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clearfix]
1. 배경
820년, 황제 레온 5세가 친구 미하일 2세에게 크리스마스에 예배당에서 암살당하는 동로마 제국 사상 가장 명분 없는 찬탈이 벌어지던 때 토마스라는 슬라브인이 있었다. 그는 니키포로스 1세가 바르다네스의 반란을 제압하던 시절에 레온, 미하일과 함께 반란군에 속해 있었으나 다른 두 사람이 배신한 것과 달리 반군편에 남았기에 10년간 유배를 당했다. 그러나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는지 이후 레온 5세가 즉위하자 유배에서 돌아온 토마스는 테마의 지휘관으로 중용되었다.
토마스는 은인인 레온 5세의 복수를 명분으로 미하일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미하일 2세가 워낙 명분 없는 모반으로 즉위한 탓에 토마스는 제국 전역에서 엄청난 지지를 얻었다. 토마스의 거병에 대항해, 미하일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테마의 병력을 동원하고 요새의 수비군을 위문하여 충성심을 확보했다.
2. 전개
토마스는 자신이 23년전 어머니 이리니에게 눈을 뽑혔던 콘스탄티노스 6세라고 사칭하고 다녔다. 기적적으로 어머니에게서 도망쳤다고 둘러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곳곳에서 빈민의 옹호자이자 민중의 대변자를 자처한 토마스의 정중함은 미하일 황제보다 훨씬 황제다운 면이 있었다.
토마스군은 다수의 슬라브족을 포함해 이슬람, 페르시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고트족, 훈족 등의 의용병들로 구성되었고 약 8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해왔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옵시키온과 아르메니콘을 제외한 주변 테마들이 그를 열렬히 반겼기에 미하일은 어쩔 수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퇴각해야 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 성벽은 요지부동이었다. 미하일은 막강한 수도군을, 더 나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한 채 반란군과 거리를 둔 옵시키온, 아르메니아에 증원군을 요청했고 성벽을 수리하면서 공성전에 대비했다. 토마스의 함대가 별다른 방해도 없이 금각만에 진입했지만 이 모든 상황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비군은 여전히 미하일에게 충성했다.
11월이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토마스는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공성을 시작했으나 성벽은 요지부동이었다. 토마스의 함대는 로마 함대의 투석기와 그리스의 불에 큰 타격을 입었고 겨울철의 날씨 탓도 있어 공격은 전부 무위로 돌아갔다.[1]
미하일은 겨울 동안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추가 지원군과 보급품을 조달하고 방어가 약한 블라헤르네의 성벽을 복구하였는데 토마스는 봄이 되자 바로 블라헤르네 구역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보강된 성벽의 힘으로 공성은 지지부진했고 오히려 수비군이 치고 나오면서 토마스 군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시점에서 제국 함대는 토마스의 배들을 그리스의 불로 불살랐고 토마스군의 해군 전력은 급격히 소모되었다. 해군 없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봉쇄할 수 없었기에 토마스군의 사기는 급락하였다. 이때 미하일에게 가족들이 잡혀있던 그레고리 프티로토스라는 이가 배반을 계획했다.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 그레고리는 한 수도자를 보내어 미하일에게 자신의 배반을 알리려 했지만 수도자가 봉쇄를 뚫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일이 꼬였다. 이 배반을 알아차린 토마스는 신속히 소수의 호위병을 대동하고 그레고리 일파를 토벌했으며, 이 작은 승리를 미하일의 병력을 육지와 바다에서 격파했다고 선전했다.
토마스는 그리스 전역의 테마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알리며 추가적인 선박을 보내달라고 요구하여 350척의 함선과 증원 병력을 손에 넣었다. 토마스는 함대를 둘로 나누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다쪽 성벽에 동시 공격을 가했지만 이 모두 그리스의 불 앞에서는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증원된 함대의 일부가 제국 해군에 나포되면서 물자까지 빼앗기며 토마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육지쪽의 포위는 여전했고 토마스는 아직은 휘하 병력과 제국 각지로부터 충성을 얻고 있었다. 이에 미하일은 마지막 수단으로 레오 5세 시기에 평화조약을 맺은 불가르 칸국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응한 불가리아군은 822년 11월, 트라키아를 침공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토마스는 포위를 풀고 불가리아군과 접전을 벌였는데 전투의 내용은 모호하지만 이 교전 이후 불가리아군의 활동이 없었기에 아마도 토마스가 승리을 거두었거나 적어도 큰 타격을 입혔던 것 같다.
이제 포위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토마스가 불가리아를 막으러 떠난 사이 금각만에 주둔한 함대가 항복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토마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떨어진 디아바시스 평원에서 월동했다. 일부 병력은 이미 미하일 2세에게 투항했지만 반군의 주력은 여전히 토마스 휘하에 남아있었기에 결전을 벌이기엔 충분했다.
마침내 823년 5월 초, 아나톨리아에서 도착한 지원군이 합류하자 미하일이 2세는 토마스에게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교전에 앞서 토마스는 후퇴하는척 하다가 반격하는 전략을 세웠는데 작전은 좋았지만 부대의 사기가 형편 없었기에 거짓 후퇴를 명령받은 토마스군은 그대로 미하일 2세에게 항복한다. 결국 대패한 토마스는 잔당을 이끌고 아르카디오폴리스[2] 에서 농성했는데, 5개월을 버텼으나 포위망만 유지하고 있는 미하일의 대군 앞에 반군은 굶주림에 시달리다 지쳐갔다. 결국 사람마저 잡아먹을 지경에 이른 잔당들은 미하일 2세가 항복하면 부하들은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포하자 토마스를 쇠사슬로 묶고 성문을 열어 투항하였다.
토마스의 시신은 장대에 걸려 성벽에 전시되었다. 그의 양자인 콘스탄티오스도 처형되었고 아나톨리아의 잔당들도 척결되며 동로마 역사상 가장 컸던 내전은 마무리 되었다.
3. 결과
반란군은 척결되고 제국은 다시 평온을 찾았다. 토마스의 잔당들은 승전 기념식에 동원된 뒤 추방당했다.
슬라브인 토마스는 제국의 거의 대부분에서 지지를 받았고 몇가지 실수는 있었으나 그의 인덕은 기나긴 포위전을 버틸만큼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자신이 이슬람 세력에게 후원을 얻은 것을 숨길 만큼의 정치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테오도시우스 삼중 성벽과 그리스의 불을 가진 함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