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전한)
晁錯/鼂錯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54년)
1. 소개
전한의 인물.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원앙조조열전袁盎晁錯列傳>의 조조가 바로 이 사람이다. 《한서》에는 이름을 조조(鼂錯)로 기록.
치세의 기반을 닦고 자기 집안을 몰락시킨 사람이다.[1]
2. 생애
영천(潁川, 지금의 하남성 우현) 출신으로 한경제의 신하이다. 일찍이 신불해와 상앙의 학문을 배운 사람이었다. 한문제 때 유가의 오경(五經) 중 하나인 상서(尙書)에 정통한 사람으로 옛 진(秦)나라의 박사(博士) 출신인 복생(伏生)이란 인물만이 남아있어 데려오려 하였으나 "님아 나이가 이미 90인 사람을 저 멀리 제남(齊南)에서 어떻게 데려와염?" 이란 태클을 먹고, 태상에 명을 내려 적당한 사람을 파견해 그의 학문을 전수받게 했는데 이때 선발된 인물이 바로 조조였다.
복생에게 상서를 배우고 돌아온 조조는 자주 상서를 인용해가며 국정에서 유익한 일을 하였고, 한문제에게 신임을 받았다. 또한 그는 태자 유계(후의 한경제)에게 신임을 받아 그의 꾀주머니로 통했다. 조조는 원앙과 마찬가지로 제후들의 봉토를 깎으라고 계속해서 주청하였지만 다툼을 싫어하는 한문제는 원앙의 때와 마찬가지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문제는 조조가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조조의 성격에 문제가 있었다.
조조는 철두철미했으나 너무 비정했고 강직했으며 각박한 이른바 융통성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러하여 승상 신도가(申屠嘉)와 원앙 등 많은 대신들의 미움을 받았기에 조조는 자신의 뜻을 펴기가 쉽지 않았다. 송나라의 왕안석이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가 죽고 경제가 즉위하자 상황은 달라졌는데, 어사대부가 된 조조는 경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조조는 언제든지 주위의 신하들을 밖으로 나가게 하고 경제와 독대하여 계책을 올릴수가 있었다. 조조는 여러 신하들과 제후왕들을 감찰할수 있는 어사대부(御使大夫)에 임명되었고 제후들의 죄와 과오를 묻고 봉토를 삭감하자고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문의 양이 무려 30여 장(張)에 이르렀다. 모든 신하들이 조조에 대한 황제의 신임을 알고 있었기에 감히 반대하지 못했고, 오직 대장군 두영만이 반대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조는 두영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의 정책은 '''매작령'''과 '''제후 견제'''로 나타낼 수 있다. 당시 화폐로 납세를 하도록 정했던 조세정책 때문에 조조는 농민들이 고리대에 손을 대며 상인이 큰 이득을 챙길때 농민들은 토지를 잃으며 국가의 기반이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이를 타파하려 조조는 세금을 '''곡물로''' 주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 매작령을 시행하게 된다. 상인이 중앙직책을 얻으려 농민에게 거대한 양의 곡식을 사들이면 농민이 화폐를 얻게 되는 중농억상책이 가능해지고, 또한 지방 호족들 역시 중앙정계에 진출하려 한나라 변두리의 척박한 땅을 대량으로 개간하게 되는 둔전 효과에다, 한나라 북방에서 매작을 실시하며 흉노 방어에 필요한 군량까지 거두게 되는 일거삼득이 가능해진다는 논리였다.
또한 중앙집권정책을 강화하기 위해서 지방의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하고 백성들과 군사들을 이주시켜 지방을 개간하게 하는 둔전책도 실시했는데, 그의 정책인 제후의 영지 삭감책이 한경제에게 승인을 받아 시행하자, 그로 인하여 오왕 '''유비'''가 주축이 된 오초7국(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7국은 조조를 죽이면 끝내겠다고 해서 경제는 조조를 거짓으로 입궐하라고 했다. 그러나 수레는 황궁으로 향하지 않고 사형장이었던 동쪽 시장으로 갔고 여기서 조조는 참수당했고 그의 가문 역시 깡그리 박살나고 말았다. 하지만 7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한경제는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후에 이어질 한나라의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은 조조만 가련한 죽음을 당한 셈.
3. 평가
조조는 여러모로 후대인들에게는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상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당시 한나라가 필요로 하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나 너무도 강직하며 타협을 모르는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은 종실 간에 내란을 불러왔고 그 자신 조차도 몸을 망쳤기에 다양한 면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인물이다. 물론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간에 그의 개혁안이 한나라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음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한편 그가 한경제에게 올렸던 상소문 논귀속소[2] 의 내용이 《한서》 식화지 상(上)편에 실려 있는데, 이는 당시 한나라가 겪고 있던 사회경제적 모순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어서 후대의 역사가들과 연구자들에게도 중요한 내용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글은 특히 온갖 괴로움과 설움에 시달렸던 당시 농민들의 애통한 삶,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악용하여 도리어 폭리를 취하던 상인들의 부덕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어 후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3]
4. 이름 표기 논란
이 시대의 조조(鼂錯)는 삼국시대의 조조(曹操)가 아니다.
실제 발음이 조착이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조조의 '錯'를 '조'로 읽는 것은 당대의 주석가인 안사고의《한서주(漢書注)》에서 '晁錯'의 '錯'에 대하여 "錯音, 千故反"라 주석한 데서 기인한다. '千故反'은 '措'나 '厝'의 독음(이들 글자들 또한 현대중국어에서 cuò로 읽는다.)이므로 '晁錯'는 조조라 읽어야 한다. 발음에 대해서 反이라고 표기된 글자는 앞 한자 독음의 자음, 뒷 한자 독음의 모음을 따면 한국어 음가와 거의 유사해진다. 그렇게 읽으면 錯는 초 아니면 조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조조(曹操)와 구별하기 위해 조착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1] 융통성이 없는 조조의 정책 추진을 보고 불안감을 느낀 아버지가 직접 남긴 말이다. 설득이 씨알도 먹히지 않자 아버지는 "쟤 땜에 우리 집안에 화가 닥치는 걸 살아서 볼 자신이 없다"며 독약을 마시고 만다.[2] 論貴粟疏, 곡식을 귀하게 여김을 논함[3] 대표적으로 조령모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