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왕조

 




1. 개요
2. 역사
2.1. 테오도시우스 1세 치하(379~395)
3. 역대 황제
3.1. 서로마
3.2. 동로마
4. 평가


1. 개요


로마 제국의 왕조. (379 ~ 457년[1])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왕조에 이르러 로마가 동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물론 동서로 갈라졌다고는 하나 두 나라가 완전히 따로 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455년 서로마에서 왕조가 먼저 단절되면서 이후 극심한 내전에 빠지게 되었고, 457년에는 동로마에서도 역시 왕조가 단절되면서 제국은 이후 완전히 두 갈래로 따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2. 역사


  • 자세한 내용은 각 황제의 개별 항목 참조.

2.1. 테오도시우스 1세 치하(379~395)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동생으로 동로마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발렌스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참패당하고 전사하자 동로마의 혼란을 막기 위해 당시 서로마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가 칩거 중이었던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 황제로 임명하면서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동로마 일대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막아냄과 동시에 게르만 족들을 등용하면서 게르만 족의 침입을 최대한 막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서로마 일대에서 그라티아누스가 살해당하고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제위를 찬탈하자 내전을 피하기 위해 그를 황제로 인정하고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하지만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 치하의 이탈리아로 침공해오자 곧바로 그를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에 나섰고, 결국 그를 패배시킨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서로마 황제로 복귀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별로 없는 편이기 때문에 사실상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전 로마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역시 암살당하자 이에 완전히 서로마를 정복하게 되고, 유일한 통일황제가 된다. 하지만 395년 병으로 죽게 되면서 제국은 항구한 분열의 역사로 가게 된다.

2.2. 서로마 제국(395~455)


서로마를 받게 된 차남 호노리우스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유능한 장군 스틸리코의 섭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호노리우스는 상당히 무능한 편이어서 결국 스틸리코를 408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이후 알라리크의 로마 침공을 막지 못한다.
이후 장군 콘스탄티우스 3세가 활약을 하여, 호노리우스는 417년에 서고트 왕 아타울프와 결혼했다가 사후 귀국한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를 그에게 시집보낸 후 421년에 그를 공동황제에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3세가 그해에 병으로 죽은 이후 남은 그의 가족들에게 위협을 가하여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를 포함한 그 가족들은 모두 동로마로 망명을 가기에 이른다.
423년 호노리우스가 자녀 없이 죽게 되자 동로마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우스 3세의 아들을 서로마로 다시 보내 황제에 올린다. 그가 바로 발렌티니아누스 3세다. 당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어머니인 갈라 플라카디아도 같이 따라가서 섭정을 하게 되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와 보니파키우스의 보좌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에티우스를 발렌티니아누스 3세모자가 견제를 하게 되고, 보니파키우스가 그 견제책의 일환으로 반달족을 불러들이면서 그야말로 파국이 시작된다. 이후 반달족은 아프리카를 장악하게 되고, 보니파키우스는 아에티우스의 침략을 막아내지만 전사하면서 결국 아에티우스가 제국의 전권을 장악한다.
이후 아틸라의 침략을 받게 되지만 아에티우스와 교황의 활약으로 간신히 막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아에티우스를 암살한다. 그리고 아에티우스의 잔당이 역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면서 결국 서로마에서의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서로마는 반달족의 침략을 받고 그야말로 혼란의 양상에 빠지면서 멸망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2.3. 동로마 제국(395~457)


동로마를 이어 받은 아르카디우스도 호노리우스 못지 않게 어리석은 군주였다. 거기다 동로마의 섭정이었던 루피누스는 서로마의 섭정이었던 스틸리코보다 더 무능했다. 결국 루피누스는 곧바로 암살당하고 늙은 환관 에우트로피우스가 섭정을 맡게 된다. 그는 좀 더 섭정을 강화하고자 본인이 교육시킨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를 황후로 앉힌다. 그러다가 가이나스가 400년 반란을 일으켜 에우트로피우스를 실각시키고 전권을 장악하나 게르만족에 불만이었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대규모 폭동으로 인해 게르만계 병사들이 학살당했으며 가이나스가 실각당하고 황후 에우독시아가 새로운 섭정이 된다. 또한 동로마 내에서의 게르만족 군대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황후 에우독시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를 실각시키는 등 각종 권한을 행사했으나[2], 404년 아이를 낳다가 유산하고 죽게 된다. 그리고 무능한 아르카디우스도 408년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하지만 아르카디우스의 후임 승계 작업이 동로마 제국을 서로마 제국과 다른 역사의 길로 인도했다. 바로 자신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으로 적국이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야즈데게르드 1세를 선택한 것이다. 그로 인해 아즈데게르트 1세의 치세에 동로마는 가장 큰 적국이었던 사산 왕조의 침입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서로마와 달리 게르만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민정 총독이었던 안테미우스를 섭정으로 세우는데 이 역시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414년 안테미우스가 사망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의 두 살 위 누나인 풀케리아가 새로운 섭정이 되어서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후 서로마 황실과의 화해를 시도한 테오도시우스 2세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을 보수하여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세우며 제국의 방어를 한층 강화시켰다. 또한 438년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만드는데 이는 서로마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황실에서 대립구도를 펼쳤던 누나 풀케리아와 황후 에우도키아가 각각 440년과 444년 황궁을 떠나게 되고 그 빈 자리를 환관 크리사피우스가 채우지만 그의 외적에 대처하는 자세로 인해 위신이 떨어지게 된다. 그것이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사망 이후 유능한 장군 마르키아누스가 제위에 오르게 되는 결과가 된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고 마르키아누스가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의 누나 풀케리아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풀케리아와의 형식상의 결혼을 통해 테오도시우스 왕조를 잇는 황제가 되었다. 곧바로 환관 크리사피우스를 숙청하며 그가 취했던 훈족에 대한 공물을 폐기하고, 훈족이 아틸라의 사후 약해진 틈을 타 도나우 강 유역을 안정화시킨다. 또한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가 2가지 본성인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모두 가졌다는 정통 그리스도교 교리를 다시 확인하고 단성론을 부정하였다. 또한 그의 치세 동안 안정적인 국외 정세를 바탕으로 재정도 튼튼히 하면서 이후 동로마 제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457년 그가 죽자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핏줄은 완전히 끊기게 되었고, 제국은 다음 왕조로 이어지게 된다.

3. 역대 황제


대수
이름
재위 기간
1대
테오도시우스 1세
379년 1월 19일 ~ 395년 1월 17일

3.1. 서로마


대수
이름
재위 기간
1대
호노리우스
395년 1월 17일 ~ 423년 8월 15일
2대
콘스탄티우스 3세
421년 2월 8일 ~ 421년 9월 2일
3대
발렌티니아누스 3세
425년 10월 23일 ~ 455년 3월 16일

3.2. 동로마


대수
이름
재위 기간
1대
아르카디우스
395년 1월 17일 ~ 408년 5월 1일
2대
테오도시우스 2세
408년 5월 1일 ~ 450년 7월 28일
3대
마르키아누스
450년 7월 28일 ~ 457년 1월 27일

4. 평가


왕조를 세운 테오도시우스 1세는 유능했지만 그의 두 아들들은 모두 무능했다. 결국 그 무능함으로 인해 제국은 위기에 빠지게 되며 서로마, 동로마로 분열된 이후에는 서로 쳐다보지 않는 관계가 될 뻔하기도 했다. 그나마 테오도시우스 2세 치하 때 동로마와 서로마가 서로 힘을 합쳤었고, 테오도시우스 2세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서로마 황제로 세우면서 두 나라는 어느 정도 통합된 상태에 있게 된다.
하지만 외적의 침입을 비교적 잘 막아내고 안정적인 기반을 갖고 있었던 동로마에 비해 서로마는 외적의 침입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고, 무능한 황제들이 유능한 사령관들을 자주 의심하는 바람에 그러한 점들로 인한 유능한 사령관들의 죽음은 결국 두 차례에 걸친 로마 약탈로 이어지게 되었고, 서로마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 사후에 제국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동로마의 경우 테오도시우스 2세가 괜찮은 제국 운영을 해나갔으며, 마르키아누스라는 장군이 역시 제위를 이어 받으며 안정적으로 제국을 이끌었고, 이후에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끊기더라도 지속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지난 왕조인 콘스탄티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무능한 후계자들로 인해 왕조가 단명되고, 제국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거의 같다고 보면 되겠다.

[1] 379 ~ 392년까지는 발렌타니아누스 왕조와 공존하였다. 다만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처단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서로마 황제로 복귀한 이후에는 사실상 테오도시우스 1세가 통치했다고 보고 있으며, 그 시기는 387년이다.[2] 참고로 이 문제로 인해 서로마 황실과는 대립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