들을 약탈했으나, 진정으로 원하던 바를 이루진 못한다. 오히려 이 사태의 주동자였던 주우는 위나라의 충신 석작의 계책으로 살해된다.[9] 정장공은 이후 주나라의 도움을 받아 위나라와 송나라에게 보복하였고 위나라와 송나라도 동일하게 맞대응한다.
정장공 26년(기원전 718년), 주왕실을 따라 곡옥대진 사건에 개입해 진악후를 몰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정장공 27년(기원전 717년), 과거 서리 사건 이후 처음으로 정장공이 입조하였는데, 정장공에게 감정이 좋지 않던 주환왕이 그를 박대한다. 체면이 구겨진 정장공은 정장공대로 원망하는 마음을 품는다.
정장공이 송나라를 치자 송나라는 이전에 정나라를 공격할 때 함께했던 노나라에 구원을 청한다. 하지만 원래 그때도 관여할 생각이 없었던 노은공은 이를 거절하고 이에 정장공은 노나라와 우호를 꾀한다. 이러한 행동이 성과가 있어 침공에 가담하였던 진나라를 노나라와 손잡고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정장공 28년(기원전 717년), 송나라, 진나라와 강화한다. 정장공은 세자 홀을 진환공의 딸과 혼인시켜 진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한다.
정장공 29년(기원전 715년), 주환왕의 푸대접에 화가 나있던 정장공은 2차 실력 행사로 노나라에게 정나라 팽읍과 노나라 허전의 교환을 제시했다. 정나라 팽읍은 태산이 속해 있는 땅으로, 사실 노나라에 있는 지역인데 경사로서 태산에 제사 지내는 일을 맡고 있던 정나라 군주들을 위해 주나라 왕이 하사한 곳이다. 한편 노나라 허전은 노나라 군주가 입조할 때 드는 비용을 보충해주기 위해 주나라 왕이 하사한 정나라에 있는 지역으로, 뿐만 아니라 노나라의 시조인 주공단의 묘가 있어 노나라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팽읍은 정나라 땅이지만 노나라에 소재해 있고 허전은 그 반대인 만큼, 서로 맞바꾼다면 이로운 점이 많을 터이지만 문제는 두 지역 모두 천자가 특별한 목적으로 하사한 곳이고 이를 제후가 사사로이 주고 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주환왕의 비위를 제대로 건드릴 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정도 타협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일전에 동맹을 맺었던 제희공과 함께 입조하고, 역시 제희공의 주선으로 송나라, 진나라와도 친선을 도모한다. 다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환왕은 정장공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경사의 권한을 쪼개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예 경사 직위를 하나 더 만들어 괵공에게 하사한다. 이로써 괵공은 우경사, 정장공은 좌경사가 되었다.
정장공 30년(기원전 714년), 송상공이 조정에 결례를 범하였고, 정장공은 좌경사로서 천자 주환왕의 명을 받들어 따라 송나라를 쳤다. 노나라와 제나라도 이에 호응하여 송나라를 칠 논의를 하였고 정장공은 채나라, 위나라, 성나라에도 왕명을 따라 송나라를 칠 것을 요구한다. 이때 북융(北戎)이 정나라를 침공했으나 정장공의 아들인 공자 돌이 매복책으로 이를 격파한다.
정장공 31년(기원전 713년), 정장공은 제희공, 노은공과 송나라를 공격했고 이를 통해 얻은 고, 방 두 지역을 자신들 중 가장 작위가 높은 노은공에게 양보한다.[10] 대의명분과 예법을 지킴으로써 명성을 얻음과 동시에 송나라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킨다.
한편, 채나라, 위나라, 성나라는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위나라는 오히려 송나라와 손잡고 정나라 본국을 치는 동시에 일부 병력은 채나라의 군대와 함께 정나라의 동맹인 대나라를 공격했다. 정장공은 직접 대나라로 가 적을 격퇴하였고 이어서 다시 송나라를 쳤다. 겨울에는 제나라와 힘을 합쳐 소집에 불응한 성나라를 쳤다.
정장공 32년(기원전 712년), 정장공은 제희공, 노은공과 더불어 허나라를 쳤다.[11] 정장공은 출진 전에 무기를 나눠주며 군대의 사기를 북돋았는데 영고숙과 정장공의 종형제인 공손 알(公孫閼)[12] 이 한 대의 전차를 두고 다퉜다. 결국 영고숙이 직접 손으로 전차를 끌고 도망쳤는데, 공손 알이 창을 들고 쫓아갔으나 결국 따라잡지 못했다.[13] 이 사건으로 공손 알은 영고숙에게 앙심을 품게 된다.
준비가 완료되자 정장공은 맹렬하게 허나라의 국성을 공격했다. 용맹한 영고숙이 가장 먼저 깃발을 들고 성벽에 올랐으나, 이를 시기한 공손 알이 그를 향해 활을 쏘았고, 영고숙은 화살에 맞아 성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이윽고 허나라의 국성은 함락되었고, 군주인 허장공은 위나라로 달아났다. 허장공을 대신해 그 동생 허숙이 항복하니 정장공은 제희공과 노은공이 허나라를 그에게 양보하였음에도 이미 허나라가 왕명에 승복하였으니 가질 수 없다며 대신 허나라를 둘로 쪼개 동쪽은 허숙에게 주어 나라를 잇게 하고, 서쪽은 정나라의 대부 공손 획에게 맡기되 자신이 죽으면 물러나게 하여 야심이 없음을 피력한다.
정장공은 영고숙을 잃은 애통함에 전군에게 닭과 돼지를 주고 제사를 지내게 해 영고숙을 죽인 자를 저주하도록 했다. 물론 부질없는 짓이었다.[14]
주환왕은 자신의 대리인인 주제에 제후를 포섭해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정장공의 행보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쓰는데 정나라의 읍 3개를 가져가고, 대신 주무왕 시절의 공신인 소분생에게 하사했던 12개의 고을을 주었다. 얼핏 보기엔 주환왕이 정장공의 봉토를 늘려준 것 같으나 내막은 달랐다. 왜냐하면 소분생의 일족은 이미 왕실을 배반하고 오랑캐 북적에게 붙은 상태였기에 주나라 입장에서 그들의 땅은 그저 그림의 떡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는 것 없이 봉읍만 빼앗아 버린 것.''' 이로써 위태롭게 유지되던 군신간의 신의가 완전히 무너졌다.
정나라와 식나라 간에 언어 문제로 다툼이 생겼고, 분을 참지 못한 식나라가 먼저 정나라에 쳐들어갔으나 대패한다. 강국인 정나라에 비해 식나라는 국력이면 국력, 위상이면 위상 모두 하나 같이 보잘 것 없었는데 자신과 상대방의 힘을 제대로 견주어 보지도 않고 덤빈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자기 역량을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행동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부자양력(不自量力)이 생긴다.
그 해 10월 괵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또 송나라를 공격했다. 이 즈음 노나라 대부 우보가 노은공을 죽이고 노은공의 동생 공자 윤을 노환공으로 세운다. 노은공은 선군 노혜공의 큰아들이긴 했지만 서자였기에 원래 군위는 세자인 공자 윤에게 돌아가야 했으나 노혜공 사망 당시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린 까닭에 노은공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그렇게 노은공은 십여 년간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 무렵 욕심이 많던 우보가 노은공에게 자신을 태재(太宰, 재상)로 임명해달라고 사적으로 청탁을 한다. 이리저리 대화가 오가던 중 공자 윤이 화제로 오르게 되고 우보는 노은공에게 정통성을 가진 그를 제거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선량하고 마음이 여린 노은공은 그 말에 놀라 화를 내며 동생이 장성하면 바로 지위를 물려주고 은퇴하려 했다며 그 자리에서 우보를 쫓아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우보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혹시라도 이 일이 밝혀졌다간 공자 윤에게 해코지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아예 공자 윤에게 붙어 역으로 노은공을 암살한다. 당연히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었고 법도에 어긋나는 계승이었으나 이미 노나라와는 회맹으로 묶인 우호 관계인 만큼 괜히 자극해 봐야 득될 게 없으므로 정장공은 별말 않고 이를 인정한다.
정장공 33년(기원전 711년), 주환왕의 영토 갈취에 분노한 정장공은 앞서 4년 전 노나라와 논의했던 팽읍과 허전의 교환을 이행한다. 다만 정말 대놓고 맞바꿨다간 꼬투리를 잡힐 수 있는데다 예의지국인 노나라 입장에선 시조의 선영(先塋)을 팔아 먹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않으므로,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일을 진행한다.
정장공 34년(기원전 710년), 송나라 태재 화독이 송상공을 죽였다.[15] 이에 정장공은 노환공의 부름에 응해 제나라, 진나라의 군주들과 함께 송나라에서 일어난 난을 평정하려 하지만 화독이 재빨리 그들에게 뇌물을 뿌려 이를 무마한다. 특히 회맹의 수장인 노환공에겐 과거 송나라가 멸망시킨 고나라의 솥[16] 을 바쳤다. 그리고 동시에 오래 전 송상공을 피해 정나라로 망명해 있던 공자 빙을 군주로 모시겠다고 청했고, 이에 주군을 시해한 화독을 벌하기 위해 맺었던 회맹은 오히려 그의 정변을 정당화하는 모임으로 변질되고 만다.[17] 정장공 입장에선 숙적이나 다름 없던 송상공이 죽고 자신이 보호해 준 공자 빙이 송나라 군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니 상당한 행운이었다. 곧 공자 빙이 군위에 오르니, 그가 송장공이다.
한편, 정장공은 남방의 초나라가 강성해지자, 초나라와 인접한 위치에 있는 채나라의 채환후와 만난다.
정장공 35년(기원전 709년), 북융이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는 정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정장공은 아들인 세자 홀에게 구원군을 이끌게 한다. 세자 홀은 있는 힘을 다해 용감히 싸웠고 정군과 제군은 힘을 합쳐 성공적으로 적을 격퇴한다. 이에 크게 기뻐한 제희공이 보답으로 세자 홀을 사위로 삼으려 하지만 세자 홀은 제나라는 크고 정나라는 작으니 격이 맞지 않다고 사양한다. 함께 출정했던 제중이 거듭 받아들일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정나라와 제나라의 우호에 금이 갔다. [18]
정장공 37년(기원전 707년), 더 이상 정장공을 용납할 수 없던 주환왕이 주나라, 거기에 더해 채나라, 위나라[19] , 진(陳)나라 병사들까지 이끌고 직접 정나라를 친다. 그러나 백전노장 정장공은 이를 막아내었고 심지어 정나라 대부 축담[20] 이 주환왕의 어깨에 화살을 쏴 맞힌다. 천자가 부상을 당해 사기가 떨어진데다 정장공의 전술에 휘말린 주환왕의 군대는 결국 패했고, 주환왕의 상처를 돌보고 전열을 정비하고자 퇴각한다. 정장공은 승리에 기뻤으나 이미 충분히 위용을 과시한데다 정말 천자를 해했다간 그 화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주나라 진영에 제중을 보내 부득이하게 맞설 수밖에 없었음을 사죄하고 주환왕에게 공격을 가한 축담을 파면한다. 공을 세우고도 벌을 받은 축담은 화병으로 죽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은 주환왕은 어쩔 수 없이 정장공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일로 천자의 위신은 실추될 대로 실추되고 만다.[21]
정장공 39년(기원전 705년), 주환왕이 준 고을인 맹과 상 땅이 배반하자 정장공은 제나라, 위나라와 함께 이를 진압하려 하였고, 주환왕은 두 고을 사람을 겹으로 옮긴다.
정장공 43년(기원전 702년), 제희공, 위혜공(衛惠公)과 함께 노나라의 낭 땅에서 회맹했다.
2.4. 최후와 후일담
정장공 44년(기원전 701년), 제나라, 위나라와 회맹했다. 그리고 이 해 정장공이 죽었고 세자 홀이 즉위해 정소공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장공에게는 야심 있는 아들들이 많았다는 점으로 특히 그 중 송장공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공자 돌에 의해 정소공은 곧 폐위되고 만다. 정소공을 몰아낸 공자 돌이 스스로 군위에 오르니 정여공이다. 다만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쫓겨났고, 정소공이 복위한다. 그러나 정소공은 환궁한지 1년여만에 사이가 좋지 않던 권신 고거미에게 살해당하고 이에 고거미와 친하던 공자 미(亹)가 군주로 추대되지만 패권을 노리던 제양공이, 회맹을 빌미로 그를 초대하고는 주군을 시해한 죄인을 벌한다는 명분으로 죽여 버린다.[22] 그 뒤를 공자 영(嬰)이 이으나 그 역시 신하의 손에 제거당한다. 결국 내분은 정여공이 복벽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해 정나라는 약해진다. 정여공 사후 그의 아들이자 정장공의 손자인 첩(踕)이 즉위하니 정문공으로 정문공은 나라를 안정시켰으나 이때는 이미 초나라와 제나라, 진(晉)나라 등이 강력해진 뒤였다.
[1] 중흥을 이끈 군주는 자산을 등용한 정간공.[2] 그 때문에 최초의 패자라는 타이틀은 제환공이 거머쥐었다.[3] 寤를 본의로 해석해서 오생을 '잠을 깨니(寤) 태어났다(生)'로 본 것.[4] 寤를 啎(거스를 오)의 통가자로 해석해서 오생을 '거꾸로(寤) 태어났다(生)'으로 본 것.[5] 훗날의 정소공.[6] 여담이지만 왕자 호는 정나라에서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 신세가 신세인 만큼 줄곧 실의에 빠져있던데다 아버지 주평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인질인 까닭에 정장공이 주나라로 보내 주지 않아 심신이 쇠약해진다. 주평왕이 죽고나서야 비로소 풀려나지만 이미 건강을 해친데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7] 그래서 공자(孔子)는 송선공을 비난했다. 정말 동생을 믿었더라면 그로 하여금 아들을 보필하게 하면 그만이지, 괜히 함부로 군위를 넘겨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사실 공자로서는 이 일로 말미암아 이후 송나라에 벌어지는 정변 때문에 6대조인 공보가가 죽임당하고 원래 송나라에서 살던 일족이 타국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됐던 터라, 맨 처음 빌미를 제공한 송선공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8] 우보는 별명이고 본명은 희휘(姬翬). 공자 휘(公子翬)라고도 한다.[9] 정당하지 못한 즉위 과정과 그 직후의 전쟁으로 민심이 주우를 따르지 않았는데, 이에 원로인 석작이 주나라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백성들의 태도도 달라질 거라고 위나라, 주나라 양쪽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진나라에게 협조를 구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올린다. 주우는 이를 타당하다 여겨 진나라에 직접 부탁하러 가지만, 실은 주우를 죽여 선군의 원수를 갚으려 했던 석작은 몰래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주우를 벌해달라고 청하고 진나라 군주인 진환공(陳桓公)은 석작의 말을 받아들여 주우를 주살(誅殺)한다. 강직했던 석작은 주우와 더불어 패악질을 벌이던 자신의 아들 석후도 주우를 따라 진나라로 가도록 해 죽였다.[10] 고대 주나라의 작위 구분법인 오등작에 따른 것으로, 제희공과 노은공은 후작, 정장공은 그보다 낮은 백작이었다. 노은공은 후작인데다 천자의 일족이었으므로 가장 높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사자들 중 가장 작위가 높은 것은 땅을 빼앗긴 송상공이었다.[11] 사서에도 이유가 기록돼 있지 않은 탓에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정황상 앞서 성나라와 마찬가지로 송나라 토벌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12] 공손은 제후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말로, 정확한 이름은 희알(姬閼)이다. 출중한 외모로 인해 훗날 맹자까지도 그 아름다움을 논하였던 춘추시대의 대표적인 미남자. 본명보다 자인 자도(子都)로 더 잘 알려져 있다.[13] 말이 끄는 무거운 수레를 끌고 가는데 달리는 사람보다 빨랐다는 점에서 영고숙이 효자일 뿐 아니라 용력 또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14] 다만 열국지에선 공손 알이 저주로 죽는다.[15] 이 변란으로 공자의 6대조 공보가가 죽고 공보가의 아들이자 공자의 5대조가 되는 목금보가 노나라로 도망간다.[16] 鼎. 고대 중국에서 솥은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신성시됐다. 구정 참고.[17] 사실 따지고 보면 맹주인 노환공만 하더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즉위했던 만큼 누가 누구를 탓하겠는가.[18] 참고로 이때 제희공이 세자 홀과 결혼시키려 했던 딸이 바로 그 유명한 문강이다. [19] 이 두 나라는 주우가 정나라를 친 이래 줄곧 정장공과 싸워 그에게 원한이 있었다.[20] 달리 축첨이라고도 한다.[21] 주소왕 때부터 떨어지던 권위가 주유왕 때 바닥을 쳤고 주평왕이 간신히 그것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나 주환왕의 패배로 급전직하한 것이다.[22] 고거미도 미를 따라갔다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