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

 

  • 아버지의 형이나 아우를 부르는 호칭인 종부(從父). 자세한 것은 또다른 명칭은 삼촌 항목 참조.
1. 후한 말에 있던 무장 집단
2. 종손의 아내


1. 후한 말에 있던 무장 집단


宗部
후한 말에 향리를 토대로 조직된 일종의 무장집단이자 파양의 원주민이 세운 조직으로 이 조직을 만들어 후한의 말단 지방 기관이나 오나라에 저항한 자를 산월 또는 산민이라고 불러 산월족이 이 집단에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사자손책에게 이들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파양에서 백성의 우두머리가 이 집단을 세우고 병사로 경계를 막아 지키면서 화흠이 보낸 장리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은 별도로 군을 만들었고 한 조정이 파견한 진짜 태수가 오면 마땅히 영접하겠다고 한다. 또한 화흠이 여릉, 파양과 화합하지 못해 근처에 있는 해혼의 상료에 보루를 세워 5, 6천 가구를 묶어 세금만 거두었으며, 초청했지만 한 명도 응하지 않고 화흠이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손책은 겸병할 뜻을 품게 되면서 예장을 평정했다고 하며, 이후 사서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손책이 예장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파양도 공격당해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오나라의 남쪽 지역에서 산월족이 반란이 자주 일으키는데, 이 종부와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상세한 것은 불명이다.
해당 내용은 강표전에 실려있는데 이걸 번역 하는 와중에 별립종부라는 삼국전투기 오리지널 캐릭터가 나왔으니 자세한 내용은 별립종부 참고.

2. 종손의 아내



꽃다운 20살에 종부(宗婦)가 되어

600년 내려온 종가집 예법 따라

조상님께 누가 될까 이 가문에 폐가 될까

숙명처럼 살아온 종부의 길이여

하늘이 내 맘 알고 땅이나 내 맘 알지

이 가슴 태운 속을 누가 알리요

몸가짐 언행 하나 조심하면서

꽃처럼 곱던 얼굴 백발이 다 되도록

외로워도 말 못하고 괴로워도 참아내며

오직 한 길 지켜온 종부의 길이여

하늘이 내 맘 알고 땅이나 내 맘 알지

한 많은 그 사연을 그 누가 알리요

가수 정희라의 노래, <종부의 길>. 종부의 어렵고 막중한 삶에 대한 노래이다.

宗婦
종손과 혼인한 종가(宗家)의 맏며느리. 일명 '종가집 맏며느리'가 바로 이 종부이다. 종가의 위상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종가의 곳간 열쇠를 쥐고 있어 문중 내에서도 존중받는 존재다. 다만 여성차별은 당연히 존재한다. 가문마다 다르겠지만 종갓집이라고 해도 여성은 제삿상 앞에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4대봉제사를 다 쳐내고도 술 한 잔 올릴 수 없으니 불공평한 노릇이다. 다만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지 종부는 필부와 달리 대우는 받는다. 경상북도 의성군학봉 김성일 종가는 설날에 집안 대소 어른들이 '''항렬을 가리지 않고''' 종부에게 세배를 올리기도 한다.
옛 양반가에서는 제사 등의 집안사 외에 가장 큰 일이 '접빈객', 손님을 맞는 일이었으므로 집안마다 내려오는 특수한 조리법[1]을 한두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2] 종가가 지역 명문가, 유지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 지역에서 상당히 존경받는 위치가 되기도 한다. 일례로 90년대에 경상북도 지방의 어느 종부가 돌아가시자 대구광역시 시내의 근조화환이 몽땅 동나버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문중에서 누군가 죽으면 이 시대에도 9일장을 치른다. 보통 문중이라고 하면 기백명은 되어야 하므로 그정도 기간은 잡아야 객을 다 맞이할 수 있다고. 이때도 종부가 최전선에서 객맞이를 진두지휘하는데 물론 품앗이가 당연히 있지만 머리를 쓰고 계산을 하는건 종부의 몫이다.
하지만 현재는 특히 제사에 대한 부담 때문에 꺼려지는 위치이기도 하다. 제사는 절기마다 지내는 시제사와 기일을 기려 지내는 기제사가 있는데, 예법에 따라 1년간 치러야 하는 제사의 횟수는 총 21회라고 한다. 거의 1달에 2번 꼴. 게다가 집안에 불천위[3]라도 있으면 그 횟수는 더 늘어난다. 제사 1주일 전부터 제수를 장만한다고 생각하면, 거의 1년 내내 제사를 치르고 있거나 제사를 준비하는 중인 셈이다.[4]
그 외에 '차종손', 즉 아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을 심하게 받는 위치이기도 하다. 물론 대를 이을 아들이 없거나 일찍 죽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해도, 양자입적을 하는 길은 열려 있다.[5] 그러나 항렬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현재 종손의 다음 항렬이어야 하고, 연령대가 맞고, 또 똘똘한 아이를 찾는 경우가 많으므로, 양자를 들이는 것도 매우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6권 인생도처유상수)에 따르면 그가 문화재청장 시절 고택의 종부들을 초청해서 간담회를 열었는데,종부들이 고택을 지키면서 겪고 있는 애로사항들이 쏟아져 나와서 당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도 한 종부는 '너무 마음쓰지 마세요. 그나마 우리가 이러한 자리에 모여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도 처음입니다. 종부란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라고 달래주었다고.
[1] 음식, 술 등 종류는 가리지 않는다. 흔히 종가집 XX라고 불리는 그 요리들도 이런 종가집 종부들이 전수받는 특별한 조리법으로 만드는 것들, 혹은 그런 기믹을 광고로 삼은 제품들이다.[2]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 역시 종부였다. 원래 장계향은 셋째며느리였지만, 위의 두 형님이 모두 죽은 남편을 따라 순절하는 바람에, 장계향이 맏며느리 역할을 해야 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급 한식 조리법 대다수가, 왕실의 음식이 아닌 이상 각 종가의 레시피가 전해진 것이다.[3] 신위를 철거하지 않음, 혹은 그 신위. 큰 공훈을 세워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사람의 신위다. 예법에 따르면 제사는 4대조까지만 지내면 되지만 불천위는 국가에 의해 공로를 인정받고 지정된 사람에 한해 몇 대가 흐르든 계속 제사를 지낸다. 대표적인 경우가 풍산 류씨의 류성룡.[4] 물론 기제사와 시제사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지내는 집은 이제 거의 없다고도 한다.[5] 양자입적으로 종손이 된 대표적인 인물이 추사 김정희다. 영조부마 월성위 김한신의 종손. 본인도 정실부인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소실에게서만 아들을 얻었으므로 또다시 양자를 입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