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총(후한)

 



'''朱寵
주총
'''
'''작위'''
안향후(安鄕侯)
'''최종직위'''
태위(太尉)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성씨'''
(朱)
''''''
(寵)
''''''
중위(仲威)
'''생몰 기간'''
?년 ~ ?년
'''고향'''
사례(司隸) 경조윤(京兆尹) 두릉현(杜陵縣) 
'''태위 겸 녹상서사 재임기간'''
126년 2월 4일 ~ 127년 7월 9일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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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대신 자는 백기(仲威), 사례 경조윤 두릉현 출신.

2. 생애


젊어서 성실하고 학문을 좋아해 태상(太常)인 환욱(桓郁)의 밑에서 상서(尙書)를 가르침 받았다.[1]
107년 대장군 등즐에게 천거되어 영천태수(潁川太守)를 하였다.
111년 강족 군대가 하동군을 공격하고 다시 하내군으로 가자 백성들은 우왕좌앙하며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갔고, 주총은 조정의 명을 받아 우진(盂津)에 주둔하며 낙양을 지켰다.
건강 연간(建光 121년 7월 ~ 122년 3월)에는 대사농을 맡았다. 등태후가 죽고 등씨일족이 모함을 받아 실각하자 등즐은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주총은 등즐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후에 여러 사람들이 등즐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결국 등즐은 북망산에 안장되고 주총은 다시 대홍려로 임명되었다.
126년 2월 4일 한순제가 주총을 태위(太尉) 임명하고 태부(太傅) 환언(桓焉)과 함께 녹상서사(錄尙書事)를 겸하였다. 안향후(安鄕侯)에 봉해졌다.
유구(劉矩)란 자가 숙부인 유숙료가 벼슬을 하지 못해서 주군(州郡)의 부름을 거절하자 유숙료를 삼공부(三公府)에서 일하게 하고 유구를 효렴으로 천거하였다.
127년 7월 1일 일식이 일어나자 8일 후인 7월 9일 주총과 사도 주창(朱倀)이 면직된다.
주총은 삼공의 으뜸인 태위를 지내었지만 청렴하여 집안이 가난하였다. 조정에서는 비단과 고기를 하사하였지만 주총은 모두 거절하였다.
제자로는 양주삼명(凉州三明)으로 유명한 장환(張奐)이 있다.

[1] 같이 가르침을 받으자로는 후한의 명신인 양진(楊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