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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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유(韓愈)[1]

퇴지(退之)
이칭
한창려(韓昌黎)
시호
문공(文公)
생년
768년 (대력 3년)
몰년
824년 (장경 4년)
1. 개요
2. 생애
3. 사상
3.1. 문학론
3.2. 인사론
4. 여담


1. 개요


'''당송팔대가의 필두'''
중국 당나라 시절 문인이자 정치가. 자는 퇴지(退之)이나, 본관이 창려(昌黎, 현 허베이성 동북부) 지역이었기 때문에 자주 스스로를 군망창려(郡望昌黎)라 불렀으며, 그의 지인들에게도 한창려 혹은 창려선생이라 불리었다. 다만 한유 본인이 태어난 곳은 하남(河南) 하양(河陽), 즉 현재의 허난성 멍저우(孟州)시였다.
벗이었던 유종원과 함께, 당나라 때 활동한 문장가로서 기존에 유행하였던 형식이 복잡하고 유미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산문 문체였던 변려문(騈儷文)을, 진나라 이전의 형식이 자유롭고 내용이 알찬 고문(古文)으로 교체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2]로 손꼽힌다. 특히 한유는 고문운동의 선구자로 당나라 이후 산문 형식을 정립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 생애


대력 3년(768년), 당대의 지방 관리이자 이름난 문인이었던 한중경(韓仲卿)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죽었고, 3세 때 아버지 한중경이 죽었기 때문에 형인 한회(韓會)에게 길러졌다. 그러나 대력 12년(777년) 한회마저 죽는 바람에, 한유의 보호자는 한회의 아내 즉 자기 형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한유가 위안을 얻는 방법은 공부였고, 그 결과 13세 때 문장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원(貞元) 2년(786년)에 장안에서 과거에 도전했다. 하지만 세 번 낙방하고 정원 8년(792년)이 되어서야 네 번째 시험인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다시 이부(吏部) 시험을 보지만 실패하고, 아내인 정(鄭)씨가 죽어 장례를 치러야 했다. 결국 한유는 정원 12년(796년)에 선무(宣武) 절도사 동진(董晉) 등의 추천을 얻는 데 성공하여 가까스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였고, 당시 얻은 벼슬은 비서성 교서랑(校書郞)이었다. 그러나 그 해에 선무에서 난이 일어났기 때문에 얼마 안 가 동진을 따라 부임하여 관찰추관(觀察推官)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시인 맹교(孟郊)와 교류하였고 이고(李翱), 장적(張籍) 등을 가르쳤다. 3년 후 동진이 죽자 취직을 하기 위해 낙양으로 갔으며, 그 해 가을에 무령(武寧) 절도사 장건봉(張建封)의 휘하에 들게 되어 절도추관(節度推官)이 되었고, 겨울에 장안으로 파견되었다. 정원 16년(800년) 장건봉이 죽은 뒤 그는 낙양으로 돌아갔고, 겨울에 4번째 이부(吏部) 시험을 치러 합격하여 이듬해 국자감(國子監)의 사문박사(四門博士)로 임명되었다. 또 1년 후 유명한 문장인 <사설(師說)>을 지었다.
정원 19년(803년)에는 감찰어사(監察御史)라는 직책을 맡았는데, 이때 관중에서 큰 가뭄이 일어난다. 목말라 죽거나 작물이 다 말라 고통받는 민중을 본 한유는 <어사대상론천한인기장(御史臺上論天旱人饑狀)>, 약칭 <논천한인기장>을 지어 당시의 경조윤(京兆尹) 이실(李實)의 폭정을 규탄했지만, 거꾸로 자신이 연주(連州) 양산현(陽山縣) 현령으로 좌천되고, 1년이 지나자 조카 노성(老成)을 잃었다. 이때 그가 지은 글이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이다. 정원 21년(805년)에 사면을 받아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다. 그 해 5월에 당덕종이 붕어하고 당순종이 제위에 올라, 유능한 인물들을 등용하여 영정혁신(永貞革新)을 진행하였으나, 한유는 그해 8월 강릉(江陵)의 군 부대에 가기로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이동할 준비를 하느라고 적극 참여하지 못하였다. 영정혁신이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 새 황제의 옹립과 함께 6개월 만에 실패하고 그에 가담한 학자들이 모두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한유에게 있어 이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원화(元和) 3년(808년)에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5년 뒤 <진학해(進學解)>를 지었다. 당시의 재상 배도(裴度)는 이에 대한 치하로서 그를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삼았으며, 이때 순종실록 집필에도 참여한다. 원화 12년(817년)에는 배도를 따라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 토벌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며, 이때 <평회서비(平淮西碑)>의 글을 짓는다.
원화 14년(819년) 정월,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던 헌종은, 당시 30년에 한 번 열리며 공양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여 신앙을 모으고 있던 봉상(鳳翔, 지금의 산시(陝西) 성) 법문사(法門寺)의 불사리를 장안의 궁중으로 들여 공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반불주의자인 그는 이듬해 <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를 헌종에게 올려 과거 양무제의 고사[3]를 언급하며 부처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간언했고, 헌종은 크게 노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재상 배도와 최군(崔羣)의 간언으로 사형을 면하고 조주(潮州, 현 광동 성) 자사로 좌천당했다.
이듬해 헌종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어 국자제주(國子祭酒=대학 학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장경 2년(822년) 이부시랑(吏部侍郞), 장경 3년 경조윤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병부시랑(兵部侍郞)의 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부시랑으로 있던 시절이 길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한이부(韓吏部)'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경 4년(824년) 질병으로 휴직하였으며, 그 해 12월 2일(양력 12월 25일)에 장안에 있는 집에서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로 문(文)을 얻었다. 그리고 북송원풍(元豊) 원년(1078년)에 황제가 한유를 창려백(昌黎伯)으로 추증하였으며 공자묘에 나란히 모시도록 하였다.

3. 사상


한유는 유교를 크게 숭상하였으며, 자신이 맹자의 도통(道統)을 계승했다고 자부하였다.

3.1. 문학론


당시에 상류층 사이에서는 변려문(騈儷文)이라는 산문 형태가 유행했다. 이는 후한 시대로부터 비롯되어 위진남북조 시대에 크게 발전하고 당나라에까지 전해진 형태인데, 글의 표현력과 형식미를 극대화하여 설득력을 높인 유미주의적인 산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수식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였는데, 우선 각 구절은 4개와 6개(혹은 어조사 하나 들어가서 7개)의 글자로 구성되어 박자를 맞추고, 대우(對偶, 뜻이 같은 글을 나열함)와 대구(對句, 글자 모양 혹은 발음이 똑같거나 비슷한 단어로 구성된 글을 나열함)를 적극 활용하며, 옛 작품에 사용된 표현을 재활용하는 전고를 준수하고, 각 글자를 음률(성조)의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배열하여 노래처럼 읊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지켜야 할 형식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렇다 보니 글 쓰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내용을 경시하고 형식과 표현에만 치중하게 되었으며, 배움의 기회가 적은 사람들은 변려문을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상류층만이 자신들 간의 소통에 사용하였다.
변려문은, 유교의 주장에 따르면 매우 부적절한 산문이었다. 유교에서는 문장이 백성의 교화에 근본을 두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일에 따라 형식을 이루며, 나라의 풍속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유학자들 역시 변려문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쉽사리 이를 개혁하지 못하였고, 이러한 분위기가 당나라 중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에 드디어 변려문을 타파하고, 형식이 자유롭고 내용이 알찬 고문(古文)을 다시 확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 고문운동(古文運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람이 바로 한유로, 그는 유교의 도리를 산문에 적용하여, 문장의 실용성을 강조하며 내용에 올바른 도리만 담겨 있다면 운율감, 대구 등의 형식을 배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문이재도(文以載道)라고 한다. 한편으로 그는 유교의 도리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여,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내용은 배제하였는데, 이 점에서 그와 함께 고문운동을 추진하였던 유종원이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도 수용하였던 것과 비견된다. 하지만 한유는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것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 성품이었기 때문에, 끝내 자신의 사상을 온전히 후세에 전할 수 있었고, 이후 한자문화권의 문학사에 낀 영향은 한유 쪽이 더욱 크다. 물론 조선의 유학자들도 일관된 유가적 가르침을 담은 한유의 글을 더 선호했다.

3.2. 인사론


한유는 유학자답게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고 공정하게, 그리고 인재가 자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 제도를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진학해(進學解)>에 등장한다.

큰 나무는 대들보로 쓰고 작은 나무는 서까래로 쓰며, 기둥 위의 방목, 들보 위의 동자, 기둥, 문지도리, 문비도리, 문빗장, 문설주 등도 각기 가장 적합한 재목을 써서 집을 짓는 것이 목수의 공이라 할 수 있다.

옥찰, 단사, 적전, 청지 같은 귀중한 약재와 거전초, 마비균, 낡은 북 가죽 같은 흔하고 값싼 약재를 모두 모아 간수하여 처방에 따라 제조할 때 없는 재료가 없도록 하는 것은 의사의 현명함이다.

인재의 등용에 명찰하고 공정을 기하여 능숙한 이나 서툰 이를 아울러 이끌어 주며 중후하고 재능 있는 이를 훌륭하다 하고 능력이 탁월한 자를 걸출한 인재라 하여 그 장단점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오직 기량과 능력에 맞게 가장 적합한 자리에 쓰이게 하는 것은 재상의 방법과 계략이다.

-진학해(進學解) 中


4. 여담


한유의 업적이 크다고 여긴 후대인들은 그를 한자(韓子)라고 높여 불렀다. 하지만 한유보다 이전에 한자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 있었는데, 전국시대 한나라의 왕족이자 사상가였던 한비(韓非)가 그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비와 한유를 구분하기 위해, 한비를 한비자(韓非子)라고 부르고 한유를 한자라고 부르기로 정했다. 별칭이 바뀐 대상이 한유보다 훨씬 먼저 활동했던 한비였던 이유는, 당시 중국이 유가가 다시금 크게 융성했던 였기 때문에 법가 사상가였던 한비가 비교적 좋지 않은 대접을 받은 데 비해 중국에 유가를 부활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한유는 크게 숭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퇴고에 얽힌 고사에 등장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팔선 중 하나인 한상자의 삼촌이다. 그러나 유학을 신봉했던 한유었던지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탕현조의 희곡 모란정환혼기에는 설정상 한유의 후손인 한자재(韓子在)라는 인물이 나온다. 스토리 전개상 큰 비중은 없는 조연으로, 남자 주인공이자 유종원의 후손인 유몽매(柳夢梅)의 친구이며 그와 이별한 뒤 과거를 보러 가서 급제하고 최부반부에 그걸 유몽매에게 알리는 게 등장 비중의 전부이다.

[1] 참고로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은 Hán Yù이다.[2] 한유, 유종원, 구양수, 왕안석, 증공, 소순, 소식, 소철. 이들 중 한유와 유종원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송대의 인물이다.[3]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건국 황제. 처음에는 민생을 보살피고 제도를 정비하였으나 점차 그의 정책에 한계가 드러났고, 이를 비관하다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며 정사를 게을리 하고 국고를 탕진하여 자기가 세운 나라의 쇠퇴기를 앞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