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1. 개요
제사란 신이나 신령, 죽은 사람의 넋 등에게 제물을 봉헌하는 의식을 말한다. 따라서 고대 종교의 신전 제의, 가톨릭의 미사 등도 일컫는 폭넓은 개념이지만, 오늘날 한국어에서는 주로 조상제사의 의미로 쓰인다. 이 문서에서는 조상제사를 설명한다.
전세계 어디에나 제사에 해당하는 조상 추모 의식은 존재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유교적 제례 행위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유교식으로는 기본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제주'의 4대조(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본이었고,[1] 이게 넘어가면[2] 매안(埋安)이라고 하여 신위를 사당에서 옮겨 땅에 묻고 원칙적으로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후 5대조 이상의 조상은 개개인의 기일이 아닌 음력 10월에 동시에 기리는 묘사(墓祀)[3] 를 지내거나, 큰 공을 세운 조상의 신위는 시대가 지나도 옮겨 그만두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는 불천위(不遷位) 같은 예외가 추가되었다.[4]
보통 서양권에서 이 문화를 소개할 때 제사를 보통 Korean Ancestral Rites (한국의 조상에 대한 의례) 라고 하거나 Jesa 로 음역한다.
2. 유래
신이나 신령, 조상 등에게 봉헌하는 의식은 수많은 종교에서 관찰되며 중요시된다. 지중해 문화권의 고대 종교들에서는 훌륭한 제사는 '경건함'의 주요한 예시였고, 동아시아에서는 갑골문에서 수많은 제의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종교가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인식되지만, 종교가 공적 영역으로 인식되던 고대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신심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제사가 자연스럽게 중시되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 문화권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지역적 특성이 섞여 형성되었다. 고대 중국 상나라(은나라)의 왕 조갑이 주변 토착신을 배제하고 조갑의 직계 조상만 섬기는 조상신 풍습을 만든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기록을 보면 상족의 조상은 직계인 근조선공과 직계가 아닌 원조선공으로 나뉘는데, 상나라에서 제사는 직계 선조인 근조선공에게만 지냈다. 조갑은 왕의 어령에 반발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자신의 조상을 숭배하면 농사가 잘 되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재앙을 막아준다"는 등 만사가 다 잘 돌아간다고 퍼뜨렸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조상 섬기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제사의 시초다.[5]
상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주나라는 위에서 조갑이 퍼뜨린 풍습을 따라 상나라의 제사방식을 이어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전 지도층을 제후로 임명해 상나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도록 했다. 이것도 다른 가문의 제사를 끊기게 하면 그 사람에게 제사가 끊어진 조상 귀신들이 재앙을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왕들을 가르치던 공자가 "상나라 제사 문화 띵호와" 하면서 재정비했다.[6][7]
일반명사로서 제사의 뜻은 이렇지만, 흔히 한국에서 '제사'라고 하면 '조상 제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8]
이런 수단으로서 행해진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제도로 고착되었다. 또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정교가 분리된 이후에도 황제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자신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다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왕조의 조상신(종묘)과 땅의 신(사직)에는 제사를 지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가정에서는 효의 의미를 가져 가문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종교적 면은 사후세계의 인정을 통한 유교 특유의 간접적 영생법의 의미를 가졌다.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아들딸 상관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받고 제사의 주체에서도 남녀차별이 없었으나[9] 조선 중기 이후 소중화 의식이 강해지면서,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남[10] 이 아버지의 재산 2/3을 받고, 나머지를 다른 아들들이 나누고, 딸은 받지 못하는 인습(因習)이 집성촌일 경우 2010년대까지 유지되기도 했다.[11][12]
3. 차례와 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하며# 두산백과에 따르면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다.# 따라서 설날과 추석에 한해서 제사가 아니라 차례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차례도 제사에 포함되는 개념이므로 설날이나 추석에도 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반대로 제사를 차례라 부르진 않는다. 일반적으로 제사라고 하면 기제사를 가리키는데, 기제사란 죽은 사람의 기일에 그 사람만을 위해 지내는 제사를 의미한다. 기제사든 차례든 보통 제주 위로 돌아가신 4대 조상[13] 까지 지내는 건 마찬가지지만, 명절 등에 지내는 차례는 4대 조상까지 연달아 대접하는 제사를 의미하므로, 기제사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차례는 명절 제례로 고려시대부터 지낸 것으로 추정되고, 이름 그대로 원래는 차를 올리는 다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차라는 부분을 고려하면, 세시풍습 + 계절제와 불교식 성향이 더해져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가 되면서 불교식 세시풍습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시 풍습도 유교식으로 변화해간다. 실제로 조선시대 예법의 기본 취급 받는 주자가례 중 참례와 천신례는 세시의 제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때 초일에는 술과 차를, 그리고 보름에는 차만을 올렸다. 다만 술 대신 차를 올리는 것은 아무리 봐도 불교 냄새가 강하다는 생각도 있었고,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차는 엄청난 고급 사치품이었기 때문에[14]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아무래도 중국에서는 차를 올리지만, 조선은 술이죠"'''를 외치면서[15] 차례상에서 차를 빼고 술을 채워넣었다.(정확히는 차를 빼고 술을 채워넣은 것이 아닌 차만 뺀것이다. 술 진상은 본래 주자가례의 참례에도 있었으며 이 부분은 동일하다. [주자가례 사당편 참고]) 이후 명절에 지내는 제사의 다른 이름이 된 것은, 조선 후기 성리학적 성향이 강해진 영향으로 보인다.
4. 한국의 제사
- 삼국시대 이전: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하늘 숭배 사상이 유행하는 원시적인 종교 형태를 띠고 있다.
- 삼국시대 초기: 고조선, 부여, 고구려, 삼한(마한, 진한, 변한)에선 동맹, 수신, 영고 등 우리 고유의 산과 강, 신과 하늘에게 지내는 의식 비슷한 제사가 진행됨. 이후 왕조의 형태가 잡히면서 주로 황실에서 시조에 대한 제사가 진행됨. 이때 고구려에서 시조의 조각상을 세우고 그를 숭배하는 제사는 고려에도 이어진다.[16]
- 삼국시대 중후반 ~ 남북국시대: 불교와 도교의 수입이 이루어지면서 절이 세워지고 불교식 제사가 자주 진행됨.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행사가 황실 위주로 이루어짐. 신라에선 도교식 제사인 초제[17] 가 행해져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이후 유교의 수입도 이어져 신라에선 종묘와 사직단이 설치되어 황실에서 유교식 제사가 이루어진다.
- 고려시대: 삼국의 제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성종대에 종묘와 환구단, 사직단 등을 설치해 황실에서 제사를 시행, 민중들은 팔관회, 연등회 등에 참가했다.
- 고려 말: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문의 무덤(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 사이에서 활발해졌으나 별로 보급되진 않음. 절에 제사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 조선시대 초기: 불교의례의 전통이 남아 주자가례와 같은 유교의례는 사회전반에 보급되지 않음. 경국대전에서는 사대부만 4대, 6품 이상 관료는 3대, 7품 이하 관료는 2대, 서민은 부모만 제사 지내도록 했다.
- 16세기 중반: 성리학이 심화되어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되고 주자가례에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 지고 있다. 20세기 이후 개신교의 유입으로 인해 개신교 신자들은 제사를 거부하곤 한다.
- 마을 제사
5. 외국의 제사
문화대혁명 탓인지, 제사가 간단하며 한국에 비하면 그렇게 지내지도 않는 편. 하나의 제사상으로 6대 조상의 제사를 전부 지내며, 제사음식은 튀긴 물고기, 튀긴 닭, 안 깎은 과일 여러 개가 끝이다. 중국 산둥성에 공자묘가 있는데, 제사 그딴 거 없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공자묘를 훼손시킬 정도였다. 반대로 한국은 무형문화재 85호로 석관대제(공자 제사)를 지정해서, 몇몇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은 공자를 한국인라고 주장한다'를 믿고 있다.
호찌민이 추석(et trung thu)을 어린이날로 바꾸자는 제안을 해서, tet thieu nhi라고 부르기도 한다. 낮에 제사를 지내며, 가족이나 친구끼리 월병을 먹는다. 여담으로 공자 제사를 지내는 문묘가 있다.
6. 의의
학계에서는 "현재에도 제사를 올리는 집은 조상에 대한 숭배의 목적이 아닌 친척 형제와의 관계유지와 전통적인 관례와 풍습으로 하는 것이고, 조상신을 모신다는 종교적인 이유는 매우 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면면을 보면 그 중에서 몇명이 여전히 '조상신을 모신다'는 관습적 혹은 종교적 이유로 고집하고, 나머지는 이 사람을 반대하지 않아서 유지되는 면이 가장 크다. [18]
핵가족화가 진행되다못해 일반적인 현대에는 제사를 지내는게 정서적, 물리적으로 어려워지고 있고 성리학의 우주론과 내세론마저 종교적으로 설득력을 잃어, 의의가 매우 퇴색되었다. [19] 일단 보통 미디어 등에서는 제사가 후손들에게 공경심과 효심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회적 소속감, 연대감을 증진하며 가족 간의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를 보는데, 사실 이게 주자가 주장하던 성리학적 제사론에서 공자가 주장한 원시유교의 제사론으로 돌아가는 것에 가깝다.
부모가 인품이 훌륭하고 경제력등으로 권위가 서 있는 잘돌아가는 집에서는 지금도 제사 잘돌아간다. 제사 참석안하면 유산 못받을까봐 다 참석하기 마련, 며느리들도 몇일전부터 와서 제사내내 손모으고 배석하고, 그런데 집에 돈이 없으면 며느리들이 와서 노동하고 배석하는 그런 효과 못 본다. 어떤 사람들은 참 배금주의적 시대상을 반영하는구나.. 하고 한탄하는데...
... 반전으로 사실 제사는 원래 태초에는 그럴 목적으로 있는 제례 였다. 민초들은 지낼 이유가 없었고 지낸다해도 제대로 형식을 갖출 여유가 없었다. 애초부터 뭔가 물려줄게 있는 집안에서 단순히 가족이 아니라 가문이라고 할만한 명문가에서 집안의 단결을 꾀하는 지배도구였다. 이게 불교와 도교에서 태극, 이기론, 혼백론, 심성론등을 따와서 유교에 집어넣은 주자가 성리학을 정리하고 주자가례라는 종교형식으로 온민초에게 퍼트린 것, 그런데 이게 다시 족벌체제의 특권 계급층의 전유물로 돌아가고 있다.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분명하게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으셨다." 라고 하긴 했다. 그런데 왜 제사에 위패,등 귀신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는 절차등을 안뺏냐하면 공자는 모르는건 모른다고 하고 관심도 없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적 개념에서 보면 불가지론에 해당하는 범주고 덕분이 초기 유교엔 우주론과 내세론에 대한 부분이 텅 비어있었다. 유교를 창시한 공자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였기에 제사를 괴력난신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귀신을 모시는 굿인 제사를 매우 중요한 의례라고 생각한 것은 제사라는 의례가 그가 이상향으로 돌아가길 바랬던 주나라에서 봉건제의 근간을 이루는 종실중심주의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즉 주나라 천자는 종실의 장으로서 조상들에게 후손들을 대표하는 제사주가 된다. 그리고 제후들은 주나라 종실의 친척으로서 제사에 참여함으로서 종실과 유대감을 가지고 지도에 따르며 보호를 받는다. 제후들은 자기 봉지에 가서 자기 부모제사를 지내는데 여기에는 대부들이 참여한다. 대부들도 당연히 인척이다. 대부들도 자기네 봉지로 돌아가서 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경,사들이 참석한다. 이런식으로 족벌중심의 통제가 이루어지는걸 종법질서 라고 부른다.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 식으로 몇대까지 제사를 지내야하는지부터 지내는 방법등이 적힌 책이 사서오경에 포함된 예기다. 재미있는 것은 공자는 술이부작 이라고 하여 내가 만든게 아니라는걸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공자님 같은 위대한 분이 귀신 이야기 같은건 안빼고, 본인이 원하는건 넣을건 넣고하시지... 라고 할 수는 있으나 거기 손대면 권위가 무너진다. 즉 공자는 제사를 지냄으로서 얻어내던 권위를 원했기 때문에 "뭔진 몰라도 하던대로 그대로 콜"을 외쳤던 것이다.
혼은 2대까지 남고 백은 4대까지 남고, 이건 불교에서 영향받은 영혼론이고, 이가 기에서 발휘되고 태극이 어덯고 음양이 어덯고 하는 것은 도교에서 온 것이다. 이건 주희가 성리학에서 집이넣은 것이고 공자는 창시한 원시유교와는 거리가 먼 아이디어다.
즉 현대에서 생각하는 무신론적 유교 합리주의자들의 생각에 가장 가까운 성인은 오히려 창시자인 공자의 생각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 제사는 친척들이 모여 조상을 섬기고, 친목을 도모하는 행위인데 백성들이 하면 그냥 가족친목 도모인데, 이걸 왕과 황제가 하면 제국 통치체제가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건 이거 지금도 작동한다. 재벌들처럼 가족이 대기업을 운영한다 생각하면 제삿날 친족들이 모여서 단합하는 행위가 곧 사업경영 행위가 된다.
가장 배분이 높은 가주가 모든 가족구성원들을 자회사 사장으로 임명하고 통제하면서 명절날 불러 제사의 제주 권위로 다스리는 형태가 재벌인데 전쟁통에 가문개념이 완전 박살난 한국보다는 가문개념이 강하게 남은 일본에서 좀 더 잘 나타난다. 즉 유교적 제사 질서는 실질 정치,경영질서를 뒷받침 할 수 있고 바로 이 목적으로 공자가 제사에 집착했던 것. 이래서 공자는 민, 양민들은 1묘면 족하다. 즉 부모제사나 지내라고 한 것. 모여봐야 할게 없으니까,
물론 한국의 제사는 공자의 유교와는 완전히 변형된 성리학 버전을 따른다. 그러다보니 주자가례에 따라 양민들도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고, 이기론이니 뭐니 백은 2대까지 남고, 혼은 4대까지 남고 하는 형이상학적 논의에 따른다. 그러나 이 의미의 제사는 현재 작동하지 않는다. 아무도 주희의 말이나, 이기론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주희가 만들어낸 종교로서의 제사는 점차 명맥을 다할 것이고, 공자가 생각한 권위로서의 제사는 동아시아의 특권계급족벌을 중심으로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다.
한국에는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 너무 많고, 한때는 모두가 그랬기 때문에 며느리들이 제사를 꺼리지만 일본처럼 제사 안지내는 집이 보편적이되면 제사 지내는 집이 로망이 되어버린다. 제사가 존재한다 = 본가-분가 시스템이 유지될만한 경제적 유인이 있다 = 최소 동네유지에서 명문가,재벌이다. 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아시아의 귀족개념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런 가문이라 할지라도 경제적 유인이 없으면 제사 시스템이 유지될 수 없고, 미천한 집안이라도 당대에 돈을 많이벌면 부모가 장남을 중심으로 자식들에게 나눠주면서 가문을 형성할 수 있다.
당대에 큰 성공을 거둔 부부는 누구나 이런걸 꿈꾸는데 벼락부자가 된 집안은 문화적으로 이런 전통이나 시스템을 물려받지 않아서 권위가 없고 따라서 차남,삼남,차녀등이 장남에 복종하기 쉽지않아서 집안 분란으로 치닫기 쉽다. [20] 한국처럼 가문개념이 문화적으로 매우 미약해진 곳에서 일본과 달리 재벌 후손들이 서로 원수가 되는 일이 잦은 것도 이런 이유. [21] 일본에서도 전통적 화족이나 지역에 확실히 자리잡은 토착재벌가문에선 '''미천한 집안이 돈 좀 벌었다고 명문가 행세한다.''' 라는 식으로 당대에 벼락부자가 된 졸부들을 고깝게 본다. 이런 열등감에 시달리던 졸부가 권위보충을 위해 딸들을 명문가 다니는 곳[22] 에 보내서 집안 좋은애랑 사귀라고 독촉하거나 아들을 데릴사위[23] 로 보내버리거나 퇴락한 명문가에 돈주고 정략결혼 시키는 막장드라마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까지 한다.
실제로도 제사는, 제사의 대상이 되는 이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거나 한 위인일 경우에 한해서만 '불천위'라고 해서 특별히 대를 뛰어넘어 그밑에 후손들에게 지내게 하는 제도가 있다. 일반적으론 사대봉사라 하여 직계 4대 위론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이 제사를 조상에 대한 기복신앙과 차별되게 하는 요소이다.[24] 또한 제사를 지낼 때 가문의 남자들이 모임으로서 가문의 수와 힘을 과시하고, 또 제사상의 차림으로 그 재력을 증명하는 등 가문의 세를 과시하는 모습이 보인다.
다만 이는 농업기반의 집성촌의 존재로 성씨에 연관된 집안사람을 즉각적으로 동원가능한 전근대적 사회에서의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와 6.25 그리고 도시화로 인해 집안의 결속력이 효과적이지 못한 현대에는 상술된 세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주가 아니라 장례와 같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먼저 죽은 사람을 추억하고 기리는 이유 혹은 아직까지도 집성촌과 종중단위를 유지하는 큰 집안의 제사를 담당하여 제사를 지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산을 비롯한 재산의 상속과 관련된 재산권 관련 이유, 또는 순수한 기복신앙과 효 문화와 동시에 과거의 영광에 기대서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유지 되고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양반 가문들이나 상류층 가문들은 가문의 정통성, 단합이나 세를 보여주기 위해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25] 이는 삼성 가문의 제사 문제만 봐도 알 수 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19/2018111903311.html 그래서 그런지 서민층과는 분위기가 다른 경우도 있다. 심지어 근본을 주장하면서도 제사를 이상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서민들이 제사 지내는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다.
6.1. 비판
선산의 이권 때문이건 제사의 비용이나 수고로움 때문이건 간에 제사 때문에 싸움이 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26] 제사가 없었다면 헛수고나 헛돈이 들 일이 없으니, 얼굴 붉혀가며 싸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명절이나 기일에 모여서 조상을 기리고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만 남겨 놓고, 제사라는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전통의 긍정적 의의를 살리는 길이다.
예컨대 명절을 이용해 가족들끼리 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친목을 다질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기껏 쉬는 날 모여서 기름 냄새 맡으면서 음식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만 정상적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다. 제사 때문에 친척들 간에 얼굴을 붉힌다거나 고성이 오가는 경우를 제외해도[27] , 제사가 있으면 부부싸움이나 분쟁이 생길 확률이 높다. 이런 현상을 고려하면, 제사를 집안의 화목을 다지는 행사라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사회에서, 가정에 경제적 및 노동 부담을 가중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오죽하면 "조상 덕을 못 본 사람들이나 조상 모신답시고 상차리고 절하고 있고, 조상 덕을 본 사람들은 그럴 시간에 해외여행 간다"는 말이 나올까.
우습게도 민속의 날로 명명되어 하루밖에 안 쉬던 명절이 길어진 게 반드시 설날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방문해야 하는 귀성길문제임을 감안하면, 제사 때문에 길어진 명절을 제사를 안 지내고 가족 간의 친목을 위해 소모한다는것은 앞뒤가 바뀐 말이다.
그리고 이런 불만은, "믿는 것은 신이지 신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부처님 오신 날과 성탄절에 절, 교회, 성당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일치한다. 젊은 세대에서 무신론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은, 상대의 집안이 제사를 지내느냐만큼이나 상대가 독실하게 종교활동[28] 을 하느냐는 파혼과 이혼의 큰 이유를 차지한다.
게다가 무엇보다 경제적 이유로 가족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제사 때문에 한 집에 모이는 일 자체가 줄어가고 있다. 친족 공동체가 모여 친목을 다지는 전통을 유지/계승하고 싶으면, 보다 친족들이 모이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모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제사는 모이고 싶지 않은 이유로 작용해 오히려 친족이 모이는 것을 방해하기만 한다. 명절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가족이 해마다 늘어나는 것과 명절대피소를 떠올려 보자. 또한 제사가 싫어서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7. 논란
제사/논란 참조.
8. 폐해
제사/폐해 참조.
9. 음복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인 제주(祭酒)와 제물을 나눠서 먹는 것. 집안에 따라 제상에 올린 나물과 밥을 함께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29]
제물이 평소 먹던 음식보다 맛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음식이 식고 난 뒤에 먹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나 생선류는 한번 조리되고 나서 식으면 수조육류 특유의 냄새가 나고, 다시 데우면 오히려 냄새가 심해진다. 양념이 안 되다 보니, 양념이 들어갔을 때보다 냄새가 심하다. 음식에 간은 하지만 양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양념의 매운 맛이나 향이 영혼을 쫓아낸다는 믿음 때문이다. 무당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행할 때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사용한다. 물론 무당 이야기 나온 것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근거 따위는 전혀 없다. 실제로 강한 양념을 하지 않는 것은, 양념을 강하게 하는 것이 상스러운 것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강한 양념 자체가 제사 풍습이 확립된 다음에 들어왔기 때문.[30] 그 향신료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느냐 마느냐는 모든 종교의 바탕인 신과 귀신의 실존을 증명할 수 없는 이상 믿음의 문제니 넘어갈 일이다.
거기다가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면 냉장고의 냄새까지 밴다(...). 밀폐용기나 지퍼백에 넣어둔다면 어느 정도는 괜찮지만, 대부분의 집이 비닐봉지에 대충 담아놓는 환경을 생각한다면 지못미(...).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먹다 버린 것 같은 느낌이나 음식에 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팁을 적자면, 수제 냉동식품처럼 취급하면 된다. 이삼일 안에 먹을 것은 냉장실에 보관하고, 그 후에 먹을 것은 전을 한입거리로 잘라 비닐백에 골고루 소분해 넣어 꽁꽁 얼리면 된다. 집에서 만들었는데 양을 줄여도 전이 남아 골치라면, 손님이 돌아간 다음, 한 번에 소분 냉동해도 된다.
1) 바닥에 신문지를 넓게 깔고, 전바구니와 도마를 놓고, 도마 주변에 롤백 비닐봉지 10~30개를 주머니처럼 입을 벌여 놓는다.
2) 전바구니에서 전을 종류별로 적당한 갯수씩 주머니에 나눠 담는다. 큰 전이면 한입거리로 잘라 나눈다.
3) 롤백 한 봉지에 들어갈 분량은 한 번에 먹을 양. 되도록 프라이팬 하나로 데울 양을 넘지 않는다. 한 봉지에 전 여러 종류가 골고루 들어가도록 한다.
4) 김치냉장고에 꽁꽁 얼린다.
먹기 전날 냉장고 냉장실에서 해동한다. 이게 가장 좋다. 급하면 꺼내 전자레인지에 1차 해동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조금 두르고 데워 식사나 도시락 반찬으로 사용한다. 즉석냉동식품과 다를 게 없다.
나물류와 탕국은 가능한 재료를 섞어 육개장을 만드는 것도 방법.
그리고, 음복 때에는 제사에 쓰인 술인 제주[31] 를 제사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들이 한 잔씩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민짜"들이 공개적으로(…) 술맛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32] 물론 이런 데 엄격한 집안에서는 이럴 때도 아이들에게 술을 못 마시게 한다.
그래도 어른들 입장에서 장점을 찾아보자면, 소위 "주도"를 훈육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첫 술은 이렇게 순한 술로, 적당히 긴장 타면서 배우게 하는 것이 지극히 바람직하다. 처음 술버릇이 평생의 술버릇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지대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명절에 차례나 성묘를 하고 제주로 음복을 하고는 음주운전을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절날 큰 묘지 주변에선 낮시간에도 음주단속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소량이라도 술은 술인 만큼 운전할 사람은 제주를 마시지 말자. 단속 이전에 안전 문제다.
현대 이전에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명절, 잔치와 함께 음식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가 음복이기도 하였다. 아래 내용의 '헛제삿밥'의 기원으로 이를 꼽기도 한다.
영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다 보니 어른들이 "남의 집 젯밥은 함부로 얻어먹으면 안 된다"고 충고하는 경우가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남의 집 젯밥을 먹음은 곧 남의 집 귀신과 한솥밥을 먹은 셈이기 때문이다. 자기 조상님도 아니고, 남의 조상님 귀신과 한솥밥을 먹는다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비슷한 이유로 무당들도 제사를 지낸 음식에는 귀신이 붙어 먹으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본토와 문화가 다른 제주도 토박이 가문들은 예외로 지인의 집 제사에 참석하거나 하는 경우도 허용된다. 또한 음식이 귀하던 시절의 전후 세대, 기성세대들은 어린 시절 음복을 얻어먹기위해 보자기를 들고 줄서 있었다.
그러나 저것은 와전된 감이 있다. 오히려 기독교도 같은 서구에서 들어온 종교를 믿는 신자는 타 종교의 세례를 받았다 할 수 있는 제사음식을 꺼릴 수 있지만, 제사를 지내는 집들은 남의 집 제사음식을 먹는 것을 꺼리지 않기도 한다. 왜냐하면 원래 제사음식을 많이 하는 것은 혈족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동네 사람들이 (절은 하지 않았다 해도 남의 집 제사음식을) 나눠먹었기 때문에 생긴 풍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혈연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회생활하며 알게 된 사람의 일로 문상가서 얻어먹는 밥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음식이다.
10. 가문별, 지역별 특색
- 제주도에서는 제사를 식게라고 부른다. 균분상속의 전통이 남아있어 시집간 딸과 사위도 제사에 참석한다.[33] 자녀가 생기면 자녀도 동행하므로 외손자가 제사에 참석하는게 유별난 일이 아니다.[34] 뿐만 아니라 친구를 제사에 초대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제주도 사람이 제사에 초대한다면 혈족만큼 친밀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된다.
- 제주도에서만 상에 올리는 음식들이 있다. 빵[35] , 빙떡 등. 갱도 생선국[36] 으로 올린다(주로 생선미역국). 지역특성상 어적도 빠지지 않고 올린다. 적갈 재료는 주로 상어, 오징어, 옥돔. 명절 때 차례상에 만두를 올리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술 대신 음료를 쓰기도 한다고.
- 경북 지방의 경우도 제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지방에서 보기 힘든 돔배기 같은 음식이 제사에 올라온다. 제사 음식들 중에서도 비중을 상당히 높게 치는 편. 집안에 따라서는 문어도 삶아서 올린다.
- 안동시에는 헛제삿밥이라는 음식이 있다. 안동의 제삿밥이 맛있기로 유명하자 그곳에 부임한 미식가 관리가 이를 원하였는데, 아랫 사람이 실제 제사에 쓰인 음식은 아니고 같은 재료로 똑같이 만들어 대접하자 관리가 이를 먹고서는 "향이 나지 않으니 진짜 젯밥이 아니구나(헛제삿밥)[37] "라고 하였다고 한다.
- 신숙주의 본관인 고령 신씨의 일부 집안에서는 제사상에 숙주나물을 올리지 않는다.
- 일반적인 제수와 달리 종묘제례나 사직제례에 쓰이는 제수에는 익히지 않은 날 것과 양념하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종종 산신제나 일부 종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산신제에서 이렇게 올리는 것은 유교의 영향이다. 산신제에는 고기를 잘 쓰지 않으나, 이는 현재 대부분의 산신각이 절 안에 있는 것도 있고, 남자 산신에게만 고기를 올리는 곳도 있다. 강원도 영월군의 태백산 산신제에서는 쇠고기를 쓰는데, 이는 영월에서 사망한 단종을 태백산 산신으로 존대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 조선 후기 이후 제사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남성, 특히 장남이 지내는 것으로 인식되나, 현대에는 평등 의식으로 인해 형제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발의 가문인 광산 이씨 문중에서는 칼로 고기나 무를 썰 때 '정철정철정철...'이라고 외운다고 한다. 이발의 가문은 정여립의 난 때 정철의 주도로 철저하게 숙청당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철에 대한 원한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 율곡 이이의 제사상엔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다. 이이가 생전에 소를 사람들이 부려먹으니 소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 명재 윤증의 직계인 파평 윤씨 노종파 종가의 제사상은 엄청나게 검소한데[38] , 이는 "제사상에 손이 많이 가는 전과류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을 올리지 말라"는 유훈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 남부 해안 지방에는 명절 차례를 당일날 아침에 지내지 않고 이전인 전날 저녁이나 밤(자정 직후)에 지내는 곳이 있다.
- 경남 서부 내륙 지방 에서는 소고기 산적 대신 돼지 수육을 쓰며, 닭고기 산적 대신 삶은 달걀이 쓰이기도 한다.
11.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음식
유교의 가르침에는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데 귀신 운운하는 내용이니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민간이나 도교에서 내려오는 풍습이다. 즉,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 이에 따라 2020년대에는 그나마 진보적인 집안일수록 조상이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 위주로 제사상을 꾸리는 게 대세이다.
- 복숭아 - 귀신을 쫓아낼 때 사용하는 과일이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 무속으로부터 유례된 풍습일 가능성이 높은데, 복숭아 나무로 만든 목검이나 제기로 귀신을 쫓기 때문이다.
- 고춧가루, 마늘 등의 양념/향신료 - 고춧가루, 마늘의 냄새가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제사 음식에는 간만 해두지 양념을 하지 않으며, 소금조차 넣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만 오늘날에는 치면 눈에 확 띠는 고춧가루는 사용하지 않지만 실고추는 사용하는 집도 있고, 후추, 생강, 마늘처럼 색이 없는 것은 얼마든지 쓰는 집이 많다.
- 팥이 들어간 음식들 - 귀신을 쫓아내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 '치' 자가 들어간 음식들 - '痴(어리석을 치)', '恥(부끄러울 치)' 와 같은 음이어서 부정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치 자가 들어간 생선을 올리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 생선들은 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12. 제사와 관련된 단어
제사상에 음식을 놓는 방식을 쉽게 외우기 위한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단어들은 '''주자가례, 국조오례의 등과 같은 유교 서적에는 나오지 않는 근거 없는 단어들'''이고, 80~90년대 언론들이 몇몇 가문들의 상차림을 참고하여 상은 이런 식으로 차려야 한다며 만들어 전파된 단어들이다. 요컨대 '''꼭 지킬 필요 없다'''. 막말로 그냥 차리고 싶은대로 차리면 된다. 다만 제사 지내는 집안의 어른들은 이 단어들에 익숙해져서 이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혼을 내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그래도 전형적인 상차림에 없는 메뉴가 점점 늘어나면서, 눈에 확 띄는 몇 가지만 괜찮으면 아무래도 좋다 정도가 되어가고 있다.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말이 있지만 신위를 북쪽으로 치고 하기에 동쪽은 신위를 마주보고 오른쪽을, 서쪽은 왼쪽을 말한다.
- 어동육서(魚東肉西):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
- 두동미서(頭東尾西): 물고기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가게 놓는다.[39] 반대로 일부 집안에서는 서수동미를 쓰기도 한다.
- 홍동백서(紅東白西):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그런데 과일이 꼭 붉고 흰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과일줄에 약과나 산자 등 다른 디저트류도 올라가기 때문에 애매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보통 진한 색은 동쪽, 옅은 색은 서쪽에 둔다.
- 조율이시(棗栗梨枾):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감 순서로 놓는다. 다만 대추, 밤, 감, 배 순으로 놓는 조율시이(棗栗枾梨)도 혼용되고 있으며 이는 집안마다 다르다. 고로 남의 제사상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지 말자. 홍동백서를 쓰는 집안에서는 조율이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위에 말했듯 제사 예법이라는 게 집집마다 다 달라서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조율이시를 쓰고 나머지를 홍동백서로 쓸 수도 있고. 제일 동쪽에 대추와 밤을 놓고 홍동백서를 따른 후 마지막에 배와 감을 놓을 수도 있다.[40]
- 좌포우혜(左脯右醯): 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놓는다.
- 반서갱동(飯西羹東): 반(밥)은 서쪽에, 갱(국)은 동쪽에 차린다.
- 생동숙서(生東熟西): 날것은 동쪽에, 익힌 것은 서쪽에 차린다.
- 건좌습우(乾左濕右): 건한 음식은 왼쪽에 습한 음식은 오른쪽에 놓는다.
- 적전중앙(炙奠中央): 적과 전은 중앙에 위치한다.
- 접동잔서(接東盞西):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 남좌여우(男左女右): 남자는 제사상의 왼쪽에서 여자는 오른쪽에서 절을 한다.[41] 손을 가지런히 할 때 어느 손이 올라와 하느냐는 말이나, 잔을 돌릴때 어느 방향으로 회전시켜야 하느냐는 말만큼이나, 남녀의 절하는 자세와 자리 구별은 의미없어지고 있다.
13. 제사상 놓는 법 쉽게 기억하기
신주를 중심으로 첫 열에 밥, 2번째에 메인요리 (적), 3번째 열에 탕, 4번째 열에 반찬, 마지막 열에 디저트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가 평소 밥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 지내는 입장에서는 이걸 거꾸로 보니 (첫열에 디저트) 외우기가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사상 놓는 법이 아니다. 고인이 좋아하던 것으로 차릴 수도 있고 후손들, 특히 어린이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어린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도 무관하다.
14. 제사에 대한 입장
〈UPINEWS〉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35.7%가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국민 3명 중 1명은 이번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조사결과다.
지역별로는 보수적인 대구광역시·경북에서는 80.7%가 차례를 지낸다고 응답한 반면, 서울과 호남은 차례를 지낸다는 응답이 각각 53.2%, 53.9%로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또헌 기사에 따르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최근 조합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결과, 남성의 16.7%, 여성의 2.4%만 "사후에 자손들이 나를 기리는 제사를 지냈으면 좋겠다"고 응답했다. 남성의 84%, 여성의 대부분은 자신의 사후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2019년 기사
14.1. 종교별 입장
제사/종교별 입장 참조.
15.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단순히 집안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42] 가 아닌, 말 그대로 특정 이유 때문에 제사만 할 수 없는 경우들이다.
- 개신교 신자(여기서 갈라져 나온 여호와의 증인 포함)와 무슬림들: 이 쪽은 제사 자체를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며 금지시킨다. 개신교에서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만일 자신이 개신교 신자일 때는 웃어른께 정중히 설명하자.
- 성매매 여성: 전근대에는 부정하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면 무례하다 하여 자발적으로 또는 집안에서 강제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 임산부: 절하는 것이 몸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로 대개 금지된다. 만삭인 경우라면 더더욱.
- 하반신장애인 등 일부 지체장애인: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절을 할 수 없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 과거 주리틀기를 당한 죄수들이 적장자라도 폐적된 이유. 부상을 이유로 다리나 발에 깁스를 한 경우에도 동일하다.
- 고인이 사형수인 경우: 북한에서 사형수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반역자는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 이게 걸리면 노동단련대로 끌려간다.
16. 기타 이야깃거리
- 현대 한국은 교육열이 강해지면서 자녀가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중3이라거나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3이라면 그 해 제사를 포기하기도 한다. 실제 사례로, 외국어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제사를 포기한 경우가 있었다.[43] 고시생이나 공무원 준비생들 역시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제사 참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과 관리요원, 검토위원이 합숙 기간에 제사가 걸려도 합숙 기간 중에는 외출이 금지되기 때문에[* 직계존비속의 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외출이 허용되나 이마저도 경찰관과 보안요원이 동행하며, 3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이건 실제로 언론에 올라온 사례도 있다.] 참석하지 못한다. 수능뿐 아니라 공무원 시험이나 각종 자격면허 시험에서도 출제위원, 관리요원, 검토위원들은 제사가 걸려도 못 간다.[44] 일단 나랏일이 이유가 되면 가문의 제사는 나중에 간단히 성묘를 하든 여의치 않으면 건너뛰어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해당하는 당사자는 참석하지 못해도 허물이 아니라고 인정된다. 탁구선수 유승민은 제삿날에도 경기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올림픽 선수들은 올림픽 기간에 제사가 껴 있으면 메달을 노리기 위해 대부분 불참한다. 이들은 ‘비록 절은 못 올리지만 조상님이 내 메달을 보면 더 기뻐하실 거다’라는 마인드로 불참한다고.
- KBO 리그에서도 제사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SK 와이번스의 2군 코치가 이만수 당시 감독에게 부친의 제사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으려 했는데 이만수가 김성근 감독의 허락도 없이 OK를 했고, 이를 알아차린 김성근 당시 1군 감독은 제사 참석도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는 행위로 간주해 “어딜 감히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냐”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 현대에 와서는 차례나 기제사를 지내게 되면 전국, 적어도 두 광역시권에 흩어진 친척이 모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구제역이나 MERS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같은 전염병이 생기면 제주 일가만 간소하게 지내기도 한다. 집안에 임산부와 환자가 있는 경우도, 집에 따라 아이가 아직 돌이 되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로 참석하지 않거나 부르지 않는다. 제사가 학기 중의 평일이나 시험기간에 걸려 있으면 대부분 불참한다.
- 실향민들은 대부분 임진각 망배단[45] 등 북녘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제사를 지낸다. 댐 건설로 고향이 수몰되거나[46] 이런저런 시설을 짓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된 지역 출신[47] 등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실향민들은 고향을 북한 지역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제사상의 동서남북은 실제 방위와 다를 수 있다. 같으면 좋겠지만 건물 구조상 불가능한 경우, 제사상의 방/신위가 있는 곳을 북쪽, 지내는 사람이 있는 곳을 남쪽, 동쪽은 지내는 사람의 오른쪽, 서쪽은 지내는 사람의 왼쪽으로 설정한다. 전통가옥이면 대청마루가 남향이니까 맞지면 현대는 그냥 신위가 북쪽이다.
- 놀부는 제물 대신에 종이에 음식 이름을 써서 올렸다. 조선 후기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당을 지을 능력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사당을 그린 그림을 대신 걸고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놀부는 재력도 있으면서 구두쇠라 아끼려고. 그 다음 해에는 제기 위에 그냥 동전을 올리고, 그 다음 해에는 무려 신위를 들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음식 앞에다가 신주를 들이 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등장인물마다 다르게 묘사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제사는 지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조상님의 신주를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는데, 그날 밤 꿈에 조상님이 나타나 배불리 먹어 만족스럽다며 은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 제사 날짜는 대부분 음력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에서는 양력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성균관 문묘에서 행하는 석전대제와 종묘 제례는 양력으로 계산해서 치르고 있다. 석전대제는 9월 28일(공자의 탄신일)과 5월 11일(공자의 기일), 종묘제례는 매년 5월의 첫째 주 일요일에 행한다. 양력을 중심으로 한 생활 습관에 익숙한 세대가 늘면서 음력으로 치르는 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 2월 29일이 제삿날이면 4년에 한 번[48] 씩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평년에는 2월 28일이나 3월 1일로 땜빵하거나 음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음력으로 윤달이 제삿날이면 날짜를 영원히 못 찾을 수 있으므로[49] 무조건 양력으로 지내야 한다.
- 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 여자는 두루마기를 벗고, 남자는 두루마기를 입어야 한다. 여자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도 되지만 남자의 경우 바지저고리 차림(생활한복은 제외)이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현대 시중에서 파는 아동한복의 90% 이상이 두루마기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냥 저고리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다.
양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면 남자는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넥타이를 맨 뒤 블레이저를 입으며, 여자는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블레이저를 입는 것이 원칙이다. 즉,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다만 장례식장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것과는 달리 제사나 차례에서는 지키지 않는 집안도 많다. 교복이 한복이 아닌 이상 교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도 양복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FM(?)을 중시하는 집안이 아닌 한, 단정한 차림이면 모두 허용하는 집도 많다.
-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이고 유교적인 제사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절이나 무당에게 땅이나 노비 등의 재산을 제사비용으로 주고 제사를 대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풍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유교적 제사문화가 강화되어 없어졌으나, 유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현대에는 부활하여[50] 점점 성행하고 있는 중. 때문에 불교 집안이라도 자주 다니는 절에 제사를 맡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있다. 혹은 명절법회라 하여, 명절마다 절의 신도들이 한데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 고려 말기에는 유밀과가 크게 유행했는데, 불교 국가인 고려의 특성상 살생을 터부시하다 보니 대충 동물 모양으로 유밀과를 올리던 게, 점점 과일대신 과일 모양 유밀과도 올리고, 모양도 점점 호화로워지니 보다못한 조정에서 유밀과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전통 한과는 제조하는 데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과 문서 참조.
- 천도교에서는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위패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는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는 듯.
- 홀수가 상당히 중요하다. 수를 셀 수 있는 제물들(ex-과일, 송편, 포 등)은 절대 짝을 맞춰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제물 준비를 할때 밤을 10개를 샀다 해서 10개를 다 놓느냐 하면 10개는 짝수기 때문에 1개는 남겨놓고 9개만 올리는 방법이다. 사실 이는 음양의 철학문제로, 땅에서 난 것은 음의 속성을 가졌으므로 홀수로 놓아 고인과 더불어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고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난 것, 이를테면 새 종류는 원래 짝수를 놓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홀수로 놓아야 한다'는 규칙만 살아남은 것.
- 현대에는 인간이 아닌 생물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유교적인 의식보다는 추모 행사에 가까운 것. 개인이 생전에 아끼던 애완동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나 혹은 의학 및 생물학 연구를 위한 실험 과정에서 희생된 생물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 등이 있다. 또한 대구 치맥 페스티벌은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개막행사 때 진지하게 지낸다.
- 북한에서도 봉건적인 잔재라고 해서 없애려고 노력을 했고, 많은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고, 80년대 이후 당국의 허용으로 제사를 다시 지내는 가족이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많은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조상에 대한 예라고 해봐야 무덤에 가서 꽃을 바치고 묵념하는 정도이다. 제사를 할 경우 남한에서는 제사 때 2번 절하지만 북한에서는 3번 절한다. 다른 점은 사형수에 대한 취급인데, 남한에서는 고인이 사형수라고 하더라도 유족이 원하면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사형수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반역자는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사형수의 제사를 지내려다가 걸리면 노동단련대로 끌려간다. 이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유현주가 증언했다고 한다. 유현주가 증언한 해당 사례는 그녀의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공개처형을 당한 사형수의 제사를 지내려다 발각된 가족이 두들겨 맞고 6개월짜리 노동단련대로 끌려간 사례였다.
- 남의 집 제사를 방해하면 제사방해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제사방해에는 제사장소에서 떠들거나 제사상을 뒤엎거나 제사를 진행할 수 없게 하는 행위등이 있다. 정말로 남의 집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면 제사방해로 졸지에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악에는 3년 이하의 징역도 가능하다.#
- 무슬림은 샤하다[51]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제사상에 절하는 것을 이슬람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며 죄악시하기 때문.[52] 개신교의 경우는 워낙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교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제사를 금지한다.[53]
- 사제(司祭)라는 직명을 직역하면 "제사를 맡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말은 기독교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동양식 제사'와는 목적도 형식도 모두 다르다. 자세한 것은 미사, 성찬예배, 감사성찬례 참조.
- 설날이나 추석 때 합동 차례를 지내는 군 부대도 있다. 대상은 설날이나 추석 때 휴가를 안 나가는 부대원 전체(...). 부대 분위기에 따라서는 간부들(특히 지휘관, 참모, 주임원사)도 상당수가 명절 땐 휴가를 못가고 당직이 아님에도 부대에 출근해서 이 행사를 같이 치러야 한다. 특히, 차례상 차리는 거 감독해야 하므로 조리 부사관들은 태생적으로 명절 당일 반일 정도는 의무적으로 출근해야 한다. 축구대회 등 단결행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높으신 분들은 명절 연휴 중 병들 무료하게 놔두면 고향 생각에 우울해지거나 심심함을 못 이겨 사고 친다고 여겨서 일부러 고생시킨다는 카더라가 많이 퍼져있다. 다만 실제로는 사서 고생을 시킨다기보다는, 명절 때 이런저런 이벤트(?)를 많이 하는 것이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들은 휴가나 외박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작정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힘을 내보자. 배에서 생활하는 해군의 경우에는 함정에서, 공군은 활주로 위에서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지휘관이 대인배인 경우는 종교별로 병들을 분류하여 각자의 종교에 따른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종교적으로 제사가 허용되지 않는 병들은 안 해도 된다.[54]
- 교도소에서도 설날, 추석에는 차례를 지낸다. 이를 "재소자 합동차례"라고 부른다. 물론 모범수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 BC3000년경 갑골문 연구로 은나라의 왕이 자신이 왕이 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주변에 있는 토착종교를 싸그리 배척하고 왕의 조상만 섬기게 하는 문화를 만들었고, 이에 대해 일어날 불만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자기 조상을 섬기면 날씨도 좋아지고 전쟁도 이기고 하는 일마다 잘된다고 하였다. 그러다 은나라는 주나라에 멸망 당하는데 주나라가 자기 나라도 졔례의식을 잘 받아들이고 은나라의 제사담당자를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주나라에도 조상숭배 문화가 퍼진 것이다. 그러다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등장으로 유교의 영향아래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주장은 유학에 매우 비판적인 김경은 교수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부분은 고려해서 판단하자.
-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였던 안영은 "유자(儒者)들은 복상(服喪)의 예를 중시하고 가산을 기울여서라도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데, 만약 그것을 백성들이 본받게 된다면 이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문왕(周文王)은 이미 가셨고 왕실까지 쇠퇴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지금 유자들은 의례(儀禮)를 성대히 꾸미고 번잡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 옛날의 예를 부활하려고 하더라도 헛수고에 끝날 것은 명백합니다."라고 하며 제사의 폐단을 지적했다.
- 제사음식에 특별한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지기 시작하자 제사상에 피자, 스테이크, 치킨 등의 신세대 음식이나 양식을 올려서 조상님들이 다양한 음식을 맛보게 해드리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집안도 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자 하는 조상이 얼마 전에 돌아가신 경우이고 직계 가족이 살아있는 경우라면, 해당 인물이 조상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조상님께서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 위주로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 윤달에 사망한 사람의 제사를 언제 지낼지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는 갖가지 방법이 나왔다. 윤달이 있는 해에만 지내기도 하고[55] 도 있고, 윤달이 없는 해에는 평달에 지내고 윤달이 돌아오면 그 윤달에 지내기도 하고[56] 평달에 지내는 것은 맞지 않으니 다음 달 초하루에 지내기도 한다.[57] 사실 조선시대에도 이 문제가 아리송하기 떄문에 저명한 유학자들에게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는데, 퇴계 이황 등 조선의 유학자들은 제사는 무조건 평달에 지낸다는 입장이었다. 이유는 윤달은 '정상적인 달'이 아니라는 것. 음력 윤8월 14일에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제사는 무조건 평달 8월 14일에 한다는 것이다. 제삿상에 비정상적인 것을 제물로 올리지 않듯이, 제사를 지내는 시기 또한 비정상적인 때는 피한다는 논리이다. 삼년상을 치를 때에도 중간에 윤달이 걸리면 상을 지내는 기간을 한 달 더 늘렸다.
- 음력 11월 중순~12월 중순이 기일이라면 윤달 배치에 따라 한 해에 두 번 제사를 지내는 해와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는 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2003년 12월 30일이 음력 12월 8일이었으므로 이 날 제사를 지냈다면 2004년에는 윤2월[58] 때문에 건너뛰고 2005년 1월 17일에나 다음 제사가 오는 셈이다.
- 일부에서는 장애인들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 기독교에서의 제사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에서 제사의 대상은 하느님 뿐이며, 이 제사를 집전하는 이를 사제라고 칭한다. 가톨릭과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에서는 사제가 미사와 성찬예배를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로서 바친다. 개신교에서는 예수가 사제인 동시에 십자가 위에서 제물이 되어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이뤘으므로 더이상의 제사는 무의미하다는 신앙을 갖고 있으며, 사제의 직위 또한 부정한다. 다만 성공회의 경우는 좀 복잡한데, 사제 계급이 존재하며 감사성찬례라는 제사를 드리지만, 평신도 또한 일상 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거룩한 사제와 제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 2020년에는 코로나19 사태로 무려 온라인 제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17. 같이보기
[1] 결혼을 일찍 하는 전근대 기준으로, 현실적으로 인간의 수명상 아무리 장수한다 해도 사람이 생전에 만날 수 있는 사실상 최고 한도는 보통 고조부와 고조모라고 할 수 있다.[2] 아버지가 사망해서 아들이 제사를 물려받으면, 아버지의 고조부는 5대조가 되므로 사대봉사에서 벗어난다.[3] 시향(時享)이라고도 한다.[4] '문중 종가에서는 1년에 제사를 수십 번 지낸다'는 속설이 있는데 근거가 바로 이 불천위다. 집안 내력이 오래된 명문가에서는 당연히 불천위 제사를 지낼 만한 역사적 인물이 많기 때문.[5] 이때 제사의 제물 중에는 상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족속의 사람도 있다. 즉 인신공양을 한 것인데, 자세한 것은 상나라 문서 참조.[6] 공자는 자신이 전생에 상나라 사람이라는 꿈을 꿨을 정도로 상을 숭상했다. 얼마나 심했냐면 후대 중국 학자들 일부가 "은나라(상나라)는 공자의 이상세계를 투영한 것이지, 실제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었다"고 착각했을 정도로.[7] 이런 의심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 -그 당시 공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상나라의 기록이 남아있었을지는 몰라도- 상나라의 제사는 공자가 극혐하다못해 제사 지내줄 자손이 끊어지리라 저주까지 불사한 인신공양이 "패시브"였기 때문이다.[8]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비는 의식이 아니라, 왕권유지를 위하여 왕가와 민가를 구분짓고, 왕실은 대개 조상에게 왕실을 위하여 복락을 빌었고, 양반들은 또한 각각 나누어져 각각의 조상에게 각자를 위하여 복락을 빌었다.[9] 조선 전기에는 출가외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남녀 구별 없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셨다. 기혼 남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시집간 누나의 집을 방문하는 경우도 많았다.[10] 당연하지만 제사의 주체도 결격사항이 없으면 무조건 장남이 된다.[11] 집성촌 할아버지는 장남의 장손(장남)이 태어나자마자 재산을 미리 물려주는 편이다. 이후 고모가 아버지 재산을 못 받았다고 조카를 법원으로 데려갈 수는 없지 않는가?[12] 2017년 12월 29일 현재에도 예전관습이 일부 변형되어 계승되었는데 제사를 주재하는 당사자는 분묘에 속한 1정보 이내의 금양임야와 600평 이내의 묘토인 농지, 족보와 제구의 소유권을 단독으로 상속받을 수 있다. 다만 관계상속인 전원의 일치된 합의가 있어야 하고, 그러지 못한 경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그 청구이유의 상당성을 인정받야야 한다.[13]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14] 차는 아열대 지역 식물이라 온대기후인 조선에서는 극히 일부지역에서 나는 고급품이었고, 석회수 때문에 맥주를 물 마시듯 마셔야 했던 중세 유럽처럼 차가 필수적이었던 중국과 달리 조선은 석회수가 거의 없이 그냥 자연상태의 물을 바로 마실 수 있는 환경이었으므로 차를 마실 필요가 없었다. 즉, 그 당시 조선은 차의 공급도 수요도 적을 수밖에.[15] 단적으로 율곡 이이가 지은 격몽요결에서는 "차는 중국 풍습이고, 술이 조선 풍습이다"라고 하면서 차를 빼버린다. 그러나 이건 위에 서술된 것처럼 차가 조선에서는 대단히 고급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16] 왕건 문서의 청동상 문단 참조.[17] 도교 속 신들과 별의 신, 옥황상제에게 지내는 제사[18] 종교적으로 유교는 사멸되고 있으며, 반전의 여지가 없고, 한중일을 막론하고 유교에 우호적인 사람들마저 중국공산당 뿐만 아니라 대만, 일본, 한국의 유교합리주의자들 전부 무신론자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명백히 다르다. 조상신을 고집스레 섬기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사람들 대부분이 유교가 아니라 무속의 관점에서 제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유교는 원시유교건 양명학이건 성리학이건 어느쪽이던지 간에 종교인과 상극이라 유학자들은 주기적으로 무속인,승려,기독교등등 모든 종교인들을 괴력난신 혹세무민한다고 처벌,학살하던 사람들인걸 생각하면 원래부터 종교라고 정의하는게 가능하지 않다는 오래된 논란이 중국공산당의 유교부흥정책을 기점으로 중국발 논문의 물량공세 덕에 = 종교가 아니다. 정리되고 있는 추세다. 물론 조지타운 대학,서강대등 유교가 종교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쏟아내는 대학도 있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작 유교를 스스로의 종교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다시말해 과거나 현재나 유교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나 유학자들은 스스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유교 외부에선 천명이나 천, 개념을 중심으로 너도 종교라고 칭하고 있다.[19]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마저 이기론을 알지 못하며 혼.백의 차이를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믿지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20] 부모 스스로도 장남에게 권위와 자산을 밀어준다는 개념을 안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1979년 이후 시행된 상속유류분 제도 덕에 부모에게 쌍스럽게 굴어도 법정상속분의 절반은 유언과 관계없이 챙길 수 있고, 장남에게 가산을 몰아준다는 것도 불가능해져서 제도적으로도 한국은 일본,유럽,미국같은 가문형성이 불가능에 가깝다. 유럽왕정 같은 작위가 존재하는 곳은 당연히 장남이 모든 작위와 유산을 물려받고 미국같이 귀족이 없는 곳에서도 먹고 살만큼은 주는게 미덕이지만 절대 균등상속을 하지 않는다. 똑같이 나눠줘버리면 지들끼리 싸우고,가문이 박살난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프랑크 제국의 사례처럼 이건 고대에도 똑같았다. 고대나 현대나 사람 하는 행동은 비슷한 법이고, 똘똘 뭉치는 다른 가문에게 불리해지는 것도 당연, 먼 핏줄이라도 가족이라는게 증명되는 애들에게 장학금을 준다거나 대학입학,취업에 추천서를 써준다거나 이런 식의 혜택이라도 주려면 한집이라도 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잘 나가는 집이 있어야한다는 개념이다.[21] 한국에서는 일본식 재벌상습이 일어난 곳이 거의 없다. 왕자의 난으로 난리치는 집안이 워낙 많아서 어디그룹의 왕자의 난? 이라고 물어야할 정도고, 장남을 아예 숙청해버리고 삼남집안이 종주 역활을 하려는데 장남집안이 반발하고 5녀 집안은 삼남 편들었다가. 장남 편들었다가 하면서 둘다 엿먹이는 어떤 재벌도 있고.. 이게 다 한국에 있어서는 유교에 바탕한 귀족주의 문화가 근대사를 거치며 6.25 이후 사실상 소멸했다는 걸 반증하는 사례다. 일본에선 이런 일 벌어지는 집안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명문가 소리 못 듣는다. 벼락부자 집안 콩가루 날린다고 혀차는 소리만 들을 뿐.. 이런 귀족주의는 남들 눈치볼 필요가 없어보이는 지배층에게 빡빡한 규율을 강요하는 압력이 되기 때문에 돈 있는 애들이 인성갖추게 하는데는 도움이 되고 구설수를 일으키지 않으며 평민들이 정부에 협조적이고 사회구조가 안정화된다는 장점은 확실히 있지만 단점으로는 평민 입장에서는 일단 띠껍고 실제로 귀족들이 품위있게 행동함으로서 여론이 보수적이 되어 진보적인 사람들 입장에선 사회변화 속도가 느려진다는 환장할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상류층에서 자주 망나니가 튀어나와야 사람들이 반감이 구체화되기 때문이다.[22] 이 방면에서 유명한 곳이 가쿠슈인 대학교다.[23] 실제로 동아시아 3국중 데릴사위가 아직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일본이 유일하며 이유도 전근대적인 이유, 즉 명성만 높은 가문과 실권을 가진 가족간에 이루어지는 거래,혹은 가문이 씨가 마를 것을 우려하여 친가와 절연시킨 후 양자로 들인다는 개념으로 동일하다.[24] 그리고 불천위도 종가에서나 하는 것이지 전체 국민 중에서 보면 소수다.[25] 현재와 다르게 제사는 과거 군대나 육사에서도 배우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케바케가 좀 있지만 지금도 제사를 지내는 부대가 있다. [26] 그런데 이 링크에서 나온 경우는 A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쓰레기라 좀 애매하다.[27] 하지만 그렇게 드문 사례는 아니다.[28] 제사 역시 종교활동이다.[29] 제사도 안 지냈으면서 제사와 똑같은 재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 이걸 헛제삿밥이라고 하는데, 특히 경북 안동시의 헛제삿밥이 유명하다.[30] 단적으로 고춧가루가 전해진 시기를 보면 왜 오신채에도 이름이 없고, 고춧가루 이야기는 언급도 없는지 알 수 있다.[31] 부재료가 들어가지 않고 주세법상 약주로 분류되는 전통식 청주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정확하게는 곡물을 원료로 사용한 술. 그래서 위스키, 보드카 같은 양주나 탁주는 되지만, '''와인이나 맥주는 절대 안 된다.'''[32] 민짜들끼리 모여서 그냥 마시는 것보다 어른들과 주도를 배우면서 마시는 게 훨씬 낫다.[33] 그러나 제사는 아들들만 번갈아가며 지내는 게 보편적이다.[34] 사실 한반도에서도 고려 때~조선 초까지는 유교적인 가례문화가 약해서 지금과 많이 달랐다. 딸과 외손자가 제주가 되거나 상속을 받는 게 당시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35] 본래 제주도는 토질의 특성상 벼농사를 짓는 것이 매우 어려워 쌀밥이 대단히 귀했다. 그래서 밀이나 보리를 쪄서 반죽해 쌀밥 대신 올렸는데, 현대에는 이것이 빵으로 정착되었다.[36] 제주도에서 생선이라 함은 옥돔을 지칭한다. 물고기 총칭하는 의미로도 쓰인다.[37] 제사를 지내면 향을 피우고 그 향의 냄새가 음식에도 배야 하는데 그게 없으므로 진짜 제사를 지낸 음식이 아니라는 것.[38] 탕이랑 밥을 합쳐도 올라간 제수가 10개가 안 된다.[39] 이때 생선의 배가 신위를 바라보게 놓는다. 망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쪽이 먹기 편하니...[40] 각 과일의 의미는 여기 참조[41] 여자가 제사에 아예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자도 남자와 같은 방식(여성의 절하는 자세는 더 힘들다)으로 절해도 무방한 집도 많다. 여자는 의무인 집도 있고 의무가 아닌 집도 있고, 소수가 지금도 여자는 배제하는 듯.[42] 고3, 고시생, 유학생, 운동선수, 해외 파병 중인 군인,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및 관리요원 등.[43] 기사가 작성된 시점은 2008년 5월 27일인데, 당시에는 외고 입시에 전 과목 내신이 반영되고 구술면접까지 있었다.[44] 심지어 시험지를 인쇄하는 인쇄공까지도! 이론상으로는 출제위원이나 검토위원은 20대도 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이 40대 이상이며, 관리요원 역시 연령대는 비슷하다.[45]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계통 실향민들이 여기로 간다. 함경도와 미수복 강원도 계통 실향민들은 통일전망대로 많이 간다.[46] 임하룡 등. 임하룡의 고향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인데 그의 고향은 충주댐 건설 관계로 수몰되었다.[47] 정태춘 등. 정태춘은 고향이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인데 그의 고향은 주한미군 기지 건설 관계로 철거되었다. 그 밖에 리조트, 대학교, 군부대, 산업단지, 관공서, 교도소, 고속철도 및 여타 교통 관련 시설(공항, 고속도로 등) 등을 짓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돼 버린 경우도 실향민이라 할 수 있다.[48]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를 끼고 있는 경우에는 8년까지도 벌어진다. 이는 4로 나누어 떨어지는 경우에는 윤년으로 하되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평년,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윤년으로 한다는 규칙 때문이다. 이 때문에 xx96년 2월 29일에 제사를 지내고 나면 4년이 지난 xy00년이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가 아닌 이상 xy04년까지 제사를 제 날짜에 못 지낸다![49] 특히 10, 11, 12, 1월에 윤달이 끼면(...)[50] 지금은 당연히 노비나 부동산이 아니라 돈으로 낸다.[51] "알라 이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구절이다.[52] 다만 '민속적 관습'이라는 시점에서는 지내도 된다는 일부의 의견이 존재하기도 한다.[53] 개신교 신자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안내문은 교회에서 나누어 준다고.[54] 아예 시작하기 전에 절 안 하는 병사 손 들라고 해서 인원를 파악한 다음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55] 윤5월 17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윤5월이 있는 해에만 지낸다든가 하는 식.[56] 윤8월 14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보통 해에는 평달 8월 14일에 지내다가 윤8월이 돌아오면 제대로 된 날에 제사를 지낸다든가 하는 식.[57] 윤7월 13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음력 8월 초하루에 지낸다든가 하는 식.[58] 2004년 윤2월은 3월 21일~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