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등작

 


1. 개요
2. 중국의 오등작
3. 유럽의 작위
4. 한국의 오등작
4.1. 고조선·부여 ~ 남북국시대
4.2. 고려 왕조
4.2.1. 신하의 오등작
4.2.2. 왕족의 삼등작
4.2.3. 오등봉작제의 특징
4.3. 조선 ~ 대한제국
5. 일본의 오등작
6. 애매한 예
7. 관련 문서


1. 개요


오등작(五等爵)은 뛰어난 공을 세운 신하에게 주어지는 5등급으로 나누어진 작위를 말한다. 이 용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고대 중국주나라 제도에서 유래한 제도이고, 둘째는 서양의 작위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역어이다.
우리가 아는 공후백자남의 구분은 중국 주나라의 작위 구분에서 다섯 등급을 사용한 것을 직대입해 번역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나라 시대에도 깔끔하게 나누어진 '오등작'은 쓰이지 않았다. 주나라 당시의 갑골문과 금문을 분석한 결과는 상당히 복잡한데, 일단 공후백자남이 있기는 하나 그 모두가 귀족의 작위는 아니었다.
한국 왕조의 경우 고조선부터 조선 초기까지 오등작 제도를 사용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 즈음부터는 제후의 봉작제인 군 칭호만 사용하게 됐고 시호에만 공 칭호를 썼다.[1] 이후 대한제국 때 다시 사용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에서는 교토 조정의 귀족, 유력 다이묘, '유신지사'들을 중심으로 화족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오등작 제도를 도입했고, 한일합방 이후 조선 왕족과 고위 친일파에게 수여된 왕공족, 조선귀족도 오등작 제도를 사용했있다.

2. 중국의 오등작


중국 역사에서 진나라 이전에는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은 없었다.
주나라 시절, 주의 귀족들이 주나라 왕에게 나라의 이름을 부여받거나 하는 식으로 변경으로 퍼져 나가면서 중국의 지방국가들이 시작된다. 즉 주나라 왕(천자)은 천하를 다스리되 중앙(중국) 주변의 각 나라는 제후가 다스린다는 개념. 당시에는 최상위 군주를 황제라 부르지 않았고 왕이라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격이 낮은 지방국가가 왕이라고 될 수는 없었다.
이 지방국가의 우두머리를 후(侯)라고 불렀다. 이러한 많은 후(侯) 가운데 세력이 크고 뛰어난 자는 공(公)으로 불렸다. 후(侯)의 지배에 속하는 작은 도시나 마을의 우두머리는 백(伯)이나 숙(叔)이라고 불렸다. 그 아래의 '일반인'에게 남(男)이나 자(子)등으로 불렀다. 따라서 실제구조는 『공-후-백-자-남』으로 순서대로 가는 게 아니라 『(공/후)-(백/숙)-(자/남)』으로 된다.
이 『(왕-)공-후-백-자-남』의 작위는 원칙적으로 온 천하에서 통용되는 것이라 천자만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말이 천하일 뿐 실제로는 지구 전체가 아니라 천자를 칭하는 군주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 중화사상에 따르면 천자는 온 천하의 지존이고 나머지는 그 밑에 있게 되기 때문에 천하에서 통용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천하에서 통용된다'는 표현은 오등작을 설명한 《맹자》 만장 하편 2장에 주자가 단 주석에 나온다.
그러므로 주나라 때의 '국(國)'은 國은 현대적인 의미의 '나라'라는 뜻도 있지만 주나라 때는 제후국이나 주나라 왕의 직할통치 지역을 國이라고도 한 것이다. '국가(國家)'라는 말은 제후가 다스리는 國과 그 안에서 대부(大夫)가 다스리는 家를 함께 일컫는 말이었다.
이 '국' 안에서 통용되어 제후가 직접 내릴 수 있는 작위는 따로 있었다. 이 표현 또한 《맹자》 만장 하편 2장에 주자가 단 주석에 나온다. 《맹자》 만장 하편 2장에 간단히 정리가 돼 있는데 이 작위는 『군(君)-경(卿)-대부(大夫)-상사(上士)-중사(中士)-하사(下士)』[2]의 육등이라고 한다. 또한 맹자는 제자에게 이 5등급을 다소 다르게 설명했는데(《맹자》 만장 하편 2장), 제일 위에 천자(天子), 그 밑에 공, 그 밑에 후, 그 밑에 백을 두고, 그 밑에 자와 남을 한 등급으로 처리했다.
(군호)이라는 작위도 있었는데 오등작은 천자가 국(國: 제후의 봉토)의 우두머리에게 내리는 것인이지만, 군의 경우 가(家: '국'에 소속된 대부의 봉토)의 우두머리에게 내리는 작위 중 최고위이다.
한편 주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지역에 있는 수장은 폄하하여 자(子)라고 불렀다. 이를테면 '초자(楚子)'라는 칭호의 의미는 본래는 주나라가 초나라에 '자작'을 하사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주나라의 제후국들이 초나라를 멸시하여 초나라의 임금을 '초나라 놈' 정도로 부르고 있었던 멸칭에 불과했던 것이다. 항우를 남쪽 원숭이라고 부른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이는 초나라의 기원이 묘족이 만든 장강 이남 문명권이라서 황하를 기원으로 한 주나라와 전혀 별개의 기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오등작이란 것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여러 호칭들이 섞여 모이면서 자연 발생한 호칭 간의 서열관계인 것이다. 진나라 통일 이후에는 왕 위에 황제를 만들어서 (王)도 이 서열 사이에 끼어들어가서 황제 아래의 '육등작' 비슷한 것이 최종적으로 만들어진다. 왕작에 대해서는 작위로서의 왕 참고.
진나라에서는 이십등작을 사용했고 통일하면서 전국에서 이를 오등작 대신 사용했다. 전후 한나라 때도 유지됐는데 진나라 때와 달리 너무 사람들에게 이십등작을 퍼줘서 유명무실해졌고, 위나라부터 다시 주나라 시대 오등작제로 회귀한다.

3. 유럽의 작위


사실 유럽에서는 오등작이란 말 자체가 없다. 유럽과 중국의 공후백자남은 의미 연관성은 전혀 없으나,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때 유럽의 작위제도를 도입하면서 다섯 계급 구분이 얼추 맞아서 작위의 고하에 맞춰 대입시킨 것이다. 메이지 유신 무렵에는 이미 유럽도 작위가 명예직 외의 의미는 거의 소멸했기 때문에, 작위의 고하 정도는 따져도 유래나 의미를 따질 필요성은 적었기 때문이다.
위의 주나라의 오등작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작위들도 딱딱 처음부터 정해진 서열이 아니라, 800년~1000년 동안의 2세기 동안 지방의 호족들이 자칭하고 난립하던 칭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서열이 정해진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유럽의 작위 체계의 핵심은 둑스(DUX, 公.공작)-코메스(COMES, 伯.백작)-바론(BARON, 男.남작)의 3계급 체계라고 보면 된다. 자작으로 번역되는 viscount부터가 백작의 보좌직위이며, 후작으로 번역되는 마크그라프 역시 백작의 파생작위인 변경백이 유래다. 러시아 역시 크냐지(Князь. 公.공작)-그라프(Граф. 伯.백작)-바론(Барон. 男.남작)의 3계급 체계였다.
서양의 주된 작위의 기본적인 어원은 로마 제국 시대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늘날의 이탈리아 반도권의 지역에서 사용했던 명칭과 그 외 유럽 대륙 국가들의 작위 명칭이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는 중세 법률용어로서 유럽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던 라틴어 표기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표시는 불·독·이탈리아뿐만 아닌 유럽 대륙 전반에 걸쳐 쓰이는 칭호이며, 괄호 안은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표기이다.

설명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동유럽(정교회)
공작
왕족, 반독립적 세력[3]
duca(두카)
duke(듀크)
duc(뒤크)
Herzog(헤르초크)[4]


후작
변경주(국경)를 봉토로 하사받은 백작
marchese(마르케세)
marquess(마퀴스)[5]
*marquis(마르키)[6]
Markgraf(마르크그라프)[7][8]
Князь.(크냐지)[9]
Voivode(보이보드[10])
백작[11]
왕 혹은 공작에게 임명된 행정관, 지방 군사령관이나 대부분의 중앙귀족
conte[콘테]
earl[얼]/Count[카운트][12]
comte[콩트][13]
Graf/Conte[그라프/콘테][14]
Граф.(그라프)
boyar(보야르)
자작[15]
백작의 궁재(백작령의 총리)
visconte[비스콘테]
viscount[바이카운트][16]
vicomte[비콩트][17]
Vicomte[비콩트][18]


남작
자유영주, 전사, 후에 부르주아들도 받음
barone[바로네]
baron[배런][19]
baron[바롱][20]
Baron/Freiherr[바론/프라이헤어][21]
Барон.(바론. 男.남작)

이외에도 프린스(Prince; 영어권의 대공), 인판테(스페인의 왕손들), 대공(Grand Duke와 Archduke), 신성 로마 제국선제후, 변경백, 궁중백, 방백, 추기경, 대주교공, 주교공,[22] 성주(Castellan) 등이 있고 파고들수록 복잡해진다.
영국의 귀족제도에 대해서는 귀족/영국 문서를 참조.
또한 이들보다 위계가 낮은 세습적 지위로는 영국에서는 준남작, 대륙에서는 세습기사(프랑스의 쉬발리에, 독일/오스트리아의의 Ritter), 그리고 세습기사보다 위계가 낮은 기타 칭호(독일/오스트리아의 Edler나 이탈리아의 Nobile 등)가 있으나, 이들 칭호의 소유자는 귀족이 아니다.
작위 칭호 외에도 귀족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관습도 고려해야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귀족들의 이름에 Sir을 붙인다든가 하는 것. 여기서 유래된 것이 오늘날의 영어권 어휘 중 타인에게 격식을 갖추어 부를 때 사용하는 Sir이다. 오늘날에도 영국에선 기사 계급의 왕국민에겐 본명 앞에 Sir을 붙인 것이 법적인 정식 이름이 된다. 예를들어 페르마의 대정리를 증명한 앤드루 와일즈는 기사 작위를 받아 정식 이름이 앤드루 와일즈 경(Sir Andrew John Wiles)이 되었다.
남성 귀족의 배우자(부인, 夫人)와 정식으로 작위를 하사받은 여성 귀족 중에서도 기혼자인 부인(夫人)은 같은 호칭을 공유하는 성향이 있다.
  • 공작 부인 - duchess
  • 후작 부인 - marchioness
  • 백작 부인 - countess (earl은 여성형이 없는 관계로, 영국에서도 그냥 countess를 쓴다.)
  • 자작 부인 - viscountess
  • 남작 부인 - baroness
남성 귀족의 배우자 외에 여성이 작위를 가지는 경우, 즉 夫人일 때, 한국에서는 서양권의 여귀족들이나 서양권 문화를 바탕으로한 창작물에서 오등작 앞에 '여(女)'를 붙여서 번역 내지는 기술하거나 그대로 ~작 부인(夫人)이라 한다.
이는 사전의 용례로도 올라와 있는 것인데, 대부분의 오늘날의 국가들이 그렇지만 과거의 한국 역시 계급사회 기간 동안 여성이 관직을 가지고 전면에서 활동한 경우가 드물어 귀족 자체가 남성성을 강하게 띠는 계층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왕정의 사무직과 귀족이 동일시.
이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이다. 위 표에도 나와있는 프랑스의 후작 Marquis의 경우 여흔작은 Marquisees라 하는데, 이는 본래 Marquis에 여성명사인 esse를 접미어로 붙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다만 매우매우 드문 경우지만 여성이 작위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2세의 경우 랭커스터 공작이면서 동시에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의 배우자로 에든버러 공작부인이라 부르기 때문에, 작위명으로 Duke of Langcaster와 Duchess of Edinburgh를 같이 갖는다. 이는 작위를 받은 여성이 명백히 해당 가문 혹은 집안의 수장 내지는 대표자이며 동시에 소속된 가문/집안에서 주도적으로 의사표명을 하거나 의사결정권자일 경우에 해당한다.
단, 예시로 들은 엘리자베스 2세의 랭커스터 공작 작위의 경우 랭커스터 공작 가문은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가문이기에 근현대의 영국왕들은 랭커스터 공작 가문의 일원은 아니지만, 항상 랭커스터 공작이라는 칭호가 따라왔다. 장미전쟁은 튜더 가문이 끝맺어 왕들을 배출해내기 시작했고, 이 튜더 왕조는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였다. 덧붙여 영국왕의 자리는 튜더 왕조로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이후 스튜어트 왕조, 하노버 왕조 등 여러 차례 바뀌었다.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 같은 영국의 여왕을 duchess of Lancaster라 하지 않는 건 엘리자베스 2세가 랭커스터 공작 가문의 가장 높은 이(사람) 이기도 하지만 랭커스터 공작 가문의 夫人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어느 가문의 미망인이 그 가문의 가주이거나 대표자로 활동한다고 해도 여성형 명사로 불리지 남성형 명사로 부르는 경우는 굉장히 적다. 이 경우 만약 처녀적 가문의 대표자라면 가능하다. 또 희귀한 경우지만 가문의 멸문 혹은 멸족 후 재건을 하였을 때, 그 주체가 여성일 때도 초대 ~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혼 후 배우자의 가문 소속이 된 후에는 법적으론 배우자 가문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발언권을 낮게 보기 때문이다.

4. 한국의 오등작


우리나라에서 주나라식 오등작 제도를 사용한 나라는 왕작이 있던 고조선으로 보고 있고 이후 고구려, 신라, 백제, 발해가 부분적으로 오등작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삼국시대에는 우리나라가 중국의 봉작제가 들어오기 전 우리 식 봉작제가 있어 각자 자국의 언어로 봉작제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중국식 오등작, 우리식 봉작제가 섞여서 쓰였다.
중세 고려 왕조도 개국 초엔 전조들과 비슷했지만 중기에 들어 "오등봉작제"가 제창되면서 체계적으로 주나라식 오등작이 사용됐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섰고, 개국 초엔 고려처럼 오등작을 사용했지만 천자의 봉작제를 쓸 수 없다는 이유로 제후의 봉작제 군호를 사용하게 된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다시 오등작을 사용하게 됐다. 대한민국은 공화정으로서 봉작을 하지 않는다.
문서명이 "오등작"인 만큼 이 문서에선 공후백자남 오등작만 관해서 적고 군호, 우리식 봉작제는 각 문서에 적는다.

4.1. 고조선·부여 ~ 남북국시대


고조선은 후한서[23]에 따르면 군주를 왕으로 칭했고, "비왕(裨王)"이라는 왕작(王爵)을 가진 장(長)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부여는 그에 관한 자료가 너무 적어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없으나 우리식 봉작제만 사용한 듯하다.
고구려우리식 봉작제 외에 오등작인 왕작, 후작을 봉작한 기록이 있다.
신라는 초기에 갈문왕 제도가 있었고 제후왕(간?, 간지?)을 봉했으며 공작위가 있었다. 견훤, 왕건이 신라를 황옥(黃屋)이라 부르며 제후왕을 자처한 적 있다.
우리 측 사서에는 없으나 중국 측 사서인 송사, 위사에는 백제부여곤지, 목간나 같은 왕족 및 신하들을 왕(王)이나 공(公), 후(侯)로 봉작한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백제가 현재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을 사용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자세한 건 외왕내제 참조.
발해는 "허왕부(許王府)"라고 적혀 있는 금석문이 발견되어 왕작이 있었다고 추측한다. 문헌 상으론 공작, 자작, 남작이 보인다.
백제와 발해는 여러 작위가 일관성 있게 보이는 만큼 정석적(?)인 주나라식 오등작을 도입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두 나라의 봉작제도에 관한 자료가 전혀 없다.

4.2. 고려 왕조


고려는 초창기인 태조 ~ 목종 때까지 봉작 제도가 완전히 정비되지 못해서 '군호'나 '오등작'을 혼용하였고, '태자'라는 칭호를 작위처럼 내리는 등 굉장히 다양했다. 이후 문종 때 크게 다섯 등급의 작위를 정해 '오등봉작제'라는 제도를 만들어 신하와 왕족들에게 봉작하였다.

4.2.1. 신하의 오등작


고려 봉작제의 특징은 왕족과 신하들에게 내리는 작위가 서로 달랐다는 것인데 신하의 경우 여섯 가지로 나누어서 식읍을 주고 작위의 등급을 정했다.
공작
국공(國公)
정2품
식읍: 3,000호
군공(郡公)
종2품
식읍: 2,000호
후작
현후(縣侯)

식읍: 1,000호
백작
현백(縣伯)

식읍: 700호
자작
현자(縣子)
정5품
식읍: 500호
남작
현남(縣男)
종5품
식읍: 300호
작위의 풀 명칭은 "ㅇㅇ국(國) 개국(開國)ㅇ"이다. 봉분된 영지가 국가가 아닌 군현이라면 "ㅇㅇ군(현) 개국ㅇ"이 된다. 여기서 개국(開國)은 중국 서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일종의 찬양문구다. 제후로 봉작 됐다는 것은 천자의 인정을 받아 자신의 나라를 연 것(개국)이니까. 찬양문구는 개국뿐만 아니라 더 넣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성계의 "화령군 개국충의백(和寧郡 開國忠義伯)". 화령군은 봉지, 개국과 충의(忠義)는 칭찬문구, 백은 백작위를 뜻한다.
다른 사용 예시를 보면, 김부식은 "낙랑국 개국후(樂浪國 開國侯)" 작위를 받았다. 여기서 낙랑국(樂浪國)은 하사된 봉국, 개국(開國)은 으레 넣는 칭찬문구, 후(侯)는 후작위다.
명칭을 줄여 부를 땐 일반적으로 봉지명과 작위만 불렀다. 예를 들면 김부식의 작위를 줄여 부르면 "낙랑후(樂浪侯)"다. 봉분된 곳이 국가라면 국(國)을 생략하지 않고 부르기도 한다.
공과 후로 봉해진 신하는 "영공저하(令公底下)"로 불렸고 백으로 봉해진 자나 재신들은 "영공각하(令公閣下)" 혹은 "상국각하(相國閣下)"가 존칭이었다.[24]

4.2.2. 왕족의 삼등작


세분화된 신하(공신)의 경우와 다르게 왕족의 봉작제는 단순했다.
공작
공(公)
후작
후(侯)
백작
백(伯)
즉 삼등작밖에 없으며 왕자, 사위 등 친인척에게 봉작했다. 왕자의 경우 먼저 후(侯)나 백(伯)으로 봉작되었다가 나중에 공(公)으로 진작되는 게 관례였으며 이후 왕태자로 봉해진 왕자는 그가 지니던 관직이나 작위가 삭제되었다.
왕족의 작위 풀 명칭은 공신의 작위처럼 "ㅇㅇ국 개국ㅇ"로 부르지 않고 "ㅇㅇ공(후, 백)"으로 불렀다. 예를 들어 숙종의 "계림공(鷄林公)", 명종의 "익양공(翼陽公)", 영종의 "안경공(安慶公)" 등이 있다.
왕후와 태자비의 아버지에게는 후(侯)가 수여되었는데, 고려 왕실이 근친혼을 했기 때문에 실상은 그들만의 리그. 마찬가지로 공주의 남편인 부마, 그리고 장인 역시 백(伯)으로 봉해지거나 추봉했다.
고려에선 작위를 받은 왕족을 통틀어 "제왕(諸王)"이라 하였고 이들의 존칭은 "영공전하(令公殿下)"이다. 작위를 받은 왕족들은 황친(皇親), 천황(天潢)[25]의 가족, 천족(天族)이라 불렀다.[26]

4.2.3. 오등봉작제의 특징


고려의 오등봉작제는 유럽 봉건 영주의 작위처럼 진짜 영토를 나누고 독자성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공훈을 세운 신하를 치하하고 왕족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한 훈작이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는 주나라, 전한 이후 봉건제(군국제)가 다시 돌아온 적이 없다. 진 이후 모든 국가가 진을 본따 군현제를 사용해 권력이 중앙 정부로 집중됐고[27] 오등작은 일종의 명예직 형식으로 남은 것이다. 김부식이 진짜로 낙랑국의 지배자가 된 게 아니라 "널 그런 지위만큼 인정한다" 라는 뜻이다.
작위라는게 명예직이 된 만큼 땅을 봉해주는 게 아니라 공덕을 찬양하는 의미로 작위를 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고려 목종의 "양국공(讓國公)". 양나라의 공작이라는 게 아니라 "나라를 양보해준 공덕이 있는 공작" 이란 의미로 받은 것이다. 최치원, 설총에게 추증된 작위도 공훈 찬양의 의미이다.
국가를 봉지로 받은 사람은 사후 봉국명이 시호에 붙기도 한다. 예를 들면 "조선국 양헌왕(朝鮮國 襄憲王)". 이 사람의 생전 작위는 조선공(朝鮮公)인데 사후 양헌(襄憲)이란 시호를 받고 왕(王)으로 작위가 올라갔다. 조선의 "변한 소경공" 또한 같은 방식.[28]
고려의 작위는 수여받은 본인 당대에만 그치고 세습되지 않도록 했으나 그 아들이 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면 다시 작위를 받으므로 결과적으론 세습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사후 작위를 추증할 때 추증 받는 자의 아버지도 같은 작위를 추증해 작위 세습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9]
원칙적으론 작위의 세습이 불가하기에 같은 봉지를 받은 신하 및 왕족은 많다. 강감찬강민첨은 같은 지역에 봉해졌고 김부식최윤의도 같은 지역에 봉해졌다. 봉지를 이어가기 위해 편법을 쓰는 경우도 많았는데, 같은 지역을 명칭만 조금씩 바꾸어 분봉받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최충헌, 최이, 최항 삼부자는 각각 진강군, 진양군, 진평군에 봉해졌는데 세 곳 모두 진주시를 가리킨다.[30]
원 간섭기에 들어선 충렬왕 때 제후국이 쓸 수 없는 제도라는 명분으로 오등작을 폐지하고 군호가 도입되었다. 고려말 공민왕 때 반원 자주정책의 일환으로 문종의 관제를 부활시키면서 다시 오등작을 사용했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군호를 사용한다.

4.3. 조선 ~ 대한제국


조선 왕조도 개국 초엔 고려의 전례를 따라 개국공신들에게 공신들의 본관에 따라 작위를 수여했다. 그 예로 봉화 정씨인 개국공신 정도전의 작위가 봉화백, 이지란의 작위가 청해백이었다. 이후 태조 7년에는 친왕자는 공, 그 밖의 종친은 후, 정1품의 관직에 있는 고관은 백의 작위를 주었다.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2차 왕자의 난을 다룬 부분에서는 태종을 정안공으로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명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기존의 오등작 제도를 폐지하고 제후국의 예에 맞게 원간섭기와 같은 군호를 다시 도입했다. 예를 들어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오성이 사실 가 아닌 오성부원군이라는 작위명이다. 다만 예외사례가 하나 있는데 태종이 성녕대군이 죽자 매우 슬퍼하여 "변한 소경공(卞韓 昭頃公)"으로 추증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2년 1월 21일 기록엔 태조가 조선팔도의 명산에 오등작을 내린 기록이 있다.[31]
대한제국이 개창된 후에 오등작을 쓰게 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쓰지 않았다. 황자들은 대군 대신 친왕으로 봉하였지만, 공신들에겐 예전처럼 봉군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유일하게 고종 대 영돈녕사사였던 심순택이 청녕공, 즉 공작위로 봉작된 사례가 있을 뿐이다.

5. 일본의 오등작


일본은 헤이안 시대 이후 중국과의 직접 교류가 끊기면서 오등작 제도를 도입하지 않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유럽 귀족 제도를 모방해 그동안 귀족으로 대우받던 공가와 유력 다이묘, 개국공신이라 할수 있는 유신지사들을 대상으로 화족 제도를 창설하면서 1884년에 비로소 오등작 제도를 도입했다.

6. 애매한 예


  • 도교의 신들에겐 공(公)이나 백(伯)으로 호칭을 적지 않게 한다.
  • 고려 말기 공양왕 때 정몽주는 "익양군 충의군(益陽郡 忠義君)", 정도전은 "봉화군 충의군(奉火郡 忠義君)"이라는 영 애매한 군호를 받은 적이 있다. 군호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봉지와 공훈 찬양을 동시에 하려고 저렇게 한 듯 한데 이례적인 케이스. 두 사람 다 나중에 저 그대로 백작이 되니 상관 없긴하다.
  • 조선 왕조에 들어서 공양왕의 동생 왕우도 정몽주, 정도전 마냥 '마전군 귀의군(麻田郡 歸義君)'에 봉해졌다. 마전군을 봉지로 받고 칭호를 귀의로 받은 가신임 셈. 역시 이례적인 사례로 후 봉지가 삭제되고 공훈 찬양만 남아 귀의군이 된다.

7. 관련 문서



[1] 국왕이 사후에 황제처럼 묘호를 받고 왕비가 사후에 왕 시호를 받는 것과 같은 일종의 외왕내제 제도이다.[2] 현대의 군 부사관 계급 명칭인 상사, 중사, 하사는 바로 주 대의 작위 명칭에서 따온 셈이다. 《맹자》의 해당 장에서는 원사(元士)라는 말도 혼용되고 있는데 주자 주에 따르면 (지금의 군 계급과 달리) 상사와 같은 뜻이라고 한다.[3] 독일계를 제외한 타국의 경우엔 절대왕정시기에는 세력이 축소되어 아예 봉토를 국왕에게 바치고 국왕의 가신노릇을 하는 세력도 등장했다.[4] IPA: /ˈhɛʁˌt͡soːk/[5] IPA: /ˈmɑː.kwɪs/[6] IPA: /maʁ.ki/[7] IPA: /ˈmaʁkɡʀaːf/[8] 흔히 독일의 Markgraf는 변경백이라 번역한다. Mark(변경주) + Graf(백작).[9] 번역상으론 후작에 대응되는 작위지만 실질적으론 공작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보이보드도 마찬가지.[10] 왈라키아 공국블라드 3세가 유명하다[11] 기원상의 차이로 미영을 제외한 영어권 문화에서는 count(카운트)라고 한다.[12] 전자는 노르드어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것을, 후자는 카롤링 프랑크의 영향을 받은 대륙의 것을 지칭한다.[13] /kɔ̃t/[14] Conte는 보통 프랑스 등 타국 작위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15] 대륙에는 자작 단계에 해당하는 작위가 없는 국가들이 많다.[16] IPA: /ˈvaɪkaʊnt/[17] IPA: /vi.kɔ̃t/[18] 단, 독일에서는 자작 칭호가 없고 '자작위'라는 뜻으로만 쓰인다. 즉, 타 국가의 자작 단계에 해당하는 귀족들을 일컫는 데에만 사용하는 제한적인 단어이다. 특히 프랑스의 자작 귀족들을 부르는 데에 사용했고, 그래서 단어 발음도 프랑스어식 그대로 한다.[19] IPA: /ˈbæɹən/[20] IPA: /ba.ʁɔ̃/[21] IPA: /fʀaɪ̯hɛʁ/[22] Prince Bishop, 즉 주교들도 세속적 지위를 누리면서 사실상 영주나 다름 없이 활동했다. 독일에서 Fürst가 고위 성직자들에게도 붙여 불렀던게 그 예이다. 또한 독일... 아니 오스트리아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령이 500년 가까이 영속했다. 현재의 가톨릭 교회에서는 더이상 실질적인 영주로서의 주교는 없지만,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사제가 주교품을 받으면 고유의 문장을 갖는 것이 그것이다.[23] 중국의 역사서.[24] 출처는 고려사 형볍지 용례, 동국이상국집 제19권.[25] 천황(皇)이 아니다. 항목 참조.[26]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제32권.[27] 이게 동아시아식 전제군주제다.[28] 변한국의 공작이며 시호는 소경.[29] 현종의 장인 김은부는 사후 안산현 개국후에 봉해졌는데 그의 아버지도 안산현 개국후로 같이 봉해졌다.[30] 이와 비슷하게 공민왕, 우왕 부자도 강릉시를 편법으로 이었다.[31] 이는 고려시대에도 있던 전통이지만 사서엔 명확히 어떤 작위를 내린 건지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