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후한)
[clearfix]
1. 개요
후한의 대신 자는 지백(志伯), 촉군 성도현 출신 한안제, 한순제, 한충제, 한질제, 한환제를 섬긴 원로대신으로 삼공에 여러번 올라갔던 걸출한 인물이다. 아들로는 팔준의 일원인 조전(趙典)이 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조계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었다. 당시 대장군이던 양상(梁商)의 동생 양양(梁讓)은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순열황후 양씨(順烈皇后 梁氏)의 위세를 믿고서 불법을 저질렀다. 조계는 부임 즉시 양양의 행각을 상주해 탄핵하였고, 곧 하간상(河間相)이 되었다.
이후에는 상서령(尙書令), 하남윤(河南尹), 태상(太常), 태복(太僕)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2.2. 삼공에 오르다
141년 3월 22일 사공(司空) 곽건(郭虔)이 면직되면서 사공이 되었다. 조계는 6년동안 사공의 자리를 지켰다.
146년 윤6월 1일 한질제가 양기(梁冀)에게 독살당하자 태위(太尉) 이고(李固), 사도(司徒) 호광(胡廣), 대홍려(大鴻臚) 두교(杜喬) 등과 함께 처음에는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을 황제로 옹립해야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조등(曹騰)에게 언질을 받은 양기에 협박과도 같은 말에 두려워하여 유지(劉志)를 옹립시켜야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태위 이고와 대홍려 두교만은 끝까지 반대하여 결국 이고가 파직당하고 윤6월 5일 사도이던 호광이 태위로 조계가 사도가 되었다.
2.3. 이고의 편지를 읽고 눈물 흘리다.
후에 호광이 면직당하고 이번엔 두교가 태위가 되지만, 양기가 거슬리다는 이유로 파직시켜 147년 10월 태위가 된다. 그리고 황제를 세운 공으로 주정후(廚亭侯)가 된다.
11월 이고는 양기에게 무고를 당해 옥중에 갇히자 마지막 힘을 다해 호광과 조계한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받은 호광과 조계는 편지를 읽고서 비통해하여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고는 결국 옥사한다.
2.4. 자연재해로 파직당하고 집에서 죽다
149년 8월 낙양에 홍수, 9월 14일 지진, 9월 25일 지진으로 5개의 산이 무너지자 149년 10월 태위인 조계는 파직당하였다.
152년 12월 사공이던 황경(黃瓊)이 파직당하자 다시 사공이 되었다.
153년 7월 32개 현의 메뚜기 떼가 발생하고 황하가 범람하였는데 특히 기주(冀州)의 피해가 심하였다. 조계는 이 일에 책임을 물어 파직당하고 광록훈 방식(房植)이 뒤를 이어 사공이 되었다.
조계는 고향인 촉군으로 돌아가 집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