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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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紀念館 | Independence (Memorial) Hall of Korea

'''종류'''
박물관, 랜드마크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 (남화리)
'''개장'''
1982년 10월 5일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설립)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
'''대표자'''
한시준
'''주무부처'''
문화관광부국가보훈처
'''직원 수'''
139명(2020년 3분기 기준)
'''자본금'''
연결: 955억 4,061만 3,393원(2019년 기준)
별도: 955억 4,061만 3,393원(2019년 기준)
'''매출액'''
연결: 282억 2,976만 8,594원(2019년 기준)
별도: 265억 1,100만 5,882원(2019년 기준)
'''영업이익'''
연결: -22억 581만 6,732원(2019년 기준)
별도: -24억 3,116만 3,208원(2019년 기준)
'''순이익'''
연결: -21억 4,223만 7,352원(2019년 기준)
별도: -23억 434만 5,173원(2019년 기준)
'''자산총액'''
연결: 392억 5,741만 9,995원(2019년 기준)
별도: 375억 288만 4,189원(2019년 기준)
'''부채총액'''
연결: 68억 1,723만 9,960원(2019년 기준)
별도: 54억 8,006만 8,459원(2019년 기준)
'''자회사'''
한빛CS
'''연락처'''
041-560-0114
'''공식링크'''
, 독립기념관법 전문
'''외부링크'''
, , , ,
1. 개요
2. 건립배경
3. 겨레의 집
4. 전시관 역사
5. 임원에 대해
5.1. 선정 기준
5.2. 역대 임원 명단
6. 창작물 속의 독립기념관
7. 노동조합
8. 기타
9. 교통 수단
10.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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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기념관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독립기념관을 설립하여 외침(外侵)을 극복(克服)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와 국가 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전시·조사·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법인격)''' 독립기념관은 법인으로 한다.
'''제22조(「민법」의 준용)''' 독립기념관에 관하여 이 법과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것 외에는 「민법」 중 재단법인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대한민국박물관. 이를 운영하는 국가보훈처 산하 공공기관(준정부기관) 역시 '독립기념관'이다. 겨레의 탑과 불굴의 한국인 상이 박물관의 상징이며, 이 박물관이 바로 천안시의 '''랜드마크'''인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이 주요 주제이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 9:30~18:00, 동절기(11월~2월) 9:30~17:00로 관람 마감 1시간 전까지는 입장해야 한다. 또한 정기휴무일은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경우 개관)이다.

2. 건립배경


1982년 일본 고교 역사 교과서 검정 당시 문부성이 한국-중국 근대사와 관련된 내용을 일본 측에 유리한 형태로 수정하면서 역사 왜곡 이슈가 터졌다. 당시 일본에서는 문부성의 일방적인 수정에 항의하는 교과서 집필진의 항의가 있었고, 일본 내 여론도 문부성 비판으로 흘러가면서 한국 내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한국 내 여론은 독립운동과 같은 역사를 보존하고 후대에 알려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고, 500여억원의 국민성금을 기초로 독립기념관을 건립하였다.[정재정,2014,302][대한뉴스1415]
독립기념관 등 80년대 건축된 대형 건축물들은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시각이 있다. 전통과 현대의 융합이라는 기치 아래 문화공보부에서는 대형 복합 문화 공간의 거대 프로젝트를 전국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따라서 독립기념관, 중앙청[1] 건물의 국립중앙박물관 전환,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등이 대형 프로젝트로 추진되어 건립되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으로 한국에 방문하는 외국인 손님들의 눈높이에 맞는 문화 시설을 만들려는 것이 당시의 목표였다. 독립기념관이 천안 목천에 들어선 이유는 이 일대가 유관순, 이동녕, 조병옥 등 여러 독립지사들이 태어나 활동한 곳이기도 하고, 1970년대 말 박정희행정수도 이전지 중 하나로 고려했던 곳(이른바 '천원지구')으로 교통과 지세가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2]
당시 정통성 없는 전두환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감정을 이용했다는 비판도 있다. 여론몰이를 통해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관제 건립 운동을 통해 국민 성금을 모아 대형 건축물을 건설함으로써 전두환 정권의 치적을 쌓으려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리영희 교수는 <월간 말> 1994년 6월호 칼럼 '일본인 망언 규탄 전에 국민 총반성이 필요하다' 에서[3] 독립기념관 건립 취지를 "5공 정권이 일본에 대한 과열된 공격 및 친일경력 권력자에 향해질 국민의 화살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82년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 당시 반일운동이 몇 달씩 벌어지자 국민들의 관심은 '왜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반복적으로 모욕하는 이유와 근거가 무엇일까?'에 쏠렸고, 해방 이래 한국이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않았고, 해방 38년 뒤에도 친일부역 인사들이 권력 상층부에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여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5공 정권은 '일본 교과서 왜곡'에 대한 전국민 항일운동의 열기를 '독립기념관 건립'으로 교묘히 바꿔치기했다고 리영희가 해석했다.
설립 발기인 선정부터 말썽이 일었다. 이들은 부랴부랴 '독립기념관 건립사업 전국추진위원회'를 구성 후 발기인 명단을 발표했으나, 이들 중 수십 명이 친일부역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결국 마지못해 이들 이름을 빼고 다시 위원회를 꾸렸다.

3. 겨레의 집


겨레의 집은 독립기념관의 상징적 건축물로, 기념 홀의 역할을 한다. 길이 126m, 폭 68m, 높이 45m 에 이르는 규모로, '동양최대의 기와집'으로 설명된다.전통 건축물의 맞배지붕양식을 본따 설계되었으며, 기와는 구리로 제작되었다. 현판은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이 썼으며, 시공은 대림산업이 맡았다.
겨레의 집 내부에는 '''불굴의 한국인상'''이라는 한민족의 기상을 담은 거대한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태극기를 들고 앞을 가리키는 인물을 필두로 여러 인물들이 그와 함께하는 형태의 군상인데, 온 몸을 바쳐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신 순국선열들의 얼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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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원래 개관 예정이었던 8월 15일을 불과 열흘 남겨둔 8월 5일에 화재가 발생해 본관이 불타 개관이 무기한 연기된 일이 있었다. 부실한 전기공사에 의한 스파크가 원인이었는데, 지붕 하부가 가연성 높은 강화플라스틱(FRP) 자재에 송판, 루핑 등으로 덮여 있었으며 전기공사를 진행하던 기능공이 무자격자라 380V짜리 선을 110V선에 연결한 게 화근이었다. 또 지붕 높이에 맞는 소방 시설 또한 준비되어 있지 않아 화재의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소화전은 있어봤자 물줄기는 30cm밖에 안 뻗었고 준공 전이라 자체소방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아 관할서인 천안소방서랑은 지리상 13km 격차가 있었고, 건물 앞은 계단이 가로막고 있어서 화재 진압차량이 오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부실공사 의혹이 불거져서 여러 사람이 쇠고랑을 찼다. 정권에서 무리하게 공사 기간을 앞당기고 관리감독을 부실하게 했던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또 시공사인 대림산업이 당시 중동건설 붐이 꺼지면서 건설경기 불황을 겪고 있기에 최저가 위주로 덤핑을 하면서 현대전업에 싼 값으로 하도급을 줬고, 현대전업 측도 인건비 절감을 위해 기능공 6명 중 4명을 무자격자로 한 게 원인이기도 했다.(참고1, 참고2)
이로써 시공사 대림산업 측이 일간지를 통해 사과광고를 내고 복구비 전액을 자체 부담한 후, 내연재로 재공사하여 1년 뒤인 1987년 8월 15일에 개관했다.
"겨레의 집"이란 건축물은 건축계에서 논란의 대상인데, 너무 직설적으로 한옥의 형태를 한 현대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기능과 상관없이 과거 건축양식을 콘크리트로 모방했다는 비판과 건물의 성격이나 역사를 생각한 타당한 전통 계승의 결과물이란 옹호가 대립하고 있다. 건축가들의 의견이 반영된 한국 최악의 현대건축과 같은 리서치에서도 목록에 오를 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전주시청과 같이 자주 거론되는 건물이다.
개관 이후부터 광복절 기념식장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1987~1994년, 1996~1997년, 1999~2004년, 2019년의 광복절 기념식이 여기서 열렸다.[4]

4. 전시관 역사


현재 있는 전시관은 2008~2010년에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 것들이며, 이외에도 10여년에 한 번씩은 소소한 개편을 하고 있다.
  • 제1관은 겨레의 뿌리관(구 민족전통관)으로 나라의 오랜 전통을 테마로 하고 있다. 크고 아름다운 광개토대왕릉비가 방문객을 제일 처음 맞이하고 있으며 선사시대의 유물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의 전시품들이 주를 이룬다.
  • 제2관은 원래 근대민족운동관이었으나, 2008년부터 겨레의 시련관으로 바뀌어 개화기와 일제의 침략 과정,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통치를 전시하고 있다. 2전시관과 3전시관은 별개의 건물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어진 형태이다.
  • 제3관은 원래 일제침략관이었으나, 2008년부터 나라 지키기관으로 바뀌어 의병전쟁과 국권회복운동을 전시 하고 있다. 3전시관의 마지막에는 일제가 애국지사들에게 자행했던 고문장면이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 제4관은 겨레의 함성관(구 3.1운동관)으로 3.1 운동과 독립운동을 전시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평화누리로 바뀌어 독립정신과 평화를 주제로 한 인터랙티브 영상이 전시되어 있다.
  • 제5관은 나라 되찾기관(구 독립전쟁관)으로, 독립군의 항쟁을 전시하고 있다.
  • 제6관은 원래 임시정부관이었으나, 2009년부터 새나라 세우기관으로 바뀌어 민족문화 수호운동과 국내외의 다양한 독립투쟁,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투쟁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제7관은 원래 대한민국관이었으나, 2008년경에 폐지된 이후 현재 체험전시와 특별전시를 하고 있다.
  • 홍보관은 원래 사무실이었으나 2017년 리모델링 후 개관했다. 주제는 독립기념관의 역사다.

5. 임원에 대해



5.1. 선정 기준


독립기념관에는 임원으로서 관장 1명을 포함한 15명 이내의 이사와 감사 1명을 두는데(독립기념관법 제7조 제1항), 관장은 독립기념관을 대표하고 그 업무를 총괄하며(같은 법 제9조 제1항),[5] 독립기념관에 두는 임원추천위원회가 복수로 추천한 사람 중에서 국가보훈처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같은 법 제7조 제2항).
관장은 김삼웅, 김주현을 제외하고 전통적으로 독립운동가 및 그 후손들이 관장을 맡고 있다.

5.2. 역대 임원 명단


  • 이사장
    • 김신 (1986~1989)
    • 조일문 (1989~1995)
    • 김승곤 (1995~1998)
    • 민영수 (1998~2001)
    • 윤경빈 (2001~2008)
    • 신용하[6] (2008~2009)
  • 관장
    • 안춘생 (1986~1992)
    • 최창규 (1992~1995)
    • 박유철[7] (1995~2001)
    • 이문원[8] (2001~2004)
    • 김삼웅 (2004~2008)
    • 김주현 (2008~2011)
    • 김능진[9] (2011~2014)
    • 윤주경 (2014~2017)
    • 이준식[10] (2017~2021)
    • 한시준 (2021~ )

6. 창작물 속의 독립기념관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역사가 원래대로 돌아간 후 2009년의 독립기념관에 사카모토 마사유키독립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연기훈과 조명호의 회담장소가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이다.

7. 노동조합


  • 독립기념관 노동조합: 과거 민주노총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소속이었으나, 2010년 탈퇴 후 미가맹 상태임.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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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외곽에는 1995년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의 첨탑과 석재의 일부를 전시해놓은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이 있다. 본 전시관이 있는 구역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라 찾는 발길이 적지만, 꼭 가볼만한 장소 중 하나이다. 원래 이 전시공원에는 이렇게 부재들만 전시할 계획이 아닌, 총독부 건물 전체를 해체 후 옮겨 재건하여 전시할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여러 문제로 부재들만 옮기는 수준에서 그쳤다고 한다. 경복궁 복원 공사와 일제 잔재 청산 시절이 시작되던 1995년 김영삼 정권 시절 정부 내에서는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 전체를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여 전시할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총독부 건물을 해체하여 독립기념관 서쪽 부지에 복원하여 항일활동 기념관으로 쓸 예정이었다고. 서쪽이 해가 지는 방향이라 저물어버린 일제의 세력을 고스란히 상징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결정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엄청난 비용 문제로 인해 무산되었고, 결국 건물은 철거되어 일부 상징적 석재만이 전시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이전 복원 비용이 철거비용을 상회했다고 한다.(이전비용 2000억원, 철거비용 117억원.)
외곽에 조성된 밀레니엄숲에 철로가 놓여 있고 구형 탕엥 무궁화호 객차 2량과 4007호 디젤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한때는 이 객차들을 이용해 열차카페를 운영한 적이 있으나 찾는 발길이 없어서 금방 없어졌고, 원래는 운행 당시의 도색이었으나 현재는 태극무늬가 들어간 백색으로 도색되어 있다. 창문이 깨져있고 도장 상태도 영 아니여서 관리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
대한민국 국군 신분의 군인이 개인 휴가 기간 중 독립기념관을 방문할 경우, 복무 기간 중 1회에 한하여 추후 1일의 휴가가 보상으로 제공된다. 안내센터에 방문하여 휴가증에 도장을 찍어서 소속부대에 제출하면 된다. 2시간 이상 독립기념관을 자유관람하거나 정해진 시간대에 1시간 동안 해설강사와 같이 코스를 돌아야 한다.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주요 교육은 독립운동사 특강, 독립운동 주제 영상 상영, 역사 골든벨 등이 있다.
평수로 12만평이 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에 독립기념관 내의 모든 곳을 하루 안에 다 가보기는 어렵다. 겨레의 탑, 백련못, 겨레의 마당, 겨레의 집, 제 1~6전시관 보고 원형극장에서 시간 되면 4D 영화를 보는 식으로 관람을 마치는게 가장 짧고 일반적인 코스인데, 이게 4km가 넘는다. 추모의 자리나 대숲쉼터, 솔숲쉼터, 통일염원의 동산이나 조선총독부 잔해 전시장소 같은 곳까지 가보려면 아예 작정하고 아침 일찍부터 해질녘까지 돌아다닐 각오를 해야 한다.
대부분의 전시품은 모조품이다. 진품 유물들은 제 7전시관 쪽의 수장고에 소장되어 있다. 겨레의 집 지붕 처마에는 겨울철에 대형 고드름이 생겨 안전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로 열선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겨레의 마당에는 수백 개의 태극기가 게양된 성역같은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태극기의 숫자는 광복을 상징하는 815개이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동일 크기의 석조로 재현해놓은 비석이 있다. 국내 최대 크기의 비석이라고.
독립기념관 진입로 로터리에 있는 청동 조형물은 '고난극복의 한국인상' 인데 원래 제 3전시관 안에 있었으나 현 위치로 옮겨졌다. 이후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4전시관에 전시중이던 3.1 정신상을 로터리로 옮겨 전시하는 중이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일보사가 신문을 찍어낼 때 사용했던 윤전기가 제 6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2000년대 초반 들어 안티조선 운동과 더불어 조선일보가 저질렀던 친일 행각이 드러나자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들의 시위 끝에 2003년 해당 전시물이 철거된 적이 있었다. 1987년 광복의 동산에 세워진 '홍난파 선생과 감나무'란 비석이 있었으나, 위와 비슷한 이유로 2015년에 철거되어 단죄문이 설치되었다.
겨레의 집 앞에 전두환의 이름이 새겨진 건립비가 있었으나, 2007년에 철거되어 외곽으로 이전되었다. 전두환 이름이 들어 있는 기념식수 표지석도 함께 철거했다고 한다.
독립기념관 본 건물 오른쪽에 C-47 수송기 기체가 정태보존 처리되어 있다. 수직미익에 ‘451123’이라고 적혀 있다. 2016년 3월부터 전시하고 있다. 해방 직후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이 귀국할 때 타고 온 항공기이다. 다만 당시의 항공기는 아니고 같은 기종을 구입, 복원한 '레플리카'에 가깝다.
1987년 개장 직후 무질서로 난장판이 된 독립기념관의 모습이 MBC 뉴스데스크 카메라출동에 보도된 바 있다.(기사후속기사영상) KBS 9시 뉴스보도했다.
인터넷 등기소 사이트에서 법인 등기사항증명서 테스트 출력을 하면, 독립기념관의 등기사항증명서가 출력된다. 그리고 봄 가을 풍경이 좋아 여기서 졸업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다. 전시관 내에 엄복동이 독립운동에 기여한것마냥 안내되어 있다(...). #

9. 교통 수단


교통수단
가는 방법
비고
자가용
경부고속도로 목천IC로 나와 직진하면 도착할 수 있다.

기차
천안역
천안역 3번출구 → 천안역동부광장(655) 정류장
→ <시내버스> '''400''', 380, 381, 382, 383, 390, 391, 392, 402
400번 10~20분 간격 운행
약 30~35분 소요
천안
아산역

수도권 전철 1호선 아산역 → 천안역 → 이후 위와 동일
아산역 1호선 시간표
고속
시외
버스
천안
종합
버스
터미널

종합터미널(686) 정류장 3번 승강장
→ <시내버스> '''400''', 380, 381, 382, 383, 390, 391, 392, 402,
400번 10~20분 간격 운행
약 40~45분 소요
천안터미널 → 독립기념관 행 시외버스
약 1시간 간격 운행
약 15~20분 소요
₩1,500
  • 이밖에 천안역과 천안종합터미널 부근에서 독립기념관까지 택시를 이용할 경우 약 13000원 정도 나온다.

10. 관련 문헌


[정재정,2014,302] 정재정,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서울: 역사비평사), pp.302, 2014[대한뉴스1415] 전두환 정부 당시 평화의 댐과 더불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벌였으며, TV를 통해 모금 방송을 하기도 했다.#[1]조선총독부 청사[2] 당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독립기념관 입지 선정에 관여했는데, 그는 박정희 정권 말기 행정수도 이전계획에도 참여한 경력이 있다.[3] 그의 저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도 수록됨.[4] 1995년(광복 50주년), 2005년(광복 60주년), 2010년(광복 65주년 겸 광화문 복원 기념) 광복절은 광화문 앞 특설 행사장에서 기념식을 치렀다. 또 2008년(정부수립 60주년) 광복절은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서, 2018년(정부수립 70주년) 광복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념식을 치렀다. 이외의 기간(1998, 2006~2007, 2009, 2011~2017)에는 모두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식이 거행됐다.[5] 보통 특수법인의 대표자는 이사장인데, 독립기념관의 대표자는 이사장이 아니다.[6]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7]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손자. 이후 광복회장 역임.[8] 독립운동가 수당 이남규의 증손자. 이후 수당기념관장 역임.[9] 독립운동가 김병우의 손자.[10]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