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왕(주)
1. 개요
주나라의 제18대 왕. 혜왕의 아들이며, 경왕(頃王)의 아버지.[1] 그는 춘추오패의 둘을 만난 왕이다. 그들은 바로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이다.[2]
2. 재위 기간
양왕 원년(기원전 651년), 제 환공은 송(宋)나라 계구 땅에서 노 희공(魯僖公), 송 양공(宋襄公)[3] , 위 문공(衛文公), 정 문공(鄭文公), 허 희공(許僖公), 조 공공(曹共公)과 함께 회맹을 하였다. 양왕은 주공을 보내 천자의 사신 자격으로 이 회맹에 참여하게 해 주 양왕이 선조에게 제사한 고기를 돌렸다. 이것을 계구지맹이라 한다.
양왕 7년(기원전 645년),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이 죽었고,
양왕 9년(기원전 643년), 제 환공이 관중이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간신배 역아, 수초, 개방의 손에 굶어 죽었다. 그리하여 송 양공은 그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나섰다.
양왕 10년(기원전 642년), 송 양공은 조(曹)나라, 위(衛)나라, 주(邾)나라와 함께 제나라로 가서 역아, 수초의 무리와 공자 무휴(無虧)[4] 를 죽이고, 강소(姜昭)를 왕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제 효공이다.
양왕 13년(기원전 639년), 송 양공은 그 일을 성공시키고 기고만장하여, 패자(霸者)를 칭하려 했으나 국력이 약해 초 성왕(楚成王) 등에게 인정을 못받는 굴욕을 당했다.
양왕 14년(기원전 638년), 송 양공은 초 성왕과 회맹을 하려다가 이복형인 목이(目夷)의 말을 듣지 않고 병사를 데리고 가지 않아 결국 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목이가 송나라 공작이 된 척 연기를 하는 바람에, 초 성왕은 송 양공과 목이의 내분을 노려 풀어줬으나 목이가 사심없이 송 양공을 모시는 바람에 그것은 실패하였다.
양왕 15년(기원전 637년), 송 양공은 초 성왕과 홍수(泓水) 전투를 벌였으나 그놈의 송양지인 때문에 애꿎은 송나라의 병사만 죽었을 뿐 아니라 자신도 다쳐서 그 해에 죽고 말았다.
지금껏 양왕과 직접 관계가 없는 이 이야기를 왜 했느냐면 이 왕 대에 일어난 패자 자리를 둘러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양왕 16년(기원전 636년), 공자 중이(重耳)가 (진 목공)(秦穆公)의 지원을 받아 19년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진후(晉侯)가 되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진 문공이다.
양왕 17년(기원전 635년), 자신의 아우인 태숙대(太叔帶)가 형수인 외후와 사통했다가 그 사실을 들켜서 반란을 일으켜 주 양왕이 쫓겨나 정나라로 피신했다. 진 문공이 그를 구해주고 태숙대를 죽였다. 그러자 양왕은 진 문공에게 하내, 양번 등을 주어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 땅의 사람들은 진 문공을 따를 마음이 없었으나 진 문공은 신의를 지키는 마음을 보여주어 결국 그 땅을 차지하였다.[5]
양왕 20년(기원전 632년), 성복 전투에서 진 문공은 초 성왕이 보낸 성득신(成得臣)을 물리쳐 초나라로 돌아가 자결하게 했다.
양왕 32년(기원전 620년), 그가 죽고, 그의 아들 희임신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경왕(주 19대)이다.
[1] 시호의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주경왕이 2명이 더 있다. 景, 敬 순이다.[2] 다른 춘추오패로 알려진 초 장왕(楚莊王)은 그 다다음 세대 사람이다.[3]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4] 달리 무궤(無詭)라고도 한다.[5] 3일 동안만 공격하겠다고 해서 정말로 그렇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