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1. 큰집
宗家
대대로 '''장남'''으로만 이어온 큰집을 말한다. 종가를 다시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나눌 수 있다. 대종은 적장자(嫡長子) 상속을 통해 무한히 이어져나가는 집안이고, 소종은 대종의 집안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소종의 종손 기준으로 같은 고조부(高祖父)에게서 나온 일족이 한 소종집단이 되며 그 소종이 계속이어져 대종이 되고 또 다른 소종이 분가하는 방식이다. 즉, 대종과 소종은 상대적인 개념이고 종손집도 기본적으로 다른 대종에서 갈라진 소종이 커져서 대종이 되는 것이고 그 대종으로부터 소종이 계속해서 갈라지는 식이다.
종가라는 개념은 중국 주나라 때의 종법제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종법에 기원을 두는데, 주 왕실이 대종이 되고, 각 제후국은 소종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주나라 종법제도의 세계관에서 국가는 가문과 별개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종법질서가 확장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종가의 당주를 종손(宗孫), 그 아내를 종부#s-2(宗婦)라고 부른다. 종손은 남계 장남이 잇는 것이었다. 만약 종손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을 경우 형제 등 가까운 일가의 조카뻘 항렬이 되는 자를 양자로 들인다.[1] 보통 양자는 차남의 아들, 3남의 아들 중에서 들이지만, 차남에게 아들이 있더라도 아들이 하나인 경우에는 다른 형제의 양자로 보내지 않고 3남의 아들에게로 우선권이 넘어간다. 자기보다 형에게 양자로 보낼 경우에는 큰아들을 양자로 보내고, 동생에게 양자로 보낼 경우에는 작은아들을 양자로 보냄이 원칙이다. 차남, 삼남 모두 아들이 하나일 경우, 먼 친척중에서 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양자를 아무나 들이는게 아니라 같은 문중의 아들 항렬에서 들여야 하므로 애당초 큰아들로만 내려온 종가집에서 양자로 들이는 대상이 되는 후보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보통 종손이 큰아들로만 내려와서 세대가 넘어가는 속도가 해당 문중에서 가장 빠른 편이므로, 문중 전체에서 가장 항렬이 낮은 경우가 흔했고 그런 이유로 종가에 양자로 입적할 수 있는 자손들 또한 대부분 같은 문중 내의 또 다른 종갓집 가지에서만 태어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굳이 양자를 들이지 않으면 차선으로 차남의 아들이 승계하고, 그렇게도 안 되면 차차선으로 3남의 아들이 승계해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양자를 들이지 않고 차남의 아들이 승계하는 경우, 엄밀히 말하면 '종손'이 아니다. 그 경우 종손은 단절된걸로 본다. 다만 제사를 맡으면서 봉사손 노릇을 하는 경우, 사실상의 큰집이 되기는 한다,
종손과 종부#s-2가 하는 일에는 2가지가 있는데,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봉제사(奉祭祀), 그리고 손님을 맞이하는 접빈객(接賓客)이다.
종가나 종손의 개념[3] 은 법적인 보장을 받는 것은 아니고, 단지 관습적인 것에 불과하다.[4] 과거의 종손은 본래 종족통리권(宗族統理權)도 가지고 있었고 유명인의 종손은 각별한 대우를 받았으나, 현재는 그러한 관념은 상당히 퇴색되었다.꽃다운 20살에 종부#s-2가 되어
600년 내려 온 종가집 예법 따라
조상님께 누가 될까 이 가문에 폐가 될까
숙명처럼 살아온 종부의 길이여
하늘이 내 맘 알고 땅이나 내 맘 알지
이 가슴 태운 속을 누가 알리요
몸가짐 언행 하나 조심하면서
꽃처럼 곱던 얼굴 백발이 다 되도록
외로워도 말 못하고 괴로워도 참아내며
오직 한 길 지켜온 종부의 길이여
하늘이 내 맘 알고 땅이나 내 맘 알지
한 많은 그 사연을 그 누가 알리요
따라서 개인주의 및 평등주의가 널리 퍼진 현대에는 여성들이 종부가 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 이 때문에 종손들이 결혼에 애를 먹고 있기도 하다. 종가의 안주인(또는 며느리)으로서의 져야 할 책임으로 자신의 생활을 포기해야 하다시피 한 데에 비해, 그에 따른 대우나 보상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 종부와 종가의 며느리들 또한 자신의 생활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단순히 종가의 사람이란 이유로 이를 희생해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옛날에는 특히 종가쯤 되는 집이면 음식 만들기나 제사 뒤치다꺼리는 집안 하인들 몫이었는데,[5]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종부가 부엌데기로 전락해버렸으니...[6] 문화가 일부분은 바뀌었는데 일부분은 그대로라서 생기는 문제. '''즉 권한은 없어질 대로 없어지고 노비들이 담당했던 의무만 지게 된 거다.'''
이외에도 고유의 가전(家傳) 기술을 보유한 집안의 가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 종가는 가문의 기술의 보호 및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외부에 개방할지를 의사결정하는 등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러한 형태의 기술 유지는 가내 기술이 발달한 일본에서 쉽게 발견되고, 한국이나 중국에도 많이 존재한다.
대중매체에서 종가의 이미지는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면이 강한데, 일종의 클리셰가 정해져 있다. 가령 새로 들어오는 여성(주로 종부로 들어오는 여주인공)에게 '''"너 같은 근본도 없는 년이 들어온다고? 난 반댈세!!"'''라거나, 현대 여성들처럼 행동을 하면 '''"종가의 며느리가 이게 무슨 꼴이냐?!"'''라며 못마땅해 하다가 그러다가 나중에는 인정을 하고 받아 들이는 식이 많다. 또한 과거 조상들이 붕당이나 개인적인 원한 등의 이유로 인해 사이가 나쁜 관계라면 로미오와 줄리엣 급.[7]
과거에는 명망 있는 가문이라면 딸이나 누이를 종가에 종부로 시집보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는데, 그렇다고 당시에도 여성들에게 종부가 매력적인 자리였던 것은 아니었다. 짊어져야 할 책임이 많기 때문에 명문가 맏며느리 자리 자체가 기피되고 있었고, 종가라면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는 혼인 당사자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가문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혼인하던 시대였다. 싫어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부모에게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시집 와보니 남편이 종손이었다는 황당한 사례(...)도 있고, 퇴계 이황 가문 종손의 딸로 태어난 이점숙 여사는 어려서부터 종부로서 희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신은 절대로 종가에 시집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할아버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학봉 김성일(퇴계 선생의 수제자) 가문의 종부가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자유연애가 보편화되어 결혼 상대자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고 산업화가 급속도로 발전한 1970년대를 기점으로 시작해, '''종가는 결혼 기피 대상 톱 클래스가 되어버렸다.'''[8] 형제가 전부 여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2009년 MBC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한국의 종가를 찾아서>를 보면 종가집 고명아들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연애 3년차임에도 여자친구한테 자신이 종가집, 그것도 고명아들이라는 사실을 차마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에야 종가이면 소작농을 두는 지역의 토호였고 해당 지역에서 떵떵거릴수 있었지만[9] , 이촌향도가 진행될대로 진행된 현대에 와서는 시골의 토호라고 해봤자 토지세만 축내는 싸구려 부동산에 지나지 않아 '''가차 없이 기피대상이다.''' 게다가 오래 전에 한옥으로 지은 종택에서 생활하는 경우 종택이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도 많아 집 수리 수준에서도 애로가 꽃피는 것은 기본이다.[10] 하도 종가집에 대한 결혼 기피가 심하다보니, 젊은 종가집 후손[11] 들은 본가인 종가와의 인연을 거부하며, 심지어는 명절에 조상들을 찾아가지도 않는다. 사실상 종가라고 해봐야 옛날처럼 권력이나 부유한 토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후손들에게 제공할 메리트도 크지 않기 때문에 종가집 문화는 빠른 속도로 소멸되고 있다. 결혼 적령기 자녀를 둔 종부들은 자기 대에서 악습을 끊고 자녀들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자녀들을 명절에 부르지 않으며, 종가집 어른들에 대해서도 매우 적대적으로 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 1에 비유하여, 어떤 분야의 원조격인 곳
예를 들면, "축구종가 잉글랜드" 같은 표현을 쓴다.
3. 유명 김치 브랜드 종가집
상호명이라 일종의 고유명사 취급하여 허용되겠으나, 종가집은 '역전 앞', '생일날'같은 중복된 표현이다.
1987년부터 김치 판매를 시작했으며 2001년부터 20년 넘게 김치 브랜드파워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마트 김치중에서는 본좌격 브랜드로 통하고 있다. 그만큼 비싸고 종류도 많은 편.
4. 임금이 탄 수레를 모시고 따르던 일
從駕
5. 증권 시장에서, 그날의 마지막에 이루어진 가격
終價
[1] 다만 사후(死後)양자 제도는 1990년 민법 개정으로 폐지되었다.[2]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래들이 섹드립이나 음담패설들이 많아서라 그렇지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노래들도 많이 부른다.[3] 종가나 종손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늘어났고, 그 기준이 자기의 직계를 기준으로 하므로 웬만하면 제사를 지낸다.[4] 다만 족보, 제사용구, 선산의 상속은 제사주재자로서 보장하고 있다.[5] 조선시대에서는 노비제가 있었고 종가는 당연히 부유했다. 종가는 가문의 제사를 모시고 제사를 모시려면 재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 설령 재력이 없더라도 종가가 망하면 가문 자체가 망하는 거였기에 같은 가문 사람이 도와줬다.[6] 다만 이전에도 집안의 식문화의 중심이 되는 장을 담그거나, 제사나 중요한 잔치에 쓰일 술을 빚는 등의 중요한 일은 종부가 직접 나서야 했다.[7] 실제로도 이런 예가 있다. 특히 사화나 환국 정치 등으로 인해 가문이 쑥대밭이 날 정도였다면 도저히 혼인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 대표적인 예가 경상도 남인 종가와 서인-노론 집안 간의 갈등이 있다.[8] 결혼이 워낙 신중한 생각이 필요한 절차다 보니 지역적인 요인, 마마보이, 장남이 제일 싫다고 하는데, 하필이면 장남의 상위호환이 바로 종손이라서...[9] 과거에는 종가에 시집가면 시부모들이 아이를 되도록이면 많이 낳으라고 강요하는데, 이유는 일손이 부족해서라고(...) 실제로도 형제 많은 집안을 보면 종가집 출신인 케이스가 많다고 한다.[10]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문화재청장 시절 일화를 밝힌 적이 있는데, 전국의 종부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열었더니, 그 동안 속으로만 삭이며 꾹 참고 살았던 종부들의 각종 불만사항이 폭발했다고 한다.[11] 이라고 해봐야 결혼적령기 자녀를 둔 60대 초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