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규
1. 함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clearfix]
조성규(趙聖奎)는 1876년 7월 7일 경상도 함안도호부(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조성규는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같은 마을인 사촌리의 조경식·조상규(趙相奎)·조형규(趙炯奎)·조용효(趙鏞孝)·조정래(趙正來) 및 소포리의 이재형(李在蘅) 등과 함께 피신하여 군북면 장날인 이튿날 20일을 이용, 다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가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시위군중이 3천여명으로 불어나 일제히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탄을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탄을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돌을 던지며 대항하여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결국 조성규도 이때 체포되어 이후 징역 3년 6개월형을 받고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다가 1940년 9월 20일 별세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2. 청송군 출신 독립운동가
[clearfix]
조성규(趙誠奎)는 1853년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내면 명당동(현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에서 아버지 조성묵(趙性默)과 어머니 경주 손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송향교의 향원(鄕員)으로 활동하던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召募將)인 유시연이 청송에서 무기를 모집하고 다른 지방에서 의병진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왜적을 토벌하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는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는데 조성규는 이때 직임록(職任錄)을 작성하는 등 의진 편성에 참여하였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그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 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의진과 연계하여 안덕면 감은리 뒷산에서 적군과 마주쳐 교전 끝에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權成夏) 등으로 하여금 3초(哨; 1哨당 1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 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의병 해산 조칙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다가 1926년 3월 28일 별세하였다.
199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