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웨리 무세베니

 


[image]
'''이름'''
요웨리 카구타 무세베니
(Yoweri Kaguta Museveni)
'''출생'''
1944년[1] 8월 15일 (80세)
영국령 우간다 음바라라
'''출신 정당'''
민족저항운동(NRM)
'''임기'''
1986년 1월 26일 ~
'''홈페이지'''
트위터
1. 개요
2. 생애
3. 개발독재와 학살
4. 동성애자 탄압
5. 친북?
6. 기타
7. 관련 문서


1. 개요


우간다의 8~13대 대통령이자 독재자이다.
아프리카의 지도자들 중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콩고 내전르완다 내전에도 개입한 아프리카 역사에서 반드시 이름이 나오는 인물.

2. 생애


요웨리 무세베니는 1944년 8월 15일 우간다 남부 음바라라에서 목축업에 종사하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에는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를 거쳐 1966년 은타라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탄자니아 다레살렘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오보테 우간다 전 대통령 밑에서 이디 아민에 의한 쿠테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일을 했다. 재학 중에는 아프리카해방운동과 동맹관계에 있던 좌익 학생단체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1년 이디 아민이 집권하자 무세베니는 탄자니아로 돌아갔다, 그렇게 무세베니는 탄자니아로 망명하였는데 그곳에서 민족해방전선을 형성하여 1979년 이디 아민이 축출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그렇게 무세베니는 1979년부터 1980년까지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밀턴 오보테와의 불화로 1980년에 물러난 후 과도정부에서 일하다가 1980년 우간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부정선거를 통해 밀턴 오보테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무세베니는 민족저항운동(National Resistance Movement)을 결성해서 밀턴 오보테와의 투쟁에 나섰고, 결국 무세베니가 밀턴 오보테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밀턴 오보테는 도망갔고 1986년 1월 26일 무세베니는 우간다 대통령이 되었다.
1995년 10월에 우간다 제헌의회는 향후 5년간 정당활동을 금지하는 신헌법을 채택하여 사실상 집권 NRM의 선거운동만을 허용하는 요웨리 무세베니의 일당 독재체제를 만들었다. 무세베니는 1996년 정당이 없는 상태에서 실시된 대선과 총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개월 뒤에 치뤄진 총선에서 무세베니의 지지자들이 의회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무세베니는 친서방정책을 주장하며, 외국인투자를 장려하면서 수출산업을 강화했다. 또 아시아인 등 이디 아민 집권시 추방되거나 우간다를 떠났던 사람들에게 토지와 재산을 돌려주었다.
오랫동안 정치 사회적 불안에 시달려온 우간다 국민들은 무세베니 정권의 평화회복과 치안유지를 지지했으나, 우간다 최대종족인 간다족 지도자와 정치지도자들은 장기간 지속된 NRM 체제에 대한 불만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한 기존의 민주당(DP, Domocratic Party), 보수당(CP, Conservative Party), 우간다인민회의(UPC, Uganda People's Congress) 등 정당 정치인들도 정당의 정치활동과 다당제의 허용 등 민주주의 실시를 요구했으며, 또 유럽과 미국 등 원조제공국들은 우간다 민주화와 인권의 개선을 경제원조와 연계시키고 있어 NRM 체제는 대내외적인 압력을 받아왔다.
결국 2000년 6월 3일~7월 2일까지 다당제 채택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우간다 국민들은 무세베니가 주도하는 NRM 무정당주의를 지지함으로써 다당제 실시는 2006년 통과될 때까지 미뤄지고 말았다. 이후 2001년 3월 12일 치뤄진 우간다 대선에서 무세베니는 약 70%의 득표로 5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했으며, 2001년 6월 26일 실시된 총선에서는 NRM이 직접선출의석 214석 가운데 170석 이상을 차지했다. 거기다 여성과 노동자, 청년 등을 대표하는 의원까지 합하면 NRM은 282석 중에서 무려 230석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우간다 국회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다당제를 주장하며 요웨리 무세베니에게 비판적인 정당도 14석에서 42석을 확보하면서 다당제의 요구 또한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선거이기도 했다.
한편 2002년 1월에 요웨리 무세베니는 다당제 실시를 위한 검토위원회를 구성했다. 무세베니 정권하의 다당제 지지자는 에리야 카테가야(Eriya Kategaya) 제1 부총리 겸 내무장관, 제임스 와파카불로(James Wapakhabulo) 제3 부총리 겸 외무장관 등으로 와파카불로 부총리는 2006년 대선에서 입후보하겠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밝혔왔었다. 특히나 이번 대선에서 요웨리 무세베니의 정치적 동지이기도 하며 우간다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카테가야 부총리는 요웨리 무세베니에게 '''"이제 그만 물러나고 후계자를 선점하셈"'''이라고 요구했지만 무세베니는 후계자 논의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고 이에 무세베니가 장기집권을 하려한다는 의혹을 짙어져갔고 '''이게 결국 사실이 되었다.''' 2003년 5월 24일 무세베니는 카즈브웨(Dr. Kazbwe) 부통령과 카테가야 제1 부총리를 해임하고 길버트 부케냐(Gilbert Bukenya)를 부통령에 임명했다. 문제는 부케냐는 무세베니의 3선 출마를 허용하는 헌법개정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헌법을 개정했다는 점이고 이 사건으로 무세베니가 장기집권을 하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렇게 2005년 7월 헌법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3선 출마가 허용되고 다당제가 채택됐다, 이에 2006년 2월 실시된 대선에서 무세베니는 3선에 성공했으며, NRM도 또다시 국회 과반수를 확보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2006년에 이어 2011년까지 4선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2016년 5선에 성공하며 장기집권하며 독재자로 살아가고 있다.
2021년 1월 또 다시 재선에 성공하여 6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우간다 야권은 대대적인 부정선거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3. 개발독재와 학살


요웨리 무세베니는 이디 아민에 대항하여 저항군을 이끌어서 처음엔 아프리카의 신세대 지도자로 주목받았다. 실제로 르완다 내전콩고 내전에도 개입해서 꽤나 잘 끝낸 편이였고 그의 측근이었던 폴 카가메가 르완다를 안정시키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디 아민을 몰아냈고 우간다의 심각했던 에이즈를 퇴치하는 등 여러 업적들을 세웠다. 무세베니 하의 우간다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했는데 몇 년 동안은 무려 7~8%의 엄청난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아프리카의 신흥 공업국가로 성장했다. 특히나 우간다에 만연하고 있는 에이즈퇴치 문제에도 적극 개입하여 에이즈 발병률을 크게 낮췄다.[2] 관련기사
물론 1986년 집권 이래 30년 넘게 독재 중이니 여러가지 심각한 인권 문제는 아직도 많다. 무세베니도 반대파인 아촐리족들을 '''만만찮게 학살한게 드러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는다. 동아일보 기사 최근 드러난 바에 따르면 '''200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둔 막장 독재자이다. 참고로 저 200만 명은 오타가 아니다!!! 르완다 인구의 6분의 1을 잡아 넣은 것이다!!!! 게다가 아촐리 사람들이 200여 곳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는데 전체 아촐리 족의 95%에 이를 정도다.
끌려가서 살고 있는 아촐리 어린이들의 사망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매주마다 최대 '''1,500명'''의 어린이가 사망하며, 수많은 여자들도 자살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수용소의 관리자들에게 성고문 및 성폭행을 당하거나 성적 학대를 당해 임신하여 애를 낳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무려 4,000명이 화장실 하나로 살아가고''' 우물가에서 물 한 통을 길어 나르기 위해 평균 12시간 동안 줄을 서야 하는 인권 탄압을 하고 있다.
한편 요웨리 무세베니가 종신집권을 시도한다는 얘기가 돌면서부터 국제사회의 시선이 점차 부정적이 되기 시작했으며, 한 미국 외교관은 보스턴글로브 기고에서 “무가베가 한 명 더 생기는 듯하다”고 비판했고, 노르웨이는 우간다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 한편 반정부 시위대들을 짓밟고 있는 요웨리 무세베니는 2011년 대선 당시에 별의별 부정선거를 치룬 끝에 재집권했다. 2013년 들어서는 우간다의 물가상승률이 30%에 이를 정도기 때문에 그가 이뤘다는 경제 성과마저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또 2012년 우간다 의회가 어떤 활동가라도 대중집회를 열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새 공공질서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안의 내용은 어떤 정치집회든 주최측이 참가자들의 신변 안전에 책임을 져야 하며, 모든 종류의 집회에 대해 사전에 경찰서장에게 허가서류를 받아야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경제정책의 실패와 부정부패의 용인 때문에 국민 저항이 점점 더 거세지자 변화를 요구하는 반정부 집회에 대응하는 수단을 점점 더 강압적이고 과격해지는 무세베니의 독재권력의 강화라고 보면 된다. #
2016년 선거에서는 한때 무세베니의 주치의였다가 이제는 가장 강력한 정적이 된 키자 베시그예(1956~) 후보가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세 번의 대통령 선거에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지만 전부 부정선거 때문에 실패했는데 이번에도 60.8%대 35.4%라는 큰 차이로 무세베니에게 패배했다. 결국 승리한 무세베니는 5선에 돌입했는데 야당은 사상 최대의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선거불복 및 반발 중이다. 여러 보도에 의하면 투표 3일 전, 베시그예 후보가 선거운동을 하러 가는 도중에 구류됐으며, 베시그예 야당 후보는 전자투표에서 여당의 무세베니 대통령에게 유리하도록 투표 수를 조작하는 선거부정(Vote-rigging)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AP 통신에 따르면 선거 다음날인 19일 베시그예 후보는 선거에 부정이 있었다는 발표를 했으나 그의 자택에 연금됐다고 한다. #

4. 동성애자 탄압


우간다의 동성애자 탄압은 전세계적으로도 악명이 자자하다. 무세베니는 최근 들어선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반동성애법 싸인하고 동성애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으며, 동성애자들을 척결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들까지 동성애자/동성애 옹호자로 몰고가면서 숙청을 거듭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고립이 심해지고 다른 나라들로부터의 경제 원조마저 끊기게 되자 가뜩이나 막장이던 우간다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젔다.[3]
2014년 2월 24일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은 동성애로 적발된 초범에게 최고 14년의 징역형을, 그리고 상습적인 동성애나 청소년 또는 장애인을 상대로 한 동성애에는 종신형까지 가능하게 한 반동성애법에 서명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알려진 무세베니 대통령은 '''“동성애는 유전적 결함으로 일어나는 비정상적 질환”'''이라고 주장해 왔는데, 우간다의 최대 원조국인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세베니는 반동성애 법안에 서명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무세베니 대통령이 반동성애 법안에 서명하면 연간 4억 달러, 우리돈 4천억 원이 넘는 원조를 끊겠다고 경고했는데 결국 무세베니가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포기하고 '4억 달러짜리 법안'에 서명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다가 노르웨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도 우간다에 대한 재정 지원을 보류하기로 결정하며 우간다가 반동성애법 채택으로 잃는 경제적 타격은 엄청났다. 또한 우간다의 반동성애법이 서명되자마자 우간다의 일간지 '레드 페퍼'가 동성애자인 유력 인물들(?) 200명의 명단을 일방적으로 공개해 비난이 일어나고 있다. 이 명단에는 은퇴한 목회자와 동성애 동조자라고 분류된 인물들도 포함됐는데 사실상 자신의 정적들을 모조리 동성애자라고 모는 것이라서 자신의 권력을 위해 동성애자 탄압을 한다는 좋은 숙청의 빌미라는 주장이 많다.
한편 일부 개신교 극단주의자들이 무세베니를 치켜세워서 크게 비판받고 있기도 하다. 제자도연구소 황정현 목사는 자신의 SNS 계정에 “무세베니가 누군 줄 알고 기사를 공유하는가? 반동성애법 주장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가? 다에쉬(IS)처럼 동성애자를 건물에서 떨어뜨려 죽이자는 건가?” 하며 개탄했다고 한다. [4]

5. 친북?


한편 이러한 국제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무세베니는 최근 들어 '''북한'''(...) 과도 연계하는 등 # 점점 독재가 심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그와는 또 반대의 모습도 보이고 있는데, 기사에 따르면 우간다의 대통령 무세베니가 북한이 수여한 국제 김일성상(...)의 수상을 1년 넘게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북한과 밀접한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질 경우 국제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될까 봐 거부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여담으로 예전에 한국을 방문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회담했을때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난 일화에 대해 이야기 한 적 있다.

6. 기타


우간다의 또다른 인간백정인 조지프 코니가 신의 저항군을 이끌며 깽판을 쳐대고 있어서 여러 모로 골치를 썩이는 중이다. 참고로 수단의 독재자 오마르 알 바시르가 이놈을 도와주는 중인데 그 이유가 요웨리 무세베니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런다고 한다.우습게도 알 바시르는 수단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며 악명을 떨치지만 무세베니 견제를 위하여 기독교 광신 테러범들인 신의 저항군을 지원한다...물론 서로 이득이 있어 그렇다고 하지만.
한국의 주류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보는 박옥수계 구원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방한했을 때 박옥수 목사와 만나기도 했는데 기사 이러한 이단과의 친분, 친북적 성향, 인권 탄압, 독재의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자를 반동성애 하나 때문에 열렬히 찬양한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계가 매우 큰 빈축을 사고 있다.
또 우간다 청소년 인성교육을 위한 '마인드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박옥수 목사가 주도하는 (사)국제청소년연합 IYF와 MOU를 체결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트위터에 팔굽혀펴기를 한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7. 관련 문서



[1] 일부 자료에 따르면 1946년설이 있음. 일단 가장 유력한 건 1944년생.[2] 사실 에이즈 발병률 감소는 WHO와 UN이 주도한 성교육과 콘돔 배포 사업의 덕이 크다. 2014년에 무세베니가 성소수자들이 에이즈 클리닉을 받지 못하게 하는 법안에 서명할 때 국제 사회와 미국은 원조 중단을 엄포하면서까지 말렸으나 강행했고 그 이후에 에이즈 발병률은 다시 올랐다.[3] 웃긴 건 이런 국제 사회에서 지탄 받는 막장 독재자를 반동성애 지지한다고 한국 개신교 일각에서 일방적으로 옹호했으니 가관이 따로 없다.기사[4] 여기에는 좀 재미있는 백 스토리가 있는데, 우간다 부흥의 주역으로 알려진 존 물린디 목사가 유명세를 얻고 방한하는 과정에서 그의 영적 멘티인 무세베니 역시 지명도가 덩달아 오른 것이다. 게다가 존 물린디는 루 잉글을 포함한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 계열 부흥운동가들과 커넥션이 이어져 있었고, 한국 개신교의 성격상 유명세가 오르지 않는게 이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