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등

 



'''조위 추존 황제'''
'''高皇帝 | 고황제'''
'''시호'''
고황제(高皇帝)
''''''
조(曹)
''''''
등(騰)
''''''
계흥(季興)
'''생몰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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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집안 관계
3. 본인의 능력
4. 정치 감각
5. 황제 추숭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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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환관으로 자는 계흥(季興). 전한의 상국 조참의 자손[1], 아버지는 조절(曹節), 아내는 고황후 오씨.

2. 집안 관계


그의 아버지인 조절은 십상시의 하나인 그 조절과는 동명이인이다. 조조의 딸이며 헌제의 2번째 황후가 된 조절과도 역시 동명이인. 조등의 아버지 조절과 조조의 딸 조절은 고조부-현손녀의 관계인데, 피휘를 엄격하게 지키던 시대에 여러 대 차이나는 것도 아니고 고조부와 현손녀의 이름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다만《예문유취》에서는 조등 부친의 이름을 조맹(曹萌)으로 기록해 놓았다. 위서와 예문유취 둘 중 하나는 오기일 것이다. 실제로 절(節)자와 맹(萌)자가 비슷하게 생겼는데다, 옛날엔 전통적으로 부수 대 죽(竹/⺮)을 간단한 풀 초(艹)로 적는 경우가 많아서 節도 莭이라고 쓰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萌과 헷갈리기가 지금보다 더 쉬웠다.
왕침의 위서에 따르면 조절은 덕이 많은 대인배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것을 증명하는 일화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이웃집 돼지가 도망쳤고 마침 조절의 집에서 키우던 돼지가 그 돼지와 모습이 비슷했는데 이에 그 이웃은 그 돼지가 도망친 자기 돼지라며 우겼다. 하지만 조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이웃이 자기 돼지를 가져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런데 며칠 후에 도망쳤던 진짜 이웃집 돼지가 돌아오자 이웃은 부끄러워하며 돼지를 돌려주면서 사과했으며 조절은 이웃을 탓하지 않고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이 기록이 전부이며 벼슬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다만 자식으로는 백흥, 중흥, 숙흥이라는 를 가진 아들 세 명과 막내로 조등 등 아들 네 명이 있었다.
조등의 형제 관계는 위로 백흥, 중흥, 숙흥이라는 자(字)를 가진 세 명의 형이 있었다.[2] 양자 조숭은 하후씨라는 설이 있다. 자세한 것은 조숭 항목 참조.
원래 삼국지 이전 세대이긴 하지만 삼국지에서는 몇차례 언급되는 이유가 바로 조조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환관이므로 혈통이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3. 본인의 능력


조등이 환관이던 시절의 한나라는 외척과 환관들의 권력 싸움이 굉장히 심했는데, 조등은 후한 안제 때 황문종관으로 처음 환관이 되어 대궐에서 30여년간 일을 처리하면서 순제, 충제, 질제, 환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5명의 황제를 섬겨 과실이 없었다. 특히 외척 양기가 질제를 독살하고 다음 황제를 세울 때 후보가 둘이 있었는데, 환제는 질제의 숙부 뻘이라 모양이 좀 나지 않는 반면 청하왕 유산(劉蒜)의 경우 항렬로도 질제의 사촌 형뻘에다 위엄있고 엄격한 성격으로 중신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이 때문에 양기가 자신의 권세에 해가 갈까 우려했고, 또한 조등 역시 유산에게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 양기에게 유산을 세우면 당신은 망한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조등은 양기와 힘을 합쳐 결국 환제를 옹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외에도 양기가 몰락한 뒤에도 다른 외척들이 준동하는 등 너무 황권을 넘보자 조등을 비롯한 환관들(일명 '22열후')이 황제와 힘을 합쳐 외척들을 몰아내고 황권을 수호한 일이 있었고, 황제는 그 상으로 환관들에게 양자를 들이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상을 받은 조등은 조숭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를 양자로 받았다. 조숭은 조조라는 아들을 뒀는데 엄청나게 영민했다.[3]
이 사건은 후한 말기의 청류파와 탁류파가 확연히 나뉘는 계기가 되는데, 충제 시절 외척과 척을 진 재야 유학자 집단이 바로 청류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류파는 이후 상당수가 양기의 정치적 세력이 되는데, 양기의 전횡이 심해지자 왕권 강화를 위해 내관들과 일부 중신이 합세하여 환제를 새로 세웠고 이 과정에서 새로 득세한 내관과 중신들을 탁류파라고 불렀다.[4]
손자 조조는 성문을 관리하고 있던 시절 십상시 건석의 친척이 통금을 어겼을 때 규정대로 처리해서 매질을 하다가 건석의 친척이 죽은 일로 유명해진 일화가 있었다. 하지만 조조는 십상시의 친척을 때려 죽이고도 무사했는데, 이것도 조조의 할아버지인 조등 덕분이었다. 십상시 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던 장양이래봐야 조등이 직접 장양의 양물이 떨어진 걸 확인하고 데려와서 자기 수발을 들게 하면서 키워준 유망주였고, 역시 십상시의 수위 중 하나였던 단규는 조등이 대장추를 지낼 때 비서 역할인 대장추승을 지낸 바가 있다. 건석은 삼국지 연의에는 십상시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사에는 십상시로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서원팔교위를 새로 정립하면서 내관들이 무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이를 총괄하는, 일종의 행동 대장 겸 신흥 세력이다. 조등하고는 세대도, 세력도, 권위도 큰 차이가 있다. 군대로 따지자면 십상시가 소위로 임관하는 정도 수준일 때 조등은 계급만 해도 중장 내지는 대장이고 여기에 몇 번이나 대승을 거둔 전쟁영웅 수준의 위엄까지 있는 전 세대의 거물이라 비교적 신흥 세력인 십상시 '따위'가 어찌할 수 있던 집안이 아니었다.
거기다 역대 황제들의 총애를 항상 유지하였는데, 138년에 중상시 장규, 거정, 양정 등[5]이 양상, 맹분과 함께 조등을 참소했는데, 순제는 양상 부자는 자신과 친한 사이이고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므로 그런 일이 없다면서 공동으로 투기할 뿐이라 했으며, 이로 인해 황명을 등에 업지 못한 장규 등이 임의로 조서를 고쳐서 조등, 맹분 등을 체포했다가 순제가 진노해 이들을 석방하고 오히려 장규 등 10명이나 되는 중상시들을 감옥에 넣었다.

4. 정치 감각


조등이 후대의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 집단과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 것은 뛰어난 정치 감각에 있다. 환제 옹립을 둘러싼 외척과 중신의 갈등에 내관이 개입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이면서도 위험한 일이었고, 이에 양기에 동조하지 않은 청류파들조차 환관을 경계하면서 직접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게 되어 청류파와 탁류파의 갈등이 초래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로 진출한 청류파 상당수가 정치 감각은 떨어지면서 인품과 학식으로는 대단히 존중받는 사람들이었고, 대표적인 것이 당고의 금에서 피해자가 된 이응, 삼국지에서도 존경받는 유학자로 나오는 정현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탁류파 중 내관들의 수장인 조등은 유학자, 특히 청류파의 거두들을 상당히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본인의 학식이 부족하다고 굽히고 들어가서 따로 글을 배우기도 하는 등 아주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인다. 이후 이응 등의 청류파가 강경한 모습을 보이면서 결국 환관들에 의해 '당파를 조장한다'라는 고소를 당하고 200여 명이 투옥되자 청류파는 이를 탁류파의 죄상을 폭로할 기회로 여기고 전국적인 유학자들의 봉기를 준비하는 등 갈등이 점점 커질 듯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 갈등이 커질 것을 우려한 조등은 탁류파를 설득하여 청류파를 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주동자 급만 금고 처분하고 나머지 청류파는 주로 향리와 같은 지방 말단직으로 좌천시키는 정도로 정리했다. 또한 환제 당시 외척이던 두무가 이응과 결탁하여 청류파에 힘을 실어주는 상황이었으므로, 두무 등이 청류파에 대한 무고를 호소한 것을 외척의 개입으로 몰고 가서 실각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이 바로 당고의 옥이며, 조등은 청류파에게서는 목숨을 빚진 사람이 되고 탁류파에서는 외척을 몰아내고 환관의 권위를 세운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게 된다. 이 사건으로 자신의 세를 확고히 굳히고 권위를 내세운 조등은 정사에 참여한 환관으로는 드물게 무탈한 은퇴에 성공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대 정파에게서 모두 존경과 칭찬을 받으며, 권력을 움켜쥔 사람인데도 무탈하게 은퇴했다는 것. 대단한 정치 감각이 아닐 수 없다.

5. 황제 추숭


언제 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황건적의 난 이전에 사망한 것은 분명하며[6] 죽은 지 한참 지나 229년에 양고손자 조예가 위나라의 황제로 등극하자 조등에게 고황제(高皇帝)라는 시호를 올려 황제로 추존했다.
중국에서 황제 명단에 오른 인물들 중 환관 출신으로서 황제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6. 미디어 믹스


여러모로 중국사에 있어서 꽤나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인 데다가, 그 '''조조'''의 할아버지이지만, 제대로 묘사한 매체는 사실상 창천항로가 유일하다.
창천항로에서의 성우는 노자와 나치. 조조의 인자한 할아버지로 등장한다. 평소에는 조조를 아들인 조숭보다 높이 평가하고 일진짓에 가깝게 사고 치고 다녀도 믿고 지지해 주는 모습으로 나오며, 장성한 조조와 말년에 사냥도 다니고 마실도 다니는 등 아주 훈훈한 관계를 유지한다. 조조의 회상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끝은 조조를 위해 있는 것이며 '''난 너와 같은 사람을 섬기고 싶었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작중 초반 수정을 장양에게 빼앗긴 조조가 장양의 집에 쳐들어가서 난동을 부린 일로 재판을 받게 되자[7] 장양을 압박한다.[8] 이 때 오랜만에 황궁에 들어가 영제를 알현하는데, 장양이 곁에서 듣는 자리에서 '''환관 중에 그것이 없어서 아주 고약할 정도로 변태적인 성욕이 들끓어 해괴한 짓을 하는 미친놈들이 있는데 잡아죽여도 싸지 않겠냐'''는 식으로 영제를 충동질한다. 당연히 영제는 '''그런 놈을 알게 되면 당장 말만 하라'''고 맞장구를 친다(...).[9]

내 손자를 어떻게 할 작정이지? 장양, '''그 애를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기라도 한다면 네 놈도 함께 가게 될 거라는 걸 명심해.'''

그리고 조등은 황제가 멀어지자 이제까지 실실거리면서 헤헤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얼굴만 웃고있지 장양에게 '''내 손자가 죽으면 너도 염라대왕한테 간다'''고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다. 조조가 처형당하면 장양을 변태성욕자로 황제에게 꼰질러서 날려버리겠다는 것. 덕분에 장양은 따로 손을 쓰지 못하고 부위인 교현이 조조에게 사형을 선고하기만 소심하게 바라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0]
물론 장양을 협박하는 카리스마가 간지나긴 했지만, '''정사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형편없이 너프된 케이스'''에 속한다. 위에 서술된 것처럼 조등은 환관계의 전설에 탁류파들에게 추앙받는 존재이며 장양은 갓 고추를 자르고 새끼 환관이 되었을 때 조등의 수발이나 들던 신세였다. '''조등이 까라면 장양은 없는 고추를 만들어 내서라도 까야 된다.''' 실제 역사에서 조등이 직접 저 정도 협박을 날렸다면 장양은 손을 쓰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등에게 머리박고 사죄한 다음 교현을 찾아가서 조조를 제발 무죄 방면시켜 달라고 빌어야 했을 것이다. 괜히 조조가 건석의 숙부를 백주 대낮에 때려죽이고도 멀쩡했던 것이 아니다.
애초에 장양이 조조가 도망치자 '저 새끼 조등 손자지? 관계자들 다 뒤졌어.' 식의 독백을 한 것부터 심각할 정도의 문제가 있다. 작중 장양의 부하들이 조씨 문중 저택 정원에 몰래 들어와 수정의 시체를 버려두었는데, '''조씨 문중 집은 조조의 집이기 이전에 조등의 집'''이므로 실제 역사에서 장양이 감히 이런 어그로를 끌었으면 장양은 최소 사망이고 십상시는 구상시로 바뀌었을 것이다. 당장 멀쩡한 남의 집에 시체를 둔건데, 그것도 그냥 남의 집이 아닌 직속 상관을 넘어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집에 그런 깽판을 쳤기 때문이다.
사후에는 아예 커다란 동상이 세워진 장례식장에서 수많은 하객들이 모여, '''"환관이긴 해도 지금 있는 쓰레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물 중의 거물이 가셨구나."''' 같은 평가를 하며 잔을 나눴다. 십상시가 환관 이미지를 바닥까지 추락시킨데다 하진과 원소가 내시 대학살까지 벌인 이후 시점인데도 저런 고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조등의 인망을 증명하는 것.[11] 사후에 입은 수의도 다른 게 아니라 옥의를 사용했다. 그런데 정작 그 손자놈은 조등의 시신 앞에서 변씨와 성관계를 한다(...)
[1] 일단 후한서 조등 열전에는 그가 조참의 후손이라는 내용은 없고 정사 삼국지 무제기(조조전)에 그의 양손자인 조조가 조등을 이었는데 조참의 자손이었다고 나온다.[2] 다만 그의 형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자(字)를 보면 '백중숙계'라는 항렬 질서를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조등은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에 흥자 돌림에 계를 붙여 계흥이라는 자를 얻은 것이다.[3] 조숭이 조등의 양자가 아니라 양손이라는 설도 있다. 조홍/조인 역시 조조의 사촌이라는 설이 존재한다.[4] 다만 탁류와 청류의 첨예한 대립은 영제 시절에 일어났으며 실제로 조등은 탁류파의 수장이었음에도 청류파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이었다.[5] 위의 '22열후'에 속하던 이들로 역시 큰 권세를 부리던 환관들이었다.[6] 창천항로에서는 북부위 시절의 조조와 직접 대화하는 것으로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창작이지만...[7] 사람을 죽인 것은 나름대로 정당방위라면 정당방위이고, 조조와 결혼하기로 약조한 수정을 데려가 놓고 '''꺼져'''로 일관한 것은 장양이 먼저이긴 하다. 하지만 조조가 벤 호위병의 가족이 부위에게 직접 호소해서 부위령으로 조조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8] 당시 조조가 붙잡혔다며 당혹해하는 조숭을 보며 공놀이까지하면서 그러냐고 실실거리는 여유를 보임과 더불어 '''놈의 목을 베어버렸다면 좋았을 걸. 조씨 가문도 네 대에서 끝인가 보구나.''' 라고까지 한다.[9] 한국 역사상의 내시들과 중국 역사의 환관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거세할 때에 음경까지 자르느냐 자르지 않느냐가 있다. 내시들은 남겨두었고 환관들은 잘라냈다. 그래서 작 중의 장양도 목제 딜도 비슷한 물건으로 여자들을 추행하고 있었다.[10] 물론 이는 조조랑 엮인게 아니라 조조가 따로 살인을 저질렀기에 교현에게 처벌받으러 간 셈이라 장양 입장에서는 변명이라도 할 여지가 있긴 하다..[11] 이문열의 삼국지에서 원소의 동생인 원술이 "환관놈들은 죄다 쓸어버려야 하오!" 라며 일갈하자 원소가 "멀리는 태사공 같은 분도 계시고 가까이는 비정후(조등) 같은 공신도 계신데 환관이라고 죄다 탐관오리만 있는줄 아느냐!" 며 일침을 가했다. 이 말을 들은 원술도 자신이 조조 앞에서 실언을 했다며 사과했을 정도. 그런데 비정후는 조등이 아니라 그 아들인 조숭을 뜻한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