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일
[image]
빵모자를 쓴 사람. 왼쪽에 있는 사람은 김평일의 아들(김인강)과 딸(김은송). 김은송은 결혼하여 평양에 살고 있다.
[image]
[image]
젊은 시절의 김평일. 출처는 KBS 대기획 '김정일'의 캡쳐본
[clearfix]
1. 개요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아들. 즉, 김정일의 이복동생이다.
2. 상세
젊었을 적에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김정일과 암투를 벌인 적이 있으며, 결국 김정일에게 패배해 권력다툼에서 밀려났다. 동시에 김평일의 어머니인 김성애까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흑역사에 가까운 취급이었는데 김일성 사망 직후에는 갑자기 생활비도 대주지 않아 죽은 듯이 숨어서 살았다고 한다.
참고로 김정일은 김성애와 그녀의 자식들을 평생 곁가지로 취급했다. 김정일은 김성애를 한번도 어머니라 부른 적도 없고 마주치기조차 싫어했으며, 김경진, 김평일, 김영일을 형제 남매로 여기기는커녕 형님이나 오빠라고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1] 또한 늘 '수령님에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으며, 1991년 김경희가 중앙당 경공업부장이 되었을 때 '수령님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 잘 도와주라'고 했다고 한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는 누나 김경진과 남동생 김영일이다. 김영일은 독일 주재 대표부의 참사관으로 나가있다가 2000년에 간질환으로 죽었고, 김경진은 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김광섭의 아내로 빈에 살고 있다.
김정일에 비해 김일성을 매우 닮았으며(얼굴, 목소리 등), 특히 관록 있는 이목구비와 180cm에 달하는 큰 키를 지니고 있었고 젊은시절에도 그리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김정일에 비해 김평일은 독보적인 미남까지는 아닐지라도 꽤 잘생긴 축에 들었다. 또한 성품도 원만한 편에다가 대중들을 상대로 직접 연설하는 것을 꺼렸던 김정일과는 다르게, 김평일은 후의 판문점 도끼사건에서 인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 다음에 인민군에 자진 입대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들 앞에서 직접 나서는 것을 좋아했다. 다시 말하지면 대중정치인으로 능력 자체는 김정일보다는 김평일이 더 좋았다. 그리하여 숙부 김영주를 비롯해 혁명 1세대 원로들의 호감을 샀다.[2] 그래서 다음 후계자 자리는 김평일이 이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3]
그러나 김일성의 환갑 때 항일 빨치산 1세대 원로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김일성이 "나의 아이들이 있는데, 누가 다음을 이어야 할지" 넌지시 묻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확실히 후계자를 낙점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김평일이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대다수의 원로들이 침묵을 하고 있는 와중, 가장 김일성이 총애하고 아꼈던 최현[4] 이 입을 연다. "당연히 다음 대에는 수령님 '''장손'''이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자가 있는데 다른 누가 한단 말입니까." 그러자 말을 들은 김일성이 고개를 한참 끄덕인 후,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가장 친밀한 좌상인 최현이 김정일을 대놓고 지지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나서서 "아닙니다, 안돼요. 그만두고 김평일이 합시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그때부터 김정일로 권력승계가 쏠리게 되었다고 한다.'''[5]
물론 김평일이 후계자의 위치에서 밀려난 일의 원인이 단순히 그게 전부일 리가 없다. 여기에는 김평일의 어머니인 김성애가 김일성과의 사이가 점차 틀어졌던 점도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에 김일성이 국립중앙도서관(후에 현 자리로 도서관을 이관하면서 인민대학습당으로 개칭했다.)의 건축을 위해[6] 선정해둔 부지가 있었는데,[7] 그 곳에 김성애의 남동생인 김성갑이 집을 짓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김일성이 김성갑을 불러내서 꾸짖자 앙심을 품은 김성애가 김일성에게 거칠게 항의하였다. 이 일로 김일성의 기분이 크게 상해있던 틈에 약삭빠른 김정일이 이를 노리고 김성애 일가의 비리를 낱낱이 조사해서 김일성에게 보고해버렸다. 이로 인하여 김일성이 김성애는 물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평일도 멀리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북한의 육군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김일성 종합군사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군 지휘관으로 복무한 경력도 있다. 대학 재학중이던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군 입대를 독려하는 연설을 한 뒤 자신부터 인민군에 자진입대했다는 사실은 꽤나 유명하다. 이런 점들 때문에 군경력이 전무한 김정일[8] 이 이복동생에게 심한 컴플렉스와 질투심을 느꼈을 것이라는 추측도 많다.[9]
이렇게 어렸을 적엔 김정일보다 후계자로서의 입지가 우세했고, 김일성도 김평일이 어렸을 적엔 자신의 후계자로 김평일을 낙점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생모가 일찍 요절한 김정일의 입장으로서는 계모 김성애가 마음에 들 리도 없을 것이고... 그 후 김성애가 정식 부인이 되어 정치적으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을 격하시키는 작업에 착수했기 때문에 김정일은 성장 후에도 김성애에게 큰 반감을 가졌다. 김평일 또한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후계자로 공인되고 권력을 잡은 김정일은 김평일의 존재를 두려워하였으며, 차후 그의 후손 및 세력이 북한에서 권력다툼의 씨앗이 될 것을 우려하여 김평일이 정치권에서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외교관으로 임명했다. 말로는 임명이라지만 사실상 권력에서 숙청당한 것이다.
1979년 주 유고슬라비아 주재 무관으로 발령난 이후로는 한번도 귀국하지 못하고 가족들과 40년째 유럽을 떠돌았다.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를 거쳐 폴란드 대사로 1998년부터 16년을 부임하다가 2015년 1월 체코 대사로 전보됐다. 십수 년간 멀쩡히 있던 폴란드에서 갑자기 체코 대사로 옮겨간 이유는, 폴란드 주재 외국 외교관들 중에서 김평일의 부임 기간이 제일 길어 자연스레 김평일이 외교단장이 되어 폴란드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자 김정은이 이를 불쾌하게 여겨서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던 김영남[10] 에게 교체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3. 근황
위에 언급했듯이 해외(주로 동유럽) 주재 대사 자리를 계속 돌았으며 유배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정일은 김평일에 대해 느끼는 적대감이 강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정일은 김평일과 어린 시절 같이 사진을 찍었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내서 모조리 숙청시켰다고 하며, 누가 김평일과 한 마디라도 수상한 대화를 한 일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가는 경우 북한에서는 곧바로 그 사람을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탈북한 한 북한 관료는 "파티에서는 항상 김평일 주위에 1m의 공백이 있었다. 아무도 그와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말 그대로 왕따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고영환도 자신의 외교관 생활 때 해외에서 만났던 김평일은 북한 내에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으며 오로지 북한 노동 신문을 통해서만 북한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김평일이 하루동안 무엇을 하는지를 그에 곁에 붙어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감시자들은 시간별로 김평일의 행적을 기록해 당에 보고했다고 한다.[11] 그리고 한번은 자신이 당 회의에 회의 시간보다 늦게 들어갔지만 뒤에 자리가 많이 남아 있어 이상해서 확인해 보니 그 빈자리들 중 한 가운데에 김평일이 있었다고 말하며, 김평일 자리 양쪽으로 6자리씩 그리고 앞뒤로 3자리씩 비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원형탈모 같은 느낌이였다고 한다. 또한 김정일은 곁가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하얀색 벤츠를 줬는데 그 벤츠는 북한 내에서 곁가지들에게만 지급되기 때문에 김평일이 탄 하얀색 벤츠가 오면 북한 주민들이 "여기 곁가지가 왔다갔습니다."라고 당에 보고하였을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이 철저히 통제된 삶을 살았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평일은 그와 얼굴도 보고 싶지 않은 대사관 직원들에게 자꾸 다가와서 말을 걸거나 내부 행사 때 싫은 티를 내도 모른 척 끼어드는 경우가 많아, 대사관 직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와 얼굴만 마주쳐도 몇 분 몇 초 단위로 무엇을 했는가 철저하게 보고해야 하는 데다가 이상한 오해라도 생기면 바로 큰일이 나기 때문인데, 그래서 김평일은 직원들에게 천치 취급까지 받는다고 한다. 그나마 숙부 김영주가 김정일을 진정시켜서 그렇지 김평일은 물론 그의 형제들과 친모 김성애까지 어떤 비참한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고 한다.
2011년 7월 1일 가택연금 상태라는 뉴스가 떴다. 5월에 입북해서 현재까지 가택연금중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이건 오보였다 2013년 초엔 폴란드 대부업체한테 돈 빌린 거 갚으라고 북한 대사관이 소송까지 걸렸다. 법원에서 기각하긴 했지만. 2015년 2월 3일, 체코대사로 임명되었고 체코대사로 재직하던 2015년 7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대사회의'(외국공관장 회의)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36년 만의 첫 평양 입국이었다고 한다관련 기사
2019년 11월에 사실상 완전히 유배를 끝내고 평양으로 귀국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같은 해 12월 국가정보원에서 김평일이 북한으로 귀국했음을 공식 확인했다. 고영환은 김평일이 북한으로 송환된 이유를 사실상 김정은이 시한폭탄을 제거하기 위함이였다고 주장하며[12] 김평일은 이후 자신의 집에서 좋은 음식은 제공을 받겠지만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서 쓸쓸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외교관으로 파견가기 전에는 소련과 동독에서 유학생활을 한 적도 있고 동유럽 국가 대사였기 때문에 영어, 러시아어, 폴란드어를 할 줄 안다.#
3.1. 권력 복귀 가능성?
2020년 4월 중순 김정은의 신변이상설이 확산되는 가운데, 북한 외교관 출신의 탈북자 국회의원 태영호는 김정은의 유고시 그가 북한의 차기 최고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후처 소생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뭐래도 김일성의 아들인 데다가, 나이도 아직 60대 중후반이라서 정치지도자로서 활동할 여력이 충분하기 때문. 이에 비해 김정철은 정치와 거리가 멀고, 김여정은 여성인 탓에 참모로는 몰라도 보수적인 북한 체제에서 지도자로 전면에 나서기는 불리하다는 논리다.
반면 유력 연구기관, 대학의 북한 전문학자들은 김평일의 권력 복귀 가능성에 회의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이미 40년간 유배나 다름없는 외교관 생활을 하는 동안 평양 권력계에서 소외되어 자기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고, 북한 주민들에게도 존재감이 없거나 한물 간 과거의 인물로만 인식되어 있는 탓에 차기 권력자로는 불리한 위치라는 것.[13] 백두혈통으로 분류되지도 않은만큼 단순히 선대 수령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가진 정통성만 내세우기는 애매하다.
일단 5월 2일 김정은의 공개 활동이 다시 공식 확인되면서, 김평일 잠룡설(?)은 당분간 추측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여겨지며 김정은이 김평일을 아무리 대해준다고 해봐야 권력 상층부까지는 아니고 자문을 맡기거나 할 정도에 그칠 공상이 크기는 하다.
그래도 후계자 경쟁에서 밀리면서 잊힌 김평일이 2011년 김정일 사망 때에 이어 또 한 번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60대로서 정치인으로 활동하기에는 충분한 나이이기 때문에 본인 의사와는 별개로 앞으로도 북한 내부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소환될 가능성이 높다. ?
4. 대중매체에서
- 1980년작 KBS-TV 100분 드라마 《붉은 왕조》에서 배우 백윤식이 연기했다.
- 1982년작 KBS1 반공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 배우 김천만이 연기했다.
[1] 다만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쓴 '대동강 로얄패밀리'에 따르면 어렸을 적엔 그래도 어린 동생들을 꽤 귀여워했고, 미워하게 된 것은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면서부터라고 한다.[2] 여담으로 김일성이 김평일이 태어났을 때 우리집에 장군감이 나왔다며 무척 좋아했다고 하며, 어렸을 때부터 혁명 1세대의 비호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3] 여기에 김평일이 김정일보다 후계자로서의 위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 중의 하나가 러시아 태생인 김정일과는 달리 김평일은 북한 출신이었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선 김평일은 김정일보다 소위 말하는 백두혈통의 우위에 있었다.[4] 현재 김정은 체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룡해의 아버지 되는 인물이다. 민간인 출신의 최룡해가 갑자기 대장계급을 달고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김일성의 첫째 심복인 최현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최현은 교육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은 빨치산 세대들 중에서도 특히 무식한 것으로 중평이 높았다. 그런 이유로 같은 원로들에게도 다소 따돌림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김일성과 아주 친밀한 관계라서 '''일성이 걔'''라고 이야기해도 될 정도였다고. 참고로 나이는 최현이 김일성보다 더 연상이었다.[5] KBS 김정일 사망 다큐 <김정일> 편에서.[6] 1963년도에 건물을 이전하면서 규모를 키웠지만 이마저도 장서량이 많아지면서 포화상태에 놓였던 모양이다.[7] 남한에서는 김일성이 정보통제의 대명사로 유명하지만 사실 김일성은 도서관 건설과 도서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남한이 도서관 납본제도를 1965년이 되어서야 시행한 것에 반해 북한은 이미 1948년도에 시행했고, 전후 복구과정에서도 도서관 건축에 많은 열을 올렸을 정도였다. 그래서 북한의 도서관 인프라가 남한보다 더 일찍 갖춰질 수 있었다. 반면에 김일성이 한창 통치를 했을 당시(이승만-장면-박정희 통치기 당시) 남한의 도서관 인프라는 딱히 좋지 않았는데, 국가적인 수준에서 도서관을 건설하는 작업에 대해서 소흘했었기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당대 도서관 인프라는 한숨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여하튼 경제성장 과정에서 북한의 도서관 인프라를 남한이 서서히 따라잡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남한이 민주화로 정보 통제가 풀리고 고난의 행군 등으로 북한의 경제가 쇠퇴하면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도서관 인프라 격차가 커졌지만 아무튼 당대에는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8] 김정일의 군경력은 김일성종합대학 재학중에 단기군사훈련을 받은 것이 전부이다. 참고로 이 시절의 북한은 지원병제였기 때문에 법률적으론 문제가 없다. 하지만 북에서 고위층으로 출세하려면 군경력은 사실상 필수고, 더군다나 수령의 장남이 군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론 분명한 약점이다.[9]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일각에서는 김정일의 후계자 등극에 의문을 가졌는데, 바로 김정일은 군의 기반이 약해 북한 정권의 중심을 지탱하는 군부의 신임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집권 후 오히려 군을 내세우는 선군정치를 표방했을 가능성이 있다.[10] 당시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북한의 명목상 대외 수반으로 대사 인사권을 가졌다.[11] 예를 들면 9시에 기상. 10시에 아침식사. 12시에 화장실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12] 고영환은 김정은이 김평일을 경계한 이유가 김평일의 모습이 김일성과 매우 닮았기 때문에 김정은은 자신에게 신변상의 문제가 생겼을 때 김평일이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위험요소로 보았던 것이 그 이유라고 주장했다.[13] 당장에 남한에서도 유엔사무총장을 역임한 외교관 출신인 반기문이 대권 출마설이 나왔으나 지지세력 구축에 실패하여 출마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