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오시
1. 개요
일본 야마나시현 고후 분지 중앙남부 지역에 있는 시로 2006년 2월 20일, 나카코마군 타마호초, 타토미초, 히가시야츠시로군 토요토미무라와 합병되어 출범되었다. 고후시, 미나미알프스시, 쇼와초, 이치카와미사토초와 인접해 있다.
카마나시 강으로 인해 퇴적 평야가 형성되었고 미사카산맥에서 성립된 지역과의 2가지의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두 지역 모두 후에후키 강 사이에 두어져 있다.
2. 출범 전의 역사
2.1. 타마호초
玉穂町
당시에는 분지 아래쪽에 범람원이 있었기 때문에 구석기 및 승석문 시대 이후의 고고 유적지 분포는 적었다.
헤이안 시대 후반기에는 각 분지에서 장원이 성립되었지만, 북동부 나카다테 및 니시아라이 부근이 하치죠인령 카마타 장원, 서쪽 지역 끝 카미산죠와 시모산죠 부근은 도호쿠인령 후세 장원에 속해 있었다. 카마쿠라 시대 때 카마타 장원의 관리자 카마타 마사키요와 각 분지에 토착한 가이겐 가문의 일족인 아사리 가문의 존재가 발견되었다.
에도 시대 근세기에는 11개의 마을이 성립되었다. 모든 마을이 에도 시대 초기 때 막부직할령으로 인해 겐로쿠 시대 고후번 영토를 거쳐 1724년 가이 일국이 막부직할령화되자 관직 대리가 농촌을 지배하면서 카미이다 대관이 지배했다. 근세 때는 분지 아래 부분에 수해가 잇따르며 치수공사가 진행되었다.
1836년에는 카이 일국 규모의 백성들이 단결하면서 봉기를 일으킨 텐포운동으로 피해가 이르렀다.
고후 분지를 흐르는 카마나시 강과 후에후키 강 등을 모아 지하에서 나온 물은 풍부하고, 벼 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촌 지대로 발전해 왔다. 1972년 고후지구 광역시정촌권의 지정으로 기업권 유치를 진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광역 행정을 추진해 왔다.
1980년에는 국립 야마나시의과대학교가 개교했고, 1983년에는 야마나시의과대학부속병원이 개원했다. 이때부터 교육 시설 지구로서의 특색을 지니게 되었고, 도시화와 동시에 늘어난 인구수 증가률은 전국에서 유수한 신장세를 나타냈다.
2.2. 타토미초
田富町
잦은 수해 피해로 후에후키와 카마나시 하천이 범람원에 해당되었고, 정착지가 곤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선사시대 고고 유적지의 분포는 적었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지질학적인 조건 때문에 가능성이 낮았고, 승석문 시대 유적도 미고하게 지상에 있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야요시대 때는 가장 오래된 굽 그릇이 표면으로 채집되었고, 고분 시대 때는 토기나 고분군이 확인되어 고대까지 지속적으로 촌락지가 장만되었다.
고대 시대 때는 안라쿠쥬인령의 코이카와 장원과 도호쿠인령의 후세 장원 등 셋칸케령이 성립되어 있는 것 외에 이치카와 장원이나 나고 장원 일부에도 해당되어 있다.
카마쿠라시대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촌락 유적지인 후세 코이가와 유적이 소재되어 있고, 후세 장원 구역을 나타낸 카마쿠라 시대 후반기 때의 오륜탑과 전국시대 사찰의 잔존물이 검출되었다.
전국시대 때는 카마나시 강의 주류가 흐르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빈번하게 수해로 피해를 당했다. 여기에 근세 초반에는 가이시 류오지역에 신겐 둑이 쌓여졌고, 카마나시 강 지류 미다이 강 유역 호수 조치가 취해지면서 물길은 고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수해는 이어졌고, 마을이 하나씩 자주 사라질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니시하나와무라에 나이토 세이우에몬이 경영했던 글방 시학관을 비롯해 히가시하나와무라에 1845년부터 1873년까지, 후지마키무라에 1824년부터 1865년까지 개원한 서당 요로칸이 있었다. 1751년에는 세이우에몬이 고후에서 교대 근무한 마츠다이라 사다마사와 함께 카이국지 편찬에 힘을 쏟았다.
1836년에는 카이 일국 규모의 백성들이 단결하며 봉기를 일으킨 텐포운동에서 후세, 히가시하나와, 니시하나와 등 모든 마을에서 깨뜨려 부수고 피해를 받았다.
근대 시대에는 수해가 많았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55년에 카마나시 강과 후에후키 강의 제방을 튼튼하게 만들고 하천 개수 완화를 마쳤다. 한때 다슬기의 서식지이자 풍토병이 원인이었던 우스이 늪은 종전 뒤인 1977년에 매립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판국에 악화된 1943년에는 공장의 소개로 타치카와 비행기가 타토미 초로 이전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는 하천개수로 인하여 벼농사에서 오이나 토마토 등을 재배하는 근교 농업으로 전환되었다. 1977년에는 야마노카미에 센터나 회관을 포함한 유통단지가 설계되어 광역 기점이 되었고, 고후 시가지의 확대로 인하여 일대에는 베드타운화도 진행되었다.
2.3. 토요토미무라
豊富村
승석문 시대부터 고고 유적지가 분포되어 있다. 소네 구릉은 고후 분지에서 대형 고분이 농밀하게 분포되어 있고, 오오토리이에는 5세기 후반에 지어진 오즈카 고분과 키하라 산세이 고분 등 가리비 형태의 고분이 발견되어 규모가 작으면서도 맹주분으로 고분군을 형성하고 있다.
헤이안 시대 후반기에는 초코지도령 아오시마 장원에 속한 아사리 마을이 성립되었고 카이겐가문 일족이 의거하며 아사리 가문을 기렸다. 전국 시대 때는 카이겐 수호 타케다 가문의 가신 아사리 가문이 있었으며 나나쿠라에는 오오토리에 다이후쿠지 등의 사적이 남겨져 있다.
근세 때는 막부직할령에서 고후번령을 거쳐 1724년에 카이 일원의 막부직할령화로 인하여 다시 막부직할령이 되면서 마을은 카미이다 관직 대리가 지배하였다. 1746년에는 카이국에 고산쿄령이 두어지며 오오토리이 마을은 타야스령이 되었다.
1794년부터 마을 4곳이 이치카와 관직 대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생업은 고작 벼 농사와 구릉지에서 잡곡재배를 했고, 중도왕래로 우바구치에서 부역을 맡았다.
근대 시대 때는 양잠이 보급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뒤에는 과수 재배와 축산업이 주요였으며 상공업으로도 이행되었다.
3. 교통
3.1. 철도
3.2. 도로
주오자동차도가 시내 동북단을 통과하지만 IC와 주차장은 없다. 단 가장 가까운 IC는 주부횡단자동차도 미나미알프스IC, 주오자동차도 고후쇼와IC, 주오자동차도 고후미나미IC가 있다. 지역 고규격 도로는 신야마나시 환상도로가 있다.
3.2.1. 국도
3.2.2. 현도
- 야마나시현도 3호선 고후이치카와미사토선
- 야마나시현도 12호선 니라사키미나미알프스주오선
- 야마나시현도 25호선 카이주오선
- 야마나시현도 29호선 고후주오우바구치선
- 야마나시현도 116호선 우스이아하라류오선
4. 출신 인물
- 타카기 신고 - 프로레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