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존슨

 

'''월터 존슨의 주요 수훈 /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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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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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월터 존슨
Walter Johnson
'''
'''포지션'''
'''투수'''
'''}}}#ffd700 득표수}}}'''
'''}}}#ffd700 479,279}}}'''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1924'''



'''1913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트리스 스피커
(보스턴 레드삭스)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에디 콜린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24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베이브 루스
(뉴욕 양키스)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로저 페킨포
(워싱턴 세네터스)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크리스티 매튜슨
(뉴욕 자이언츠, 1908년)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1913년)'''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필라델피아 필리스, 1915년)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필라델피아 필리스, 1916년)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1918년)'''
히포 본
(시카고 컵스, 1918년)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필라델피아 필리스, 1920년)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필라델피아 필리스, 1920년)

'''월터 존슨
(필라델피아 필리스, 1924년)'''
대지 밴스
(브루클린 로빈스, 1924년)

레프티 그로브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30년)

보유 기록
통산 완봉승
110승
최다 탈삼진 1위 시즌
12회
최다 투수 트리플 크라운 시즌
3회[43]


'''이름'''
'''월터 페리 존슨
(Walter Perry Johnson)'''
'''생년월일'''
1887년 11월 6일
'''사망'''
1946년 12월 10일 '''(향년 59세)'''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캔자스 주 험볼트
'''포지션'''
선발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07년 자유계약 (워싱턴 세네터스)
'''소속 구단'''
'''워싱턴 세네터스 (1907~1927)'''
'''지도자 경력'''
워싱턴 세네터스 감독 (1929~193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 (1933~1935)
'''수상'''
'''월드시리즈 우승 (1924)
AL MVP 2회 (1913, 1924)'''
AL 다승왕 6회 (1913~1916, 1918, 1924)
AL 방어율왕 5회 (1912, 1913, 1918, 1919, 1924)
AL 탈삼진왕 12회 (1910, 1912~1919, 1921, 1923, 1924)
'''기록'''
'''노히트 노런 (1920.07.01)
110 완봉승'''
'''별명'''
'''The Big Train'''
1. 소개
2. 그의 능력
2.1.1. 실제 구속은?
2.2. 변화구
2.3. 고무팔
3. 성격
4. 전설적인 성적
5. 연도별 기록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7. 선수 경력
7.1. 정규 시즌
7.2. 포스트시즌
7.2.1. 1924년 월드 시리즈
7.2.2. 1925년 월드 시리즈
8. 평가
9. 참고 자료
10. 기타

[clearfix]

1. 소개


[image]
선수 시절의 월터 존슨

'''그라운드 위에 베이스가 놓인 이래 최고라 불리는 투수가 있었다.'''

'''야구공을 처음 잡았을 때, 마치 그것이 언제나 제 손 위에 있어 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걸 던지는 순간 공, 손, 손목, 팔, 어깨가 차례로 하나가 되어 뻗어 나갔어요.'''[1]

미국의 야구 선수로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2][3][4]이자 '''명예의 전당 최초의 5인 중 한 사람'''이다.[5] 엄청나게 큰 키[6]와 긴 팔을 지녔고, 그 팔로 마치 채찍을 휘두르듯이 '''사이드암'''으로 공을 던졌으며,[7]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광속구 하나로 전설이 된 투수이다. 게다가 월터 존슨이 던진 속구에서는 마치 기차 소리가 난다면서 ''''Big Train''''이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이다. 다른 별명으로는, 아래에서 얘기하는 순둥이 같고 신사적인 성격 때문에 붙은 '백기사(White knight)', '월터 경(Sir Walter)'이 있다. 백기사나 기품 있는 월터 경(Lord)으로 불리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1925년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실책에 이은 5자책 끝내기 패배를 당했을 때 했던 행동 때문이다(7-9패). 당시 그는 패전 직후 등을 돌려 실책을 범한 2루수를 껴안았다.

2. 그의 능력



2.1. 패스트볼



캐치볼 영상

1924년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투구하는 영상(2:18, 2:46)[8][9]
양팔을 뒤로 한 번 돌리는 가벼운 와인드업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그를 처음 상대하는 타자들은 너무나도 간단한 그의 투구 폼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구가 나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속구에 대해서는 오로지 비범한 소문들뿐인데 "공이 겁나게 빨라서 보이지 않아!"란 이야기는 기본이고, "그 자식 제구력이 형편없었으면 경기 때마다 줄초상 치렀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상대했던 타자들도 "뭔가 쉭 하고 지나가던데?"라는 반응을 보였으며, 당대에 이름 날리던 타자들도 "뭐 이런 공이 다 있냐"라면서 멍 때리다가 삼진당하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또한 타자를 맞힐까 봐 몸쪽 공을 던지는 것을 극도로 기피했는데도 '''타자들이 미처 피하지 못해서''' 통산 사구(死球)가 역대 4위인 205개라고. 타자뿐 아니라 심판들도 "솔직히 존슨의 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래봤자 타자들도 못 보는 건 똑같기 때문에 항의는 없지."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경기에서는 그날따라 제구에 난조를 보인 월터가 심판에게 연거푸 실투를 직격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심판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대낮에 '일몰 콜드 게임'을 선언해버린 일도 있었다.[10][11] 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레이 채프먼[12]은 2구 만에 타석에서 내려와 '2구 삼진'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심판이 아직 투 스트라이크라 지적하자 "나는 공이 보이지 않으니 심판께서 잘 보고 알아서 처리하세요"라고 하고 내려가서 삼진 처리된 것이다. 그때는 타자들이 삼진 아웃당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탈삼진 기록을 따내서 '스트라이크아웃의 제왕(Sultan of Strikeouts)'이란 별명도 얻었다.

2.1.1. 실제 구속은?



투구 폼(느린 화면). 팔이 엄청나게 길고 유연하다.
그의 실제 구속에 대해서는 왈가왈부가 좀 있는 편이다.
1912년 10월 6일 야구 매거진 F.C. 레인이 그의 구속을 측정하기 위해 총기 회사 레밍턴 암즈를 방문한다. 당시 레밍턴 사가 총알의 구속을 측정할 때 쓰던 크로노그래프를 썼는데[13], 월터 존슨은 83마일이 찍히고 냅 러커는 77마일이 찍혔다. 공이 도달하는 순간의 속도를 측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몇 마일이 깎인 수치였지만, 당시의 대중을 열광시키기엔 충분했고 미국 전역에서 헤드라인이 됐다.[14]
1914년, 시카고의 링컨 파크에서 다른 방식으로 구속이 측정되었는데, 오토바이가 86마일로 달리는 와중에 공을 던져 비교하는 원리였다. 이때 측정된 구속은 '''99.7마일(160.45km/h).''' 같은 해에 탄동 진자(Ballistic Pendulum)을 사용한 실험이 있었는데, 기기가 존슨의 투구에 맞는 순간 얼마큼 튀어오르냐로 속도가 측정되었다. 결과는 시카고에서의 실험과 같은 99.7마일. 하지만 이것은 공이 손에 떠나는 순간이 아닌 탄동 진자에 직격하는 순간의 속도, 즉 초속이 아닌 종속이었다. 참고로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구속(전광판이나 TV에서 보는 구속)은 항상 초속으로 기록된다. 당연히 초속이 종속보다 훨씬 빠르다. 링크
1917년엔 엔지니어 프랭크 길브레스가 카메라, 시계, 그리드[15]를 사용한 구속 측정을 실시했다. 찍히는 사진마다 한 시간을 100만분의 1로 쪼갠 것 같이 정확한 시간을 기록했으니 당시 이론적으론 상당히 수긍이 가는 측정 방법이었고,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서[16] 실험이 이루어졌으나... '''150마일(241km/h)'''이라는 황당한 수치가 나왔기 때문에 패스. 같은 해 브리지포트 탄약 연구소에서 측정한 바로는 약 91.36마일(147km/h) 정도의 구속이 측정되었다고 한다.[17]
투구 당시의 컨디션이나 측정 위치에 따라 차이가 날 수는 있겠지만,[18] 그의 구속에 관한 전설들이 헛소문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는 타자가 헬멧도 쓰지 않는 시기였으니, 그들의 공포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예상해볼 수 있겠다.
추가로 보면 증언을 통한 간접적인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명전에 헌액된 2루수인 찰리 게링거는 39세의 월터 존슨과 17세의 밥 펠러를 다 상대해 봤는데 존슨이 더 빨랐다고 증언했다. 펠러의 공식 구속 기록은 98마일이 넘었고 비공식은 107마일이 나왔다. 게링거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존슨의 구속은 최고 100마일은 넘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게링거의 첫 상대 투수가 존슨이었다는 점에서 그 정도의 강속구를 처음 상대해 본 게링거의 뇌리에 존슨의 빠른 공이 깊게 박혔을 수도 있다. 또한 존슨의 39세 시즌은 은퇴 시즌으로 5승 6패에 5.10이라는 도무지 존슨이랑 어울리지 않는 성적이었다. 과연 이 시즌에 던진 공이 그렇게 빨랐을까 하는 의문점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그 영리한 타자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서 도저히 공략을 하지 못하고 '''417승이나''' 헌납을 했고, 그 원인으로 강속구를 공통적으로 꼽고 있으니 당대 독보적인 스피드였던 건 분명하다.

2.2. 변화구


게다가 다른 투수들과는 달리 변화구를 거의 던지지 않았다. 말년에 가서 조금씩 섞어 던지기도 하였지만 팔팔하던 시절에는 오로지 속구만으로 리그를 제압(!)해 버렸다. '''13년 동안 속구만 던지다가''' 부상당해서 속구 위력이 '''약간''' 줄어들자 커브를 배웠다. 정확하진 않지만 "야 이거 괜찮네. 좀 더 일찍 배워놓을 걸"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데, 당대 타자들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영향으로, 과거 투수들에 대해선 공이 빨랐다고 해도 140km대 중후반 정도로 보고 있지만, '''월터 존슨은 어쩌면 꿈의 100마일, 즉 161km대 공을 던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이다.'''[19] 참고로 공식적으로 100mph라는 숫자가 등장하게 된 건 불꽃 같은 강속구를 던진 밥 펠러의 등장 이후이다.

2.3. 고무팔


22세부터 30세까지 '''매년 300이닝을''' 넘게 던졌고, 그중 5시즌에서 리그 최고 이닝을 적립했다. 이틀~나흘 간격으로 선발과 구원 등판을 가리지 않고 등판했고, 경기가 연장으로 갈 때는 11~15이닝(!) 등 경기가 지든 이기든 끝날 때까지 던졌다(...).[20] 같은 시기 완봉형 투수로 이름을 날리던 잭 쿰스, 에드 월시 등이 이만한 성적을 내고 2년도 못 버틴 것은 물론,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는 것을 감안할 때 정말 엄청난 내구성이었다.
풀타임으로 뛰기 시작한 20세부터 이런 정신 나간 페이스로 던진 그에게도 결국 세월이 찾아왔는데, 프로 13년차가 되는 32세에 드디어(...) 오른팔 통증으로 시즌 절반을 쉬면서 그의 전성기도 끝났다.[21] 그러나 이런 혹사 뒤에도 인대하나 끊어진 곳이 없어서 그는 바로 다음 시즌에 복귀, 나머지 7시즌 동안 더 이상 던질 수 없을 때까지 매시즌 200이닝 이상을 던지다가 은퇴했다. [22] 최종 성적은 '''5914.1이닝.'''

3. 성격


하지만 성격은 그야말로 부드러운 젠틀맨 그 자체. 정에 약해서 지인들의 표를 구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표를 구하러 사방팔방을 뛰어다녀야 했다. 또한 자신의 사인을 받으러 온 캘빈 쿨리지 대통령 앞에서 벌벌 떨었다. 타자가 자기의 공을 맞고 죽을까 걱정이었으며[23] 실제로 레이 채프먼이 칼 메이스의 공에 맞고 사망하자 더욱 전전긍긍했다.
이런 성격을 두고 팀 동료가 '''"월터 존슨이 남자라서 다행이야. 만약 여자로 태어났다면 평생 산부인과 신세를 졌을걸?"'''이란 말을 남겼다. 즉, 여자였으면 그 심약함 때문에 남자들의 대시를 거절을 못 했을 거란 얘기다.
카리스마와는 한 100만 광년쯤 거리가 있는 사람. 당시엔 야구 선수들에게 방탕아, 무법자 이미지가 있었을 정도로 거친 사람이 많았기에 더욱 더 비교가 됐다. 이렇게 다른 동시대 선수들에 비해 임팩트가 부족한 탓이었는지, 저 우주 괴수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작 명예의 전당 투표 당시에는 헌액된 5인 중 가장 득표가 낮았다. 하기야 다른 '최초의 5인'을 보면 우선 압도적인 메이저 리그 기록을 가진 데드볼 시대의 황제 타이 콥과 '야구의 신'이라 칭해지는 베이브 루스, 메이저리거 최초이자 최고의 특급 스타였던 크리스티 매튜슨, 그리고 메이저리그 사상 가장 완벽했다는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 호너스 와그너이다. 투수는 단 2명이고, 500승에 빛나는 사이 영이 초대 투표에선 투표율 50%도 안 나온 것과[24] 또다른 대투수들인 피트 알렉산더, 레프티 그로브도 3수, 4수를 거친 것을 생각하면 한 번에 통과한 것 자체가 대단한 위엄이다.

4. 전설적인 성적


[image]
바로 위에서 서술한, 명예의 전당 최다 득표율을 기록한 대선수 타이 콥의 강력한 천적이 월터 존슨이었다. 야구에 대한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던 타이 콥이었지만[25] 끝내 인정한 3명이 있는데 한 명은 자기가 생전에 못 이긴 선배이자 타격왕 8회에 빛나는 호너스 와그너,[26], 한 명은 타격 기술은 자기와 거의 기록이 동격이고 수비와 주루는 더 뛰어나다고 인정했던 '맨발의 조' 조 잭슨이었다.[27] 다른 한 명이 월터 존슨이다. 그는 월터 존슨의 공 앞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고 시인했다. 타이 콥의 통산 타율은 .366으로 역대 메이저리그 선수 중 1위이다. 2위인 로저스 혼스비가 .358. 하지만 타이 콥의 월터 존슨 상대 통산 타율은 .233이며, 이를 제외하면 .368로 올라가게 된다. 그나마 타자가 다칠까 봐 몸쪽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했던 월터 존슨의 심리를 이용,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타격을 해서 나온 성적이 이 정도이다. 심지어는 월터와 경기에서 처음 대결해본 직후부터 그를 탐낸 나머지, 구단 프런트에 월터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빼내 와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타이 콥은 그 괴물 같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정작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해보질 못했는데, 당시 메이저리그 최약체 팀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승 반지를 껴 본 월터의 미래를 생각하면 뭔가 조짐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소속 팀이 만년 꼴찌였던 워싱턴 세너터스(현 미네소타 트윈스)였던 까닭에 괴수와도 같은 평균자책점과 탈삼진 기록에도 불구하고 500승을 넘기지 못하였으며(그 대신, '''한 팀에서 거둔 승 수'''로는 부동의 1위), 동시에 완투패를 가장 많이 기록(그 중 0:1 완투패가 28번)한 투수로 남았다. 그러나 1924년 워싱턴 세네터스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우승 반지는 하나 건졌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그의 말년에는 워싱턴이 꽤 강한 팀으로 성장해서 월터가 나이가 먹었음에도 승 수를 많이 올리는 데 기여했고 결국 우승도 달성했다.
그는 '''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세 자리수 완봉승'''의 주인공이다. 110완봉승이고, 그 중 38번이 '''1:0 완봉승'''으로 이 부문에서도 1위이다. 2위는 피트 알렉산더로 각각 90완봉승, 1:0 완봉 19승이다. 야구 평론가 레너드 코페트는 이 점이 피트 알렉산더와 월터 존슨의 차이라고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의 다른 기록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뛰어넘은 선수들이 있지만, 현대 야구의 특성상 이 기록은 앞으로도 아무도 깨지 못할 불멸의 기록이다. 이 110완봉승이 얼마나 현대 야구에서 넘사벽급 기록인지는, 로저 클레멘스,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 3명의 완봉승 기록을 '''합쳐야 118 완봉승'''이라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선발투수의 이닝 소화가 줄어들고 있는 2010년대로 오면 더욱 이 경향이 심화되는데, 현역 최고의 투수인 클레이튼 커쇼가 풀타임 8년 동안 기록한 완봉이 총 15회이다. 문제는 커쇼 말고는 두 자릿수 완봉을 기록한 투수도 거의 없다는 것. 풀타임 12년을 뛴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고작 11완봉이다. 나머지는 거의 한 자리.
그의 선수 시절 최전성기인 1913년 시즌에는 11완봉을 거두었는데, 그중의 백미는 보스턴 레드삭스 원정에서의 '''15이닝''' 1 대 0 완봉승이었다.[28]

5. 연도별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fWAR
bWAR
1907
WSH
14
110.1
5
9
0
.357
1.88
100
1
22
71
35
23
1.088
2.2
2.8
1908
36
256.1
14
14
1
.500
1.65
194
0
64
160
75
47
0.964
4.5
4.9
1909
40
296.1
13
25
1
.342
2.22
247
1
99
164
112
73
1.117
3.5
4.1
1910
'''45'''
'''370.0'''
25
17
1
.595
1.36
'''262'''
1
89
'''313'''
92
56
0.914
'''9.6'''
10.5
1911
40
322.1
25
13
1
.658
1.90
292
8
78
207
119
68
1.123
5.9
8.5
1912
50
369.0
33
12
2
.733
'''1.39'''
259
2
92
'''303'''
89
57
'''0.908'''
'''9.3'''
'''13.2'''
1913
48
'''346.0'''
'''36'''
7
2
'''.837'''
'''1.14'''
232
'''9'''
47
'''243'''
56
44
'''0.780'''
'''8.5'''
'''15.1'''
1914
'''51'''
'''371.2'''
'''28'''
18
1
.609
1.72
'''287'''
3
85
'''225'''
88
71
0.971
7.8
'''11.7'''
1915
47
'''336.2'''
'''27'''
13
4
.675
1.55
258
1
75
'''203'''
83
58
'''0.933'''
8.2
'''11.5'''
1916
48
'''369.2'''
'''25'''
20
1
.556
1.90
'''290'''
0
91
'''228'''
105
78
1.006
'''8.8'''
'''9.9'''
1917
47
326.0
23
16
3
.590
2.21
248
3
82
'''188'''
105
80
0.969
6.7
6.8
1918
39
326.0
'''23'''
13
3
.639
'''1.27'''
241
2
78
'''162'''
71
46
'''0.954'''
'''6.5'''
'''10.3'''
1919
39
290.1
20
14
2
.588
'''1.49'''
235
0
58
'''147'''
73
48
'''0.985'''
'''6.8'''
'''10.5'''
1920
21
143.2
8
10
3
.444
3.13
135
5
32
78
68
50
1.128
2.7
2.5
1921
35
264.0
17
14
1
.548
3.51
265
7
94
'''143'''
122
103
1.352
4.5
4.8
1922
41
280.0
15
16
4
.484
2.99
283
8
106
105
115
93
1.364
3.3
5.4
1923
42
261.0
17
12
4
.586
3.48
263
9
93
'''130'''
112
101
1.287
3.8
4.4
1924
38
277.2
'''23'''
7
0
'''.767'''
'''2.72'''
233
10
87
'''158'''
97
84
'''1.116'''
5.1
6.8
1925
30
229.0
20
7
0
.741
3.07
217
7
85
108
95
78
1.288
3.9
4.9
1926
33
260.2
15
16
0
.484
3.63
259
13
78
125
120
105
1.274
4.1
3.8
1927
18
107.2
5
6
0
.455
5.10
113
7
33
48
70
61
1.291
1.3
-0.4
<color=#373a3c> '''MLB 통산
(21시즌)'''
<color=#373a3c> 802
<color=#373a3c> 5914.1
<color=#373a3c> 417
<color=#373a3c> 279
<color=#373a3c> 34
<color=#373a3c> .599
<color=#373a3c> 2.17
<color=#373a3c> 4913
<color=#373a3c> 97
<color=#373a3c> 1568
<color=#373a3c> 3509
<color=#373a3c> 1902
<color=#373a3c> 1424
<color=#373a3c> 1.061
<color=#373a3c> 117.1
<color=#373a3c> 151.6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월터 존슨
150
420
364
82
HOF 입성자 평균
40
185
100
50
  • JAWS - Starting Pitcher (1st)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월터 존슨
165.6
89.5
127.5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73.9
50.3
62.1

7. 선수 경력



7.1. 정규 시즌


키가 크고, 스무살 남짓의 어수룩해 보이는 녀석이었는데, 팔이 소매 밖으로 나올 정도로 길었어. 처음에는 사이드암으로 던지는 투구 폼이 별 거 없어 보였지... 우리 팀 선수 중 하나가 소 울음소리를 흉내냈고, 우리는 캔틸론 감독[29]

에게 외쳤지: '조, 쇠스랑을 준비해야겠어, 자네 시골뜨기가 외양간에 가는 중 같은데.' ...[30] 타석에서 처음 만났을 때, 존슨이 편하게 와인드업을 하더군. 그리고 잠시 뒤 뭔가가 휙 지나갔는데, 순간 움찔했어. 건드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어...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역대 최강의 팔을 가진 투수를 만난 걸 깨닫게 됐지.'''[31]

'''타이 콥''', 1907년 8월 2일 월터 존슨의 데뷔전

존슨의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그의 팔이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뿐'''이다.

버리 크리, 뉴욕 양키스 외야수


7.2. 포스트시즌


첫 포스트시즌 경험 때 그의 나이는 이미 황혼기에 접어든 36세였다. 그의 현역 시절에 워싱턴 세네터스는 두 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는데, 모두 월드 시리즈 7차전까지 갔다.

7.2.1. 1924년 월드 시리즈


1924년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는데, 3:3으로 8회까지 팽팽하게 맞서고 9회가 된 상황에서 갑자기 관중들이 월터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의 등판을 요청했다. 감독은 월터가 이전 경기에서 부진했던 까닭에 등판시키길 망설였지만 그 사이에 월터가 자진해서 등판했고, 이후 매 회마다 주자를 내보내는 불안한 피칭 속에서도 12회까지 무실점으로 4이닝을 막아냈다. 그리고 12회 말에 행운의 불규칙 바운드(그것도 2번이나)에 힘입어 세너터스가 우승을 거두었다. 이를 두고 자이언츠 선수들도 "신께서 월터에게 승리를 주길 원하신 거다"라면서 분루를 삼키면서도 월터의 승리를 축하했다.

7.2.2. 1925년 월드 시리즈


그 다음해 1925년에도 세네터스는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는데, 상대는 피츠버그 파이리츠. 이번에도 월터 존슨은 3번 등판한다(1, 4, 7차전). 3경기 모두 완투였는데, 1차전은 4-1승, 4차전은 4-0 완봉승을 거두어[32] 우승을 눈앞에 두었으나 팀이 5차전, 6차전을 내주며 7차전의 책임이 그에게 주어졌다. 당시 그는 은퇴를 2년 앞둔 37세였고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비가 계속 내리고 안개가 껴서 3회까진 내야 안의 시야조차도 확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기자석에서 외야수들이 보이지 않았고, 7회에 심판이 인정한 피츠버그의 2루타는 페어존에서 최소한 2피트(60cm) 벗어난 파울볼이었다고 한다.[33] 다리가 발목까지 진흙에 빠지는 상태에서 존슨은 7회말까지 4실점을 하나 팀이 6득점을 해서 승리를 앞두는 상황까지 갔다.
그러나 그 후 세네터스 유격수 로저 페킨포의 7, 8회 에러로 인해 그는 4점을(모두 비자책점이었다)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페킨포는 bWAR 기준 '''역대 17위(!)의 통산 수비 스탯을''' 자랑하는 최고의 유격수였고,[34][35] 1925년 시즌 당시 '''리그 MVP(!)였다.'''[36]
당시 세네터스 감독이었던 밴 존슨은 왜 구원투수를 쓰지 않았냐는 무수한 질타를 받았으나,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그때로 돌아가도 다시 존슨을 끝까지 기용했을 거라고 대답했다.

8. 평가


빌 제임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로 우완 월터 존슨을 꼽고 두 번째로 좌완 레프티 그로브를 꼽았다. 이 둘의 업적에 대해서는 지금의 전문가들 사이에도 은근히 불꽃 튀는 최강자 떡밥이 전개되는데, 이는 바로 데드볼 시대라이브볼 시대의 커다란 간극 때문. 일단 가장 간단하면서도 쉬운 투수 비교 방법인 조정 평균자책점에서는 근소하게 레프티 그로브가 앞선다(역대 순위: 마리아노 리베라, 클레이튼 커쇼, 페드로 마르티네즈, 짐 데블린, 레프티 그로브ㆍ제이콥 디그롬, 월터 존슨) 하지만 승 수 자체를 놓고 보면 417승과 300승이라는 넘사벽의 차이가 존재하니 월터 존슨이 밀리는 것은 딱히 없다.
야구 평론가 레너드 코페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로 월터 존슨을 꼽았다. 그가 위대한 투수로 꼽은 기준은 누적 성적, 구위, 제구력, 투구 요령, 배짱으로 보았다. 누적 성적으로 인하여 5년간 강력한 임팩트를 보여준 샌디 쿠팩스, 심지어 통산 260승에 그쳤지만(?)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조국에 '100승'을 바친 밥 펠러도 제외되었다. 구위를 통하여 짐 파머와 같은 제구력 피처가 제외되었고, 제구력으로 '강철 팔' 놀란 라이언 또한 제외되었다.[37] 상기된 레프티 그로브는 누적된 성적은 좋으나 실제로 강속구를 잃어버린 시점부터 평범한 투수로 전락하여 투구 요령이 없다고 보아 제외되었다. 이런 식으로 많은 투수들이 떨어졌고 남은 선수는 트리플 크라운 3회의 피트 알렉산더와 월터 존슨.
여기에서 레너드 코페트가 월터 존슨을 위로 놓은 이유는 바로 완봉승의 질이었다. 월터 존슨은 110완봉, 피트 알렉산더는 90완봉을 기록하여 아주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완봉 중 완봉이라 불리는 1:0 완봉에서 38완봉과 19완봉으로 2배의 격차를 벌렸기에 월터 존슨의 배짱, 즉 유연하면서 자상하고도 강철 같은 멘탈이 인정받게 되었다.

9. 참고 자료


  • 최훈의 MLB 카툰 클래식 빅 트레인 월터 존슨 편 1, 2

10. 기타


  • 1921년 12월에 두 살이었던 딸 엘리너가 독감으로 사망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월터와 헤이젤 부부는 농장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 그의 부인 헤이젤과 금슬이 좋은 걸로 유명했는데, 부인이 1930년에 열사병으로 36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월터는 이에 극심히 슬퍼했고 여생 동안 매우 힘들어 했다고 한다. 월터는 후에 59세에 뇌종양으로 별세, 메릴랜드에 있는 부인의 무덤에 같이 안치되었다.[38]
  • 타이 콥과 같은 팀 소속이었던 샘 크로포드와[39] 절친한 친구였는데, 종종 중요하지 않은 상황에서(주자가 없는 상황 등) 친구를 위해 치기 쉬운 공을 던져주는(!) 우정을 발휘했다. 프로 무대에서 이런 여유를 부릴 만큼 존슨은 자상했고, 또 사기적인 실력을 가졌었다. 이런 사정을 눈치 못 챈 타이 콥[40] 왜 자신보다 한 수 아래인 크로포드가[41] 존슨을 상대로 그렇게 잘 치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 했다고 한다.
  • 타격 재능도 뛰어나서 통산 타율이 투수 기준으로는 수준급인 0.235이나 되고, 특히 1925년엔 0.433을(!) 기록했다. 외야수로 13번 뛰었고, 타석에서 21시즌동안 2할을 넘기는 시즌이 13번, 1914년엔 홈런을 3개를 쳤다. 1917년엔 130타수에 2루타 12개, 3루타 1개를 쳤다. 그의 통산 24홈런은 역대 투수 홈런 9위의 기록이다.
  • 40-50년대에 미국 정치인 조세프 W. 마틴 주니어가 존슨을 의회로 끌어들일려고 노력했는데, 말주변이 정말로 없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직원들을 시켜서 명연설 원고 두 개를 써줬죠, 하나는 농촌 지역 주민들한테 읽을 것이었고, 나머지는 공업 지역 사람들을 위한 것. 그런데 그것마저 헷갈려서 농부들한테 비즈니스에 대한 연설을 하고, 비즈니스맨들한테 농촌 지역 문제에 대한 연설을 했어요.[42]
  • 월터가 1924년 팀을 우승으로 이끈 이후 워싱턴 D.C.에 야구 월드시리즈 우승이 찾아오는 데는 무려 95년이 걸렸다(2019년 워싱턴 내셔널스 우승).

[1] http://sabr.org/bioproj/person/0e5ca45c[2] 역대 최다 승에 빛나는 사이 영도 재수를 거쳐 헌액되었던 명예의 전당을 단 한 번의 투표로 들어갔다. 그것도 타이 콥, 베이브 루스 등을 포함한 최초의 5인으로서.[3] 통산 fWAR 3위, bWAR 2위. fWAR도 약쟁이 로저 클레멘스를 제외하면 2위이며, 이 선수 위엔 '''사이 영'''뿐이다. 이 둘의 통산 이닝은 무려 '''1441이닝'''이나 차이나는데, fWAR은 11.1, bWAR은 2.8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이 양반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4] 한때 최다 승 부문에서 1위인 사이 영의 뒤를 잇는 2인자 정도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이후 질적 평가의 가치가 주목받으면서 오늘날에는 월터 존슨이 단연 메이저리그 사상 최고 투수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인종 문제로 메이저에서 활약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던 사첼 페이지가 거론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5] 또한 메이저리그 에이스 계보인 팀 키프-사이 영-월터 존슨를 잇는 대선수이다. 이 계보는 훗날 밥 펠러, 샌디 쿠팩스, 스티브 칼튼이 이어받는다.[6] 186센티미터. 당시로서는 서양인 중에서도, 야구 선수 중에서도, 투수 중에서도 엄청난 장신이다. 당시는 북유럽계 남성의 평균 신장도 170cm을 약간 웃돌던 시절이라 현재의 관점으로 환산하면 거의 200cm에 육박하는 장신이었던 셈이다. 현재는 메이저리그에서 186cm의 선발투수를 전혀 장신이라 말할 수 없지만, 저 시대엔 그랬다. 월터 존슨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난 현재의 MLB 선발투수의 평균 신장은 193cm. 다만, 당대 메이저리그 대표 투수였던 사이 영이나 베이브 루스보다는 작았고, '''타자''' 타이 콥과 비슷했다. 키가 크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다른 메이저리그 레전드와 비교했을 때 거인 수준은 아니다.[7] MVP 베이스볼 시리즈의 MVP 베이스볼 2005에서 그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실제 투구 영상[8] 이것이 그의 7차전 마지막 투구. 다음 이닝에서 끝내기로 경기가 종료, 승리는 그에게 간다.[9] 1:04초의 선발투수 컬리 오그덴의 투구와 비교하며 감상하자.[10] 당시 메이저리그 경기는 경기장에 조명이 없어서 주간 경기였기 때문에 날이 어두워지면 경기를 끝냈다.[11] 타자들도 그냥 모자를 쓰고 타석에 서던 때라 당연히 헬멧 외에 심판 보호 장비 같은 것은 전무했다. 강속구가 날아와 맞으면 다치기 십상이고 재수없으면 사망할 수도 있었다.[12] 뉴욕 양키스 소속 투수 '칼 메이스'가 던진 공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 걸로 유명한 선수로, 월터가 더더욱 몸쪽 공을 기피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13] 길이는 15피트, 넓이는 2X2피트.[14] http://scoutee.co/the-historic-quest-for-speed-in-baseball/[15] 이 사람이 썼던 건 그냥 거대한 모눈종이를 생각하면 된다.[16] [image][17] http://scoutee.co/the-historic-quest-for-speed-in-baseball/[18] 다만 기반 기술은 이미 개발되어 있었다. 도플러 효과 역시 19세기 말에 발견된 것으로, 국가 등급의 연구소에서라면 높은 정확도로 측정 가능했을지도 모른다.[19] 김형준 기자의 레전드 스토리에 따르면 평균(!)으로 예상된다고 한다.[20] 베이스볼 레퍼런스의 Game Log 참고.[21]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즌에 그의 유일한 노히터를 기록했다. [22] 끝나긴 했다. 세 번째 시즌에 평균자책점 2.22를 찍은 것을 제외하면(...) 부상 전까지 매시즌 1점대 중반은 가볍게 찍는 성적을 기록하던 그가 부상 이후엔 나머지 7시즌 동안 2점대 중후반에서 3점대 초중반을 찍는 투수가 됐으니까 말이다. 물론 저 1점대 성적을 기록하던 때는 데드볼 시대였다는 걸 생각하긴 해야한다. 정확히는 부상당한 시즌인 1920시즌 부터 1927시즌 까지 그가 기록한 평균자책점은 순서대로 3.13-3.51-2.99-3.48-2.72-3.07-3.63-5.10 이다. 이 성적을 거뒀을 때가 라이브볼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고 마지막은 은퇴 시즌 인걸 생각하면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고 볼 수 있다.[23] 당시 강속구 투수로는 스모키 조 우드와 월터 존슨이 유명했다.[24] 하지만 사이 영도 이듬해 투표에서는 76.1%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데 성공한다. 사이 영의 동료급 선수들이 대부분 베테랑 위원회에 의해 헌액되었고, 또 그러라고 베테랑 위원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투표로 2번 만에 들어간 사이 영의 위엄 역시 대단한 것이다. '''제시 버켓, 에드 델라한티, 휴 제닝스, 에디 플랭크, 모데카이 브라운, 에디 조스''' 같은 사이 영과 동시대에 뛰었던 대선수들이 베테랑 위원회로 들어갔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25] 타이 콥은 천하의 베이브 루스조차 우습게 봤다. "그가 어떻게 야구를 잘한다고 할 수 있지?"라고. 그러나 은퇴 후에는 그를 두고 그의 파워와 선구안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다며 인정했다.[26] 역대 NL 최다에 해당한다. 타이 콥은 11회로 AL 및 MLB 역대 최다.[27] 블랙삭스 스캔들에 연루되어 타자로서 전성기인 31세에 선수 경력이 빨리 끝나서 통산 기록은 대단하지 않지만 그래도 타격 3위에 해당한다, 타이 콥과 타격왕을 다툴 수 있던 선수.[28] https://www.baseball-reference.com/players/gl.fcgi?id=johnswa01&t=p&year=1913[29] 당시 워싱턴 세너터스의 감독이었던 조 캔틸론을 의미한다. 타이 콥의 회상에 의하면 이때가 워싱턴과 디트로이트의 더블헤더 1차전이었다.[30] 월터 존슨이 농가 출신인 점과 더블헤더 1차전이라는 중요한 경기에 별 거 아닌 것으로 보이는 신인을 내보낸 조 캔틸론 감독을 조롱한 것이다.[31] He was a tall, shambling galoot of about twenty, with arms so long they hung far out of his sleeves, and with a sidearm delivery that looked unimpressive at first glance.... One of the Tigers imitated a cow mooing, and we hollered at Cantillon: 'Get the pitchfork ready, Joe—your hayseed's on his way back to the barn.' ... The first time I faced him, I watched him take that easy windup. And then something went past me that made me flinch. The thing just hissed with danger. We couldn't touch him.... Every one of us knew we'd met the most powerful arm ever turned loose in a ball park. 출처: Stump, Al (1994). Cobb: A Biography.[32] http://www.baseball-reference.com/players/gl.cgi?id=johnswa01&t=p&year=0&post=1[33] http://www.espn.com/blog/sweetspot/post/_/id/18091/important-delays-in-world-series-history[34] https://www.baseball-reference.com/leaders/WAR_def_career.shtml[35] 이때는 지금과 달라서 그라운드 관리도 형편없었고 글러브도 저질이었다. 게다가 비까지 쏟아져 진창이니 최고의 유격수라도 얼마든지 실책을 할 수 있었다.[36] 그런데 정작 MVP를 수상한 1925년엔 bWAR이 겨우 2.6로 급락했지만 나머지 5-6점대 경쟁자들을 제치고 받았다. 아무리 WAR 측정법이 없던 시기였어도 의외인데, 약팀 세네터스가 2연속 아메리칸 리그를 우승한 게 컸을 거라고 추정된다.[37] 오히려 놀란 라이언은 가장 화려한 투수로 꼽았다.[38] https://sabr.org/bioproj/person/0e5ca45c[39] 통산 타율 .309, 통산 안타 2,961의 외야수. 통산 309 3루타로 역대 최다 3루타 기록 보유자이자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하게 300개 이상의 3루타를 쳤던 선수. 1957년에 명예의 전당 입성.[40] 존슨이 타자를 맞히는 걸 꺼리는 걸 알고 타석에 몸을 바짝 붙이는 위험한 짓까지 동원해서 얻어낸 타율이 겨우 2할 3푼이었다.[41] 이분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서 결국 명전까지 갔지만 타이 콥에 비하면 듣보잡 선수이다.[42] Joe Martin to Robert J. Donovan, My First Fifty Years in Politics, p. 24 (New York City: McGraw-Hill Book Company, Inc., 1960), 261 pp. Library of Congress No. 60-15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