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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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10~20년대 메이저리그를 지배했던 레전드 2루수로 명예의 전당 멤버다. 한때 당대 최강 2루수 이미지였던, 냅 라조이[1] 의 뒤를 잇는 최고의 2루수라는 평가도 받았던 선수다.[2] 리그 전체에서 원톱으로 튀는 몬스터 시즌들보다, 공수 모두에서 톱급 플레이를 유지하는 최정상급 시즌을 40대 초반까지 이어가는 꾸준함[3] 이 장점이었던 선수라 주목을 덜 받았던 데다가, 범인이 아니었음에도 블랙삭스 스캔들로 밉상으로 찍혀 영구결번[4] 대우도 못 받았을만큼 저평가가 가장 심한 선수[5] 이다. 세이버매트릭스상으로의 커리어는 로저스 혼스비와 유사하며, 냅 라조이[6] 를 압도할 정도이다.
아메리칸 리그 MVP도 수상한[7]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교타자 중 한 명.
2. 선수시절
1887년 뉴욕 주 밀러튼에서 태어난 콜린스는 어릴때부터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눈에 띄어 1906년 입단했다. 하지만 콜린스는 당시 컬럼비아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입단 초에는 학업을 수행하느라 별로 뛰지 못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인 1908년부터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한 1908년, 콜린스는 타율 .273 90안타 8도루 40타점을 기록한데에 이어,1909년에는 타율 .347 198안타 63도루 54타점으로 새로운 스타가 나타났음을 알렸다. 다음 해인 1910년에는 타율 .347 188안타 81도루 81타점으로 도루왕을 차지했으며 그 해 애슬레틱스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물리치고 우승반지를 획득했다. 이후에도 콜린스는 프랭크 베이커[8] 등과 함께 활약하며 일명 10만 달러 내야진을 구축했다. 이 내야진의 활약으로 애슬레틱스는 월드시리즈 3연패를 할 수 있었다.
1914년에는 타율 .344 181안타 58도루 85타점으로, '''무려 6년 연속 3할을 기록하고 아메리칸리그 MVP까지'''[9]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지만 시즌이 끝난 이후 팀의 재정이 악화됨에 따라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된다. 화이트삭스에서도 콜린스는 '맨발의 조' 조 잭슨, 에디 '너클스' 시카티 등과 함께 활약하며 화이트삭스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1917년에는 리그우승과 동시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던 1920년 콜린스는 블랙삭스 스캔들에 휘말리고 만다. 당시 자신의 연봉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화이트삭스의 몇몇 선수들은 도박사들과 결탁하여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승부조작을 했던것이다.[10] 이로 인해 조 잭슨을 비롯한 대부분의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제명당했으며, 월드시리즈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였던 콜린스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콜린스는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아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블랙삭스 스캔들이 터진 이후에도 콜린스는 화이트삭스에 계속 남아 선수생활을 했다.1924년부터 화이트삭스의 감독 겸 선수가 된 콜린스는 3년간 감독으로서 174승 160패를 기록했다. 이후 1927년 친정팀인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돌아와 선수 겸 코치로 뛰다가 1930년 은퇴를 했다.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Second Base (2nd)
4. 은퇴 후
은퇴 후 애슬레틱스의 코치로 일하던 콜린스는 193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으로 임명되어 1947년까지 보스턴의 단장으로 일했다.
콜린스는 1939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4수만에 77.74%의 특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94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레드삭스의 단장직에서 물러난 콜린스는 이후 1951년 3월 25일 세상을 떠났다.향년 64세.
5. 여담
-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운동선수다. 콜린스 본인은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19세기 말 ~ 20세기 초 메이저리그에는 의외로 아이비 리그 등의 명문대 출신 메이저리거들 비율이 지금보다 더 높았다.
-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희생번트 기록을 가지고 있다(511개). 한때 세계기록이었으나, 그의 사후 60여년 뒤 일본의 번트의 신이 그의 세계기록을 뺏어갔다.
6. 둘러보기
[1] 1901년 4할2푼1리를 쳤던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4할 타자이다. 콜린스보다 한참 선배라 콜린스가 MVP를 수상한 시기 이후 몇년 못가 은퇴했다.[2] 문제는 당대 최강의 교타자였던 콜린스의 전성기때 9년 후배이자 완성형 2루수라 할만한 거포 2루수 로저스 혼스비(2루수 최초 메이저리그 300홈런 기록 보유자다.)라는 괴물이 등장하면서 그 이미지를 구축할 기간이 짧았다는 것. 그래서, 제대로 따지고 보면 냅 라조이 - 에디 콜린스 - 로저스 혼스비가 당시 최강 2루수 계보가 맞지만, 실제로는 냅 라조이 - 로저스 혼스비로 그냥 이어지는 걸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단 지금까지도 세이버매트릭스상 에디 콜린스를 넘을만큼의 2루수는 안 나왔으므로 1위 로저스 혼스비, 2위 냅 라조이, 3위 에디 콜린스라는 순서는 변함이 없다. 사실 세이버 매트릭스로는 에디 콜린스가 냅 라조이보다 위다. 후술될 블랙삭스 스캔들이 아니었다면 로저스 혼스비와 동급비교되는 선수였을 지도 모른다. [3] 40대 초반까지도 수비가 뛰어나서 2루 수비의 모범이라 불렸고, 20대에 MVP를 받았지만 30대 중후반까지도 도루왕에 도전하거나 MVP 후보에 들어갈 정도로 공수 밸런스 유지를 매우 잘했었던 역대 최정상급 내야수다.[4] 물론 등번호가 없던 시대라 진짜 영구결번이 될 수야 없지만, 똑같이 등번호가 없던 동시대 타이 콥 같은 레전드들처럼 영구결번 대우는 받을 수 있는데 못 받았다. (자신이 감독일때 제자였던 투수 테드 라이언스조차 영구결번을 받았다. 물론 이쪽은 데뷔 후 베테랑이 되었을때는 등번호가 생겼다.) 현재까지 그의 소속팀이었던 팀들의 영구결번 선수들 중 콜린스에 비할 만한 성적을 낸 선수는 아직 없다. [5] 동시대의 저평가왕 트리스 스피커보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트리스 스피커는 똑같은 포지션에 타이 콥이라는 원톱 때문에 2인자 이미지로 밀린 거였고, 그럼에도 명예의 전당 투표 2번만에 들어갔지만, 현역 시절에 아메리칸 리그 2루수 중에는 라이벌이 없다 불렸고, 데드볼 시대와 라이브볼 시대 모두에서 2루 수비의 완결판이라 불리워 오히려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하고만 비교되던 최고의 내야수 에디 콜린스는 4번만에 겨우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을 정도이다. 세이버 매트릭스상 기록은 둘다 메이저리그 역대 야수 탑10급의 대선수이다.[6] 20대에 1901년 4할2푼1리의 몬스터시즌을 포함하여 임팩트있는 시즌이 많았지만, 30대부터는 의외로 기복이 꽤 있어서 기록상 마이너스가 많아, MVP 시즌도 몬스터 시즌이라 하기는 힘들만큼 괴물같은 임팩트는 없었고 대졸선수라 풀타임데뷔도 늦었지만 30대에도 20대 때처럼 성적이 꾸준했고 40대 초중반까지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으로 활동했던 콜린스보다 세이버매트릭스가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팬들 머리 속에는 아메리칸 리그를 부흥했다시피하는 20대를 보낸 냅 라조이가 더 강하게 남아 있어 콜린스가 무시되곤 한다.[7] 상술된대로 1911년부터 생겼는데 1914년까지 단 4번(리그별 1명씩 총 8명)만 시상했으니 당시 선수들로써는 지금보다 더 희귀한 기회의 수상이었다. 1914년 MVP 당시 타율 2위로 기록되었고 100여년 동안 이 기록이 유지되었으나, 2020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당시 타격왕 타이 콥을 규정타석 미달자로 처리하기로 결정하며, 2위 에디 콜린스를 1위 타격왕으로 수정하여 논란이 있을 예정이다. 1922년에 MVP제도가 부활했으나 에디 콜린스는 당시 30대 중반이었고, 1923년에 만 36세의 나이에 감독 겸 선수로써 도루왕을 하며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MVP를 두고 경쟁하였다. 당시는 블랙삭스 스캔들 이후 3년밖에 안 되어 오히려 에디 콜린스의 이미지가 불리했음에도 MVP투표 2위를 했다. 오히려 그해 4할을 넘게 친 타격왕, 즉 4할 타자였던 해리 하일만이 MVP 3위를 했을 정도이니 전설로만 남아있고 기록으로 표현이 어려운 콜린스의 2루 수비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야말로 2루 수비의 달인이었다고 한다.[8] 한자리수 홈런왕이나 15홈런 미만 홈런왕이 난무하던 데드볼 시대에 홈런왕으로 유명하던 인물이다. 홈런 베이커가 별명을 넘어 선수명이 되었으며, 21세기 현재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아직도 그의 등록명을 Home Run Baker로 유지하고 있다. [9] 그때 MVP의 이름은 MVP가 아니라 Chalmer's award였다.[10] 콜린스는 당시 팀내에서 유일하게 실력대로 연봉을 받는 선수여서 의심을 많이 받지는 않았다. 물론 전에 있던 팀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할 때는 정규리그때 모습대로 활약했었는데,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못해 약간 의심을 받은건 사실이다. 허나 일류선수에게도 단기간의 부진은 흔한 것이라 조작으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이적 직후부터 당시 승부조작 선수들과의 사이도 평소에 좋지 않았던 걸로 알려진다.[11] 메이저리그는 1911년부터 MVP제도를 만들었다가 1914년 이후 없애버렸다. 아메리칸 리그는 8년 뒤인 1922년(내셔널 리그는 1924년)에 다시 생기게 하였는데 1922년 당시 아메리칸 리그 MVP수상자는 조지 시슬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