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크 스타인

 


'''조크 스타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펼치기 · 접기 ]





''' 스코틀랜드의 축구감독 '''
''' 이름 '''
'''조크 스타인'''
'''Jock Stein, CBE'''
''' 본명 '''
존 스타인
John Stein
''' 출생 '''
1922년 10월 5일 /
영국 스코틀랜드 사우스래너크셔주 번뱅크
''' 사망 '''
1985년 9월 10일 (향년 62세) /
영국 웨일스 사우스글러모건주 카디프시
''' 국적 '''
영국 (스코틀랜드 )
''' 신체 '''
''미상''
''' 직업 '''
축구선수(수비수[1]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블랜타이어 빅토리아 FC(1940~1942 / 유스)
앨비언 로버스 FC(1942~1950)
래넬리 타운 AFC(1950~1951)
셀틱 FC(1951~1957)
''' 감독 '''
셀틱 리저브(1957~1960)
던펌린 애슬레틱(1960~1964)
하이버니언 FC(1964~1965)
스코틀랜드 대표팀(1965)
'''셀틱 FC(1965~1978)'''
리즈 유나이티드(1978)
스코틀랜드 대표팀(1978~1985)
''' 국가대표 '''
없음
1. 개요
2. 선수 경력
3. 감독 경력
3.1. 던펌린
3.2. 하이버니언
3.3. 셀틱
3.4. 리즈 유나이티드
3.5. 스코틀랜드 대표팀


1. 개요


영국(스코틀랜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유럽 최초 트레블을 이룩한 셀틱의 전설적인 감독. UEFA 유러피언 컵에서 셀틱 FC를 우승시키며 유럽에 알린 명장이며, 알렉스 퍼거슨의 스승이다.

2. 선수 경력


[image]
셀틱 선수 시절의 스타인.
1922년에 사우스 랭커셔 주 버뱅크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광산 밖에서 축구를 하는 걸 보고 축구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1937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카펫 공장에서 일하다 광산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그는 1940년에 고향팀 버뱅크 애슬레틱에 입단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격렬하게 반대하여 블랜타이어 빅토리아 유소년팀에 입단해 2년간 축구를 배우다 1942년, 20세의 나이로 앨비언 애슬레틱에 입단하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라 선수들이 군에 징집되는 와중에도 선수 생활을 계속하였고, 1943년에는 잠깐 던디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다고 한다.
전쟁 이후인 1947/48 시즌에 팀을 1부 리그로 올리는 수완을 보였지만 한 시즌만에 팀은 2부 리그로 강등당했고, 이후 스타인은 1950년에 웨일스의 아마추어 팀인 래넬리 타운[2]에 입단하여 12파운드의 주급을 받으며 뛰다가 1951년에 셀틱으로 이적하여 1952년에는 공동 주장까지 맡았으나 션 펠론 주장이 무릎부상을 당하자 주장직을 맡아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내고 1957년에 은퇴했다.

3. 감독 경력


'''팬이 없는 축구는 아무것도 아니다.(Football is nothing without fans.)'''


3.1. 던펌린


[image]
은퇴 이후 셀틱의 리저브팀 감독으로써 빌리 맥닐, 바비 머독, 존 클락 등 셀틱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들을 육성했고, 이후 1960년에 던펌린 애슬레틱의 감독으로 본격적인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던펌린 애슬레틱은 스타인이 오기 전만 해도 4개월이라는긴 세월 동안 승리를 한 번도 거두지 못하고 있는 팀이었고, 28경기 동안 74골을 실점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팀은 스타인이 감독으로 오자 모든 것이 바뀌었고, 처음으로 자신의 친정팀이자 스코틀랜드의 최강자인 셀틱과의 경기를 3-2로 승리하더니 거침없는 6경기 연승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후 스타인은 본격적으로 최악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던펌린을 자신만의 팀으로 리빌딩하기 시작했고, 레스터 시티에서 잔뼈가 굵은 수비수 윌리 커닝엄(훗날 그는 스타인 감독의 뒤를 잇게 된다.)과 라이트 윙어인 토미 맥도날드와 계약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만의 색깔로 팀을 리빌딩하는데 성공한 스타인은 한때 4개월 동안 승리가 없었던 던펌린을 1961년 스코티쉬 컵 우승의 자리까지 이끌게 된다. 그것도 결승에서 셀틱을 꺾은 후에 말이다. 이 승리는 스타인이 죽기 전에 감독 생활 중 최고의 순간이라 회고했고 이 성공으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하이버니언 FC와 잉글랜드의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구애를 건넸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던펌린에 남아 1961/62 시즌에 팀을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에 진출시켜 8강까지 이끌어 꽤 선전했다. 이때 팀은 리그에서 4위를 기록하여 1962년에는 인터-시티 페어스컵에 출전시켜 플레이오프전까지 진출시키는 등 짧지만 꽤 굵은 감독 시절을 보냈다.

3.2. 하이버니언


1963/64 시즌 막바지에 영웅 대접을 받고 하이버니언으로 옮긴 스타인 감독은 62%의 어마어마한 승률과 함께 썸머 컵을 우승하게 된다. 그러나 리그에서는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1965년 1월에 팀을 떠난다.

3.3. 셀틱


[image]
1964/65 시즌 막바지인 1965년 3월에 스승인 지미 맥글로리 감독이 20년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친정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지미 존스톤, 빌리 맥닐, 바비 머독, 존 클락, 존 휴즈, 토미 제멜, 스티비 찰머스, 바비 레녹스를 중심으로 한 스쿼드를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아 1965년 스코티시 컵 우승을 시작으로 그가 정식 감독이 된 1965/66 시즌에 리그 우승을 일궈내더니, 그와 동시에 스코티시 리그 컵까지 단숨에 들어 올렸다. 첫 시즌부터 폭풍 같은 2관왕을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조크 스타인의 셀틱이 진정한 절정으로 다다랐을때는 그의 2번째 시즌인 1966-67 시즌이었다. ​
그의 두번째 시즌인 1966/67 시즌은 셀틱의 역사적인 시즌이자 모든 축구계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스타인의 셀틱은 리그 우승, 스코티시 컵 우승, 스코티시 리그 컵 우승까지 가더니 UEFA 유러피언 컵까지 모두 우승하며 축구 역사상 '''첫번째 트레블'''을 달성한 것이다.
특히나 그들은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서 극강의 빗장수비 카테나치오를 펼쳤던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 체제의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그 첫 번째 원동력에는 스타인 감독의 기강 유지가 있었다. 실제로 당시 유로피언 컵 결승전 전날, 인테르 선수들은 긴장해서 3-4시간 밖에 자지 못하거나 하루 종일 먹은 것을 게워내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었는데, 이와 반대로 스타인의 셀틱은 긴장을 푸는 것을 강조하며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인테르를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원동력에는 스타인 감독의 전술이 있었다. 스타인은 에레라의 인테르가 대인 방어를 강조한다는 것을 알고 4-2-4 포메이션을 기용해냈는데, 이러한 스타인의 4-2-4에서는 최전방 두 명의 스트라이커가 보다 낮은 위치로 내려오는 것, 양 쪽 측면 윙어가 중앙 쪽으로 좁혀 주는 것, 그리고 그 사이드 공간을 양쪽 윙백의 활발한 오버래핑으로 메워주는 것을 강조했다. ​
이것은 결국 대인 방어를 강조하는 에레라의 전술을 상대로 수비수들을 끌어오는 효과를 가져다줬고, 스타인의 셀틱은 전반 7분에 인테르의 산드로 마촐라에게 페널티킥 골을 허용하며 따라가는듯 했으나 활발한 오버래핑을 주문했던 윙백 제멜과 스트라이커 찰머스의 연이은 후반전 골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것도 40번이 넘는 어마어마한 슈팅 숫자를 기록하며 말이다. ​
이뿐만 아니라 스타인이 유러피언컵 우승으로 이끈 셀틱 선수들의 출생지는 모두 홈구장인 셀틱 파크 반경 30km 안이었다. 이것은 모두 고향 출신 유소년팀 자체 육성 선수들로만 이뤄낸 우승이며, 결국 이러한 셀틱의 전설적인 5관왕은 스코틀랜드 축구계에도 큰 기여를 했다는 뜻이 되었다. ​
​엘레니오 에레라의 인테르를 상대로, 40개가 넘는 슈팅수를 기록하며 거둔 2-1 승리는 당연하게도 60년대 축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셀틱과의 충격적인 유러피언 컵 결승전 이후 카테나치오 전술의 약점과 조건 등이 확연하게 들어나기 시작했고, 그 다음 시즌인 1967-68 시즌 인테르는 세리에 A를 5위로 마감하면서 클럽의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됐다.
한편 스타인의 셀틱은 괴물 같았다. 1967년에 전설적인 5관왕을 달성하며 전 세계에 스코틀랜드 챔피언의 위용을 과시하더니, 그들의 우승 행진은 1969년부터 데뷔한 선수 케니 달글리시가 활약했던 1974년까지 끊이지 않았다. 1965-66시즌 부터 1973-74시즌 까지. 무려 9년 동안 스코틀랜드 리그를 연속으로 우승하며 셀틱을 완벽한 명문 클럽으로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리그 컵은 1956-66시즌 부터 1969-70시즌까지. 무려 5년 연속으로 제패하며 셀틱을 완벽한 최강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1970년 6월자 서훈명단(1970 Birthday Honours)에 올라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다.관보링크
이리하여 1978년 퇴임 때까지 조크 스타인은 20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셀틱에 부임하며 총 25번의 우승을 일궈낸 감독이 됐다. 이 기간 동안 스타인은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의 감독 자리에 떠오를 수 있었고, 현재도 셀틱 팬들은 이를 존경하고 있다.

3.4. 리즈 유나이티드


[image]
셀틱에서의 명성을 토대로 1978년에 서서히 전성기가 멀어져가던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아 처음으로 잉글랜드에서 감독 생활을 했으나 성적이 부진하여 얼마 못 가 쫓겨났다.

3.5. 스코틀랜드 대표팀


[image]
퍼거슨 수석코치와 함께.
셑틱 감독 시절인 1965년에 스코틀랜드 국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유럽 예선 8조에 편성되어 출전하여 이탈리아와 1승 1패로 동률을 이뤘으나 같은 조에 편성된 폴란드에게 홈에서 패하는 바람에 역시 탈락했다. 이후 스타인 감독은 셀틱 감독에 전념하기 위해 국대 감독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1978년에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마침 물러난 스타인은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의 요청을 받고 고향인 스코틀랜드 국대의 감독으로 또다시 부임하여 당시 애버딘 FC의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을 코치직에 발탁한다.
[image]
그러나 그는 스코틀랜드 국대에서 셀틱 때와 같은 임팩트는 보여주지 못했는데, 유로 1980 예선에서 벨기에에게 본선 진출이 막혔지만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선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진출에 성공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들은 6조에 배정받게 된다. 그곳에는 지쿠, 소크라테스, 세레조, 팔카오라는 '황금의 4중주'가 자리 잡고 있는 브라질과 60~70년대의 강자였던 소련, 그리고 뉴질랜드가 스코틀랜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잘 싸웠다. 자신의 애제자 케니 달글리시그레이엄 수네스를 앞세운 그들은 뉴질랜드를 상대로 5-2 대승을 거두며 기분 좋게 흘러가는듯 했으나, 황금의 4중주를 앞세운 브라질에게 4-1 대패, 그러나 소련에게 2-2 무승부를 거두며 승점 3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당시에는 승리시 승점 2점) ​
하지만 브라질의 4-1대패가 너무 컸던 탓일까, 스코틀랜드는 같은 승점 3점을 확보한 소련에게 골 득실 차이로 밀려 조3위로 탈락하며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스타인의 스코틀랜드 감독 생활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다음 멕시코 월드컵을 준비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감독 자리를 쭉 이어갔다.

사망 3일전 BBC 그랜드스탠드에서 스코틀랜드-웨일스 전 예비 분석에 출연할 당시의 영상. 왼쪽 위가 마이크 잉글랜드 당시 웨일스 감독이고, 아랫쪽 두 분이 바비 롭슨 잉글랜드 국대 감독과 빌리 빙엄 북아일랜드 국대 감독이다.
[image]
사망 당일 스타인 감독과 퍼거슨 코치.
당시 1985년에 열린 1986 멕시코 월드컵 최종예선전에서 스페인에게 참패를 당한 스코틀랜드 대표팀은 스페인과의 일전에서 패배한 후 최종전을 맞게 되었다. 상대는 스코틀랜드의 라이벌인 웨일스. 여기서 스코틀랜드는 이길 경우 본선 진출. 비길 경우 호주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문제는 패배하면 본선조차 못 나가는데, 예선 기간 내내 조크 스타인과 수석 코치 알렉스 퍼거슨은 영연방 국가의 특수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앨런 한센은 웨일스의 마크 휴즈와 이언 러쉬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길 꺼려했는데, 이유는 그가 리버풀의 팀 동료였던 것이었다.
이런 저런 어려움 속에서 마지막 경기는 시작이 되었는데, 전반전에 왼쪽 사이드로 올라온 크로스를 웨일스의 휴즈가 논스톱 슈팅하여 선제득점을 올렸고, 그 다음엔 무승부라도 거둬야 본선에 갈 수 있었는데, 이 당시를 퍼거슨이 회고하길,

"후반전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아내는 경기를 TV로 시청하고 있었는데, 카메라에 잡힌 내 모습에 대경실색했다고 나중에 이야기했다. 자칫 심장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나보다 자크가 더 심각했다.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고,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

조크 스타인 감독은 평소에 심혈관계 질환이 있어 약을 복용했다고 합니다.

시간은 다 돼 가는데 골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분쯤 지나자, 조크는 힘없이 '만약 우리가 지더라도 품위를 지키자' 고 했다.

그가 나를 쳐다보면서 몇 번이고 강조한 그 말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여봐, 알렉스.' 그는 비장한 어조였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진다고 해도 자네가 선수들을 경기장 센터 서클로 데려가 팬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도록 해야 하네. 품위를 잃지 않도록. 다른 건 중요치 않아. 품위를 잃지 않도록 그렇게만 하게나.'”

(사실 이 글은 퍼거슨이 쓴 <알렉스 퍼거슨, 무한 인생경영(2007)>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지지 않았고, 경기종료 10분을 남겨두고 얻은 행운의 페널티킥을 데이비 쿠퍼가 성공시킨 것이다. 공은 골키퍼 장갑에 거의 들어왔다가 골대로 빠져 들어갔다. 이것이 웨일스에게 한 방 먹인 것이었다.
[image]
1985년 사망 당시 사진.

1985년 사망 당시 영상.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바로 스타인 감독이 심판의 프리킥 휘슬을 게임 종료를 알리는 휘슬로 오인하여 상대팀 감독인 마이크 잉글랜드와 악수를 나누러 갔다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그대로 주저앉아 쓰러진 것이었다. 결국 스타인 감독은 의무실로 옮겨졌으나 얼마 못가 숨을 거두었다. 향년 62세.
갑작스러운 큰 사고로 인해 전 세계의 축구계는 혼란에 빠졌고, 멕시코 월드컵을 바로 앞둔 스코틀랜드 대표팀에게도 큰 혼란이 왔다. 결국 수석 코치였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그 자리를 메웠고 플레이오프에서 호주를 이겨 본선에 진출하였지만 퍼거슨의 스코틀랜드는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덴마크와 서독, 우루과이에게 1승도 거두지 못하며 0승 1무 2패로 탈락하게 된다.
[1] 그의 선수시절 기준으로는 '센터하프'[2] 현재 웨일스 프리미어 리그 2부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