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이스트만
[image]
George Eastman
1854년 7월 12일 ~ 1932년 3월 14일
미국의 사진학자이자 연구가 그리고 세계적인 필름 브랜드 코닥을 창립한 경영자.
1854년 미국 뉴욕 워터빌에서 태어났다. 로체스터 공립학교를 졸업하여 뉴욕에 있던 로체스터 은행 서기로 일하다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가 당시에는 엄청 무거운 장비가 필요하다는 걸 듣고 좀 더 간편하게 사진을 찍을 수 없나 하여 손수 사진기술을 배우고 여러 실험을 직접 하면서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1882년에 필름의 초기 형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걸 대량으로 만들자면 엄청난 돈이 들기에 여러 사업가들을 만나 설득과 시범을 보이면서 드디어 사업가 헨리 스트롱의 투자를 얻어냈고, 1883년 감광필름을 만들어내면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걸 대량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성인 이스트만이 여러 언어에서 발음하기가 어렵다는 걸 생각하여 여러 논의 끝에 '이스트만 코닥'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덕분에 설립자 이름이 이스트만 코닥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코닥 사는 1887년 세계 최초 휴대형 사진기를 개발하여 이듬해 판매에 들어가는데 좀 더 편하게, 가볍게, 누구라도 마음껏 찍는다는 걸 강조하면서 본격적인 카메라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카메라가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코닥이 개발한 카메라와 필름은 전문가에게서나 호응을 얻었지 대중적으로는 큰 관심을 얻지 못하였다. 때문에 코닥은 당시 이벤트로만 기획된 광고에 고정적인 투자를 결정함으로써 잠재 시장을 빠르게 넓혀갔다. 무엇보다 전문가와 극지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의 리뷰를 광고매체에 포함하여 과거 방식으로 사진을 찍던 전문 사진기사들의 이목을 휘어잡는 데 성공하고, 또한 파란 스트립의 원피스를 입은 '코닥 여성'[1] 을 광고에 기용함으로써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잠재 시장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카메라의 대중화를 이끌면서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코닥은 이스트만의 꿈이었던 싸고 사진 찍기 편리한 카메라를 판매함으로써 더욱더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코닥 사진기는 당시 일회용 컨셉으로 판매되었는데, 사용자는 카메라를 사서 사진만 줄창 찍고, 필름을 다 쓰면 코닥으로 보내서 현상과 인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코닥의 경영 방식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의 코닥이라는 단어는 현재 미국에서 iPod이 MP3 플레이어 전체 시장을 대표하듯이, 카메라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곤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 많은 이들은 빠른 성장 속에서 독과점의 형태를 이루어낸 코닥과 카메라 시장을 어둡게 생각했는데,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코닥이 독과점을 이용하여 수익을 올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메라 사업을 카메라에 대한 호기심, 흥미로부터 시작한 이스트만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기계 대량 생산으로 자신의 꿈에 그리던 1달러 카메라, 그리고 이후에 브라우니[2] 를 시장에 선보임으로써 카메라 업계에서 다른 회사가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가 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성공적인 경영으로 빠르게 성장한 코닥이었지만, 당시 코닥이 고용한 과학자의 수는 고작 10명도 채 안되었다. 1911년 이스트만은 독일의 한 화학 공장을 견학하게 되는데, 이 독일 화학 회사는 700여명의 독일인 엔지니어와 화학자를 고용하고 있음을 확인한 코닥은 크게 충격을 받게 된다. 시장에서 선두를 점하고 있던 코닥이었지만, 코닥의 성공이 상품 개발과 혁신으로부터 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스트만은 이를 계기로 연구소를 설립하고 지속적인 투자로 상품 개발에 착수한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3] , 당시 연구소장에게 2가지의 임무를 부여하는데, 첫째는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연구해봐라.'였고 둘째는 '당신의 임무는 사진술의 미래다.'였다. 또한 이스트만은 평생동안 MIT에 기부를 하였는데 1912년 150만 달러어치의 기부를 시작으로, 죽기 직전까지 MIT에만 총 45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4] . 이런 이스트만의 기부와 투자는 코닥을 단순한 카메라 필름 회사가 아닌 수많은 특허를 갖춘 견실한 기업으로 만드는 현명한 선택이었고, 코닥은 1세기 동안 특허를 통해서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회사 중 하나로 남게 된다.
한때는 필름을 코닥이라고 부를 정도로 필름의 대명사가 되었던 만큼, 이스트만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독신자였던 그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보다 사회에 막대한 기부를 하였고, 회사 직원들에 대한 풍요로운 노동조건[5] , 복지에 신경쓰면서 코닥 직원들에게서뿐만이 아닌 사회에서도 대단한 존경을 받는 사업가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을 뒤로 한 채 이스트만은 1932년 "내가 할 일은 이제 없다. 더 이상 살아봤자 할 일이 없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고 만다. 말년에 척추관이 줄어드는 병인 요추협착증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 때문에 거의 걷지를 못해 굉장히 우울해 했었다고 한다. 그의 남은 재산 대부분은 이스트만 사회재단 이름으로 기부되어 사회 기부금으로 쓰였고 로체스터 대학교[6] 와 MIT에 기부하였다.
George Eastman
1854년 7월 12일 ~ 1932년 3월 14일
1. 개요
미국의 사진학자이자 연구가 그리고 세계적인 필름 브랜드 코닥을 창립한 경영자.
2. 일생
1854년 미국 뉴욕 워터빌에서 태어났다. 로체스터 공립학교를 졸업하여 뉴욕에 있던 로체스터 은행 서기로 일하다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가 당시에는 엄청 무거운 장비가 필요하다는 걸 듣고 좀 더 간편하게 사진을 찍을 수 없나 하여 손수 사진기술을 배우고 여러 실험을 직접 하면서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1882년에 필름의 초기 형태를 만들어낸다.
3. 코닥 필름
하지만 이걸 대량으로 만들자면 엄청난 돈이 들기에 여러 사업가들을 만나 설득과 시범을 보이면서 드디어 사업가 헨리 스트롱의 투자를 얻어냈고, 1883년 감광필름을 만들어내면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걸 대량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성인 이스트만이 여러 언어에서 발음하기가 어렵다는 걸 생각하여 여러 논의 끝에 '이스트만 코닥'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덕분에 설립자 이름이 이스트만 코닥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코닥 사는 1887년 세계 최초 휴대형 사진기를 개발하여 이듬해 판매에 들어가는데 좀 더 편하게, 가볍게, 누구라도 마음껏 찍는다는 걸 강조하면서 본격적인 카메라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카메라가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코닥이 개발한 카메라와 필름은 전문가에게서나 호응을 얻었지 대중적으로는 큰 관심을 얻지 못하였다. 때문에 코닥은 당시 이벤트로만 기획된 광고에 고정적인 투자를 결정함으로써 잠재 시장을 빠르게 넓혀갔다. 무엇보다 전문가와 극지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의 리뷰를 광고매체에 포함하여 과거 방식으로 사진을 찍던 전문 사진기사들의 이목을 휘어잡는 데 성공하고, 또한 파란 스트립의 원피스를 입은 '코닥 여성'[1] 을 광고에 기용함으로써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잠재 시장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카메라의 대중화를 이끌면서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코닥은 이스트만의 꿈이었던 싸고 사진 찍기 편리한 카메라를 판매함으로써 더욱더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코닥 사진기는 당시 일회용 컨셉으로 판매되었는데, 사용자는 카메라를 사서 사진만 줄창 찍고, 필름을 다 쓰면 코닥으로 보내서 현상과 인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코닥의 경영 방식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의 코닥이라는 단어는 현재 미국에서 iPod이 MP3 플레이어 전체 시장을 대표하듯이, 카메라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곤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 많은 이들은 빠른 성장 속에서 독과점의 형태를 이루어낸 코닥과 카메라 시장을 어둡게 생각했는데,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코닥이 독과점을 이용하여 수익을 올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메라 사업을 카메라에 대한 호기심, 흥미로부터 시작한 이스트만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기계 대량 생산으로 자신의 꿈에 그리던 1달러 카메라, 그리고 이후에 브라우니[2] 를 시장에 선보임으로써 카메라 업계에서 다른 회사가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가 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성공적인 경영으로 빠르게 성장한 코닥이었지만, 당시 코닥이 고용한 과학자의 수는 고작 10명도 채 안되었다. 1911년 이스트만은 독일의 한 화학 공장을 견학하게 되는데, 이 독일 화학 회사는 700여명의 독일인 엔지니어와 화학자를 고용하고 있음을 확인한 코닥은 크게 충격을 받게 된다. 시장에서 선두를 점하고 있던 코닥이었지만, 코닥의 성공이 상품 개발과 혁신으로부터 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스트만은 이를 계기로 연구소를 설립하고 지속적인 투자로 상품 개발에 착수한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3] , 당시 연구소장에게 2가지의 임무를 부여하는데, 첫째는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연구해봐라.'였고 둘째는 '당신의 임무는 사진술의 미래다.'였다. 또한 이스트만은 평생동안 MIT에 기부를 하였는데 1912년 150만 달러어치의 기부를 시작으로, 죽기 직전까지 MIT에만 총 45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4] . 이런 이스트만의 기부와 투자는 코닥을 단순한 카메라 필름 회사가 아닌 수많은 특허를 갖춘 견실한 기업으로 만드는 현명한 선택이었고, 코닥은 1세기 동안 특허를 통해서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회사 중 하나로 남게 된다.
한때는 필름을 코닥이라고 부를 정도로 필름의 대명사가 되었던 만큼, 이스트만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독신자였던 그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보다 사회에 막대한 기부를 하였고, 회사 직원들에 대한 풍요로운 노동조건[5] , 복지에 신경쓰면서 코닥 직원들에게서뿐만이 아닌 사회에서도 대단한 존경을 받는 사업가가 된다.
4. 죽음
하지만 이러한 영광을 뒤로 한 채 이스트만은 1932년 "내가 할 일은 이제 없다. 더 이상 살아봤자 할 일이 없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고 만다. 말년에 척추관이 줄어드는 병인 요추협착증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 때문에 거의 걷지를 못해 굉장히 우울해 했었다고 한다. 그의 남은 재산 대부분은 이스트만 사회재단 이름으로 기부되어 사회 기부금으로 쓰였고 로체스터 대학교[6] 와 MIT에 기부하였다.
[1] 젊음과 자유를 나타내었던 이 코닥 여인은 해외에서 코닥여사, 파란 옷의 여인으로 불리며 일대의 센세이션을 일으킨다.[2] 간편한 조작성, 단순하고 멋진 디자인의 카메라로 1년만에 25만 개가 판매될 정도로 성공적인 제품이었다. 이 카메라는 이스트만이 고용한 화학자 브라우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3] 이스트만이 세운 연구소는 미국에서 설립된 최초의 상업 연구 단지 중 하나였다.[4] 이스트만은 다른 미국 대학에도 막대한 기부를 하였지만, MIT가 기부 금액이 가장 컸던건 이스트만이 개인적으로 존경했던 대학이였기 때문.[5] 코닥은 '''종신고용'''의 대명사로 유명한 기업이었다. 초창기에 이스트만이 주식 사업으로 번 수입을 일개 노동자에게 나눠준 일화는 유명한 일화. 그러나 1970-80년대의 미국 경제의 불황과 후지필름이라는 라이벌 기업의 등장으로 고전하던 코닥은 결국 종신고용을 포기했다.[6] 그의 이름을 딴 이스트만 음대는 줄리어드 음대와 미국 음대순위 1, 2위를 다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