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 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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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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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성적 및 기록들'''Willie could do everything''' from the day he joined the Giants. He could do all the things you look for in a player better than anybody I ever saw. He never had to be taught a thing. The only other player who could do it all was Joe DiMaggio.
"(뉴욕) 자이언츠에 온 그날부터, '''윌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는 한 명의 선수에게 요구되는 그 모든 것을 내가 본 다른 어떤 선수보다 잘할 수 있었다. 그에겐 그 무엇 하나도 가르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유일하게 다 잘할 수 있었던 다른 선수는 조 디마지오 뿐이었다."
ㅡ 레오 듀로서[2]
1979년 신문 인터뷰에서 남겼던 말이자, 그 기사 제목이다. ## [3]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5툴 플레이어'''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야구선수'''이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포지션은 외야수. 공격 면에서는 '''통산 2회의 MVP와 660홈런, 3,283안타'''로 설명이 끝나며, 수비 면에서는 '''12년 연속 골드글러브 수상'''[4] 한 선수이자, 메이저리그 역사상 두고두고 명장면으로 기억되는 외야 호수비(일명 "바로 그 수비"(The Catch))로 유명하다. 주루면에서는 도루의 암흑기라 개수가 적을 뿐, 338도루를 기록했다.[5][6]
통산 성적은 22시즌 동안 타율 .302, '''660홈런''', '''3283안타''', 338도루, 출루율 .384, 장타율 .557, OPS .941, 순장타율 .256, BB/K 0.96, wRC+ 154, 연 평균 bWAR 7.1[7] 1903타점 - 500홈런 - 3000안타를 기록한 선수는 메이스와 행크 애런, 에디 머레이, 모 약쟁이, 또 다른 약쟁이, 알버트 푸홀스뿐이며 이 중 통산 3할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오직 행크 애런과 윌리 메이스 뿐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도루 300개 이상 기록한 선수는 윌리 메이스 뿐.[8][9] 이쯤 되면 다시 한번 '''Willie could do everything''[10][11] ' 그래서 샌디 쿠팩스는 "베이브 루스는 메이스처럼 달리지도 못했고, 수비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메이스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또 올스타전과 월드시리즈 이외엔 아메리칸리그와 교류가 없던 시기에 동시대 테드 윌리엄스는 올스타전에 참가한 이유를 윌리 메이스를 보기 위해 참가했다고 말하기도 했다.[12]
2. 선수 시절
니그로리그에서 처음 경력을 쌓기 시작한 후, 마침 재키 로빈슨에 의해 인종차별의 벽이 무너지자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보스턴 브레이브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쳤는데, 특히 레드삭스의 경우 입단시키기를 희망했지만,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감독 조 크로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13] [14] 이후, 뉴욕 양키스역시 인종차별주의자 스카우트의 허위보고로 영입에 실패했고, 브루클린 다저스도 니그로리그 출신 명 포수 로이 캄파넬라가 그를 추천했지만, 역시 거부. 결국 뉴욕 자이언츠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자이언츠 프랜차이즈에서 '''전설이 되었다.'''
선수 시절의 메이스는 22시즌을 뛰면서 '''13년 연속 bWAR 7.5'''를 넘길 정도로 늘 꾸준했고, '''bWAR 10을 6번''' 넘길 정도로[15] 늘 최고였다. 데뷔 첫 해부터 51년도에 타/출/장 .274/.356/.472, OPS .828, 조정 OPS 120, 20홈런, 68타점, 57볼넷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내며 신인왕(Rookie of the Year, RoY)을 차지했다. 그러나 팔팔하던 22~23세에 군 복무를 하느라 단 34경기밖에 출전하지 못 했고, 이 점 때문에 누적 기록에서 상당한 손해를 봤다.[16]
이제 막 신인 티를 벗은 선수가 2시즌 까먹은 것으로 왜 상당한 손해라는 소리나 나올까도 싶지만, 군 복무를 마친 54년부터 66년까지의 메이스의 압도적인 전성기를 보면 그런 소리가 왜 나오는지 알 수 있다.
군 복무를 마친 메이스는 54년부터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타/출/장 .345/.411/.667, OPS 1.078, 조정 OPS 175, 41홈런, 110타점, 66BB/57K(!), bWAR 10.6[17] 으로 리그를 씹어먹는 성적을 낸 것. 타율, 장타율, OPS, 조정 OPS 그리고 3루타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고, 당연히 올스타에도 들어갔으며 이해 리그 MVP를 차지했다.
전성기인 54년도~66년도의 성적을 요약하면 13년간 연평균 '''타/출/장 .315/.390/.601, OPS .992, 조정 OPS 166, 40홈런, 109타점, 73볼넷, 69삼진, 21도루, bWAR 9.5[18] !'''. 가히 초월적인 성적이라 할 수 있다. 3할을 넘게 치는 타자가 장타율 6할에 40홈런을 치는 파워를 지녔고 볼넷이 삼진보다 많을 정도로 선구안도 좋은 데다가 도루왕을 4번이나 차지할 정도의 준족에 수비 WAR도 1.3을 찍을 정도로 수비를 잘 했다.[19][골드글러브는] 이러니 메이저리그 올 타임 넘버 원 5툴 플레이어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시즌은 65년도로, 타/출/장 .317/.398/.645, OPS 1.043, 조정 OPS 185, 52홈런, 112타점, 76볼넷, 71삼진, bWAR는 무려 11.2를 기록했다. 이해 출루율 1위, 장타율 1위(그러니 당연히 OPS도 1위), 조정 OPS 1위, 홈런 1위, 루타 1위(360루타)를 차지하며 생애 2번째 MVP에 선정된다. 사실 1964년에도 11.0의 bWAR을 기록했는데 MVP는 겨우 6위였다.
여기에 빼어난 수비 솜씨로 중견수 수비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54년 월드시리즈에서 전력상 더 강하다고 평가받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상대로 보여준 신기의 수비, The Catch.
영상을 저렇게만 보면 실감이 안날 수 있겠지만, 당시 구장은 뉴욕 시절 홈구장인 폴로 그라운드이다. 폴로 그라운드의 구조가 어떻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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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겨먹은 구장의 센터 가장 깊은 곳으로 날아간 타구였기 때문에 평균적인 외야수가 정상수비를 하는 데 저 정도 타구면 장내홈런의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그걸 뒤로 쫓아가 바스켓 캐치를 선보인 명장면.
아직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외야수를 꼽을 때 꼭 들어가는 이름이며, 외야에서 믿기지 않는 호수비가 나올 때마다 해설자들은 늘 윌리 메이스를 언급한다. 수비까지 잘하다니 정말로 '''Willie could do everything'''.
메이스도 나이는 못 속이는지 36살을 넘기며 하향세에 접어들었다. 말년엔 정든 자이언츠를 떠나 젊은 날을 보냈던 뉴욕에 창단된 뉴욕 메츠로 돌아가서 활동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가 메이스를 뉴욕으로 보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당시 샌프란시스코가 적자를 보며 메이스의 연금을 보장하기 어려웠고 메츠의 구단주가 과거 뉴욕 자이언츠 시절 현지 팬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메이스를 다시 뉴욕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었고 전성기를 지났지만 이런 이해 관계와 추억이 합쳐지며 메이스는 뉴욕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나이 때문인지 큰 활약을 보이진 못했다. 오히려 1973년 월드시리즈에서 평범한 플라이를 잡지 못하고 놓치는 등 안 좋은 모습[20] 을 보여 미국에서는 은퇴 시기를 놓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이는 스포츠맨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가 36살부터 은퇴하는 42세까지 남긴 성적은 타/출/장 .272/.374/.458 17홈런 57타점 64볼넷 79삼진 WAR 3.9. 30~40대에 기록한 성적 치곤 나쁘지 않은 성적임에도 저런 말이 나오는 것에서 그 당시 메이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어땠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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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스는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선수였다. 덕분에 54년도에 첫 올스타를 나간 뒤로 은퇴할 때까지 매년 올스타전에 나갔다. 특히 가장 유명한 것은 뉴욕 할렘 가 아이들과 어울려서 스틱볼을 즐기던 장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어울리는 모습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도 '''Say Hey Kid'''.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는 희대의 호타준족이지만, 인품도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그야말로 한 몸에 받았다.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Center Field (1st)
4. 평가
보통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베이브 루스, 그 다음 가는 2위로 메이스를 꼽는다. 하지만 소수지만 메이스를 최고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이는 타격만 놓고 보면 베이브 루스가 1위지만 '''주루'''를 포함하는 플레이에서는 메이스가 1위라는 논지다.[21] 거기다가 수비까지 포함하면 중견수 메이스가 좌익수 겸 1루수를 한 루스를 이긴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다. [22]
행크 애런은 오래도록 사상 최고 야수 순위 최상위권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았지만, 배리 본즈가 루스의 기록을 넘어서자 그에 대항할 성적 격으로 대두된 감이 있다. 일단 타자면 모를까 수비를 합쳐 봐야 하는 야수라면 행크 아론이건 테드 윌리엄스건, 외야 수비의 신 메이스의 상대가 안 된다.
ESPN의 데이비드 숀필드는 올타임 순위에서 루스가 아닌 메이스를 역대 1위로 평가하며, 윌리 메이스가 행크 아론보다 위인 것은 자못 당연한 듯 설명했다.##
데드볼 시대의 야구 황제 타이 콥은 야구감독도 그만두고 야구계를 떠난 말년에 윌리 메이스의 플레이에 대해 "야구장에 돈 주고 보러 가는 걸 안 아깝게 만드는 선수"라는 극찬을 한 적이 있다.[23]
인기도 매우 많은 선수였다. 미국 동쪽 끝인 뉴욕에 있던 팀을 하등 관계 없는 서쪽 끝인 샌프란시스코로 옮기고도 인기를 유지하게 했다.
5. 기타
메이스가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상대는 18개를 내준 워렌 스판이다.
샌프란시스코 시절 동료 바비 본즈의 아들의 대부를 서준 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배리 본즈다.
그의 등번호 24번은 당연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영구결번이며, 이 등번호는 재키 로빈슨의 전 구단 영구결번 42를 뒤집은 번호인 점도 있다보니 모든 선수들이 가장 선호하는 번호 중 하나다. 배리 본즈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시절에 이 번호를 달았고[24] , 그 외에도 그래디 사이즈모어, 켄 그리피 주니어, 리키 헨더슨, 미겔 카브레라 같은 선수들이 이 번호를 달았다.[25]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한 기자의 질문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그가 뛰었던 기간'동안 제일 위대한 선수는 누구인 걸로 생각하냐는 질문이었으며 이에 메이스는 '''"저였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답변을 했었다. 당연히 이런 메이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그동안 보였던 플레이와 인성적으로 매우 뛰어난 모습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를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2016년 자신의 85번째 생일에는 메탈리카가 선창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 홈 팬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2017년부터 월드 시리즈 MVP에게 주어지는 상의 이름을 윌리 메이스 상으로 지정하였다.
6. 관련 문서
[1] 1953년 윌리는 군복무로 경기에 뛸 수 없었고 팀은 1958년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이전했다.[2] 윌리 메이스가 뉴욕 자이언츠에 데뷔했던 시기부터 5년간 자이언츠의 감독을 맡았던 감독.[3] 이중 "윌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라는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윌리 메이스에 대해 말할 때 야구계에서 계속 인용되곤 한다. 참고로 레오 듀로서 감독은 윌리 메이스가 데뷔한지 얼마 안 되었을때였던 신인시절에도 "윌리가 요리만 할 수 있다면, 난 그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인터뷰도 남겼을만큼 감독-선수 관계를 넘어 윌리 메이스라는 인간 자체를 좋아한 팬이었으며, 디마지오는 메이스가 데뷔한 해에 은퇴한 선수로 활동시기가 겹치지 않고 오히려 듀로서가 선수생활하던 시기에 전성기를 시작했던 선수이다. [4] 아직도 깨지지 않은 외야수 최다 골드글러브 기록(로베르토 클레멘테와 동률) 보유자이다. 그것도 그가 한창 선수생활을 하며 뛰어난 수비능력을 이미 인정받던 중에 골드글러브가 생긴거라 더 일찍 생겼으면 당연히 그만큼 더 많이 수상했을 것이라 평가된다. [5] 그래서 많은 야구팬들이 도루의 암흑기가 아닌 시기였으면 배리 본즈만이 기록한 400홈런 - 400도루도 충분히 달성했을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500홈런-500도루도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사실 350-350도 본즈만이 유일한 기록이고, 가장 가까운 선수가 메이스다.[6] 참고로 윌리 메이스의 도루 성공률은 76.644퍼센트로서, 행크 애런의 76.677퍼센트보다도 낮다. 물론 이건 행크 아론의 도루 성공률이 거포로서는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높은 것이고(홈런왕과 20-20을 동시에 기록한 박병호나, KBO 통산 홈런 2위에 빛나는 거포이면서도 20-20을 몇 번씩 기록한 양준혁만 봐도 도루 성공률이 60%대 초중반에 그친다.) , 메이스의 도루 성률은 현대의 세이버매트릭스 관점에서 봐도 충분히 생산적인 도루 성공률이었다. 그렇지만 이게 도루에 목을 맬 정도로 높은 수준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애초에 도루를 할 시간에 장타를 더 때려냈던 선수.[7] 누적 bWAR가 무려 '''156.2'''로 메이저리그 전체 랭킹 5위에 해당한다. 이 위로는 베이브 루스, 사이 영, 월터 존슨, 배리 본즈 밖에 없다.[8] 메이스는 338 도루, 행크 애런은 240 도루.[9] 3할을 뺀다면 배리 본즈와 알렉스 로드리게스도 600-300을 기록했다. 물론 둘의 기록은 이제 의미가 없다.[10] 세계로 넓혀보면 3할-500홈런-3000안타는 일본프로야구의 장훈밖에 기록하지 못한 대기록이다. 여기에 통산 300도루 이상까지 붙으면 메이스와 장훈 단 둘만 기록했다. 그야말로 후덜덜덜. 사실 윌리 메이스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배리 본즈도 홈런과 도루는 달성했는데 안타가 2935개라서 아깝게 달성 못 한 경우이다.[11] 단, 장훈은 어릴 적 화상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오른손이 손상되는 바람에 수비 쪽에서는 활약하지 못 했다. 라인 드라이브성 공을 잡게 되면 눈 앞에 불꽃이 튀는 기분이었다고.[12] 이 시기에뛰던 유명선수들로는 화이티 포드, 요기 베라, 미키 맨틀, 행크 아론, 밥 깁슨, 샌디 쿠팩스, 게일로드 페리, 스티브 칼튼, 윌리 맥코비 등이 있다.[13] 그래서 밤비노의 저주는 허구라고 해도 인종차별의 저주는 진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왜냐면, 보스턴은 이런 식으로 재키 로빈슨도 놓쳤다. 재키 로빈슨이 입단 테스트를 받고 있을 때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가 확성기로 '저 깜둥이 새X들을 당장 내보내지 못해?!'라며 크게 소리쳤고 로빈슨을 비롯한 흑인 선수들은 전부 도망쳐야 했다. 레드삭스 구단은 이 일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가 50년 뒤인 1995년에서야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흑인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1950년대말 전성기를 연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보스턴은 흑인 선수를 받아들이는데 가장 늦은 팀이고, 그들의 라이벌 양키스는 상대적으로 빠른 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14] 역시 보스턴과 함께 오랫동안 우승을 못하기로 유명했던 시카고 컵스도 메이저리그 초기 흑인 선수들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그래서 이것도 인종차별의 저주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15] 9를 넘긴 건 9번.[16] 윌리 메이스는 21~22살(34경기 출장)에 군복무를 하느라 누적 기록에서 상당한 손해를 봤다. 물론 34경기에 출장한 21살 때 OPS는 .736(OPS+ 102로 거의 평균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테드 윌리엄스보다는 큰 손해는 아니다.[17] 놀라운 점은 수비 WAR만으로 2를 채웠다는 점이다. 그의 수비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수치.[18] 공격 WAR 8.2 + 수비 WAR 1.3[19] 57년도부터 68년도까지 12년 연속 골든 글러브 수상.[골드글러브는] 57년도부터 생겼음에도 저런 기록을 낸것이다. 만약 더 일찍 골드글러브가 생겼다면 역대 외야수 골든글러브 단독 1등도 가능했을 것이다.[20] 커리어 말년이라 할 수 있는 37세부터 그의 수비 WAR는 마이너스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메이스조차도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던 셈.[21] 정말로 진지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루스vs메이스와 달리, 이쪽은 그냥 이승엽이 야구 자체를 이종범보다 훨씬 잘했으며, 이것은 일부 극성 기아팬들을 제외한 모두가 인정하는 팩트다. 스탯티즈 WAR에서도 더 적게 뛴 이승엽이 우위(72vs67)를 점하고 있으며,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수비 스탯(스탯티즈에서 제공하는 2014년 이전의 수비 스탯은 사실상 포지션 보정치와 수비 이닝을 곱한 수준이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허술하다.)을 감안해 준다고 억지를 부려도 넘사벽의 넘사벽이었던 일본 시절 활약을 생각하면 결국 이승엽의 압도적 우위이다. 솔직히 약쟁이 제외 역대 홈런 4위에 역대 최고 외야 수비를 한 몸에 갖췄던 윌리 메이스를 3할 타율도 200홈런도 못 쳤고 수비 역시 외야수로선 A급이었지만 역대 최고를 논할 정도는 절대 아니며, 격수로서는 애초에 5년밖에 안 뛴 것을 고려하지 않고 봐도 김재박 류중일까지 갈 것도 없이 동시대의 유지현도 못 제끼는 정도였던 이종범에 갖다 붙이는건 선을 넘어도 몇 번은 넘은 비유다. 그에 비하면 이승엽은 적어도 기량(20대 후반~30대 초반을 전부 일본에서 보내고도 역대 최다 홈런), 위상(국민타자) 양 면에서 최소한 크보 역대 원탑이었다는건 부정할 수 없는 팩트다.[22] 베이브 루스는 저 유명한 월터 존슨을 제치고 아메리칸 리그 방어율왕을 했던 엄청난 투수이다. 데드볼 시대에는 투수 겸 홈런왕이라는 괴이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18년 투수로 166이닝을 던지고 방어율 2.22를 기록하며, 11홈런으로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이 되었다. 따라서 투수를 포함할 시 루스가 다시 우세가 된다.[23]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타이 콥이 위대한 선수라고 극찬한 흑인 선수는 윌리 메이스와 로이 캄파넬라 뿐이다.[24] 자이언츠 이적 후에는 이 번호가 영구결번이라 25번으로 바꿔 달았다.[25] 이 중 켄 그리피 주니어, 리키 헨더슨은 명전을 갔고 그들의 24번 역시 영구결번이 되었다. 미겔 카브레라 역시 별 일이 없는 한 은튀 후 명전과 영구결번이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 여러모로 야구계의 굵직굵직한 인사들이 포진한 번호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