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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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유종원(柳宗元)[1]

자후(子厚)
이칭
유유주(柳柳州), 유하동(柳河東), 하동선생(河東先生)
시호
문충공(文忠公)
생년
773년 (대력 8년)
몰년
819년 (원화 14년)
1. 개요
2. 생애
3. 업적
4. 여담


1. 개요


당나라의 문관이자, 시인, 수필가이자 사상가. (字)는 자후(子厚)였으나, 조상이 하동(河東, 현 산시 성 영제시(永濟市)) 사람이었어서 유하동(柳河東), 혹은 하동선생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마지막으로 얻은 벼슬이 유주(柳州)의 책사였기 때문에 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불렸다.
당대송대에 걸쳐 진나라 이전의 산문인 고문(古文)의 형식을 정리하고 중국 전역에 퍼트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2] 중 한 명이다.

2. 생애


773년에 장안에서 태어나, 어머니 노(盧)씨의 높은 교육열 덕에 792년 20세의 나이로 1차 과거시험에 합격해 향공(響貢)이 되었고 1년 뒤인 793년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5년 뒤인 798년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한, 젊은 시절엔 시험만 보면 합격하는 수재였다. 그마저도 5년 동안 시험을 보지 않은 것은 도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였다고.[3]
801년에 정6품인 남전위(藍田尉)가 되었으며 805년 2월에 당덕종이 붕어하고 새로 즉위한 당순종에 의해 왕비(王伾), 왕숙문(王叔文) 등과 함께 등용되어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으로 승진하여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환관들을 억제하고 부패를 막아 황권을 강화하는 영정혁신(永貞革新)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나 환관들이 이에 저항하여 수구파 세력과 연합해 같은 해 8월에 황태자 이순(李純)을 옹호하여 순종을 몰아내고 왕비, 왕숙문은 죽여버림으로써 180여일 간의 혁명은 실패하였고 유종원은 805년 9월 소주(邵州, 현 후난성 신화(新化) 현)의 책사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2개월 만에 또 좌천되어 영주(永州, 현 후난성 소재) 사마가 되어 이동 중에 거처도 못 구하여 잠시 용흥사(龍興寺)에 머무르는 신세가 되고, 그로부터 6개월 뒤 모친상을 당한다.
아래의 시는 유종원이 영주 사마로 좌천되었을 때 느꼈던 외로움을 시로 옮겨 지은 것이다.

江雪 (강설)

千山鳥飛絶 (천산조비절)

萬徑人踪滅 (만경인종멸)

孤舟簑笠翁 (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 (독조한강설)

수많은 산에 나는 새는 보이지 않고

수많은 길에 사람의 발길은 끊겼도다.

외로운 배 위의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늙은이는

눈 오는 추운 강에서 홀로 낚시를 하는도다.

의외로 이 작품은 200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 출제된 적 있다! 수능 역사를 통틀어 출제된 단 셋 뿐인 외국 문학작품.[4]
10년 뒤인 815년, 영주의 산수를 유람하고 현지 사람들과 사귐과 동시에 정치, 역사, 문학, 철학 등 다방면의 학문을 연구한 내용을 다룬 수필집인 영주팔기(永州八記)를 완성한 뒤 그곳을 떠나 장안으로 돌아갔으나, 장안에 자기 반대파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같은 해 3월 유주(柳州)로 발령받아 그곳의 책사가 되며 4년 뒤인 819년에 그곳에서 향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 업적


유주의 관리였을 적에 노비들을 풀어주고, 직접 학교를 설립하여 백성들에게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황무지를 개간하고 우물을 파는 등 국민 복지에 크게 신경을 썼다는 업적이 있으나, 가장 큰 업적은 중국 전통 산문학을 부흥시켰다는 것이다.[5]
대표작으로 나무 심는 일을 하는 곱사등이가 정치를 논하는 내용인 '종수곽탁타전(㮔樹郭橐駝傳)'과 뱀 잡는 땅꾼이 슬픈 속사정을 털어놓는 이야기인 '포사자설(捕蛇者説)', 무턱대고 더 많은 재산과 더 높은 관직을 추구하가 끝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어리석은 관료들을 기이한 습성의 벌레에 비유한 '부판전(蝜蝂傳)' 등이 있다.
당시 수필은 후한대부터 존재하였던 변려문(騈儷文)이 유행이었는데, 수필임에도 4자 · 6자의 대구를 많이 사용하여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대우(對偶, 뜻이 같은 글을 나열함)와 대구(對句, 글자 모양 혹은 발음이 똑같거나 비슷한 단어로 구성된 글을 나열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각 글자를 음률(성조)의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배열하여 노래처럼 읊을 수 있도록 한 수필이다. 격식과 수식을 차려 지배층 간의 소통에 사용하기에 좋은 문체였으나 형식에만 신경을 써서 문맥이 뚜렷하지 않고 글 뜻은 애매하여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유미주의적인 성격을 띤 글이었다.
이는 '''문장은 백성의 교화에 근본을 두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일에 따라 형식을 이루며, 나라의 풍속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는 유교의 주장에 어긋나는 문장이었기에 이전부터 유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아 왔으나, 정작 그 유학자들 역시 변려문에 익숙했기 때문에 변려문을 비판하는 상소를 변려문의 문체로 작성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며 이들의 주장은 흐지부지되었다. 변려문은 황제의 혈통에 유목민의 피가 섞여 있어 다른 왕조에 비해 외래 문화에 더 수용적이었던 당나라 때에 이르러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러나 한유(韓愈)와 그의 벗 유종원의 등장으로 중국 수필은 전환기를 맞는다. 문장력이 뛰어났던 한유는 고문가들의 이론을 집대성하여 문장으로서 유교의 전통을 회복하는 고문(古文)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유종원 역시 그와 함께 고문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다만 글의 내용만을 중시하여 문장의 미적 형식을 배척하고 유교의 도리만을 숭상한 한유와 달리, 유종원은 문장을 접하는 이로 하여금 그 내용을 오래 간직하도록 하려면 문장의 일정한 형식을 배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비단 유교가 아니어도 올바른 도리를 포괄한다면 불교도교와 관련된 내용을 품고 있어도 괜찮다고 여겼다.[6]
이토록 사상에 큰 차이가 있던 두 사람이었으나 한유와 유종원은 서로를 최고의 벗이자 협력자로 여겼으며, 그들의 고문운동은 당 말기에 다시 유미주의가 확산되며 잠시 주춤하였으나 송대에 이르러 완전히 성공하게 된다. 문제는 후대의 문인들이 이 고문을 문장의 완성이라 여겼기 때문에 이후 중국의 문체는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는 거...
소설을 쓴 적도 있는데, 대표작으로 의협심 강한 부자 상인의 전기(傳奇)인 <송청전(宋清傳)>이 있다. 하지만 중국 문학계에서는 그가 수필과 시의 발전에 끼친 영향에 더욱 주목하고 있고, 소설은 명나라 때까지는 주목받는 문학 장르가 아니었으며 이 때문에 연구 자료도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일반인들에게는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

4. 여담


증삼 휘하의 문인인 악정자춘(樂正子春)과 자사의 무리가 논어를 편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유종원이 죽자 한유가 그에게 바친 묘비명에서 젊은 나이에 일찍부터 재능이 남달리 뛰어났음을 일러 현두각(見頭角)이라고 표현한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 두각(頭角)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명대의 작가 탕현조의 희곡 모란정환혼기의 남자 주인공 유몽매(柳夢梅)는 설정상 유종원의 후손이다. 해당 작품에는 유몽매의 하인인 정원사가 나오는데 그 이름이 곽타(郭駝)로, 앞서 언급한 종수곽탁타전의 주인공 곽탁타의 패러디이며, 설정상으로도 곽탁타의 후손이다.
현재 광시 좡족 자치구 유주시(柳州市)에 있는 유후공원(柳候公園)에는 유종원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봉건제도에 의문을 품은 합리주의자였다고 하며 세상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를 주제로 비판적인 내용이 담긴 글을 많이 썼다. 대표적인 글로 <봉건론(封建論)>이 있으며,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그를 유물론자라고 평가했다.
[1] 참고로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은 Liǔ Zōngyuán이다.[2] 당의 한유(韓愈), 유종원, 송의 구양수(毆陽修), 소순(蘇洵),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소철(蘇轍). 여기서 소순은 소식과 소철의 아버지로, 이 소씨 세 분을 묶어 삼소(三蘇)라고도 한다.[3] 이때 진사시와 박학굉사과에 함께 합격한 유우석#s-1과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4] 나머지 둘은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과 유종원과 같은 당나라 시대 시인이었던 두보의 강촌.[5] 참고문헌: 김학주 저, <<중국 문학의 이해>> (신아사)[6] 종수곽탁타전은 곽탁타가 나무를 처음 심을 때 자식처럼 대한 뒤 이후에는 내버려두어 나무가 스스로 본성을 다하도록 해야 비로소 나무가 잘 자라며, 정치를 할 때도 백성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다하도록 하고 각종 법률과 명령으로 규제하면 도리어 혼란이 생긴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는 노자의 정치론과 일치하며, 도교에 대해 유종원이 긍정적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