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시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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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前 야구선수.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 초중반를 대표한 명선수로 뛰어난 타격실력과 빠른발을 가지고 있었다. 4할을 2시즌이나 친 유명한 4할 타자이며, 최다 200안타 시즌 기록도 가지고 있다. 한창 전성기일 때 치명적인 시각장애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활약을 했던 안타 제조기.
1893년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난 시슬러는 고등학교시절 좌완투수로 주목을 받았다. 1911년 시슬러는 지역 마이너리그 팀인 애크론과 계약을 맺어 프로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시슬러의 아버지는 대학 먼저 졸업하고 하라며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에 시슬러는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했고, 거기에서 당시 미시간 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이었던 브랜치 리키의 중용을 받아 미시간 대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던 1913년,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시슬러를 데려가겠다며 나타났다. 시슬러 측은 부모의 동의 없이 계약이 이루어졌고, 계약금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2년동안 법정공방을 벌이다가 결국 "시슬러와 애크론의 계약은 무효이며 피츠버그에는 시슬러에게 우선 교섭권이 주어진다."라는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시슬러는 피츠버그대신 대학 시절의 은사인 브랜치 리키가 감독으로 있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1915년에 입단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월터 존슨을 존경했고, 시슬러 본인도 투수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그는 투수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지만, 타자로서의 재능이 더 뛰어났다. 구단은 시슬러가 타자로 뛰기를 원했지만, 시슬러는 투수로 뛰고 싶어했다. 결국 시슬러가 투타겸업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데뷔 첫 해인 1915년, 시슬러는 투수로 15경기에 출전했는데, 자신의 우상 월터 존슨과 맞대결을 두번 펼쳤다. 첫 대결인 8월 2일에는 5-1 완투패를 당했다(존슨은 1실점 완투승).# 그러나 두번째 대결인 8월 29일에는 1실점 완투승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존슨은 2실점 완투패).# 시슬러는 데뷔 첫 해 투수로서 4승 4패 41삼진 방어율 .2.83의 성적을 거두었고, 타자로서는 타율 .285 78안타 3홈런 10도루 29타점을 기용했다.
본격적으로 1루수로 자리잡은 1916년, 시슬러는 타율 .305 177안타 4홈런 34도루 76타점이라는 성적을 거두며 타자로서의 재능을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 시즌까지도 투타겸업을 했던 시슬러(단 3경기 출전)는 9월 17일 다시 한번 월터 존슨과 맞붙어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존슨 1실점 완투패).# 이후 시슬러는 존슨과의 맞대결로 만족하고 투수로서의 미련을 접고, 완전히 타자로 전향했다.[1]
다음 해인 1917년 시슬러는 타율 .353 190안타를 기록했고, 다음해인 1918년에는 타율 .341 154안타를 기록했으며, 45도루로 도루왕을 차지했다.1919년에도 타율 .352, 180안타를 기록하며 3년동안 평균 .349의 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20년, 시슬러는 전경기를 전부 출장해 타율 .407 257안타 19홈런 42도루 122타점을 기록하며 타격왕 석권과 함께 타이 콥이 가지고 있던 248안타를 경신하면서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세웠다.[2] 1921년에는 10타수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신기록을 세운 시슬러는[3] 타율 .371, 125안타, 12홈런, 35도루, 104타점으로 개인통산 두번째 도루왕에 올랐다. 1922년에는 41경기 연속 안타로 타이 콥이 가지고 있던 아메리칸리그 연속 안타 기록을 경신했으며,[4] 그 해 타율 .420, 246안타, 8홈런, 51도루, 105타점으로 개인통산 2번째 타격왕과 함께 개인통산 3번째 도루왕에 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시슬러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시슬러는 1923년 시즌을 앞두고 급성 축농증으로 인해 하나의 물체가 둘로 보이는 시각장애가 생기게 된것이다. 결국 시슬러는 1923년 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다음 해인 1924년, 시슬러는 시각장애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감독 겸 선수로 복귀해 타율 .305, 194안타, 9홈런, 18도루를 기록했다.하지만 시슬러에게 예전의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1925년 시슬러는 타율 .345를 기록함과 동시에 22안타를 기록하며 다시 200안타를 치는데에 성공했다.다음 해인 1926년에는 타율 .290, 178안타를 기록했고, 1927년에는 타율 .327, 201안타를 기록했고, 27도루로 개인통산 4번째 도루왕에 올랐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데려온 루 블루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시슬러를 워싱턴 세네터스로 보냈다. 하지만 시슬러가 1928시즌 첫 20경기에서 타율 .245로 부진하자,워싱턴은 그를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시슬러는 보스턴으로 이적해 로저스 혼스비와 함께 보스턴의 중심으로 활약했고 보스턴에서 타율 .340, 167안타를 기록했다.
1929년, 시슬러는 타율 .326, 205안타를 기록하며 다시 부활하는 듯 했으나, 다음해인 1930년 타율 .309, 133안타로 성적이 떨어지자 아무도 그를 원하는 팀이 없었다. 시슬러는 이후에도 2년간 독립리그에서 뛰었지만, 1930년을 마지막으로 끝내 메이저리그로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 후 인쇄업 등을 하던 시슬러는 브랜치 리키의 부름을 받아 브루클린 다저스의 타격 인스트럭터 겸 스카우터로 이했다. 그는 다저스에서는 재키 로빈슨을 찾아냈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명타자인 듀크 스나이더를 발굴했으며,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일할 때에는 역시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발굴했다.
시슬러는 1939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4수만에 85.77%로 헌액되었다.
시슬러는 죽을때까지 스카우터로 일했으며 1973년 3월 26일 향년 81세로 사망했다.
1. 소개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前 야구선수.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 초중반를 대표한 명선수로 뛰어난 타격실력과 빠른발을 가지고 있었다. 4할을 2시즌이나 친 유명한 4할 타자이며, 최다 200안타 시즌 기록도 가지고 있다. 한창 전성기일 때 치명적인 시각장애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활약을 했던 안타 제조기.
2. 유년시절
1893년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난 시슬러는 고등학교시절 좌완투수로 주목을 받았다. 1911년 시슬러는 지역 마이너리그 팀인 애크론과 계약을 맺어 프로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시슬러의 아버지는 대학 먼저 졸업하고 하라며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에 시슬러는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했고, 거기에서 당시 미시간 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이었던 브랜치 리키의 중용을 받아 미시간 대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던 1913년,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시슬러를 데려가겠다며 나타났다. 시슬러 측은 부모의 동의 없이 계약이 이루어졌고, 계약금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2년동안 법정공방을 벌이다가 결국 "시슬러와 애크론의 계약은 무효이며 피츠버그에는 시슬러에게 우선 교섭권이 주어진다."라는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시슬러는 피츠버그대신 대학 시절의 은사인 브랜치 리키가 감독으로 있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1915년에 입단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3. 선수시절
월터 존슨을 존경했고, 시슬러 본인도 투수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그는 투수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지만, 타자로서의 재능이 더 뛰어났다. 구단은 시슬러가 타자로 뛰기를 원했지만, 시슬러는 투수로 뛰고 싶어했다. 결국 시슬러가 투타겸업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데뷔 첫 해인 1915년, 시슬러는 투수로 15경기에 출전했는데, 자신의 우상 월터 존슨과 맞대결을 두번 펼쳤다. 첫 대결인 8월 2일에는 5-1 완투패를 당했다(존슨은 1실점 완투승).# 그러나 두번째 대결인 8월 29일에는 1실점 완투승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존슨은 2실점 완투패).# 시슬러는 데뷔 첫 해 투수로서 4승 4패 41삼진 방어율 .2.83의 성적을 거두었고, 타자로서는 타율 .285 78안타 3홈런 10도루 29타점을 기용했다.
본격적으로 1루수로 자리잡은 1916년, 시슬러는 타율 .305 177안타 4홈런 34도루 76타점이라는 성적을 거두며 타자로서의 재능을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 시즌까지도 투타겸업을 했던 시슬러(단 3경기 출전)는 9월 17일 다시 한번 월터 존슨과 맞붙어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존슨 1실점 완투패).# 이후 시슬러는 존슨과의 맞대결로 만족하고 투수로서의 미련을 접고, 완전히 타자로 전향했다.[1]
다음 해인 1917년 시슬러는 타율 .353 190안타를 기록했고, 다음해인 1918년에는 타율 .341 154안타를 기록했으며, 45도루로 도루왕을 차지했다.1919년에도 타율 .352, 180안타를 기록하며 3년동안 평균 .349의 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20년, 시슬러는 전경기를 전부 출장해 타율 .407 257안타 19홈런 42도루 122타점을 기록하며 타격왕 석권과 함께 타이 콥이 가지고 있던 248안타를 경신하면서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세웠다.[2] 1921년에는 10타수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신기록을 세운 시슬러는[3] 타율 .371, 125안타, 12홈런, 35도루, 104타점으로 개인통산 두번째 도루왕에 올랐다. 1922년에는 41경기 연속 안타로 타이 콥이 가지고 있던 아메리칸리그 연속 안타 기록을 경신했으며,[4] 그 해 타율 .420, 246안타, 8홈런, 51도루, 105타점으로 개인통산 2번째 타격왕과 함께 개인통산 3번째 도루왕에 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시슬러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시슬러는 1923년 시즌을 앞두고 급성 축농증으로 인해 하나의 물체가 둘로 보이는 시각장애가 생기게 된것이다. 결국 시슬러는 1923년 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다음 해인 1924년, 시슬러는 시각장애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감독 겸 선수로 복귀해 타율 .305, 194안타, 9홈런, 18도루를 기록했다.하지만 시슬러에게 예전의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1925년 시슬러는 타율 .345를 기록함과 동시에 22안타를 기록하며 다시 200안타를 치는데에 성공했다.다음 해인 1926년에는 타율 .290, 178안타를 기록했고, 1927년에는 타율 .327, 201안타를 기록했고, 27도루로 개인통산 4번째 도루왕에 올랐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데려온 루 블루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시슬러를 워싱턴 세네터스로 보냈다. 하지만 시슬러가 1928시즌 첫 20경기에서 타율 .245로 부진하자,워싱턴은 그를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시슬러는 보스턴으로 이적해 로저스 혼스비와 함께 보스턴의 중심으로 활약했고 보스턴에서 타율 .340, 167안타를 기록했다.
1929년, 시슬러는 타율 .326, 205안타를 기록하며 다시 부활하는 듯 했으나, 다음해인 1930년 타율 .309, 133안타로 성적이 떨어지자 아무도 그를 원하는 팀이 없었다. 시슬러는 이후에도 2년간 독립리그에서 뛰었지만, 1930년을 마지막으로 끝내 메이저리그로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었다.
4. 은퇴 후
은퇴 후 인쇄업 등을 하던 시슬러는 브랜치 리키의 부름을 받아 브루클린 다저스의 타격 인스트럭터 겸 스카우터로 이했다. 그는 다저스에서는 재키 로빈슨을 찾아냈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명타자인 듀크 스나이더를 발굴했으며,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일할 때에는 역시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발굴했다.
시슬러는 1939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4수만에 85.77%로 헌액되었다.
시슬러는 죽을때까지 스카우터로 일했으며 1973년 3월 26일 향년 81세로 사망했다.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First Base (18th)
6. 기타
-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한 타이 콥이 인정한 몇 안되는 선수이다.[5] 메이저리그 최다 4할 시즌 기록 보유자인 타이 콥이 현역때 기록한 3번의 4할 시즌 중 한 번은 타격왕을 못했는데, 그때 타격왕을 한 사람이 바로 시슬러였기 때문이다. 콥은 시슬러를 완벽에 가까운 선수라고 극찬했다. 사실 반대로 타이 콥 때문에 4할을 치고도 타격왕을 못한 선수가 있는데, 그게 바로 맨발의 조라 불리우는 조 잭슨이다. 1911년 4할을 치고도 타격 2위를 했다.
-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최다안타 기록보유자였던 시슬러는 1973년 3월 26일에 사망했는데 자신의 기록을 넘은 스즈키 이치로는 같은해 1973년 10월 22일에 태어났다.
- 이치로가 2004년 메이저리그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한 경기에 조지 시슬러의 자손이 세이프코 필드에 찾아왔었다.
7. 둘러보기
[1] 물론 그 뒤로도 아주 가끔 2~3년에 한두번씩 땜빵 투수로 투구를 했다.[2] 이는 2004년 스즈키 이치로가 262안타로 경신할때까지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이었으며, 현재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안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시슬러의 기록이 깨질 때까지 84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던 셈. 여담으로 이치로가 신기록을 달성할 때 시슬러는 이미 고인이어서 시슬러의 딸이 참관했다. 안타깝게도 시슬러의 딸도 향년 88세의 나이로 2010년에 숨을 거두었다.[3] 이는 1952년 월트 드로포가 12타수 연속 안타로 경신했다.[4] 후에 조 디마지오가 56경기 연속 안타로 경신했다.[5] 콥이 인정한 다른 선수로는 호너스 와그너, 조 잭슨, 윌리 메이스가 있다. 참고로 베이브 루스는 콥의 선수 생활 동안 콥이 겉으로 능력을 인정 안하고 갈군 선수이다. 베이브 루스가 콥이라면 치를 떨었을 정도. 은퇴 후에야 베이브 루스를 훌륭한 타자라고 인정했다.[6] 메이저리그 MVP는 1915년부터 없어졌다가 1922년(아메리칸 리그)에 부활한 제도이다.(내셔널리그는 1924년에 부활) 없어지기 전 마지막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자는 1914년도 MVP 에디 콜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