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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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지복영(池復榮)
생몰
1920년 4월 11일 ~ 2007년 4월 18일
출생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본관
충주 지씨
사망지
경기도 안산시 고대병원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독립운동
2.3. 이후의 경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지청천의 딸이자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의 모친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지복영은 1920년 4월 1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부친 지청천과 모친 윤용자 사이에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에게 붙여진 '복영'이라는 이름은 모친이 남편을 만나기를 소망한다는 뜻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지청천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독립 운동에 뛰어들면서 지청천의 가족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갈수록 심해지자, 그녀는 어머니와 3남매와 함께 1924년 만주로 이주했다.
지복영은 6살 때 검성중학교 부속 소학교에 다니며 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동안 거주지를 여러번 변경했기에, 그녀는 만주에서 1~2년 마다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학업을 꿋꿋이 이어갔다. 만주사변 후 가족과 함께 낙양군관학교 입학생들과 함께 중국 관내로 이주한 그녀는 중국어를 잘해 중국인 행세를 하며 살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중국인 귀화 권유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내 나라가 주권이 없어 지금 중국에서 유랑생활을 하지만 조선은 반드시 독립된다고 믿는다. 그러면 내가 떳떳이 한국 사람으로 살 수 있는데 무엇이 답답해서 중국인으로 살겠느냐.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진강,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기강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이동했다. 지복영은 난징의 중국 학교에서 재학하다가 임시정부를 따라 피난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피난 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했다.

2.2. 독립운동


이후 18살이 된 그녀는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1937년 8월 중국 남경에서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및 미주의 몇 단체들이 연합하여 조직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의 후신이었다. 청년공작대원은 34명이었는데, 이 중 여성대원은 지복영을 포함해 11명이었다. 그들은 주로 한국과 중국인들의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선전활동은 거리 선전, 연예와 항일 연극, 대규모 공연, 합창 등을 통해 이뤄졌다.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을 때, 지복영은 오광심, 김정숙, 조순욱, 민영주, 신순호 등과 함께 여성 광복군으로 참여했다. 이들을 주로 사령부의 비서 사무 및 선전 사업 분양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서안총사령부에 가담해 오광심, 조순옥과 함께 선전조를 맡았다. 그녀는 적 후방에 있는 교포들을 모집하고 독립 운동을 알리기 위해 1941년 2월 잡지 <광복>을 발간했다. <광복>은 한국어본과 중국어본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한국어판 창간호 필자들은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지청천, 황학수, 김학교, 이복원, 김광, 지복영, 오광심 등이었다. 그녀는 <광복>에 '대시대는 왔다. 한국 동지들아 활약하자'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해 한국 여성들의 광복군 입대를 종용했다.

한국 이천 삼백만 민족의 반수를 차지한 여성 동포들이 조국을 광복하고 신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한 역군이라는 것을 범 한국 사람은 다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중 삼중의 압박에 눌리어 신음하던 자매들! 어서 빨리 일어나서 이 민족해방 운동의 뜨거운 용로 속으로 뛰어오라. 과거의 비인간적 생활은 여기서 불살라 버리고 앞날의 참된 삶을 맞이하자. 흑암 중에 서광 - 한국광복군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봉화는 붉고 맑게 빛난다. 이에 모인 혁명 동지들은 뜨거운 손길을 내어 밀고 열정에 넘쳐 속히 속히 달려옴을 기다리고 있다. 오라! 와서 힘을 뭉치여 적을 부시고 새집을 세우고 새로운 삶을 찾자!

또한 그녀는 김구의 글과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 전문' 등을 번역하여 <광복>에 실었다. 그리고 1942년에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초모위원 겸 비서로서 안휘성 부양에서 활동했으나 도중에 결핵에 걸려 후방에 배치되었다. 이후 1944년에 임시정부 선전부 자료과와 선전과에 복무하면서 대적방송 담당 요원으로서 선전방송을 하고 원고를 작성했으며, 소령으로 진급했다. 1945년 4월엔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및 조리원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2.3. 이후의 경력


지복영은 1946년 5월 귀국 후 서울대학교 도서관 사서를 맡았고, 1950년 6.25 전쟁 중에 결혼하여 첫 딸을 출산하고 부산 화교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이후 한국광복군 동지회 이사,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상무이사를 맡았으며, 저서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를 출간했고 사후에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이 출간되었다. 2007년 4월 18일, 지복영은 경기도 안산시 고대병원에서 병사했다. 향년 87세. 그녀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지복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