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앙(전한)
1. 개요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정치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기에 활약했다. 당대에 현명하고 덕이 있는 인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직언(直言)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황제가 되고 싶은 야망이 있던 양효왕의 뜻을 저지시켜, 결국 이 때문에 양왕의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
2. 생애
2.1. 출신과 입신양명
전한의 공신들 대부분이 한고조의 시대에 벼락출세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원앙은 그런 공신의 집안도 아닌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아니, 한미한 정도를 넘어서 아버지는 '''도적떼'''의 일원이었고, 도적 생활을 하다가 안릉(安陵)에 이사를 하였는데 이때부터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원앙이 처음 정치계에서 모습을 드러낸것은 여후(呂后)의 시대로, 여후의 인척이자 당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여록(呂祿)의 빈객으로 지내고 있었다.
이후 여씨가 척살되고 한문제가 즉위하고 나서는, 형인 원쾌(袁噲)의 추천으로 중랑(中郞)이 되었다. 원쾌에 직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나, 원앙을 추천한 모습을 보면 그 무렵에는 형도 정계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문제 시절
2.2.1. 주발과의 인연
문제가 처음 황제로 즉위했을 당시, 조정에서 최고의 실력자는 단연 여씨를 척살하고 황제를 추대한 주발(周勃)이었다. 주발은 조정에서 최고의 자리인 우승상(右丞尙)[1] 이 되어 권세가 당당했고, 황제 앞에서도 의기양양 하며 빠른걸음으로 걷지 않았다[2]
당초에는 황제인 문제 역시, 주발의 도움으로 즉위한 처지라 딱히 뭐라고 지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이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 바로 원앙이다. 원앙은 황제에게 주발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고, 문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원앙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놓았다."주발은 사직을 지킨 신하이외다(社稷之臣)."
이렇게 주발을 비난한 원앙은 문제에게 이런 간언을 올렸다."강후 주발은 공신(功臣)일 뿐이지, 사직의 신하가 아닙니다. 사직지신이란 군주가 살고 있으면 같이 살고 군주가 죽으면 같이 죽는 사람 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 여후의 치세에 여씨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기들 멋대로 제후왕을 칭하니, 유씨들은 겨우 명맥만 이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강후 주발은 태위의 직분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여후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대신들과 함께 여씨를 배반하고 태위의 직분을 되찾아 군사를 장악하여 거사에 성공했음으로 공신이 되었지만 사직지신은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럴 법도 하다고 여긴 문제는 이후 주발을 만날때 위엄서린 태도를 취했고, 이에 주발은 겁에 질려 황제만 만나면 벌벌 떨기 일쑤였다. 황제에게 화를 낼 수는 없으니, 주발은 원앙을 심하게 원망하기 시작했다."승상의 직위에 있는 신하의 몸으로 그 주군에게 교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황제께서는 오히려 겸양하시니 그것은 신하와 군주가 서로 예를 잃는 행위입니다. 삼가 폐하께서 취하실 바가 아닙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한게, 고조 유방(劉邦)의 시대부터 엄청난 공훈을 쌓아오고 이제는 조정에서 나이나 직급 모두 최고의 자리에 오른 주발에게 있어 원앙은 애송이에 불과했고, 또한 원앙의 형인 원쾌와 주발은 평소에 친분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원앙이 주발을 대놓고 비판해버리니, 주발은 '''"어린 놈의 색히가 나를 까고 다닌다고?"'''라고 여기면서 원앙에게 이를 갈게 된 것.
일반적인 경우라면 권세가 대단한 주발을 만나 어찌어찌 사과라도 하는게 처세에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원앙은 '''결코 주발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때문에 주발은 계속 원앙을 원수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주발이 결국 승상의 직에서 사임[3] 을 하여 권세가 땅에 떨어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주발 저거 사실은 반란 일으키려는 녀석임" 하고 흔들어대었고, 결국 주발은 체포되어 반란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문제의 눈치를 보며 감히 주발의 변호를 하지 않았는데, 정작 '''주발과 원한이 있던 원앙만은 "주발은 억울하다. 죄가 없다"고 항변하며 그를 변호했던 것이다.''' 이 당시 주발에 대한 혐의는 문제가 주발을 손 봐주려고 벌인 모습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데,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잘못된 일은 잘못된 일이라고 따지고 든것.
결국 주발은 천신만고 끝에 혐의에서 벗어나 바깥 세상의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이전까지 건방진 어린 놈이라고 여긴 원앙과 곧바로 교분을 맺게 되었다.
2.2.2. 회남왕을 견제하다
당시 회남왕(淮南王)의 자리에 있었던 유장(劉長)은 유방의 막내 아들[4] 로, 문제는 형제가 모두 죽고 유장만이 남은지라 어지간하면 유장을 비호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이 유장이 '''견공자제분'''이라 하여도 좋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유장은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를 죽이는 등 매우 방자하게 굴었다.[5]
대략 그 싹수를 알아본 원앙은 황제에게 '''"회남왕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회남왕의 봉국을 깎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를 듣지 않았고, 결국 회남왕은 이후 모반 사건에 연류되어 촉(蜀) 땅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 당시 원앙은 중랑장(中郞將)의 자리에 있었는데, 회남왕을 견제하라고 주장했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황제를 말렸다. 당초에 유장을 '''오냐오냐 해서 교만하게 만든건 다름아닌 황제인데, 이제 와서 그를 크게 처벌하면 황제만 나쁜 놈이 된다'''는 이유 때문. 하지만 문제는 이때도 원앙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명령을 시행하다, 유장이 옹(雍) 땅에서 곡기를 끊어 자살하자 그제서야 스스로를 자책하며 애통해 했다.[6] 원앙은 그런 문제를 위로하고, 회남왕의 아들을 제후왕에 임명하도록 권했다.[7]
2.2.3. 환관 조동을 지적하다
당시에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으로 조동(趙同)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조동은 원앙을 상당히 미워했는데, 대놓고 원앙을 해치려고 하자 원앙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이 많았다. 이때, 형인 원쾌의 아들이자 원앙에게는 조카가 되는 원종(袁種)은 "공격 당하기 전에 먼저 까는게 나을것"이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그렇게 기회를 엿 보고 있는 중, 하루는 문제가 출타를 하는 와중에 조동이 참승(驂乘)으로 문제를 모시고 수레에 같이 타는 일이 있었다. 원앙은 황제가 지나가는 길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내가 듣자하니, 황제를 모시고 수레에 타는 사람은 모두가 천하의 영웅 호걸들이라고 하는데 고자가 왠 말이냐"'''라고 따졌고, 이 말을 들은 문제는 씩 웃고는 조동을 내리게 했다. 조동은 눈물을 흘리면서 수레에서 내려야만 했다.
이후 문제는 수레를 타고 가다가, 험준한 구릉에 이르자 수레를 빨리 달리게 하려고 했다. 이때 말을 타고 있던 원앙은 수레의 바로 옆에서 있으면서 수레를 끄는 말의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게 했다. 이에 문제는 '''"너 생각보다 겁이 많구나?"'''라고 물었지만, 원앙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문제는 '''즉시''' 수레를 달리려는 생각을 멈추었다."신은 듣기에 천금의 부자집 귀한 자식은처마밑에서 놀지 않으며 백금의 부자집 자식은 높은 누각의 란간에 매달리게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성스러운 군주는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지 않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폐하께서 6필의 말이 끄는 험준한 산길을 달리려고 하시는데 혹시 말이 놀라 수레가 전복되기라도 한다면 막중하신 폐하께서는 결국 몸을 가볍게 처신하게 되는 처사이니 무슨 면목으로 고조의 묘당을 배알할 수 있으며 태후를 뵐 수 있겠습니까?"
2.2.4. 신부인에게 충고하다
이때 문제는 상림원(上林苑)[8] 에 나갈 일이 있을 시에, 효문황후 두씨와 신부인(愼夫人)을 따라오게 했는데 신부인은 궁중에 있을때도 항상 황후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물론 본래 격식으로라면 이건 맞지 않는 일이지만, 문제가 신부인을 총애하기도 해서 아무도 지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원앙은 황제의 일행이 도착하여 정해진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일부러 신부인의 좌석을 뒤로 끌어내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신부인은 뒤로 끌어내려진 자리에 앉지 않고 화를 내었고, 자기 여자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문제도 열이 있는대로 올라 궁궐로 돌아가버렸다. 원왕은 그런 문제를 따라가 이유를 설명했다.
즉 지금 첩실과 정부인의 대접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이 때문에 결국 훗날에 파국을 초래해 과거 여후가 척부인(戚夫人)에게 자행했던 끔찍한 일이 되풀이 될지도 모른다고 충고한 것이다.[9] 워낙 그 사례가 흉흉한 이야기라 정신이 번쩍 든 문제는 신부인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원앙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척부인 같은 꼴이 됐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하자 신부인도 입장을 바꿔 원앙에게 황금 50근을 주면서 감사한 마음을 표시했다."신은 듣기에 존귀함과 비천함은 그 서열이 분명해야 상하가 서로 화합한다고 했습니다. 금일 폐하께서 이미 황후를 세우셨으니 신부인은 즉 첩실입니다. 첩실과 정부인을 어찌 동열에 같이 앉힐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 첩실을 사랑하신다면 후하게 상을 내리십시오. 폐하께서 신부인을 대하시는 바는 후에 신부인에게 필시 화가 미치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옛날 사람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2.2.5. 농서도위와 오나라의 상국
하지만 이렇게 조정에서 틈만 나면 간언을 올려 유력자들을 건드리고 다니니, 결국 이게 문제가 되어 원앙은 조정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농서도위(隴西都尉)가 된 원앙은 밥먹듯이 쳐들어오는 흉노(匈奴)와 싸워야 했는데, 워낙 병사들에게 잘 대해주는지라 병사들도 원앙을 위해 전투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열심히 싸웠다.
이후 잠시 제나라의 상국으로 있다가 오나라의 상국으로 이동했는데, 문제는 이 당시 '''오나라의 왕인 유비(劉濞)'''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는 것. 언제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라 위험천만 했는데, 일전에 원앙에게 충고를 해준 조카 원종은 이때도 충고를 해주었다. 괜히 나서서 유비를 막으려고 하면 참살 될 것이 뻔하니, 오나라에 가면 술만 마시고 지내면서 가끔씩 "반란을 일으키지 말아라."라고 말만 하라는것.
원앙은 이 말을 듣고 실제로 오나라에서 그렇게 했고, 이에 유비도 원앙을 죽이지 않았다. 원앙은 무사히 오나라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조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3. 경제 시절
2.3.1. 오초7국의 난과 조조와의 악연
여러 사람들로부터 인망을 얻은 원앙도 영 껄끄러운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조조(晁錯)였다.''' 원앙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데 조조 역시 각박한 사람이라 둘은 물과 기름처럼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원앙이 자리에 먼저 앉아 있으면 조조는 자리에 앉지 않고 가버리고, 조조가 자리에 앉고 있으면 원앙도 자리에 앉지 않고 가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가 사망한 후 한경제가 즉위하자 일이 꼬이게 되었다. 경제는 태자 시절부터 조조와 죽이 잘 맞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친분을 바탕으로 단숨에 조정의 중심 인물이 된 조조는 즉시 원앙이 오나라 상국으로 있던 시절을 탈탈 털기 시작했고, 뇌물죄로 엮어 넣는데 성공했다. 완전히 원앙을 보내버리려는게 조조의 의도였겠지만 경제는 원앙을 사면하여 서인으로 만드는 선에서 일을 끝냈다.
이후 조조는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갔고, 이로 인해 오초7국의 난을 초래하고 만다. 그런데 오초7국의 반란으로 모두가 우왕자왕 할때, 조조는 '''"이건 오왕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원앙이 모반 사실을 숨긴 탓이다. 원앙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다른 관리들의 반응은 '''"아니, 모반이 일어나기 전이라면야 원앙을 죽여 음모를 막을 수 있겠지만, 지금 이미 난리가 나서 반란군이 진격하고 있는 상황인데 원앙을 죽여서 뭐하나? 그리고 원앙이 그럴 사람도 아니다."'''라는 식.
결국 조조는 완강한 반대 때문에 원앙에게 손을 쓰지 못했다.[10] 한편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원앙에게 전해 주었고, 가만히 있다간 당할지도 모르겠다고 여긴 원앙은 즉시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을 만나 정황을 이야기 하고, 황제에게 사정을 이야기 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평소에 원앙과 사이가 좋던 두영은 이에 응했다.
원앙이 입조를 했을때는 마침 조조가 황제 앞에서 군대의 병력과 식량 보급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경제는 오나라에 있었던 경험이 있는 원앙에게 몇가지 정보를 물었는데, 원앙은 오나라의 자금력과 인재들을 평가절하 하며 이렇게 말했다.
반란을 제압해야 하는 조조 역시 이 이야기는 "원앙의 말이 옳습니다"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황제가 "무슨 계책이 없느냐"고 묻자, 원앙은 주위의 사람들을 잠시 물려줄것을 요청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켰지만, 오직 조조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원앙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요청했다."오나라가 구리와 소금의 이득이 있다고 하지만 어찌 천하의 호걸들을 모을 수 있었겠습니까? 진실로 오왕이 천하의 호걸들을 끌어모았다면 그들 역시 의로써 오왕을 보좌했을 것임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나라가 불러 모은 자들은 모두가 무뢰한 자들 뿐이고 도망쳐 돈을 만드는 간사한 무리들로 그런 자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에 황제는 조조에게 잠시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고, 조조는 한탄을 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것이 조조의 운명을 결정짓고 만다.''' 황제와 독대하게 된 원앙이 말한 계책은 '''조조를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였기 때문. 오왕 유비가 반란을 일으킨 명분 중에 하나가 조조를 주살하겠다는 이야기니, 조조를 죽이면 그 명분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남의 신하된 자가 알면 안 되는 일입니다."
아무러한 경제도 이 제안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며 말성였지만, 원앙이 "이 방법 밖에 없다"고 하자 결국 조조를 속여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유비는 조조의 목숨 정도로 반란을 멈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2.3.2. 오나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다
그렇게 조조를 날려버린 원앙은 사신의 임무로 가지고 오나라로 떠났다. 그러나 '어서 절을 하고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라'라는 원앙의 말에 유비는 "'''내가 이미 황제인데 누구에게 절을 올리라는 거냐'''"며 원앙을 잡아다 위협을 하면서 반란군의 장수가 되라고 협박을 하였다. 원앙이 말을 듣지 않자 유비는 그를 일단 감금하여 오백 명의 병력으로 포위를 시켜 놓고, 곧 사람을 시켜 살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일전에 원앙의 부하 노릇을 하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원앙의 시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데, 주인의 여자를 함부로 건드렸으니 보통 경우라면 화를 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지만, 원앙은 이미 진작부터 일의 내막을 꿰뚫어 보면서도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입이 근질거렸던 누군가가 "이 사람아, 나리께선 자네가 시녀와 사통하고 있는 걸 이미 알고 있네. 그냥 아무 말도 안 하실 뿐이지"라고 시원하게 스포일러를 터뜨리자, 지렸던 부하는 그대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부하가 도망친 사실을 알게 된 원앙은 그를 추격해 붙잡은 뒤, "이미 알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구만. 돌아와서 '''시녀와 행복하게 사시게. 예전처럼 일도 열심히 하고 말일세'''"라고 되려 격려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오나라의 교위사마(校尉司馬)가 되어 원앙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병사들에게 독한 술을 사먹였고 감시병들은 모두 곯아떨어졌다(마침 날씨가 추워 술이 술술 넘어갔다고 한다). 자다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게 누구인지 알아본 원앙은 "내가 도망치면 네 가족이 해를 입을 텐데, 어떻게 나 혼자 도망친단 말이냐"고 만류했지만 그가 "'''어찌하여 제 걱정을 하십니까?''' 가족은 이미 다 빼돌려놨습니다"라고 말하자 탈출을 결단한다. 두 사람은 군사들 사이를 빠져나온 뒤 냅다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쳤다(그 부하의 뒷이야기는 언급이 없어 알 수 없다). 원앙이 정처 없이 8리쯤 걸으니 날이 밝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양나라의 기병을 만나 탈주에 성공하게 된다.
2.3.3. 부자보다 도박꾼이 낫다
오초7국의 난이 주아부(周亞夫) 등의 활약으로 진압이 되고 난 후, 원앙은 초나라의 상국으로 지내게 된다. 그는 초나라 상국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황제에게 몇번 글로 자신의 뜻을 올렸지만, 제안이 쓰여지진 않았다.
이후 원앙은 병에 걸려 초나라 상국의 지위를 내려 놓았고,[11] 마을 사람들과 같이 웃고 떠들고 울고 하면서, 닭 싸움이나 개 경주 시합이나 보면서 조용히 소일거리를 하며 지냈다.
이때 낙양에서 협객으로 이름이 높았던 극맹(劇孟)이 길을 지나다가 원앙의 집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는데, 원앙은 극맹을 아주 극진하게 대접해 주었다. 이 모습을 보고 안릉(安陵)의 부자는 "극맹은 도박이나 좀 하는 놈인데 뭐하러 그런 놈하고 교류를 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원앙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아주 호되게 야단을 쳐버리고 이후에 그 부자와 상종을 하지 않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통쾌해 하면서 원앙이 아주 잘 했다고 칭찬했다.일전에 극맹의 모친이 별세했는데 장례식에 참석한 수레가 얼마나 되었는지 아시오? '''1천 승이 넘었소이다'''! 이것은 그가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기 때문이오. 또한 사람에게는 급하거나 급하지 않거나 하는 일은 항상 있는 법이나, '''무릇 어느 날 아침 급한 일이 생겨 그의 집을 두드려 도움을 청하면 부모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않고, 혹은 일이 있다거나 집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하면서 따돌리지 않는 사람'''으로 천하가 우러러보는 사람이 오로지 극맹과 계심(季心)[12]
뿐이오. '''지금 그대는 항상 수십 기의 거마를 이끌고 호기롭게 출입을 하고 있지만, 어느 날 아침 나에게 위급한 일이 생긴다면 어찌 그대를 믿을 수 있겠소?'''
2.3.4. 양왕의 야심을 막고, 목숨을 내어주다
이 무렵 경제의 후사 자리는 묘하게 되었다. 박 황후는 자식을 만들어내지 못해 경쟁력이 없었는데, 후궁 율희(栗姬)가 유영이라는 아들을 낳아 황태자로 만들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율희는 경제의 누나이자 막강한 치맛바람을 휘두르던 관도공주와 적대관계가 되었고, 훗날 한무제가 되는 유철의 어머니 왕지는 관도공주와 연합전선을 이루어 율희를 공격하였고,[13] 결국 BC 150년 11월 황태자는 폐위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자 경제의 어머니인 효문황후는 사랑하는 작은 아들인 양효왕을 후계자로 만들 궁리를 하였다. 이 당시 양왕 유무(劉武)는 효문황후의 총애를 바탕으로 엄청난 재산을 보유했고, 또한 오초7국의 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등 활약 역시 대단했다. 효문황후는 황태자가 폐위된 틈을 타 유무를 후계자로 하고 싶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내보였고, 양효왕 역시 내심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당시에 양효왕은 조정에 입조해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제국의 원칙은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니, '동생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이에 원앙은 여러 대신들의 대표격으로 나서 경제에게 진언해서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따졌다.[14] 그리고 원앙은 다시 태후를 만나 물었다.
이에 효문황후는 "그럼 황제의 아들을 다시 후계로 삼겠다"고 대답했는데, 이에 원앙은 춘추시대 송(춘추전국시대)(宋) 선공(宣公)의 잇을 빗대어, 송선공이 올바르게 후계를 세우지 않아 나라에 화란이 발생하여 5세에 이르도록 끊이지 않고 계속된 난리를 차분하게 설명했다.[15]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효문황후는 양효왕을 다시 봉국으로 돌아가게 했다."태후께서 양왕을 황제의 후계로 세우라고 하셨는데, 만일 양왕이 죽으면 그때는 누구를 세우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이 일로 양효왕은 원앙 등에게 큰 원한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 '''자객'''을 파견하여 원앙을 살해하려 하였다. 심지어 자객의 숫자는 10명을 넘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양효왕이 원앙을 죽여버리고 싶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런데 그 자객 중에 먼저 도착한 인물은, 여기저기서 원앙에 대해 수소문을 해보았다. 그런데 "원앙이 어떤 사람이냐" 물으니, '''모든 사람들이 원앙의 칭찬을 하느라 그 입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수소문을 해보아도 "군자다", "의협심이 대단하다"는 식의 이야기만 듣게 된 자객은 원앙 앞에 모습을 드러내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원앙은 또 마침 집안에 불안한 일도 생기고 해서, 배생(掊生)이라는 점쟁이를 만나 운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안릉현의 외곽 성문 밖에서 뒤따라오는 자객들을 만나고 말았다. 원앙은 돌아서서 자객에서 이렇게 말했다.'''나는 당신을 죽이러 온 자객이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려 한다. 당신에 대해 물으니 모두들 칭찬만 하는데 어찌 죽일 수 있겠는가…(헤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아참, '''당신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은 10여 명이 넘으니 각별히 대비하기 바란다'''.
그러자 자객은 이렇게 말하며 그대로 칼을 찔러 넣었다."나는 원장군이라는 사람이오. 그대들은 혹 사람을 잘못 알고 찾아온것 아니오?"
원앙은 그 자리에서 살해 당했는데, 자객은 칼을 뽑지 않고 그대로 현장에 두고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이후 살해당한 대신들의 숫자가 10명에 이르렀는데, 현장에 남은 칼은 새로 주조된 칼이라 칼을 만든 장인을 수소문하여 찾아 심문하자, '''"양나라에서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되었다."당신이 맞소이다."
3. 평가
행적을 보면 가히 '''전한의 모두까기 인형.''' 일생동안 쉴새없이 직언을 올렸는데, 그 대상들이 모두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다는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발은 가장 연륜 있는 공신이자 조정의 실력자였고, 회남왕은 황실 일원이자 황제의 총애를 받은 제후왕이었다. 조동은 황제가 총애하는 환관이었고 신부인 역시 황제에게 사랑받은 여인이었으며, 적대관계를 유지한 조조는 경제의 최측근이었고 양효왕은 그 자체로도 막강한 실력자인 동시에 효문황후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다. 물론, 직언을 올린 대상 중엔 '''황제인 문제와 경제도 포함된다.'''
하지만 주발이 옥에 갇히자 이에 대해 혼자서 변호한 것에서도 보이듯이, 이렇게 올린 직언들이 단순히 까기 위해서 어거지를 부리는게 아니라 당시의 기준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대의(大義)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중에는 조동이나 조조와의 대립은 자기가 살기 위해 먼저 선수친 경우이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분명히 옳은 말을 한 것이었다. 즉, 직언을 올리는 신하의 임무는 제대로 수행한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없이 직언을 올리면서도 대인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높은 명망을 지닌 편에 가까웠는데 주발과의 일화나 사통을 한 부하에게 대한 태도만을 보아도 그럴 수 밖에 없다 싶을 정도.
이를테면 문제 시절 '''천하의 명신'''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며, 모든 사건의 판결을 법률과 규정에 정해진 원칙대로 처결한 장석지(張釋之)[16] 를 발굴한 사람은 바로 원앙이었다. 또한 원앙 못지 않게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급암(汲巖)[17] 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도 원앙이었다.
또한 '''의기가 관중을 덮을 만큼 높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사방 수천 리의 선비들이 달려와 다투어 그를 위해 죽음을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인 계심이 '''형님'''처럼 모시는 인물이 원앙이었으며, 대장군을 지낸 두영이 가장 친하게 지낸 인물 중에 한명도 바로 원앙이었다.
그리고 원앙이 처음 찾아올 때에 '''"나라 일로 온 게 아니면 그냥 얼른 가라"'''라고 할 정도로 깐깐했던 승상 신도가(申屠嘉) 역시 원앙과 대화를 해보고 나서는 상객으로 모실 정도였다.[18]
그렇다고 사대부나 거친 협객 부류에서만 인기가 좋은것이 아니라, 자객이 소문을 들은 일화에서 보듯이 일반적인 마을 사람들에게도 더 말할 나위가 없을 정도의 평판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사(士)'''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士)라고 해도 학문에 별다른 재주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유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국시대의 전국사군자와 같은 인물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의로움을 인연을 중시하고 사람들을 끌고 모으던 점이 그러한데, 하지만 일단 귀족 출신이었던 사군자에 비해 더 소탈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사마천은 원앙에 대해 '''명성으로 몸을 망쳤다'''는 식의 애매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 이는 사마천이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등에서 '아름답고 좋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는 노자(老子)의 말을 인용하며 편작이 자신의 재주 때문에 망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과 어느정도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너무 지나쳐서 정작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일반적인 사서의 평가가 장렬하게 이름을 날린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주는데 비하여, 사마천은 오히려 처세 잘하고 마무리가 좋은 인물에게 후한 평가를 내려주는 편이다. 확실히 원앙의 행보를 보면 옳은 소리도 잘하고 항상 바른 길을 지향했지만, 동시대 주아부나 후대의 인물 예형까지는 아니였지만 굽힘없고 강직해 적이 많아 끝내 제 명을 재촉했다. 사마천의 평은 비난보다는 (과거 사마천 자신이 이릉 문제로 그러지 못했듯이) 좀 더 유연하고 때에 따라 물러날 줄 알았으면 더 명도 보전하고 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에 가깝다고 본다.[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