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선
1. 개요
김길선은 북한의 기자 출신 탈북자이다.
1955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남시구에서 출생하여 1979년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를 졸업한 후 1995년 말까지 대한민국의 국방과학연구소에 대응되는 제2자연과학원 (현재 국방과학원) 산하 제2자연과학 출판사 강연선전편집부 기자로 재임했다.
이후 1997년 8월 가족 (남편, 딸)과 함께 탈북, 1999년 1월 남한에 정착하였다.
이후 각종 방송과 언론에 출연해서 북한정권의 실체에 대해 알리는 한편, '''김씨일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3] .
최근에는 유튜브도 개설해 주기적으로 게스트도 초청해가며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매우 중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대북 관련 문제를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오로지 김일성 족속을 패는 것에만 집중한다고 한다. #[4]
2. 탈북 동기
친한 동료들과 성혜림에 관해 언급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초를 겪은 것이 발단이라고 한다. 단순히 대화에서 풍문식으로 풀어놓은 것인데, 당시 김정일의 정실부인은 부친인 김일성이 직접 고른 김영숙으로 알고 있었고 이것도 일부 핵심계층내에서만 암암리에 전해지고 있어서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혜림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아니 우리 지도자에게 내연녀가 있었다니 뭔 소리인가?"라고 의문을 표했는데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이 신고해 버렸다.
그것을 계기로 어느 날 직장에 출근하는데 사장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에 갔다가 낯선 남성을 따라가라는 지시에 차에 타고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10호실 [5] 로 연행되어 40일 간 구속수사를 받았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이름, 심지어 초상화조차 함부로 말하거나 취급했다간 소위 '불경죄'로 걸려 엄청난 후폭풍을 겪어야 한다.
이는 고위 공직자나 일반 간부급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더구나 김씨 일가의 사생활은 엄격하게 금기시되어 누설이라도 했다간 멸문지화를 면할 수 없다.
고초를 겪은 것이 발단이라고 한다. 이후 추방을 당하고 내려온 곳[6] 에서 지방 사람들의 참혹한 현실과[7] 북한의 실상을 깨닫고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추방지에서 이웃해 살던 노인이 "일제시대 때보다 못하다. 그때는 일본인은 쌀밥 먹고 조선인은 조밥 먹는게 배알이 꼴렸지만 굶지는 않았다."고 한탄할 정도였다고. 이후 여러 가지 일을 거쳐서 탈북을 결심하고 실행하였다고 한다.
최근 본인의 유투브에 밝힌 바에 따르면 중국에 체류할 당시 작성하였던 수기가 계기가 되어 남한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중국에서 작성한 수기는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3. 여담
- 빨치산가문 출신으로 북한에선 나름 명문가 였다고 한다.[8]
- 추방당한 뒤 황장엽 망명 사건을 김책공대 학생들로부터 접하고 탈북을 결심 했다고 한다. 주체사상의 핵심이자 김일성대 총장을 지냈고 당중앙위원회 비서까지 지낸 황장엽과 김덕홍의 탈북을 보고 그분들이 아무렴 배가 고파서 달아났겠나, 이 체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실질적인 탈북의 계기는 다른 사건이 기폭제가 되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탈북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9]
- YTN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있을때 외국영화를 보며 자가용을 몰고 싶은 로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한에 와서 그 로망이 실현되었다고 한다.
-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도 사실상 고정패널로 자주 참여하는데 시원시원한 입담으로 인기가 좋다[10] .
- 유튜브 시청자와의 소통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그녀의 꿈은 북한이 자유화된 이후, 북한으로 넘어가서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씻겨 주고 먹여 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서 유학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1] 1998년 탈북하여 대한민국 국적자가 되었다.[2] 사위는 남한 출신으로 한수정과 이혼 후 재결합.[3] 김길선은 김씨일가를 "김일성 족속"이라고 표현한다.[4] 김길선의 평양만사라는 제목으로 올려지고 있으며 딸이 편집을 맡고 있다. 부제가 자극적인데 '김일성 족속만 팹니다'다(...). 나이가 있어서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해 같은 탈북민 심하윤씨가 공동 진행자로 참여 중이다.[5] 수령의 권위를 훼손한 사람만 연행되는 곳이다. 이 외의 조사업무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취급한다. 그러나 10호실 조사관들은 모두 국가안전보위부 국장급이다.[6] 김책시. 95년 12월경[7] 이때는 고난의 행군중이었던때라 평생 평양에서만 살던 그녀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항목의 처음 문항에 등장하는 주성하의 증언에 따르면 실질적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것이 1994년 12월이었다고 하는데 평북 구성에서 온 여인에게서 들은 현지 상황을 예로 들었다. 특히 평북 구성은 평양에서 불과 100km밖에 되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로동자구였다.[8] 이는 그녀가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이라는점에서도 증명된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출신성분이 확실하고 북한의 지도층 집안의 자제들이 아니면 접근도 언감생심이다.[9] 재미있게도 탈북 후 한국에 오게 된 실마리는 먼저 망명해 있던 황장엽과 김덕홍이 제공했다고 한다. 당시 안기부로 넘어가게 된 그녀의 수기를 본 두 사람이 "이 사람은 북한의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본 사람이니 무조건 데려와야 한다."고 안기부 직원들에게 이야기했다고.[10] 김길선씨는 개인적으로는 북한 정권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서, 북한 정권에 관해서만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그 비판의 수위가 방송용으로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보니, 방송사/언론사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일부 네티즌들이 댓글로 정치적인 성향에 대해 따질때도 "성향은 보수이지만 맹목적인 보수 옹호는 하지 않는다. 그럴만큼의 정치적인 식견도 없는 사람이다. 북한에 대해 열렬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그 사회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보고 경험했던 것으로 인해 그리 된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달라"고 한 일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