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네이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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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Napier of Merchiston
존 네이피어 오브 머치스턴
1550년 2월 1일 ~ 1617년 4월 4일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로가리듬'''의 발명자로 유명하다. 네이피어의 뼈 혹은 네이피어의 막대라고 불리우는 계산 막대도 만들었다.
1550년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위치한 머치스턴 타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아치볼드 네이피어 경은 머치스턴의 7대 레어드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 존이 태어났을 때 겨우 16세였다. 네이피어의 집안은 전통적인 귀족 집안이기는 했으나 대단한 명문가였던 것은 아니고, 남작이나 준남작보다는 낮고 젠트리보다는 높은 정도의 집안으로 기사나 향사 정도에 대응하는 레어드(Laird)라는 스코틀랜드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 지주 계급으로 태어난 만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시기의 귀족 집안 자제들이 으레 그러했듯, 존 네이피어도 학교에 가지 않고 가정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13세가 되던 해에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에 진학하였고,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사망한다. 이 시기 존 네이피어는 신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요한묵시록에 열정을 쏟았다. 사실 그 시대의 대학이라는 게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했지만. 이 탓인지 훗날에는 시빌라의 신탁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언제 세계가 멸망하는 날이 올지 계산해 보기도 했다. 개신교 신자로서는 가톨릭 교회와 교황을 강경하게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이 무렵, 네이피어의 외삼촌이 존의 재능을 알아차렸는지 네이피어의 아버지 아치볼드 경에게 편지를 보내 '''부디 존을 제발 프랑스나 플랑드르에 있는 학교로 유학을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존 네이피어의 아버지는 그 부탁대로 아들을 유학 보냈고[1] , 이에 존 네이피어는 이때부터 약 8년 가량 대륙에서 공부를 한 후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듣고 21세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듬해인 1572년, 비슷한 수준의 귀족 집안의 딸인 엘리자베스 스털링과 결혼하고 1574년에는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얻어 스코틀랜드 서부의 가트니스에 성을 구입해 분가해 나간다. 첫 아내인 엘리자베스와는 두 아이를 두었으나, 그녀가 1579년에 2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아그네스 치스홀름과 재혼했다. 이 시기에 네이피어는 자기 영지에서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수력 프로펠러를 이용한 탄광의 배수 설비를 발명하거나 토지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소금을 사용하는 방법 같은 것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후 1594년, 그동안의 신학적 탐구의 결과를 집대성한 요한묵시록의 진상(A Plaine Discovery of the Whole Revelation of St. John)이라는 책을 낸다. 이 책에서 그는 아포칼립스가 17세기 후반에 도래할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이 책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네이피어 사후에도 계속 출간되어 21판까지 찍어내는 등 꽤 히트를 쳤으며, 무엇보다도 존 네이피어 본인이 이 책을 본인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았다.
네이피어가 살던 동네가 동네였던만큼, 다른 학자들과 교류하기보다는 혼자서 연구하는 성향이었는데, 바로 이 1590년대에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네이피어의 친구인 존 크레이그[2] 가 1589년에 덴마크에서 티코 브라헤를 만나, 브라헤가 삼각함수를 이용한 곱셈법을 보여준 것을 네이피어에게 알려주자 이에 자극을 받은 것. 이 시기에는 아직 로그법이 없었기 때문에 삼각함수를 이용한 곱셈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더 쉬우면서도 더 나은 계산법에 대한 생각이 이때부터 존 네이피어의 머릿속을 채우게 된다. 이에 1594년에 로그에 대한 개념을 세우고, 로그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후 약 20년간 로그를 향한 그의 탐구가 계속된다.'''
예순을 바라보던 1608년, 아버지의 사망에 따라 머치스턴 성과 작위를 상속받게 되어 제 8대 머치스턴의 레어드가 되고, 머치스턴 성으로 돌아가서 죽을 때까지 계속 그곳에서 살게 된다.
마침내 1614년, 20년 간의 근성과 그의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마침내 로그표를 완성해, 이를 로그의 개념과 구면삼각법 등에 대한 연구와 합쳐서 '''로그의 놀라운 규칙'''(Mirifici Logarithmorum Canonis Descriptio)이라는 책으로 정리해 (라틴어로) 발표한다. 다만 존 네이피어가 정리한 로그의 개념은 현대의 학생들이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다른 접근 방법을 따른다. 자세한 것은 로가리듬 참조.
네이피어의 발표는 대단한 찬양을 불러왔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이자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였던 헨리 브릭스는 1615년 직접 스코틀랜드까지 찾아와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이제는 누구나 쉽게 여기지만, 당신이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도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네이피어에 대한 존경의 뜻을 밝힘과 더불어 함께 로그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 존 네이피어는 이미 60대의 고령이었고, 통풍을 앓는 탓에 많이 쇠약해진 네이피어를 대신해 헨리 브릭스가 로그표의 계산을 이어받게 된다. 헨리 브릭스는 이듬해에도 그를 찾아왔고, 또 그 이듬해에도 찾아올 것을 약속하지만 이제 존 네이피어에게는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1617년 4월 4일, 결국 존 네이피어는 숨을 거두게 되지만, 헨리 브릭스와의 공동연구 덕분에 상용로그 등의 용법이 탄생하게 되었다. 네이피어의 사후에도 헨리 브릭스와 후대의 사람들이 존 네이피어의 업적을 계승해 발전시켜 나갔으며, 이후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시대에 비로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지수함수의 역함수로서의 로그의 개념이 정립되게 된다.
첫 번째 결혼에서는 두 명의 자녀를, 두 번째 결혼에서는 무려 열 명의 자녀를 얻었다. 첫 번째 부인인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아치볼드(1576~1645)가 존 네이피어의 작위를 상속받았는데, 이 아들이 정치적 재능이 있었는지 가문을 빛내는(?) 데에 성공한다.
아치볼드 네이피어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할 때 궁정 신사로서 함께 잉글랜드로 따라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대관식에도 참석했고, 존 네이피어 사후에는 제 9대 머치스턴의 레어드 작위를 물려받고 이후 스코틀랜드의 재무관, 대법관 등을 비롯한 중책을 역임했으며, 1627년에는 노바스코샤 준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또한 제1대 로드 네이피어(Lord Naiper)로 불리게 된다.[3][4] 존 네이피어에 대해 그가 남작이었다는 서술들이 제법 보이는데, 이는 그의 아들 대에서부터 그에 해당하는 작위를 창설하여 세습하게 된 것을 오해했거나 Laird의 번역을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에 맞추려다 오역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담으로, 이후 네이피어 가문은 존 네이피어의 증손자이자 제3대 로드 네이피어인 아치볼드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함에 따라, 존 네이피어의 증손녀인 마가렛에게 이어진다. 이 때 부계 계승이 단절되어, 마가렛의 외손자인 프랜시스 스콧이 성을 네이피어로 바꾸고 네이피어 가문을 이었다. 그 고손자가 19세기 후반에 인도 제국 총독을 지내는 프랜시스 네이피어이며, 이 때부터는 스코틀랜드의 귀족 가문에 더하여 영국의 남작(baron) 가문이 되었다.[5]
오늘날 존 네이피어가 태어난 장소이자 말년을 보냈던 머치스턴 성은 그의 이름을 딴 대학교의 교정 안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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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Napier of Merchiston
존 네이피어 오브 머치스턴
1550년 2월 1일 ~ 1617년 4월 4일
1. 개요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로가리듬'''의 발명자로 유명하다. 네이피어의 뼈 혹은 네이피어의 막대라고 불리우는 계산 막대도 만들었다.
2. 생애
1550년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위치한 머치스턴 타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아치볼드 네이피어 경은 머치스턴의 7대 레어드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 존이 태어났을 때 겨우 16세였다. 네이피어의 집안은 전통적인 귀족 집안이기는 했으나 대단한 명문가였던 것은 아니고, 남작이나 준남작보다는 낮고 젠트리보다는 높은 정도의 집안으로 기사나 향사 정도에 대응하는 레어드(Laird)라는 스코틀랜드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 지주 계급으로 태어난 만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시기의 귀족 집안 자제들이 으레 그러했듯, 존 네이피어도 학교에 가지 않고 가정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13세가 되던 해에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에 진학하였고,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사망한다. 이 시기 존 네이피어는 신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요한묵시록에 열정을 쏟았다. 사실 그 시대의 대학이라는 게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했지만. 이 탓인지 훗날에는 시빌라의 신탁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언제 세계가 멸망하는 날이 올지 계산해 보기도 했다. 개신교 신자로서는 가톨릭 교회와 교황을 강경하게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이 무렵, 네이피어의 외삼촌이 존의 재능을 알아차렸는지 네이피어의 아버지 아치볼드 경에게 편지를 보내 '''부디 존을 제발 프랑스나 플랑드르에 있는 학교로 유학을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존 네이피어의 아버지는 그 부탁대로 아들을 유학 보냈고[1] , 이에 존 네이피어는 이때부터 약 8년 가량 대륙에서 공부를 한 후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듣고 21세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듬해인 1572년, 비슷한 수준의 귀족 집안의 딸인 엘리자베스 스털링과 결혼하고 1574년에는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얻어 스코틀랜드 서부의 가트니스에 성을 구입해 분가해 나간다. 첫 아내인 엘리자베스와는 두 아이를 두었으나, 그녀가 1579년에 2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아그네스 치스홀름과 재혼했다. 이 시기에 네이피어는 자기 영지에서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수력 프로펠러를 이용한 탄광의 배수 설비를 발명하거나 토지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소금을 사용하는 방법 같은 것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후 1594년, 그동안의 신학적 탐구의 결과를 집대성한 요한묵시록의 진상(A Plaine Discovery of the Whole Revelation of St. John)이라는 책을 낸다. 이 책에서 그는 아포칼립스가 17세기 후반에 도래할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이 책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네이피어 사후에도 계속 출간되어 21판까지 찍어내는 등 꽤 히트를 쳤으며, 무엇보다도 존 네이피어 본인이 이 책을 본인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았다.
네이피어가 살던 동네가 동네였던만큼, 다른 학자들과 교류하기보다는 혼자서 연구하는 성향이었는데, 바로 이 1590년대에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네이피어의 친구인 존 크레이그[2] 가 1589년에 덴마크에서 티코 브라헤를 만나, 브라헤가 삼각함수를 이용한 곱셈법을 보여준 것을 네이피어에게 알려주자 이에 자극을 받은 것. 이 시기에는 아직 로그법이 없었기 때문에 삼각함수를 이용한 곱셈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더 쉬우면서도 더 나은 계산법에 대한 생각이 이때부터 존 네이피어의 머릿속을 채우게 된다. 이에 1594년에 로그에 대한 개념을 세우고, 로그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후 약 20년간 로그를 향한 그의 탐구가 계속된다.'''
예순을 바라보던 1608년, 아버지의 사망에 따라 머치스턴 성과 작위를 상속받게 되어 제 8대 머치스턴의 레어드가 되고, 머치스턴 성으로 돌아가서 죽을 때까지 계속 그곳에서 살게 된다.
마침내 1614년, 20년 간의 근성과 그의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마침내 로그표를 완성해, 이를 로그의 개념과 구면삼각법 등에 대한 연구와 합쳐서 '''로그의 놀라운 규칙'''(Mirifici Logarithmorum Canonis Descriptio)이라는 책으로 정리해 (라틴어로) 발표한다. 다만 존 네이피어가 정리한 로그의 개념은 현대의 학생들이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다른 접근 방법을 따른다. 자세한 것은 로가리듬 참조.
네이피어의 발표는 대단한 찬양을 불러왔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이자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였던 헨리 브릭스는 1615년 직접 스코틀랜드까지 찾아와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이제는 누구나 쉽게 여기지만, 당신이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도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네이피어에 대한 존경의 뜻을 밝힘과 더불어 함께 로그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 존 네이피어는 이미 60대의 고령이었고, 통풍을 앓는 탓에 많이 쇠약해진 네이피어를 대신해 헨리 브릭스가 로그표의 계산을 이어받게 된다. 헨리 브릭스는 이듬해에도 그를 찾아왔고, 또 그 이듬해에도 찾아올 것을 약속하지만 이제 존 네이피어에게는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1617년 4월 4일, 결국 존 네이피어는 숨을 거두게 되지만, 헨리 브릭스와의 공동연구 덕분에 상용로그 등의 용법이 탄생하게 되었다. 네이피어의 사후에도 헨리 브릭스와 후대의 사람들이 존 네이피어의 업적을 계승해 발전시켜 나갔으며, 이후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시대에 비로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지수함수의 역함수로서의 로그의 개념이 정립되게 된다.
3. 기타
첫 번째 결혼에서는 두 명의 자녀를, 두 번째 결혼에서는 무려 열 명의 자녀를 얻었다. 첫 번째 부인인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아치볼드(1576~1645)가 존 네이피어의 작위를 상속받았는데, 이 아들이 정치적 재능이 있었는지 가문을 빛내는(?) 데에 성공한다.
아치볼드 네이피어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할 때 궁정 신사로서 함께 잉글랜드로 따라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대관식에도 참석했고, 존 네이피어 사후에는 제 9대 머치스턴의 레어드 작위를 물려받고 이후 스코틀랜드의 재무관, 대법관 등을 비롯한 중책을 역임했으며, 1627년에는 노바스코샤 준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또한 제1대 로드 네이피어(Lord Naiper)로 불리게 된다.[3][4] 존 네이피어에 대해 그가 남작이었다는 서술들이 제법 보이는데, 이는 그의 아들 대에서부터 그에 해당하는 작위를 창설하여 세습하게 된 것을 오해했거나 Laird의 번역을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에 맞추려다 오역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담으로, 이후 네이피어 가문은 존 네이피어의 증손자이자 제3대 로드 네이피어인 아치볼드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함에 따라, 존 네이피어의 증손녀인 마가렛에게 이어진다. 이 때 부계 계승이 단절되어, 마가렛의 외손자인 프랜시스 스콧이 성을 네이피어로 바꾸고 네이피어 가문을 이었다. 그 고손자가 19세기 후반에 인도 제국 총독을 지내는 프랜시스 네이피어이며, 이 때부터는 스코틀랜드의 귀족 가문에 더하여 영국의 남작(baron) 가문이 되었다.[5]
오늘날 존 네이피어가 태어난 장소이자 말년을 보냈던 머치스턴 성은 그의 이름을 딴 대학교의 교정 안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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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를 당연히(...)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출신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프랑스로 건너간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2] 스코틀랜드의 의사이자 천문학자. 제임스 1세의 주치의이기도 했다.[3] 존 네이피어의 대까지는 Sir로 불리던 호칭이 아치볼드 네이피어의 대에 이르러 Lord로 격이 올라갔다. 또한, 스코틀랜드에서 Lord는 남작에 해당하는 호칭이라고 한다. 덧붙여 노바스코샤 준남작 작위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쳐질 때 폐지된다.[4] 덕분에 찰스 1세의 시대에도 그와 그의 아들은 왕당파로서 왕에 대한 충성을 바치는데, 이 탓에 70세가 넘은 말년에 고생을 좀 하게 된다.[5] Lord of Naiper는 (스코틀랜드-잉글랜드 통합 이전부터 내려오는) 스코틀랜드에 속한 작위이며, Baron of Ettrick은 연합왕국에 속한 작위이다. Baron의 격에 있어서도 스코틀랜드에서의 그것과 연합왕국에서의 그것은 차이가 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Baron은 귀족이긴 하나 매매가 가능한 것이라서 Lord보다 그 격이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