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쿠

 



지쿠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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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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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C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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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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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1977 · 1981 · 1982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982

베스트팀




<color=#373a3c> 1976 Rey del Fútbol de América
수상
엘리아스 피게로아
2위
지쿠
3위
호베르투 히벨리누
<color=#373a3c> 1980 Rey del Fútbol de América
수상
디에고 마라도나
2위
지쿠
3위
왈데마르 빅토리노

Player of the Year 1984
수상
미셸 플라티니

2위
이언 러시

3위
지쿠

Player of the Year 1983
수상
호베르투 파우캉

2위
지쿠

3위
미셸 플라티니

鹿島アントラーズ
이름
지쿠
Zico
본명
아르투르 안투니스 코임브라
Arthur Antunes Coimbra
출생
1953년 3월 3일 (71세)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주 리우데자네이루시
국적
브라질
신체
172cm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1]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b9193f> 선수
CR 플라멩구 (1960~1972 / 유스)
CR 플라멩구 (1971~1983)
우디네세 칼초 (1983~1985)
CR 플라멩구 (1985~1989)
가시마 앤틀러스 (1991~1994)
감독
가시마 앤틀러스 (1999)
CFZ (2000~2002)
일본 대표팀 (2002~2006)
페네르바흐체 SK (2006~2008)
FC 분요드코르 (2008)
PFC CSKA 모스크바 (2009)
올림피아코스 FC (2009~2010)
이라크 대표팀 (2011~2012)
알가라파 SC (2013~2014)
FC 고아 (2014~2016)
기타
가시마 앤틀러스 (2018~ / 기술고문)
국가대표
71경기 48골 (브라질 / 1976~1986)
AFC 아시안컵 우승 감독
트루시에(2000)(2004)비에이라(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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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하얀 펠레
SNS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감독 경력
5. 기록
5.1. 대회 기록
5.1.1. 선수
5.1.2. 감독
5.2. 개인 수상
6.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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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4년부터 2016년까지 FC 코아 감독을 맡았고, 2018년부터 가시마 앤틀러스 기술고문을 맡고 있다.
본명은 아르투르 안투네스 코임브라(Arthur Antunes Coimbra). 지쿠(Zico)는 '말라깽이'란 뜻이다.[2] 국내에서는 '지코'로 불렸다. 축구팬들 사이에선 '하얀 펠레 지코'로 유명하다[3].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세계 축구계를 빛낸 선수이다. 특히 CR 플라멩구에서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뿜어내며 활약했다. 엘리아스 피게로아, 카를로스 테베스와 함께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상 최다 수상자(3회 수상)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지쿠는 1971년 CR 플라멩구에 데뷔하여 리우데자네이루 주립 리그에서 우승하면서 플라멩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74년 브라질 전국 리그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면서 다음 시즌에는 리그에서 30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플라멩구는 명실상부 브라질 최강의 팀 중 하나로 바뀌었고 1979년에는 무려 89골을 넣었다.
1980년에는 전국 리그 결승전 2차전에서 클루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를 상대로 1골 1도움을 넣으며 2경기 모두 승리로 이끌어 지쿠는 전국리그 트로피를 차지한다. 기세를 몰아 1981년에는 11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제패한다.
이후 리버풀 FC와의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지쿠는 3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상대를 3:0으로 대파하고 MVP를 차지한다. 당시 명실상부한 유럽축구 최강의 팀이자 간간히 역대 최강의 팀으로도 뽑히는 그 붉은 제국 시절의 최전성기 리버풀을, 말 그대로 원맨쇼를 펼치며 초전박살을 내버린 것이다. 충격과 공포.
이후 1983년 이미 30대에 접어든 지쿠는 당시 세리에 A의 중위권 팀이었던 우디네세 칼초로 이적한다. 사실 지쿠 정도 되는 동세대 세계 최고의 선수가 밀란이나 유벤투스 정도 되는 명문 클럽도 아니고 군소 클럽에 가까웠던 우디네세로 이적한 것은 그가 하락세로 접어들 나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우디네세가 지쿠를 영입하기 위해 돈이란 돈은 남김 없이 털어버린것도 모자라 시민들마저 모금운동까지 했다는(...) 흠좀무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렇게 세리에 A로 이적한 첫 시즌에 지쿠는 프랑코 카우시오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많은 골을 넣어 미셸 플라티니에 이어 득점 2위를 차지하는 등 기대에 걸맞는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 다만 그 이후로 부상으로 신음하면서 좋은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이후 1989년 CR 플라멩구에서 선수생활을 정리한 뒤 199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미토모 금속공업' 팀에 들어간다. 이 팀은 J리그가 출범하면서 가시마 앤틀러스가 된다.
지쿠는 J리그 출범에 깊이 관여했을 뿐더러 선수로서도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 일본 팬들의 지지를 얻는다. 1994년 가시마 앤틀러스를 마지막 팀으로, 지쿠는 현역 프로생활에서 은퇴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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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1982년 스페인 월드컵,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했다. 하지만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1978년엔 무패 3위라는 성적표[4][5]를 받기도 했다.
특히 1982년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지쿠 - 소크라치스, 호베르투 파우캉[6] - 토니뉴 세레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황금의 사중주로 명성을 떨쳤다. 지금도 최강팀 떡밥에서 빠지지 않고 이름을 내민다.[7]

1982년 브라질의 월드컵 행보를 요약한 동영상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 3:1로 승리를 거뒀으며, 그나마 아르헨티나의 1골도 종료 1분 전에 들어간 것이었다. 멘붕한 마라도나는 종료 5분 전 브라질의 수비수 바티스타를 걷어차고 퇴장 당했다. 반면 지쿠는 이 경기에서 1골 1어시에 남은 득점 장면에서도 어시의 어시를 기록하는 등 3골 모두에 관여하며 MOM급 활약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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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 VS 젠틸레
하지만 그 후 이탈리아 전에서 지쿠는 클라우디오 젠틸레에게 막혔고 파올로 로시에게 해트트릭을 내주고 3:2로 역전패 당해 브라질이 탈락하면서 그 화려한 행보를 끝내고 말았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부상을 안고 출전해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팀은 오히려 1982년 대회보다 훨씬 안정적인 경기력으로 8강전까지 파죽지세로 진출했다. 8강전에서 플라티니프랑스와 만난 브라질은 카레카의 선제골을 앞세워 앞서나갔으나 플라티니에게 동점골을 허용해 1대1로 비긴 상황에서 후반전 극적으로 페널티 킥을 얻어내는데, 하필 이것을 지쿠가 실축하고 만다. 결국 브라질은 승부차기 끝에 패하고 말았고, 지쿠는 경기력과 더불어 패배의 원흉으로 몰려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 월드컵은 지쿠 입장에서는 커리어 막판 제대로 재를 뿌린 대회가 되고 말았다.

3. 플레이 스타일




나는 프리킥과 페널티 킥의 차이를 모르겠다.

역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축구 괴수들이 많다 못 해 넘처흐르는 브라질에서도 펠레 다음 반열로 평가받는 선수다.[8] 당시 남미 리그에서는 독보적인 실력과 인기를 자랑했으며 프랑스의 축구영웅 미셸 플라티니와 라이벌리를 형성했다.[9]
탁월한 개인기를 보유했으며 킥이 대단히 정교했다. 특히 수비벽을 살짝 넘겨 차는 프리킥의 정확도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득점 기록만 보면 포워드 같지만, 실제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10] 이는 동시대의 프랑스의 축구 영웅인 미셸 플라티니도 마찬가지이나 지쿠는 좀 더 단독으로 전진하는 플레이를 즐겼다. 플라티니도 뛰어난 테크니션이지만 지쿠는 굉장히 빠르고 민첩한데다가 테크닉이 굉장히 뛰어난 편이라 상대 선수 여럿을 가볍게 제칠 수 있는 수준의 드리블러이다.
경기를 읽는 눈이 예리할 뿐더러 '발에 레이더가 달렸다'는 찬사를 들을만큼 정교한 킥으로 수비 허점을 노리고 길고 짧은 패스를 자유자재로 뿌렸다. 특히 볼을 세워놓고 차는 킥은 명불허전으로, 팀에서 프리킥, 페널티 킥, 코너킥을 도맡아 차다시피 했다.
프리킥의 본좌로 꼽히는 주니뉴 페르남부카누"지쿠가 나보다 잘 찬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역대 프리킥 통산 골순위도 1위. 우디네세 칼초에서 뛰던 시절, 유벤투스 FC와의 경기에서는 프리킥을 차려는 지쿠를 견제하기 위해서 수비벽을 쌓은 유벤투스 선수들이 슬금슬금 앞으로 기어나오는 통에 심판의 제지로 인해 경기가 5분 가까이 지연되기도 했다는 소설같은 일화도 있다.[11]
프리킥 통산 골 수는 80여골이다. 프리킥 잘 찬다는 베컴이 통산 60골대인걸로 봐서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겠다.
국내에서는 프리킥 통산 골 수가 101골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국내에 퍼진 대부분 프리킥 골 기록의 출처는 자료 해당 포스트에서 비롯됐고 사실 이곳에 올라온 기록은 날조된 글들이 꽤 많다. 예를 들어 아순상이 프리킥으로 64골을 넣었다고 올라온 글에 64개중 29개의 프리킥을 베티스에서 넣었다고 했는데, 아순상이 베티스에서 넣은 모든 골 수가 29골이며 처음 101골이라고 주장했던 유저는 후에 101골은 잘못된 정보였고 80여골 정도라고 증거와 함께 다시 글을 남겼다. 자료
득점에 특별히 주력하던 미들라이커 유형의 선수가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팀의 빌드업을 후방에서부터 리드하던 지휘관 스타일의 선수였다. 이런 선수가 득점력도 역대 최고 수준이니, 레전드로 꼽지 않을 수가 없다.

4. 감독 경력


2002년 필립 트루시에 감독의 뒤를 이어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이후 2004년 AFC 아시안컵 우승을 맛보기도 했지만, 2006 FIFA 월드컵 독일 예선에서는 다소 고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2005년 동아시아 경기대회 당시에도 졸전을 펼치자 대한민국조 본프레레 감독과 일명 '감독 단두대 매치'를 벌이기도 했다(...).[12] 그 경기에서 승리한 후 정신을 차렸는지 팀을 재정비해 본선 진출을 달성하는데 성공했으나, 막상 월드컵 본선에서 일본 국가대표팀이 졸전 끝에 1무 2패로 광속 탈락하자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첫 경기에서 거스 히딩크호주에 역전패하였고, 모국과의 경기에서는 1-4로 패하는 굴욕을 당했다.[13][14]
이후 터키 쉬페르리그페네르바흐체 SK 감독을 맡았으며, 2007-08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PSV 에인트호번을 조 3위로 밀어내고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한 뒤 16강에서 세비야 FC를 꺾고 팀을 8강에 올려놓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감독으로서도 선수 못지않은 명성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으며,[15]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케빈 키건의 후임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감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 뒤 우즈베키스탄 프로페셔널 풋볼 리그의 FC 분요드코르,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PFC CSKA 모스크바를 맡았으나 각각 1년만에 경질되었으며, 2009년 수페르리가 엘라다올림피아코스 FC 감독을 맡아 2009-1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조 2위로 다시 한 번 챔피언스 리그 16강을 밟는 등 좋은 성적올 올렸다. 하지만 팬들은 지쿠의 팀 운영 방식이나 전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지쿠를 까대기 시작했으며, 구단도 이를 받아들여 결국 2년차에 팀의 지휘봉을 놓게 되었다.
이후 자국으로 돌아가 CR 플라멩구의 단장을 맡았으며, 2011년부터 이라크 축구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2014 FIFA 월드컵 3차 예선에서 A조에 소속되어 조 1위를 확정짓고 최종 예선에 올랐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최종 예선에서 자신이 감독을 맡았던 일본과 한 조가 되었다. 조추첨 이후 "일본을 꺾을 자신이 있다."고 인터뷰했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가 끝난 뒤 가시마 앤틀러스 기술 이사에 취임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1.1. 선수



5.1.2. 감독



5.2. 개인 수상



6. 이야깃거리


일본 국가대표팀에 부임한 뒤 한때 나카타 히데토시, 나카무라 슌스케, 오노 신지, 이나모토 준이치 등 당시 일본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선수로 MF를 꾸린 적이 있다. 이를 놓고 일본에선 '일본판 황금 4중주'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막상 경기에서 좌우 측면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끝내 포기했다. 생각을 해 보면, 수비형 미드필더를 주로 하는 나카타와 이나모토, 중앙에서 플레이메이커를 하는 오노와 나카무라를 뒀으니, 좌우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무래도 자신의 현역 시절 브라질 국대의 주 포메이션이었던 4-2-2-2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은데, 당시 브라질의 공격형 미드필더는 지쿠 본인과 소크라치스로 오노, 나카무라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선수들이었다.
J리그에서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는 젊은 선수가 있어 당장 선발해야 한다며 프로필을 알아봤는데, 한국 선수인 김근철[16]이었다.
한국 선수들의 강인한 인상이 남달라 보였는지, 일본대표팀 선수들에게 '한국 선수들처럼 뛰어야 한다'는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image]
오락실 축구게임 세이부 컵 축구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메인 모델이자 주장으로 등장한다. 1994년 슈퍼패미컴으로 나온 '지코 사커'에서도 감수 및 찬조출연을 담당했다. 게임 자체는 똥겜이다.
피파 시리즈에서도 클래식 레전드로 등장했었다. 오버롤은 91
일본에서는 초기 J리그를 상징하는 대형 스타이지만, 의외로 J리그 출범 전에는 지명도가 낮다 보니 이름과 관련한 안습한 일화도 있었다. 가시마의 전신 스미토모금속에서 지쿠를 데려왔다는 뉴스가 나오자, 지역 주민들이 '제철소에서 또 사고 (일본어 발음으로 '지코') 를 친 모양이구만' 하는 반응을 보였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소도시인 가시마의 프로팀 가시마 앤틀러스가 빠르게 명문으로 발돋움하면서 그런 일은 사라진다.
중국탁구 선수 장지커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1] 공격형 미드필더[2]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지쿠가 플라멩구 유스팀에 합격하면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을 때 150cm에 30kg이었기 때문이다. 기술은 출중했지만 이런 형편없는 피지컬로는 답이 안 나오니 결국 팀에서 육체 개조(...)를 시켰다고.[3] 이 별명은 토스탕부터 이어져내려온 별명이며, 카카가 그대로 이어받는다. 웨인 루니 역시 하얀 펠레라는 별명이 있었다[4] 이 무렵엔 토너먼트가 아닌, 16강 조별 리그 방식이었다. 결국 골득실에서 홈팀 아르헨티나에 밀려서 결승전에 오르지 못했는데, 지금도 승부조작 의혹이 끊이질 않는다. 현재 담합을 막기 위해 같은 조 마지막 경기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연다고 명시했지만, 이때는 이런 규칙이 없어서 아르헨티나가 브라질보다 나중에 경기를 치뤘다. 결과는 득실차 +3을 극복한 6-0 대승(...).[5] 이 국제대회 우승이 없는 커리어 때문에 호마리우에게 "지쿠가 뭘 우승한 적은 없잖아."라고 하였다. 물론 월드컵 우승이 없다고 해서 지쿠를 호마리우보다 낮게 평가하는 사람은 없다.[6] 지쿠와 마찬가지로 일본 국대 감독을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는 선수기도하다.[7] 축구 역사상으로 따져도 역대최강이라 불리는 1970년 브라질 국가대표팀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8] 보통 가린샤, 호나우두와 함께 펠레 다음 반열로 같이 묶이는 경우가 많다.[9]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이 두 선수가 맞대결을 펼친것은 1986 월드컵 8강전이 전부이며 그마저도 지쿠가 부상을 안고 무리하게 출전하면서 지쿠의 경기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당시 남미리그의 수준이 유럽리그와 비교해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과 둘의 포지션이나 플레이스타일이 비슷해서 발생한 현상으로 보인다.[10] 이 때문에 하얀 펠레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실 펠레는 전형적인 센터포워드라기보다는 파울로 디발라처럼 프리롤 세컨탑과 공격형 미드필더를 왔다갔다 하는 타입에 가깝다. 2020년 발롱도르를 시상하는 프랑스 풋볼에서 역대 베스트 11 후보를 뽑으면서 펠레의 포지션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하기도 했을 정도로 포워드와 공격형 미드필더 롤 사이에 있는 선수.[11] 출처는 베스트 일레븐.[12] 참고로 이 경기에서 패배한 본프레레 감독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마지막 기회를 얻었고, 결국 그 경기에서도 패배하자 어김없이 경질되었다.[13] 브라질은 이미 조 1위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1.5군으로 출전했다.[14] 의외로 전반 34분 선제골을 넣어 앞서갔으나 12분만에 호나우두한테 동점골, 후반 2분 주니뉴 페르남부카누한테 무회전 중거리슈팅으로 연달아 실점했다. 이날 호나우두는 자신의 월드컵 통산 13, 14호골 기록했다.[15] 이 당시에는 페네르바흐체 팬들 사이에서 '크랄 아르투르(Kral Arthur, 킹 아르투르라는 의미)'로 불렸다.[16] 이 친구도 소싯적에 축구팬들에게 유망주로 기대받았지만, 이른 나이에 J리그 간 선수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폭망했다. 그리고 K리그로 돌아와서 경남 FC대구 FC를 전전하다가 이후 태국 리그에서 뛰는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