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후한)

 


'''李固
이고
'''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李)
''''''
(固)
''''''
자견(子堅)
'''아버지'''
이합(李郃)
'''생몰 기간'''
94년 ~ 147년 11월
'''고향'''
익주(益州) 한중군(漢中郡) 남정현(南鄭縣) 
'''태위 재임기간'''
144년 8월 13일 ~ 146년 윤6월 4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조정의 중대사를 처리하다
2.3. 7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다.
2.4. 모함을 받지만 극복하다
2.5. 삼공의 반열에 오르다
2.6. 질제가 죽자 슬피 울다
2.7. 참소를 받아 옥에 갇혀 죽다
2.8.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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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대신 자는 자견(子堅), 한중군 남정현 출신, 한안제 시절 사공(司空)과 사도(司徒)를 지낸 이합(李郃)의 아들

2. 생애



2.1. 초기 생애


이합의 아들로 태어난 이고는 생김새부터 기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상이 마치 솥발처럼 튀어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상당히 특이했던 모양이다.
젊었을 때부터 학식이 해박하고 두루 잘 알아 사례교위(司隸校尉)와 익주자사(益州刺史)는 한중태수(漢中太守)에게 이고를 효렴으로 천거하라고 명하였고, 사공(司空)도 그를 속관으로 천거할려 하였지만 이고는 모두 거절하였다.
결국 한순제 때 의랑(議郞)으로 천거되었다. 적어도 30세가 넘어서 관직에 출두한 것이다.
133년 6월 8일 낙양 선덕정(宣德亭)에서 땅이 갈라졌는데 그 길이가 85장(丈)이였다.
이고는 이 일이 유모 송아(宋娥)와 환관들의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말하니 송아와 환관의 참소를 받아 옥에 갇히고 풀려난 후에는 광한군(廣漢郡) 낙현(雒縣)의 현령이되었지만 이고는 백수관(白水關)에 이르러서 인장을 풀고 고향으로 돌아와 집에 문을 닫고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다.

2.2. 조정의 중대사를 처리하다


135년 4월 19일 대장군에 양상(梁商)이 취임하고 이고는 양상의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 이고는 황후의 아버지인 양상에게 국정을 보좌하는 일을 간언하였지만 양상은 따르지않았다.
136년 왕공(王龔)이 환관들과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심문을 받게 되자 양상에게 왕공을 죽게 두지 마라고 간언하였고 왕공은 결국 목숨을 건졌다. 자세한 내용은 왕공 문서 참조.

2.3. 7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다.


138년 시어사(侍御史) 가창(賈昌)이 만족 수령 구련(區憐)을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포위되어 1년넘게 물자를 지원받지 못하자 5월 조정에서 형주(荆州), 양주(揚州), 예주(豫州), 연주(兖州) 네곳에서 4만군을 징병하려 하는데 이고는 7가지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1. 만약 형주(荆州)와 양주(揚州)에는 아직 도적 무리가 남아있고, 무릉군(武陵郡)과 남군(南郡)은 반란으로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장사군(長沙郡)과 계양군(桂陽郡)은 이미 여러번 병사를 징병하여 더 이상은 징병할 수 없다.
2. 예주(豫州)와 연주(兖州)에서는 한 번 병사를 징병하면 만리를 이동해야 하고 돌아올 날도 모르니 필시 예주와 연주에서는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3. 남쪽 땅은 덥고 습해 장독(瘴毒)의 원인이 되니 10명 중 4명은 죽을 것이다.
4. 만리를 이동하면 병사들은 모두 지쳐 영남에 도착하더라도 싸울 수가 없다.
5. 정상적인 행군이면 하루에 30리를 가는 것이 보통인데 일남군까지에 거리는 9천리로 약 300일을 가야하니 병사 하나에 일일 식량을 5되로 한다 치면 60만 곡(斛)의 식량이 필요하고 이것은 장군들과 말의 먹이를 포함하지 않은 거라 더욱 많은 양을 병사가 가지고 다녀야 한다.
6. 군대가 싸운다면 반드시 많은 사람이 죽을테고 만약 패배한다면 다시 원정을 해야하니 이것은 심장을 파 사지(四肢)를 메꾸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7.불과 일천리만 떨어진 구진군(九眞郡)에서도 병사를 징발하자 못 견디다는 말이 많은데 하물며 4주의 백성을 징병해 만리 원정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가.
그리고 이고는 강족을 토벌했던 중랑장 윤취(尹就)와 익주자사(益州刺史) 장교(張喬)의 예[1]를 들며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병하는 것보다는 최남단인 일남군(日南郡)이 고립되어 이고의 건의에 따라 일남군의 관리와 백성을 교지군(交趾郡)으로 옮기고 이간계로 상대하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전 병주자사(并州刺史) 축량(祝良)과 장교(張喬)를 구진태수(九眞太守)와 교주자사(交州刺史)로 임명하게 하니 장교는 만족을 회유하여 평정하였고 축량은 홀로 수레를 타고가는 배짱을 부려 도적들을 감복하여 투항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영남 지역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2.4. 모함을 받지만 극복하다


영화 연간(永和, 136년 ~ 141년)에 형주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어 반년만에 반란을 진압한다. 자신의 죄가 처벌될까봐 두렵던 남양태수(南陽太守) 고사(高賜)가 대장군 양기에게 뇌물을 주어 이고는 태산태수(太山太守)로 좌천된다. 이고는 여기서도 약 1년만에 모든 도적을 소탕하였다.
두교(杜喬)는 이런 이고의 공적이 천하에서 최고라며 상주해 이고는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었다.
이고는 황경(黃瓊) 주거(周擧)등을 추천하고 유현(留縣) 사람 양륜(楊倫), 하남(河南) 사람 윤존(尹存), 동평(東平) 사람 왕운(王惲), 진국(陳國) 출신인 하림(何臨), 청하(淸河) 사람 방식(房植) 등을 더 천거하였다. 순제는 일 잘하는 이고를 대사농(大司農)으로 임명시킨다.
이고는 오웅(吳雄), 유선(劉宣) 등과 함께 순제에게 간언하여 다시 조정의 기틀을 바로잡았다.

2.5. 삼공의 반열에 오르다


144년 8월 6일 한순제가 죽고 한충제가 제위에 오르자 순열황후 양씨가 섭정하면서 144년 8월 13일 태위(太尉)가 된다. 양씨는 순제가 죽었다고 알려지면 양주(揚州), 서주(徐州)의 도적들이 다시 강성해질까봐 두려워하였다. 이에 양태후는 모든 제후들이 도착한 후에 순제의 발상을 치르자는 의견을 내었지만, 이고는
"폐하께서는 비록 어리시지만 천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신하들이 도리어 숨기겠습니까? 옛날에는 진시황(秦始皇)도 사구(沙丘)에서 죽자 호해(胡亥)와 조고(趙高)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장례를 치르지 않고 결국 부소(扶蘇)가 죽으면서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근래에는 북향후(北鄕侯)가 죽고 염황후(閻皇后)와 강경(江京)이 죽은 사실을 숨기자 중황문(中黃門) 손정(孫程)이 이들을 죽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황제가 죽은 사실을 감추는 것은 천하의 금기여서 해서는 안됩니다."
양태후는 이 말에 수긍하여 그날 밤 순제의 장례를 치뤘다.
이 후 양태후는 이고를 신뢰하며 대부분의 정무를 이고가 보게 하였다. 이고는 죄를 저지른 환관들을 싸그리 처벌하며 천하는 그렇게 태평한 시대가 되었다고 양태후는 여겼다. 그러나 양태후의 오빠이자 대장군양기(梁冀)는 이고를 시기하였고 ,이고가 처벌시킨 100여 명도 이고를 원망하였다. 양기와 100여 명은 서로 규합해 이고를 참소하였지만, 양태후는 듣지 않았다.
영창태수(永昌太守) 유군세(劉君世)가 황금으로된 문사(文蛇)를 만들어 양기에게 바치자 익주자사(益州刺史) 충고(沖暠)가 이를 발견해 유군세를 체포하고 역참을 통해 밝혔다. 이에 양기는 충고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 파군(巴郡) 사람 복직(服直)이 스스로를 천왕(天王)이라 칭하며 수백명과 봉기하였고, 충고와 파군(巴郡太守) 응승(應承)은 복직의 토벌에 실패하였다. 양기는 이 기회에 충고와 응승을 모함하였고 체포하게 하였으나 이고가 상소를 올렸다. 양태후는 이고의 상소를 보고서 충고와 응승을 면직만 시키었다. 문제가 된 문사(文蛇)는 대사농으로 보내졌고, 양기는 대사농(大司農) 두교(杜喬)에게서 이것을 빌려보려 했으나 두교는 거절하였다. 후에 양기의 어린 딸이 죽자 양기는 공경(公卿)들에게 장례에 참석하라 하였지만 두교만은 장례에 오지 않았고, 양기는 두교에게 앙심을 품게 하였다.

2.6. 질제가 죽자 슬피 울다


질제는 비록 어리지만 총명하여 양기에게 발호장군(跋扈將軍)이라 말하였다.
양기는 어리지만 총명한 질제가 두렵기도 하고 화도 나서 146년 윤6월 1일 자병(煮餅)에다가 독을 넣어 질제를 독살하였다.
질제가 고통과 답답함에 이고를 불렀고 물을 달라하니 옆에 양기가 "물을 마시면 토할 수 있으니 마시면 안되옵니다."라 하였고 질제는 양기의 말이 끝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이고는 질제의 시신에 엎드려 통곡하였고, 시의(侍醫)를 추궁해 조사할려하자 자신의 짓이 들통날까 겁낸 양기는 이고를 몹시 증오하게 되었다.
이고는 사도(司徒)인 호광(胡廣), 사공(司空) 조계(趙戒)등과 논의하면서 양기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실로 명문이다.

천하는 불행히도 몇년 사이에 나라의 후사가 3번이나 끊겼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황제를 세워야 하지만 황제는 천하의 중요한 그릇이니 합당한 사람을 택하여 황제의 고명한 덕인 성명(聖明)을 보존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가만히 마음 속에 생각되는 바가 있소 멀리는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를 등극하였던 일을 생각하고 가까이로는 천조(踐祚)를 하는 것을 생각하니 공경들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널리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구하여 위로는 하늘에 뜻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바람의 부합하도록 해야합니다.

전해지는 말에는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쉬우나 천하를 위하여 합당한 사람을 얻기는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창읍왕(昌邑王)이 세우자 혼란이 일어나 곽광(霍光)의 근심과 부끄러움이 치밀어 후회하였고 박육(博陸 곽광이 받은 봉토)의 충성과 용기 전연년(田延年)의 분발이 없었더라면 한의 사직이 기울 뻔했습니다.

지극힌 근심스럽고 지극히 중한 일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의 흥망과 성퇴가 이 일에 달려있습니다.

이에 양기는 삼공(三公)과 중(中)이천석 이상의 녹봉을 받는 관리와 열후를 불렀다.
삼공인 이고, 조계, 호광 그리고 대홍려 두교(杜喬)는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이 황제로 세워야한다며 주장했지만, 중상시 조등(曹騰)은 유산을 만났을때 유산이 조등을 예로 대하지 않았단 이유로(...) 유산을 싫어하여 평원왕(平原王)[2] 유익(劉翼)의 아들인 유지(劉志)를 황제로 세울려 하였다. 조등은 양기에게 만약 청하왕이 제위에 오르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라 말하며 설득하였다.
양기는 이에 응해 다음날 공경들이 모이자 강한 언사와 격렬한 말투로 말하자 조계와 호광 이하의 관리들은 해가 끼쳐질까 두려워하였다.
결국 대부분의 신하들이 대장군이 명령을 내려주라고 하였지만 이고와 두교만은 그 뜻을 꺾지 않았다.
이고는 다시 한번 편지로 유산을 황제로 세우자고 양기에게 간언하지만 오히려 양기의 화를 돋구었다.
윤6월 4일 결국 양기는 양태후를 설득하여 이고를 태위직에서 해임시키고 호광을 태위로 임명하였다. 결국 유지가 황제가 되는데 바로 환제(桓帝)이다.
후에 호광도 면직되자 광록훈이던 두교가 태위가 되는데 이고가 조정에서 폐출되자 조정의 인사들은 이고와 함께 마지막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한 두교에 의지하였다.
그러나 낙양에 지진이 발생하자 두교는 양기에 의해 9월 9일 면직된다.

2.7. 참소를 받아 옥에 갇혀 죽다


환관 당형(唐衡)과 좌관(左悺) 환제에게 참소하며 말하였다. "폐하께서 제위에 오르실때 이고와 두교는 폐하께서는 황실의 제사를 받들지 못할거라 말하였사옵니다" 환제는 이일로 이고와 두교에게 원한을 가지게 됐다.
147년 11월 청하국(淸河國) 사람 유문(劉文)과 형주 남군(南郡)의 요적(妖賊.요사스런 도적)인 유유(劉鮪)가 청하왕을 옹립시키려하지만 곧 발각되었다. 이에 청하국상(淸河國相) 사고(謝暠)를 위협하였지만 따르지 않아 유문이 사고를 죽이고 유문과 유유는 체포되었다.
이 일로 유산은 위지후(尉氏侯)로 강등되고 형주 계양군(桂陽郡)으로 유배를 가니 자결하였다.
양기는 옳다구나 싶어 이 일로 이고와 두교를 체포하게 하였다. 그러나 양태후는 두교만은 불허하였고 결국 이고만이 옥에 갇혔다.
이고가 옥에 갇히자 이고의 문생이였던 기주(冀州) 발해군(勃海郡) 사람 왕조(王調)가 스스로 형구를 짊어지고 편지를 올리는가 하면 하내군(河內郡) 사람 조승(趙承) 등 수십명의 사람이 부질(鈇鑕)을 차고[3] 대궐에 이르러 이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양태후는 조서를 내려 이고를 사면시켰다. 이고가 사면되자 낙양의 저자는 물론 작은 골목길의 사람들까지 만세를 외쳤다.
양기는 이 소식을 듣고 이고의 명성과 덕망이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해 다시 이고를 옥에 가두었다.
대장군부의 장사(長史)인 오우(吳祐)가 양기를 대신하여 글을 써주던 마융(馬融)에게 만약 "이공(이고)의 죄는 경의 손에서 이루어지오, 만약 이공께서 주살되면 무슨 낯으로 천하 사람들을 보겠소?" 라 말하였다. 옆에 같이 있던 양기는 이 말을 듣고 화가난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며 오우도 급히 자리를 떴다.
마침내 이고는 옥사하였다. 이고가 죽기전 호광과 조계에게 편지를 썼으니,

나 이고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고 그래서 나라의 팔다리와 같은 역을 하여 죽음을 돌아보지 않고, 뜻으로 왕실을 보존하여 문제선제 때보다 융성하게 만들려 하였소, 공들은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양씨(梁氏)에게 미혹되어 허리를 굽혀 길상이 흉조로 변하였고, 이루어질 일이 실패하도록 하였소? 한나라의 쇠미(衰微)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오, 공들은 나라에서 넉넉한 봉록을 받았지만 넘어져도 부축하지 못하고 오히려 큰일을 기울게하여 무너트리니 후세의 역사가들은 어찌 사사로이 평하겠소? 나 이고의 몸은 끝났지만, 의(義)에서는 얻은 것이 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소."

호광과 조계는 이 편지를 읽고서 비통해하여 오랬동안 탄식하여 눈물 흘렸다.
이고가 죽은 후에는 두교도 마찬가지로 잡혀가 결국 옥사하였다.
이고의 아들들인 이기(李基)、이자(李兹)도 마찬가지로 체포되어 옥사하고 막내인 이섭(李燮)만이 누나 이문희(李文姬)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2.8. 사후


양기는 이고와 두교의 시신을 성 북쪽 사거리에 버려두도록 하고 이 곳에서 곡을 하는 자들은 죄를 묻는다고 하였다.
이고의 제자 여남(汝南) 사람 곽량(郭亮)은 미성년인데도 왼손에는 주장(奏章)과 도끼를 오른손에는 부질(鈇鑕)을 들고서 대궐에 이르러 이고의 시신을 수습해 달라고 간청하였지만, 회답이 없자 남양군(南陽郡) 사람 동반(董班)과 같이 이고의 시신 앞에서 곡을 하고 시신을 지키며 떠나지 않았다. 하문정장(夏門亭長)이 이들을 썪은 유생이라 하며 조서를 어긴다고 꾸짖자 곽량은 "대의를 따를 뿐인데 어찌 목숨을 돌아볼 것이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라 하였다. 양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둘을 모두 사면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두교의 옛 부하인 진류군(陳留郡) 사람 양광(陽匡)은 낙양에 도착하자 부탁하여 하문정리(夏門亭吏)가 되고 붉은 두건을 머리에 두르면서 12일 동안 이고와 두교의 시신을 지켰다. 이에 도관종사(都官從事)가 양광을 잡아서 보고하니 양태후는 마찬가지로 사면해 주었다. 양광은 대궐에 이르러 상서를 올려 이고와 두교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에서 장사를 지낼 수있게 하여 달라고 청하니 태후가 이를 허락하였다. 양광은 마침내 이고와 두교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곽량, 동반과 함께 은거하여 벼슬을 하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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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취가 강족을 모두 토벌하지 못하자 윤취는 소환되어 익주자사인 장교가 윤취에 군사를 대신 통솔해 강족을 토벌하게 하였다.[2] 여오후(蠡吾侯)로 강등된다.[3] 부질은 허리를 베는 형벌도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