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
1. 개요
1995년 북한 6군단이 쿠데타를 모의하려다가 발각당하여 실행하지 못한 사건이라고 주장되는 사건
2. 정황
사건 당시 북한 6군단은 함경북도 지역을 방어하는 향토군단으로서 청진시 라남구역에 사령부를 둔 중국 접경지대의 수비군으로 휘하에 보병 3개 사단, 포병 1개 사단, 방사포 4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94년 여름에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의 승계가 안정되는 와중에 북한 권력이 허점을 보이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치장교 장성(중장)은 체제를 뒤엎기로 결심했다.
사실 공산국가의 정치장교 제도는 지휘관의 반란을 막는 통제제도였으며, 거기다가 북한의 조선인민군의 지휘 체계는 정치장교를 감시하는 보위부 장교까지 만들어 넣은 이중감시 구조였는데 '''정작 정치장교와 보위부 장교가 손을 잡고 반란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사실 50년 이상 유지된 체제하에서는 모두 다 북한 정권 아래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들이니 정치장교나 보위부원이라고 해서 군 지휘관보다 북한 정권에 대해 더 충성심이 높은 게 보장되지 않는다. 애초에 북한이 군 지휘관 + 정치장교 + 보위부원 제도를 운용하는 이유는 군의 지휘구조를 복잡하게 하고, 이들간의 상호 감시 체제를 구축하여 반란 등의 행동을 위한 의견 일치를 어렵게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볼 여지가 더 크다. 당장 이 사건을 보더라도, 2명 사이에는 의견 일치가 이뤄졌지만 3명째가 동의하지 않아서 적발된 것을 생각해 보자.
그러던 차에 1995년 초 국가안전보위부에서 라남구역 라성동을 담당하는 한 요원이 여성 정보원으로부터 한 건의 정보자료를 받는다. 내용인즉슨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한 중장[1] 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체제를 뒤엎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접수한 라남구역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은 이 사실을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에게 보고했다.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의 지시를 받은 도 국가안전보위부의 반탐[2] 처 처장은 현지로 가 그 여성 정보원을 만났다. 그러나 쿠데타를 준비한다고 알려진 6군단 정치부 군관의 말이 취중에 한 말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정보자료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데다가 도 국가안전보위부의 관할 밖인 군 부대라는 점을 고려하여 도 국가안전보위부 반탐처 처장은 '허위보고'로 속단하고 도 국가안전보위부장에게 보고 한 뒤 자료를 서류함에 넣고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한편 정보를 제공한 그 여성 정보원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데 반탐처 처장이 속단했다고 판단하고는 이 사실을 조선인민군 보위국에 보고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6군단 보위국이 미심쩍었던 그녀는 평양에 가서 지인들을 통해 어렵사리 조선인민군 보위국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보위국장을 맡고 있던 원응희 중장은 즉시 수사팀을 파견했다.
수사 결과 6군단 정치장교와 군단의 포병부 사령관을 비롯해 정변을 준비하던 군관들은 군수물자 쿠데타 모의 사건과 6군단 반란사건을 신속히 처리하고 군부내의 반김정일 세력을 뿌리뽑은 공로로 보위사령부로 승격됐고, 보위국장이었던 원흥희는 보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장에서 단숨에 대장으로 진급했다.
김정일은 제2의 6군단 사건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국가안전보위부 산하의 국경경비대, 해안, 철도 경비대와 사회안전성의 일부를 인민무력부에 통합시켜 유일적 지휘체계를 세웠다. 또한 주요 군부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다.
이후 2020년 10월 10일 열병식 때도 여전히 6군단이 해체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3. 실체?
다만 사실 별 거 없었고 그냥 군단장과 정치장교의 '''알력 싸움'''이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우선 쿠데타 시도라기에는 동기와 실제 계획이 어땠는지 너무 불분명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다. 추정되는 설로는 6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후 함경북도를 기반으로 평양에 대한 내전을 일으키거나, 한국군이나 미군을 청진항에 끌어들인 다음 특수부대가 평양에 잠입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는데 모두 비현실적이다.
6군단의 전력은 인민군 내에서도 열악한 수준인 데다 함경북도의 생산력을 감안하면 전쟁을 벌여도 당연히 평양의 중앙 정권과는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쿠데타에서 중요한 것은 언론의 장악과 선전을 통한 지지의 확보인데, 북한의 모든 매스미디어는 평양이 장악하고 있으며 설령 국지적인 지지를 확보한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호응이나 혼란을 야기할 역량이 되지 못한다. 한국군이나 미군이 육로로 연결된 강원도(북한)나 황해도도 아니고 해로와 항공로를 동원해야 하는 함경북도에 진입한다는 것은 더더욱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수 년간 탈북자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대규모 반란 사건에 대한 처분 치고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일단 북한 기준으로 허술한 측면이 있다. 당시 전역자들이 탄광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원래 인민군 전역자를 아무 데나 복불복으로 끌고 가는 인민군 기준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3] 게다가 당시 6군단에 있었고 숙청되어 싹 쓸려야 했던 좌관급 장교들마저도 생존했다는 증언까지 확보되고 있기 때문. 처형당한 경우도 가족들은 함경북도 국경지대로 추방당하는 선에서 끝났다.
역시 자세한 정황은 북한이 붕괴된 이후에야 밝혀질 것이지만 현재로서 확실한 것은 '''"1995년에 모종의 이유로 군단장 살해 사건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김영춘 주도 하에 6군단이 전격적으로 해체되었다"''' 라는 것 뿐이다.
유추를 해 보자면, 정치 장교와 6군단장 사이에 알력 다툼이 있었고, 정치 장교가 군단장을 살해했고,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정치 장교가 윗선에 손을 써서 군단 자체를 해체시켰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가설이지만.
6군단 사건은 탈북자들에 의해 알려 졌는데 내용 자체가 너무 허술한 점이 많다. '''당장 반란을 모의했다는 정치장교인 중장의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반란사건이든 단순 알력사건이든 1개 군단이 해체된 사건에서 주모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는 건 이상하다. 더구나 탈북자들의 주장으론 이 사람이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웠다는데 그런 사람이 이름조차 없다는 게 아무리 북한이지만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김길선 기자와 전소현은 6군단 사건은 군사반란이 아니라, 단순히 국경지역에서 자본주의를 맛보고 돈을 국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 가로채가는 부대를 해체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였다.링크
주성하 기자는 6군단 반란모의 사건이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군대도 안갔다와서 군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약했던[4]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고자한 조작된 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링크
4. 기타
이 사건을 주제로 한 단편 웹만화가 있다. 퀄리티도 괜찮고 무료로 볼수 있으니 관심 있다면 한번 봐보는걸 추천. 다만 어디까지나 만화이므로 사실이라고 믿으면 안된다.현재까지도 사건의 실체가 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