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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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炯九
1945년~
진형구는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며,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기도 하다. 아들인 진동균은 부장검사에 대기업인 CJ그룹의 법무담당 임원을 맡았지만 여검사 성추행 혐의로 인해서 처벌받기도 했다. 한동훈의 장인이기도 하다.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제11회 사법시험에 합격[1] 하였고 사법연수원 1기를 수료했다. 검사에 임용된 이후에는 주로 기획통으로 활약했으며 동시에 형사통, 공안통이기도 했다. 그리고 업무 추진력이 남다르고 검찰실무, 법무행정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서 후배 검사들의 신망을 상당히 많이 얻기도 했다. 또한 명분보다 실리를 우선하기도 했다.
1983년에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1985년에 대검찰청 전산관리담당관, 1986년에 법무부 인권과장, 1987년에 법무부 법무과장을 맡았으며 1989년에는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2] 형사2부장으로 영전했다. 그 뒤 1990년에 서울고등검찰청 검사가 되었고 1991년에 서울지방검찰청 총무부장, 1992년에 서울지방검찰청 조사부장, 1993년에 서울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등을 두루 거쳤다.
1994년에는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장[3] 이 되었으며 이후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을 거쳐서 1997년에 대검찰청 감찰부장이 되었고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인 1998년에는 대검찰청 공안부장으로 영전했다. 이후 김태정 검찰총장의 신뢰를 받으면서 신공안을 뒷받침하기도 했으며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소환 방침을 흘리는 등의 행위를 하면서 "신중하지 못하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99년에는 대전고검장으로 발령이 났지만 이후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는 과정에서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을 하고 모든 언론이 보도를 하면서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이 커지기 시작했고 이에 진형구는 '''취중실언'''이라고 하면서 이를 무마하려고 했으며 검찰 측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정을 했지만 검찰에 대한 부정여론이 거세지자 진형구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리고 검찰은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옷로비 사건과 맞물려서 김대중 정부가 수세에 몰리고 특별검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지만 국가의 조직적인 개입은 없었다고 하면서 수사는 종결되었고 법원에서도 파업유도 자체에 대해서 무죄판결을 내리면서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김대중 정부에 대한 여론은 점점 좋지 않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김태정 법무부장관이 취임 8일 만에 사임하는 등 김대중 정부의 도덕성에 큰 치명타를 남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진형구는 대전고검장에서 면직되었다.
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2002년에 차이나라이프 발행인을 맡으면서 언론인으로 재기했으며 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
秦炯九
1945년~
진형구는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며,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기도 하다. 아들인 진동균은 부장검사에 대기업인 CJ그룹의 법무담당 임원을 맡았지만 여검사 성추행 혐의로 인해서 처벌받기도 했다. 한동훈의 장인이기도 하다.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제11회 사법시험에 합격[1] 하였고 사법연수원 1기를 수료했다. 검사에 임용된 이후에는 주로 기획통으로 활약했으며 동시에 형사통, 공안통이기도 했다. 그리고 업무 추진력이 남다르고 검찰실무, 법무행정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서 후배 검사들의 신망을 상당히 많이 얻기도 했다. 또한 명분보다 실리를 우선하기도 했다.
1983년에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1985년에 대검찰청 전산관리담당관, 1986년에 법무부 인권과장, 1987년에 법무부 법무과장을 맡았으며 1989년에는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2] 형사2부장으로 영전했다. 그 뒤 1990년에 서울고등검찰청 검사가 되었고 1991년에 서울지방검찰청 총무부장, 1992년에 서울지방검찰청 조사부장, 1993년에 서울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등을 두루 거쳤다.
1994년에는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장[3] 이 되었으며 이후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을 거쳐서 1997년에 대검찰청 감찰부장이 되었고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인 1998년에는 대검찰청 공안부장으로 영전했다. 이후 김태정 검찰총장의 신뢰를 받으면서 신공안을 뒷받침하기도 했으며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소환 방침을 흘리는 등의 행위를 하면서 "신중하지 못하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99년에는 대전고검장으로 발령이 났지만 이후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는 과정에서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을 하고 모든 언론이 보도를 하면서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이 커지기 시작했고 이에 진형구는 '''취중실언'''이라고 하면서 이를 무마하려고 했으며 검찰 측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정을 했지만 검찰에 대한 부정여론이 거세지자 진형구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리고 검찰은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옷로비 사건과 맞물려서 김대중 정부가 수세에 몰리고 특별검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지만 국가의 조직적인 개입은 없었다고 하면서 수사는 종결되었고 법원에서도 파업유도 자체에 대해서 무죄판결을 내리면서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김대중 정부에 대한 여론은 점점 좋지 않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김태정 법무부장관이 취임 8일 만에 사임하는 등 김대중 정부의 도덕성에 큰 치명타를 남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진형구는 대전고검장에서 면직되었다.
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2002년에 차이나라이프 발행인을 맡으면서 언론인으로 재기했으며 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