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혜공

 



'''진(晉)나라 22대 국군
혜공
恵公
'''
''''''
희(姬)
''''''
진(晉)
''''''
이오(夷吾)
'''아버지'''
진헌공(晉獻公) 희궤제(姬詭諸)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697년 이전 ~ 기원전 637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50년 ~ 기원전 637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즉위에 이은 배신
2.3. 한원 전투와 사망[1]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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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晉)의 22대 군주. 진무공의 손자. 진헌공의 아들. 진문공의 동복 아우. 진헌공 사후 혼란에 빠진 진(晉)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진목공의 원조를 받아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신의를 잊고 자신을 원조한 진(秦)과 자주 다투었다.[2]

2. 생애



2.1. 즉위 이전


진 헌공은 애첩인 여희의 미모에 반해 그 사이에서 희해제를 낳고 그를 태자로 삼기 위해 희신생과 훗날 진문공이 될 희중이,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인 진혜공 희이오를 도성에서 내보냈다. 희이오는 굴 땅에 봉해졌다.
진 헌공 21년(기원전 655년), 여희의 계략에 넘어간 진헌공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의심하여, 희신생을 자결케 했다.[3] 그리고 2년 뒤 여희는 후환을 뿌리 뽑기 위해 희이오와 희중이에게 신생의 패륜 음모를 뒤집어 씌우니, 이오는 결국 대비하려 했으나 형세가 이롭지 못해 양(梁)나라로 달아났는데, 그 이유는 진과 양이 가까운 나라이기도 하지만, 희중이와 같이 적(狄)나라 땅으로 달아났다가 암살 혐의가 사실이라는 혐의가 짙어질 것을 우려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양나라 군주의 딸과 결혼해 훗날 진회공이 되는 희어[4]와 딸 하나[5]를 낳았다. 이극과 진목공은 혼란에 빠진 진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 희이오를 불러들여 진나라의 군주로 받들었다.[6][7] 그가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 진혜공이다.

2.2. 즉위에 이은 배신


진혜공 원년(기원전 650년), 비정을 보내 5성을 주겠다는 약속을 철회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즉위 시키는 데 기여한 공신인 이극에게 줄 분수 이북 땅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권력을 빼앗는 개막장 짓을 했다. 당연히 공신들에게 상도 일체 주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주양왕이 주공 기보[8]과 왕자 당을 사신으로 보내 제의 대부 습붕과 진의 대부와 함께 그를 진나라 군주로 승인했다. 그리고 기예의 말을 듣고 공신인 이극을 죽여버렸는데, 사기에 의하면 외국에 나간 희중이와 내응할까 두려워서라고 했다.[9] 하지만 춘추좌씨전에는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두예[10]의 주해에 의하면 찬탈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11] 양백준은 임금을 시해한 악인을 죽인 것이라고 알기 쉽게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죽인 뒤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형인 신생의 묘소를 개장했다. 한편 진 목공의 진나라로 간 비정은 여생, 극칭, 기예 셋이 진나라에 선물을 주지 않게 하므로 이들을 유인해 진혜공을 몰아내고 희중이를 진나라 군주로 모실 것을 제안했다. 진 목공이 거기에 따르자 여생, 극칭, 기예는 비정의 파당을 몰살했다. 사마천의 평에 의하면 그것 때문에 진혜공은 민심을 잃었다고 한다.
진혜공 4년(기원전 647년), 진혜공은 진 목공에게 곡식을 팔라고 해서 진 목공이 승낙했다.
진혜공 5년(기원전 646년), 진 목공의 진나라에 흉년이 들자 진혜공은 대부 괵사의 말을 듣고 쿨하게 거절해버렸다. 그 이유가 가관인 게 선물 안 준 김에 쿨하게 주지 말자고... 거기다가 괵사의 말이 더욱 가관인 게, 오히려 진 목공의 진나라를 치자고 했다. 물론 간신배가 들끓으면 충신이 있는 법이라 경정이 반대했으나 진혜공은 그것을 씹었다.

2.3. 한원 전투와 사망[12]


진혜공 6년(기원전 645년) 봄, 진 목공의 진나라를 쳤다. 그러나 3연타로 발려 한원으로 쫓겨났다. 결국 진혜공은 가복도를 차우로, 보양을 융차의 어자로 삼았다. 그리고 정나라 말 소사로 끌게 했으나 경정은 소사가 실전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진혜공은 그것을 씹어 먹었다.
같은 해 9월, 한씨 가문의 당주인 한간에게 정탐하게 했는데, 그는 진 목공의 병력의 수는 적으나 사기가 왕성하다고 했는데, 진혜공은 어리석게도 그 말을 개무시하고 전투를 벌였는데, 소사가 놀라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그러나 그는 경정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경정은 구하지 않았다. 단 여기에는 실드칠 요소는 있는게, 자신의 힘만으로 부족하여 양유미, 한간, 괵사 등에게 구하게 하려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그 세명이 잡으려 했던 진 목공은 달아나고 진혜공만 사로잡히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진목공은 진혜공을 풀어주는 대신 태자 희어를 인질로 요구했다. 그리고 하외 5성을 챙겼다.
진혜공 13년(기원전 638년), 혜공이 병이 들었고, 그것을 핑계로 희어가 돌아왔다.
진혜공 14년(기원전 637년), 진혜공이 죽었다. 그의 아들 희어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회공이다.

3. 평가


진 목공의 원조를 받아 즉위해 5개 성을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주지 않았으며, 자신이 흉년이 들 때 진 목공에게 징징대고서는 진 목공이 흉년이 드니까 입을 싹 씻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원 전투를 벌이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자업자득으로 자신이 잡히고, 자신 대신 자신의 세자인 희어가 인질로 잡혔다가 죽기 직전에야 아들을 볼 수 있었다.
[1] 단, 후술하듯이 이 전투로 죽지 않았다.[2] 진혜공은 머리는 좋은 편이었지만 너무 신의가 없고 욕심만 많아서 진나라의 많은 선비들은 이오보다 그 형인 중이를 더 선호했다.[3] 자세한 사항은 진헌공 문서를 참조하시라.[4] 양백에게 점을 치게 하니 신하가 된다하여 그리 지었다.[5] 그 딸의 이름은 첩이다. 절대 농담이 아니다. 역시 양백에게 점을 치게해 첩이 된다고 나와서 그리 지었다.[6] 물론 공짜로 해준 것은 아니고 진혜공이 자신이 진나라의 군주가 되면 진나라의 5개 성을 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7] 덤으로 이극 등은 원래 희중이를 맞아들이려 했으나 희중이가 거절했다.[8] 주공 단의 후손.[9] 다만 이것은 막장짓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게, 이극이 희해제와 희탁자를 죽여버리고 희중이를 끌어들이려 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0] 삼국지에 나오는 그 두예 맞다.[11] 이극이 희해제와 희탁자를 죽인 바탕 위에 즉위한 것을 지적한 것.[12] 단, 후술하듯이 이 전투로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