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클레멘테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펼치기 · 접기 ]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color=#373a3c> '''1960'''
<color=#373a3c> '''1971'''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로베르토 클레멘테'''
헌액 연도
1973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93.38% (1회)[9]

'''196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올랜도 세페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71년 월드 시리즈 MVP'''
브룩스 로빈슨
(볼티모어 오리올스)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진 테네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6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월리 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행크 애런
(밀워키 브레이브스)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바이더 핀슨
(신시내티 레즈)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빌 버든
(피츠버그 파이리츠)
'''196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바이더 핀슨
(신시내티 레즈)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빌 버든
(피츠버그 파이리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빌 버든
(피츠버그 파이리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4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7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69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토미 아지
(뉴욕 메츠)
'''197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토미 아지
(뉴욕 메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데이비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바비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7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토미 아지
(뉴욕 메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데이비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바비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데이비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세자르 세데뇨
(휴스턴 애스트로스)
'''197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데이비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바비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데이비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세자르 세데뇨
(휴스턴 애스트로스)

윌리 데이비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세자르 세데뇨
(휴스턴 애스트로스)
바비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보유 기록
외야수 최다 골드글러브 수상
12회[10]


<colbgcolor=#000000> '''피츠버그 파이리츠 No. 21'''
'''로베르토 엔리케 클레멘테 워커
(Roberto Enrique Clemente Walker)
'''
'''출생'''
1934년 8월 18일
'''사망'''
1972년 12월 31일 '''(향년 38세)'''
'''국적'''
[image] 푸에르토리코
'''출신지'''
푸에르토리코 캐롤라이나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54년 자유계약 (BRO)
'''소속팀'''
'''피츠버그 파이리츠 (1955~1972)'''
'''수상'''
'''15회 올스타 선정 (1960~1967, 1969~1972)
2회 월드시리즈 우승 (1960, 1971)
NL MVP (1966)
월드시리즈 MVP (1971)
12회 NL 골드글러브 (1961~1972)'''
4회 NL 타격왕 (1961, 1964, 1965, 1967)
2회 NL 최다안타왕 (1964, 1967)
1. 소개
2. 선수 시절
3. 1972년: 영광의 절정과 비극적 최후
4. 명예의 전당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6. 사회공헌
7. 연도별 기록

[clearfix]

1. 소개


'''"당신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Anytime you have an opportunity to make a difference in this world and you don't, then you are wasting your time on Earth.)

미국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야구선수.
메이저리그의 1세대 카리브해/중남미 출신 선수 중 한 명으로 '''훌륭한 성적뿐만 아니라 인품, 사회봉사 정신으로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귀감이 된 위대한 야구인'''이다. 통산 타율 0.317과 3,000안타, 외야수로서 12회의 골드글러브MVP 1회 수상 등 공수를 겸비한 당대 최고의 선수였으며,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모든 중남미 출신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 중남미 출신 선수들 중에서 21번을 달기는 희망하는 선수라면, 그에 대한 경의와 존경심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정도.[1]
통산 성적은 타율 .317, 240홈런, 3000안타, 출루율 .359, 장타율 .475, OPS .834, 순장타율 .158, BB/K 0.5, wRC+ 129, 1305타점, 1416득점을 기록했다.

2. 선수 시절


처음에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스카우트인 앨 캄파니스가 클레멘테를 강력히 추천하여 다저스와 연봉 5000달러 보너스 1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다저스가 제일 먼저 인종차별을 철폐하는데 앞장서는 바람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흑인 및 히스패닉 계열 선수가 많아서 클레멘테가 뛸만한 자리가 없었고 마이너리그에서도 출전하지 못했다. 이유는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4000달러 이상의 보너스를 받은 선수는 무조건 2시즌 동안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포함시켜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었고, 이를 어길 경우 그 선수를 룰5 드래프트에 내보내야 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저스는 그를 출전시키지 않고 그의 존재 자체를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숨기려는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바로 다저스에서 흑인 차별을 없앴던 전설적인 명 단장 브랜치 리키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단장으로 취임해 그를 지명해 자신의 팀으로 데려온 것.[2]
[image]
마구잡이 타법으로 유명했다. 머리부터 무릎까지 모든 공을 다 친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였고, 선수 생활 끝까지 이 배드볼 히터의 성향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전설적인 안타왕인 조지 시슬러의 지도로 무거운 방망이를 쓴 후, 정확하게 볼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0년과 1971년 두 차례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피츠버그에 안겨주기도 했고, 본인은 꾸준히 3할 타율을 유지하면서 3,000안타까지 도달했다. 아울러 역대 최고 수준의 우익수 수비를 자랑하기도 했다. 풋아웃과 '엘 바주카'로 불릴 정도의 엄청난 강견을 바탕으로 한 어시스트 같은 고전적인 스탯부터 Total Zone Runs 같은 세이버메트릭스 지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역대 우익수 지표에서 정상권을 기록하고 있다. 스즈키 이치로조차 클레멘테에겐 미치지 못한다고 할 정도.
(사진 삭제됨)
일찍이 중남미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서 맞서던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은 반드시 본명인 로베르토로 불리기를 원했고, 엉뚱한 별명이 붙을 경우 이를 정정하기 위해 언론과 맞서는 것도 불사했다. 아직 흑인 차별의 잔재가 남았던 시절에 비 미국인이자 흑인으로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중남미 출신의 흑인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스타 선수로서 자존심을 세우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끝까지 투쟁했던 것이다. 덕분에 중남미 출신 선수들 모두의 우상이 되었다.
잔부상이 굉장히 많았고, 특히 담증세에 꽤나 시달려서 자신의 차례의 타격이나 수비가 끝나면 몸이 굳어지지 않게 벤치에서 스트레칭하느라 엄청 부산스러웠다. 그럼에도 좋은 성적을 남겼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1956년 7월 25일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한 '''끝내기 인사이드 파크 만루홈런'''을 쳤다.[3]

3. 1972년: 영광의 절정과 비극적 최후


[image]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사망을 다룬 피츠버그 지역지 헤드라인.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영광보다도, 비극적이면서도 영웅적인 최후로 인해 후대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아직 팔팔한 현역이던 1972년 10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12를 기록했으며, 통산 12번째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더불어 시즌 마지막 타석의 마지막 안타를 정확하게 통산 3,000번째 안타로 장식하였다.[4] 이로써 사실상 명예의 전당행도 일찌감치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MLB 오늘은]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마지막 타석 '3000안타' (1972.09.30)
그 해 연말에는 전세 비행기에 식량 등의 구호물자를 가득 싣고 니카라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니카라과에 구호물자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탄 비행기는 악천후 속에 추락하고 말았고, 그를 포함한 구호팀은 전원 사망하였다. 그리고 전미가 울었다. 그의 나이는 불과 38세였다.[5][6]

4. 명예의 전당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 그는 루 게릭 이래 최초로 5년간의 유예기간 없이 바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랐고, 92.69%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러면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미국 외 출신으로 들어간 첫번째 선수로 기록되었다.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로베르토 클레멘테
23
154
231
51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Right Field (6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로베르토 클레멘테
94.5
54.3
74.4
우익수 HOF 입성자 평균
73.2
43.0
58.1

6. 사회공헌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매년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이 큰 선수에게 시상하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으로 남아 있다. 이 상은 현재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타고 싶어하는 가장 명예로운 상이다.[7] 그리고 푸에르토리코프로야구 리그도 그의 이름을 따 로베르토 클레멘테 프로야구 리그.
히스패닉계의 영웅인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등번호인 21번(재밌게도 메이저리그 전체 영구 결번인 재키 로빈슨이 달았던 42의 정확하게 절반)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전체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2000년대 중반에 있었으나 무산됐다. [8] 그의 등번호 21번은 1회와 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푸에르토 리코 대표팀이 영구결번 처리했다. 아울러 당연히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영구결번.
[image]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홈구장인 PNC 파크 바로 옆을 지나는 다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베르토 클레멘테 브리지(Roberto Clemente Bridge)로 명명되었고, 파이리츠의 전 구장인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이 있던 자리에 로베르토 클레멘테 기념 공원이 조성되었다.
PNC 파크의 우측 펜스는 클레멘테 월(Clemente Wall)로 명명되고 있다. 펜스의 높이는 그의 등번호에서 딴 21피트(약 6.4m)이다.
[image]
이것은 뉴욕에 있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동상. GOYA 푸드에서 협찬해서 조성된 로베르토 클레멘테 주립공원에 있다.
그리고 정확히 33년뒤에 아들인 '''로베르토 클레멘테 주니어'''가 33년전 아버지가 준비했던 구호품과 똑같은 구호품을 가지고 니카라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남아시아 대지진으로 엉망이 된 동남아가 더 도움이 급하다고 하여 그는 동남아로 구호품을 가지고 직접 가서 전해줬다. 참고로 아들인 주니어도 필라델피아 필리스,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야구선수로 뛰었지만 부상 때문에 메이저리그의 꿈을 접고 은퇴한 뒤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았다. 대신 그의 사후 태어난 조카 '''에드가르드 클레멘테'''가 콜로라도 로키스, 애너하임 에인절스에서 1998~2000년까지 백업 외야수로 써 메이저리그 선수로 뛰기도 했다.
2015년, 클레멘테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교황 프란치스코가 이를 축복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보도되었으나 교황청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7. 연도별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1955
PIT
124
501
121
23
11
5
48
47
2
18
60
.255
.284
.382
.666
-0.9
1956
147
572
169
30
7
7
66
60
6
13
58
.311
.330
.431
.761
1.8
1957
111
474
114
17
7
4
42
30
0
23
45
.253
.288
.348
.637
1.5
1958
140
556
150
24
10
6
69
50
8
31
41
.289
.327
.408
.736
3.7
1959
105
456
128
17
7
4
60
50
2
15
51
.296
.322
.396
.718
1.9
1960
144
620
179
22
6
16
89
94
4
39
72
.314
.357
.458
.815
3.4
1961
146
614
201
30
10
23
100
89
4
35
59
'''.351'''
.390
.559
.949
5.3
1962
144
581
168
28
9
10
95
74
6
35
73
.312
.352
.454
.805
3.6
1963
152
642
192
23
8
17
77
76
12
31
64
.320
.356
.470
.826
4.6
1964
155
683
'''211'''
40
7
12
95
87
5
51
87
'''.339'''
.388
.484
.872
6.1
1965
152
642
194
21
14
10
91
65
8
43
78
'''.329'''
.378
.463
.842
6.0
1966
154
690
202
31
11
29
105
119
7
46
109
.317
.360
.554
.956
7.6
1967
147
632
'''209'''
26
10
23
103
110
9
41
103
'''.357'''
.400
.554
.954
7.7
1968
132
557
146
18
12
18
74
57
2
51
77
.291
.355
.482
.838
6.7
1969
138
570
175
20
'''12'''
19
87
91
4
56
73
.345
.411
.544
.955
7.0
1970
108
455
145
22
10
14
65
60
3
38
66
.352
.407
.556
.963
4.7
1971
132
553
178
29
8
13
82
86
1
26
65
.341
.370
.502
.871
6.5
1972
102
413
118
19
7
10
68
60
0
29
49
.312
.356
.479
.835
4.0
<color=#373a3c> '''MLB 통산
(18시즌)'''
<color=#373a3c> 2433
<color=#373a3c> 10211
<color=#373a3c> 3000
<color=#373a3c> 440
<color=#373a3c> 166
<color=#373a3c> 240
<color=#373a3c> 1416
<color=#373a3c>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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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표적인 사례로 새미 소사가 있지만, 그는 이후 악물 복용 혐의가 드러나 오점을 남겼다.[2] 다만 클레멘테가 다저스에서 데뷔를 못한 것에 대해 당시 다저스의 단장인 버지 버베이시의 증언은 달랐다. 버지는 당시 흑인 선수의 비중은 문제 될 것이 없었고 '팀의 승리'에 대해 클레멘테를 어떻게 할 지 두고 이사회를 소집했다고 한다. 이사회는 선수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재키 로빈슨'''이 "클레멘테가 올라오면 누굴 내릴 것이냐"라는 질문을 했고 이에 버지는 당시 부진에 빠졌던 조지 슈바를 내릴 것이라는 답변을 하자 로빈슨은 이에 "팀 내 최고의 선수는 아니지만 신망이 두터운 선수"라며 즉각 항변했고 이내 "내가 단장이라면 클레멘테를 올리지 않고 슈바나 다른 백인 선수를 내리지 않을 것. 이 결정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퇴보할 것."이라며 클레멘테의 콜업에 강력히 반대했다. 사실 로빈슨과 슈바는 다저스의 마이너리그 팀이었던 몬트리올 로열스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어쨌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레멘테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로빈슨이었기에 더욱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현재 미국 내 흑인들이 비판받고 있는 문제점인 '히스패닉 차별'의 또 다른 사례가 될 수도 있다.[3] 그것도 역전, 3점차 역전 홈런이었다. 파이리츠는 9-8로 승리.[4] 그해 피츠버그가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해 신시네티 레즈와 리그 챔피언십 결정전을 치렀고, 로베르테도 당연히 출전했다. 결국 이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메이저리그 출전이 되었다.[5] 이전부터 니카라과에 구호품을 전달해줬는데, 니카라과를 통치하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일당과 그 휘하의 부패한 관리들이 그걸 가로채는 일이 계속되었다. 결국 이를 참다못한 클레멘테가 자신이 직접 전세기 타고 전달하려 했다가 그만 화를 입고 만 것. 이러한 사연이 알려진 후 더욱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6] 원래는 갓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절친한 후배인 톰 워커라는 선수도 같이 갈 예정이었지만 클레멘테는 미혼인 그에게 가족과 연말을 보내길 권했고 톰 워커는 클레멘테가 구호물자를 싣는 것만 도와주고 돌아오게 되어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화를 피한 톰 워커가 결혼한 후 낳은 아들 닐 워커는 훗날 피츠버그에서 준수한 타자로 활약하게 된다.[7] 2005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수상자였던 존 스몰츠의 수상소감. "이 상은 지금껏 내가 받은 상 중에서 가장 큰 상이다. '''사이 영 상'''을 받을 때 보다 더 영광스럽다."[8] 일단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그다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여기에 재키 로빈슨의 유족측에서도 부정적 입장을 비춘 것까지 더해져서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21번을 전체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는 것은 흐지부지되었다. 단순히 재키 로빈슨 유족의 반대만으로 무산되었다는 일부 주장은 와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