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더 전투
중국어: 常德會戰(창더 회전)
일본어: 常徳殲滅作戦(창더 섬멸작전)
영어: Battle of Changde(창더 전투)
중일전쟁 중인 1943년 11월 초부터 12월 말까지 일본군과 국민혁명군이 창더에서 맞붙은 전투. "동방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창더는 둥팅호(洞庭湖) 서안(西岸), 위안장(沅江)을 끼고 있는 후난성 북부의 대도시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초나라의 검중(黔中) 지역으로서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로 각광받았고 진나라 시기에 임원현(臨沅縣)이 설치되었고 후한 시기 때 무릉군(武陵郡)으로 승격했다. 이후 당나라 때 낭주(朗州), 송나라 때 정주(鼎州)로 불렸고 남송 이후 창더라고 불렸다. 창더는 위안장 유역의 물자 집산중심지이며 교통중심지다. 지청-류저우 철도, 스자좡-창사 철도가 근처에 있고 동유(桐油)를 비롯하여 쌀·목화·차·모피·채종유(菜種油) 등의 집산지이며 양조, 면막직 등 공업이 활발하며 이들 물자는 중형 선박에 실려 웨양, 창사, 우한 등지로 운송된다. 그밖에도 기계, 식품, 조선, 화학, 방직 등의 공업이 발달했고 어업도 발달했다.
이렇듯 평시에도 중국 서남부의 경제적, 전략적 요충지였던 창더는 중일전쟁 시기에 매우 중요한 곳으로 각광받았다. 1938년 우한 전투에서 패해 중국 최대의 공업단지였던 우한을 상실한 중화민국으로선 창더를 우한의 대체지로서 중요하게 여겼다. 일본 역시 창더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1939년 이래 수년간 창더에 여러차례 공습을 가했다. 또한 국민정부가 연합군과 함께 중인도 도로를 뚫기 위해 제6, 제 9전구로부터 7개군을 차출해 원난 및 인도로 이동시켜 버마를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1] , 일본군이 이를 저지하려면 중국과 인도 간의 교통로를 끊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자면 후난성 교통의 중심지인 창더 공략이 필수적이었다.
1943년 여름,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대신은 중국을 굴복시키려면 영미와 중국간 교통로를 끊어야 하며, 이를 위해 남방작전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대본영은 지나 파견군에게 남방작전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지나파견군은 중국 공군과 미 공군의 증강과 화북 팔로군의 상황, 지나 파견군별 자급 상황을 분석, 연구한 후 1943년 8월 28일에 <쇼와 18년 가을 이후 지나 파견군 군사작전 지도요강>을 발표했다. 이 작전지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3년 11월 1일 밤, 일본군 5개 사단이 3개의 진군로를 통해 일제이 출격했다. 제 39사단과 제 13사단은 좌익을 맡아 국민혁명군 제10집단군의 주력 진지를 공격했고, 제 68사단은 국민혁명군 양 집단군의 경계를 가로질러 츠리현을 공격하려 했으며, 제 3사단은 제 29집단군의 전면에서 강을 도하해 29집단군의 주력을 섬멸하려 했다. 또한 창더 작전의 주력인 제116사단은 둥팅호를 건너 국민혁명군 제 29집단군의 우측면에 착륙해 한개 부대는 제 44군을 견제하고, 다른 군대는 창더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이러한 기동전을 통해 국민혁명군을 포위섬멸하고 창더를 단시일에 제압하고자 했다.
제10집단군 사령관 왕징주는 적이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받자 일본군의 주요 공세는 난수로(暖水街)와 왕가창(王家厂) 지역일 거라고 예상하고 제79군과 제66군 주력을 난수로 및 왕가창에 파견해 그곳을 사수할 것을 지시했다. 79군과 66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11월 4일에 난수로로 후퇴해 난수를 통해 침입하려는 일본군의 공세를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6전구의 지원을 기다렸다.
11월 3일, 양쯔강 연안 일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국민혁명군 제 73군은 리현에서 일본군과 맞붙었고, 제 44군은 둥강에서, 제 79군은 가하시(街河市)에서 일본군 주력과 상대했다. 제6전구 사련관 쑨롄중은 적의 공세를 살펴본 후 적의 주력이 창더로 이동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11월 4일 저녁 74군장 왕야오우에게 전보를 보내 도원으로 향하게 했고 제 57사단에게 즉시 창더에 들어가 창더 외곽에 방어시설을 건설하게 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정말로 창더를 주요 목표로 삼았는 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쑨롄중은 일본군이 전투 초기에 샹시 지역에 기승을 부리자 일본군이 샹시 지역을 목표로 삼은 것일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일본군이 창더를 주공으로 삼았음이 명백해질 때까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고, 강 방어군 지휘관 우치웨이에게 진지를 고수하며 적을 경계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한편 6전구 예비군인 26집단군과 33집단군에게 대기 명령을 내렸다.
그러던 중 일본군 제 13사단의 전투 참모 사쿠라 중좌가 이동 중 국민혁명군에게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참모는 일본군의 창더 공세와 관련된 중요한 서류를 휴대하고 있었다. 13사단 사령부는 이 소식에 발칵 뒤집혀 사방을 수색해 문서를 회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국민혁명군은 이 문서를 통해 일본군의 주요 공세가 창더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월 7일, 제1선 병단 2개 집단군은 왕가창, 난수로, 홍묘 일선에 방어선을 형성했고 제74군 제 2선 병단은 후방의 도원을 점령했다. 일본군 제 3, 13, 39, 68사단의 주력 부대와 제 40, 58사단의 분대는 이 방어선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11월7일 오전까지 격렬한 전투를 벌인 79군 임시 6사단은 막심한 사상자를 낸 채 철수했다. 이에 제10집단군 사령관 왕징주는 전선 각 부대에게 전보를 보내 용감하게 역습하여 진지를 회복하라고 명령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전황은 갈수록 위급해졌다. 하지만 왕징주는 아직 구원부대가 오지 않는 상황에서 10집단군이 단독으로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공격적인 방어 전술을 채택했다. 즉, 왕가창과 난수로로 일본군을 끌여들인 뒤 외곽 부대로 하여금 적을 포위해 섬멸하기로 한 것이다. 왕징주는 패퇴한 6사단에게 난수로 수비를 맡겨 일본군을 끌여들이는 '자석' 역할을 맡게 했고 제 98사단과 제 194사단에게 정면의 적과 항전하며 시간을 끌게 했으며 제 199사단에게 난수로를 공격하는 적의 측면을 요격하게 했다. 이후 일본군은 제10군 방어선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했기 때문에 쉽사리 뚫지 못했다.
11월 12일, 일본군은 일주일이 넘게 10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전황은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이러다가 6전구의 지원 병력이 도착한다면, 일본군은 여지 없이 협공당할 것이다. 게다가 공격 부대의 사상자가 이미 3천여 명에 달해 사기가 침체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주공의 방향을 바꿔 신안과 석문의 전선으로 주력을 이동시켜 29집단군 정면을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난수로 쪽에는 제39사단 2개 연대만 남아서 국민혁명군 제 10집단군을 견제하게 했다.
제 10집단군이 전 전선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제 29집단군 역시 일본군과 교전하고 있었다. 일본군 제3사단이 강을 도하해 29집단군의 전면을 공격한 후, 제116사단 1개 부대가 둥팅호를 건너 빈후구를 점령해 29집단군의 후방을 급습했다. 29집단군은 적이 동시다발적으로 아군의 전면과 후위를 공격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6전구 사령관 쑨롄중은 급히 29집단군에게 전보를 보내 빈후구 지역을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석문과 리현 사이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29집단군 사령관 왕예서는 명령에 따라 병력을 퇴각시켰고 44군을 리현에, 제 73군 주력을 석문에 배치했다.
그런데 11월 13일, 왕예서는 44군이 거듭된 패퇴로 지칠대로 지쳤다고 판단하고 쑨롄중의 지시를 확대 해석해 44군을 리현에서 철수시켰다. 그러나 73군은 여전히 석문을 사수하고 있었고 왕예서로부터 아무런 명령을 접수받지 못했다. 게다가 73군 군장 왕지빈은 석문의 방어 상태를 보고 경악했다. 요새는 전혀 없었고 단지 20km에 달하는 참호만 파여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44군이 철수해버렸으니, 이제 그들은 아군의 엄호를 받지도 못하고 단독으로 이 형편없는 방어 시설에서 적과 대적해야 할 위기에 몰렸다.
왕지빈은 야전공사를 서둘러 실시했고 임시 5사단을 석문에 배치하고 제 77사단과 제 15사단을 석문 외곽에 배치해 어떻게든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11월 14일, 일본군은 석문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원래 44군이 맡았던 리현을 지나 73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 결과 석문 수비대 우익이 붕괴되는 등 전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한편,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73군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당황했고 군령부 차장 류페이(刘斐)는 제 6전구를 거치지 않고 29집단군 사령관 왕예서에게 전보를 보내 73군을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11월 14일 저녁,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73군 군장 왕지빈은 석문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대가 난수를 도하할 때까지 5사단에게 후위에서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때 일본군은 석문 후방으로 우회하여 73군이 강을 건너고 있을 때 요격했다. 이 갑작스런 역습에 당황한 73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왕지빈은 참모들만 이끌고 츠리현으로 퇴각한 뒤 그곳에서 잔여 병력을 수습했다. 한편, 석문에 배치된 임시 5사단 역시 아군의 맨 뒤에서 난수를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15일 해질 무렵, 일본군이 그들을 포위했다. 임시 5사단장 펜즈량은 결사적으로 항전하다가 전사했고 5사단은 완전히 궤멸되어 생존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석문을 공략한 일본군은 뒤이어 난수를 건너 29집단군 측면을 공격했다. 제29집단군에 속한 제44군 제150사단의 방어선은 삽시간에 무너졌고 제161사단 역시 일본군의 공격으로 부대가 절단되는 상황에 놓였다. 왕예서는 이 난국에 안전한 후방으로 사령부를 옮겼고, 44군 군장 왕택준은 전선이 너무 길어 일본군의 돌파구가 너무 많으니 방어선을 고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 전선의 44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73군은 츠리현에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있다가 상부로부터 츠리현을 사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1월 17일, 일본군 116사단 전체가 둥팅호를 건너 44군 우익을 공격했다. 여기에 제 3사단과 13사단이 29집단군의 정면을 공격했고, 17여단과 58사단 1개 부대가 연합하여 츠리현으로 진격했다. 또한 68사단은 수로를 통해 진군하여 곧장 창더의 측면 지대에 상륙했다. 이때 국민혁명군의 제1 방어선은 거의 붕괴되었고 제29집단군 전체 부대가 고전했고 측면이 공략당할 위기에 처했으며, 제10집단군 역시 39사단과 상대하는 동시에 116사단의 후방 공격을 받을 위험에 처했다.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국민혁명군 제6전구의 핵심 부대인 제10집단군과 제 29집단군이 포위 섬멸당하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때 일본군 13사단은 남쪽으로 진군했고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68사단도 삼선호를 건너 창더 동남쪽의 한수에 상륙했다. 한편 제10집단군과 맞붙었던 39사단은 수세에 몰려 10집단구을 견제하는 데 만족한 듯했고 제116사단은 창더로 곧장 진군하여 임야에 도착, 창더를 향한 진군로를 개척했다. 여기에 일본군은 제 3사단과 제 13사단으로 하여금 제74군과 제44군이 창더로 오는 것을 차단했고 제 26사단은 안향에서 배를 타고 곧장 한수를 건너 창더로 진격했다.
급기야 일본군은 도원에 낙하산부대를 투입했다. 11월 21일 저녁, 낙하산 부대가 투입되어 도원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다수의 낙하산 부대원들이 전사했다. 또한 제3사단의 주력과 116사단 109연대는 배산을 공략한 후 도원에 있는 제 150사단을 포격했다.
제 150사단장 허국장(許國璋)은 절대로 후퇴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 도원으로 접근하는 116사단을 상대로 항전했으나 거의 반나절 만에 150사단 병사들이 대거 사살되었다. 허국장은 일본군이 150사단을 거의 돌파했다는 것을 깨닫자 공병 중대를 급파해 방어시설을 보강하게 했지만 공병 중대는 30분 이내에 거의 죽거나 부상당했다. 이에 허국장은 450연대의 잔여 병력을 직접 인솔해 돌격했으나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후 150사단은 거의 전멸했다.
허국장은 중상으로 의식을 잃고 경위대에 의해 나룻배에 실려 후송되었다. 허국장이 깨어났을 때 이미 강을 건넌 뒤였고 부대는 대부분 섬멸되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허국장은 분통을 터트리며 외쳤다.
도원이 함락된 후, 국민혁명군 100군 제 19사단이 전장에 도착해 황스시에서 일본군 제3사단과 격전을 벌였다. 19사단장 당백인은 전황이 위급함을 고려하여 부대를 매일 70km 씩 강행군시켰다. 그리하여 황스시에 도착한 19사단 병사들은 지칠대로 지쳤으나, 뜻밖에도 일본군은 황스시 공격에 그리 열을 올리지 못했다. 이후 그의 부대는 창더 전투가 끝날 때까지 황스시를 사수했지만 전체 전황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1월 21일, 제10집단군은 군대의 방향을 돌려 석문 탈환에 나섰지만 석문 수비를 맡은 일본군 39사단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또한 제29집단군은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급급해 창더 방위를 위해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 일본군 제 3사단과 제 116사단은 도원을 지나 창더로 향했고, 제 13사단은 제 73군의 저항을 가볍게 무찌르고 츠리현을 공략했다. 또한 제 68사단은 22일에 한수를 점령했다. 이제 제 3, 13, 68, 116사단은 창더를 포위해 창더 공방전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한편, 국민혁명군 6전구 직할 군대인 제 74군은 창더를 구원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11월 16일 창더로 진군하고 있던 적과 교전을 벌였다.이에 일본군 3사단과 13사단은 11월 22일 명월산에서 야전 진지를 쌓고 있던 제 74군 소속 51사단을 급습했다. 51사단장 저우즈다오(周志道)는 1만 5천명에 달하는 적과 맞서 항전해 74군이 집결할 시간을 벌어줬다. 그러나 5차례에 걸친 적의 맹공에 중과부적으로 진지가 함락되었고, 저우즈다오는 전사했다. 이후 도원이 함락되어 측면이 위험해지자, 74군 군장 왕야오우는 칠가하 이남의 방어선으로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후 74군은 방어 시설을 건설하고 창더 구원을 위해 군세를 재정비했다.
이 무렵, 제29집단군 사령관 왕예서는 거듭된 패전으로 병력이 얼마 남지 않았던 73군에게 적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반면 44군은 왕예서의 배려로 전장에서 물러났다. 일본군 역시 44군을 격파한 뒤 더이상 추격하지 않고 창더에 집중했다. 이 때문에 제 44군은 창더 외곽 지역으로 철수해 일본군에게 섬멸될 위기를 모면했다.
창더를 수비한 국민혁명군 제 57사단은 5월부터 창더에 진주하여 방어시설을 건설했다. 제 576사단장 위청완(余程萬)은 창더 도시 외곽에 야전공사를 철저하게 실시했고 교외의 야전 요새와 성벽에 두번째 방어시설을 건설했으며, 모든 중요한 교차로에 콘크리트로 제작된 토치카를 쌓아 시가전을 대비했다. 또한 거리의 골목길을 최대한 활용해 지하 매복 시설을 건설해 도시에 진입한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격멸하게 했며 74군 포병연대 1개 대대와 전방포대 1연대, 고 제 42연대 1개 소대를 창더에 배치해 일반적인 국민혁명군 사단을 훨씬 뛰어넘는 포병 화력을 갖췄다. 또한 위창완은 169연대를 성 북쪽에, 170연대를 성 서쪽에, 171연대를 성 동쪽에 배치했고 성 남쪽엔 위안장을 뒤에 둠으로서 배수로로 삼았으며 창더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켜 일본군에게 해꼬지 당하는 일이 없게 했다.
11월 18일, 일본군 116사단과 제 68사단이 창더에 육박했고 57사단 전초기지가 적군 169연대에게 공격받았다.이 시각, 국민혁명군 제99군단은 일본군 제 40사단의 진군을 저지한 후 한수에서 68사단과 대치했다. 그리고 제44군은 창더 외곽의 타이양산(太阳山)에 주둔했고, 제 74군은 츠리현 이남의 칠가하(漆家河)에 방어선을 쳤으며 제 100군은 도원 이남에서 창더의 수비군에 호응했다.
11월 22일, 일본군 11군 주력부대가 창더 교외에 집결한 후 창더를 향한 맹공격을 개시했다. 특히 그동안의 전투에서 창더에 도착할 때까지 전력 보존을 위해 전투를 가능한 피했던 116사단이 주력을 맡아 창더를 앞장서서 공격했다. 그리고 68사단은 116사단의 좌익을 엄호해 국민혁명군의 지원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제 3사단과 13사단은 츠리, 도원 방면에서 제 74군과 39사단을 저지했으며, 17여단과 58연대 1개 부대는 제 10집단군의 공세를 저지했다.
제 100군 63사단 188연대는 창더 전투 초기 쑨롄중의 지시를 받고 덕산진을 선점해 창더 수비를 맡은 57사단을 지원했다. 이후 창더를 포위한 일본군이 덕산진을 덮치자, 188연대는 급히 응전했으나 하룻밤 만에 덕산진을 빼앗기고 100군에게 귀환했다. 덕산진이 함락된 후, 제 57사단의 후방이 차단되었고 외부와의 교통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11월 24일, 116사단은 강력한 포병을 동원해 57사단 외곽진지에 맹포격을 퍼부은 후 보병 돌격을 감행했다. 이에 57사단의 각 연대는 이를 막아내는 한편 역습을 감행했고, 수류탄 세례와 화공으로 적을 저지했다. 중국군은 결사적으로 일본군의 침임을 저지했고, 일본군 결사대는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116사단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결사대를 투입시켰으나 57사단의 각 연대는 맹렬하게 저항해 이들을 저지했다. 170연대장 장정림(张挺林)은 진지에서 용감하게 돌격했다가 7차례나 중상을 입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또한 중국군은 최루가스를 대량 방출해 창더 시내로 진입했던 일본군 116사단 제 109연대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했고, 109연대는 연대장 누노 대이치 대좌가 전사하고 절반이 넘는 부대원들이 목숨을 읺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11월 25일, 일본군 제 120연대가 국민혁명군 169연대를 공격했다. 120연대는 '무사도'를 실현하겠다는 서약을 맺은 후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했다. 그러나 이들은 169연대의 기관총 세례와 박격포 세례에 휘말려 수많은 부대원을 잃고 패주했다. 또한 국민혁명군 169연대는 창더 남쪽의 위안장을 도하하기 위해 지형을 정찰하던 나카쇼 오이치(中细卢一) 제3사단 6연대장을 저격해 중상을 입혔다.
이후 57사단은 사력을 다해 일본군에 저항했다가 성곽 수비가 뚫리자 시내로 후퇴하여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웠다. 이에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해지자, 일본군은 급기야 독가스를 마구 살포해 국민혁명군 병사들을 모조리 질식시켜 죽였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아군 병사들까지 독가스에 질식해 죽게 만들었다. 12월 2일 밤, 위청완 사단장은 불과 300명 밖에 남지 않은 병사들을 이끌고 중앙은행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했다. 이때 그는 33집단군 총사령관 풍치안(馮治安)과 74군장 왕야오우, 6전구 사령관 쑨렌중에게 전보를 보냈다.
일본군은 10여 일에 걸친 창더 공방전 끝에 마침내 창더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이 시기 제6, 9전구 소속 중국군이 사방에서 압박하기 시작했고 후베이성 북부에서도 천청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하고 일본군의 인프라를 파괴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12월 11일 중국의 포위 전선이 펼쳐지기 전에 철수했고, 중국군은 그들을 맹추격해 잃어버린 모든 영토를 되찾았다. 이로써 창더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일본 측은 자국군이 창사 작전에서 1,274명 전사, 2,977명 부상의 손실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반면 중국 측은 일본군이 4만명을 상회하는 사상자를 냈다고 발표했다. 학계에서는 두 주장 모두 숫자를 왜곡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창사 작전을 집행했던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이 훗날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창사 전투 때 18%의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이 창사 전투에 약 6만 가량의 병력을 파견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일본군의 손실은 적어도 1만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일본측은 자신들이 국민혁명군 2만 9천명을 사살하고 1만 4천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발표했으며, 국민혁명군 측은 제 6전구에서 4만 5천명, 제 9전구에서 1만 5천명, 제 5천구에서 3천명 등 총 6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제5사단장 펜즈량, 10사단장 손명근, 150사단장 허국장(자살)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창더 전투에서 국민혁명군을 상대로 탁월한 전투력과 전략 기동을 선보이며 승전을 거듭했고 창사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이 악착같이 버텼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고 겨우 창더를 공략한 후에 국민혁명군이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사방에서 포위하자 어쩔 수 없이 창더를 포기해야 했다. 이후 일본군은 수만 정도의 군대로는 남방작전을 성사시키기가 힘들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달았고 1944년 4월 50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 대륙타통작전을 개시한다.
일본어: 常徳殲滅作戦(창더 섬멸작전)
영어: Battle of Changde(창더 전투)
1. 개요
중일전쟁 중인 1943년 11월 초부터 12월 말까지 일본군과 국민혁명군이 창더에서 맞붙은 전투. "동방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2. 배경
창더는 둥팅호(洞庭湖) 서안(西岸), 위안장(沅江)을 끼고 있는 후난성 북부의 대도시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초나라의 검중(黔中) 지역으로서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로 각광받았고 진나라 시기에 임원현(臨沅縣)이 설치되었고 후한 시기 때 무릉군(武陵郡)으로 승격했다. 이후 당나라 때 낭주(朗州), 송나라 때 정주(鼎州)로 불렸고 남송 이후 창더라고 불렸다. 창더는 위안장 유역의 물자 집산중심지이며 교통중심지다. 지청-류저우 철도, 스자좡-창사 철도가 근처에 있고 동유(桐油)를 비롯하여 쌀·목화·차·모피·채종유(菜種油) 등의 집산지이며 양조, 면막직 등 공업이 활발하며 이들 물자는 중형 선박에 실려 웨양, 창사, 우한 등지로 운송된다. 그밖에도 기계, 식품, 조선, 화학, 방직 등의 공업이 발달했고 어업도 발달했다.
이렇듯 평시에도 중국 서남부의 경제적, 전략적 요충지였던 창더는 중일전쟁 시기에 매우 중요한 곳으로 각광받았다. 1938년 우한 전투에서 패해 중국 최대의 공업단지였던 우한을 상실한 중화민국으로선 창더를 우한의 대체지로서 중요하게 여겼다. 일본 역시 창더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1939년 이래 수년간 창더에 여러차례 공습을 가했다. 또한 국민정부가 연합군과 함께 중인도 도로를 뚫기 위해 제6, 제 9전구로부터 7개군을 차출해 원난 및 인도로 이동시켜 버마를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1] , 일본군이 이를 저지하려면 중국과 인도 간의 교통로를 끊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자면 후난성 교통의 중심지인 창더 공략이 필수적이었다.
1943년 여름,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대신은 중국을 굴복시키려면 영미와 중국간 교통로를 끊어야 하며, 이를 위해 남방작전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대본영은 지나 파견군에게 남방작전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지나파견군은 중국 공군과 미 공군의 증강과 화북 팔로군의 상황, 지나 파견군별 자급 상황을 분석, 연구한 후 1943년 8월 28일에 <쇼와 18년 가을 이후 지나 파견군 군사작전 지도요강>을 발표했다. 이 작전지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도요강>은 특히 창더의 중요성에 대해 "창더는 후난성 서부의 군사, 정치, 경제 중심지로 동부의 창사와 함께 충칭군의 명맥을 보급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우리 군은 이 곳을 점령해 동남의 창사, 헝양을 압박하고 서방의 쓰촨성 동부를 겨냥할 수 있으며 충칭을 위협할 만한 전략적 요충지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 제11군은 창더작전을 수행할 공격 작전을 수립했다. 그들은 3단계에 걸쳐 작전을 진행하기로 했다. 즉, 먼저 안향 인근의 적을 섬멸하고 주력으로 왕가창(王家厂) 주변의 적을 섬멸한 뒤 창더를 공략하는 동시에 적의 반격을 섬멸하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1943년 10월 하순, 일본군 제 39사단, 제13사단, 제 3사단, 제116사단, 제 68사단, 제58사단 제1부에서 동원된 약 6만 병력이 화용, 석수, 연근지, 사시, 강릉 등지에서 집결해 창더 작전에 착수했다."기존의 점령지역, 특히 화북방면엔 무력 행사를 자제하고 점령지를 평화롭게 다스린다. 올해 가을에 제11군과 제13군 주력으로 창더작전과 광더 작전을 실시한다. 내년 봄에는 화북방면군 제 11군으로 경한선 작전을 실행한다."
3. 전력
3.1. 일본군
- 제 11군: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 지휘.
- 제 3사단: 야마모토 미츠오 중장 지휘.
- 제 13사단: 아카 시카리 중장 지휘.
- 제 39사단: 스미타 시로오 중장 지휘.
- 제 68사단: 사쿠마 히토토나리 중장 지휘.
- 제 116사단: 이와나가 히로시 중장 지휘.
- 코가지대: 제 58사단 차출.
- 사사키 지대: 제 34사단 차출.
- 미야고쿠 지대: 독립 혼성 제17여단 차출.
- 가라타 지대: 제 65사단 차출.
- 항공부대: 제3비행사단 제44전대
3.2. 국민혁명군
- 제 6전구: 쑨롄중 지휘
(1) 제10집단군: 왕징주(王敬久) 지휘
1) 제66군: 군장 방정(方靖)
2) 제 79군: 군장 왕갑본(王甲本)
- 제 185사단: 사단장 석조황(石祖黃)
- 제 199사단: 사단장 저우톈젠(周天健)
- 제 199사단: 사단장 저우톈젠(周天健)
2) 제 79군: 군장 왕갑본(王甲本)
- 제 98사단: 사단장 향민사(向敏思)
- 제 194사단: 사단장 공전문(龔傳文)
- 예비 제 6사단: 사단장 조계평(趙季平)
- 제 194사단: 사단장 공전문(龔傳文)
- 예비 제 6사단: 사단장 조계평(趙季平)
(2) 제 26집단군: 저우레이 지휘
1) 제 75군: 군장 류제명(柳際明)
2) 제 32군: 군장 송긍당(宋肯堂)
- 제 6사단: 사단장 오중직(吳仲直)
- 제 16사단: 사단장 당숙(唐肅)
- 임시 제 4사단: 사단장 왕중주(王中柱)
- 제 16사단: 사단장 당숙(唐肅)
- 임시 제 4사단: 사단장 왕중주(王中柱)
2) 제 32군: 군장 송긍당(宋肯堂)
- 제 139사단: 사단장 손정초(孫定超)
- 제 149사단: 사단장 임작정(林作楨)
- 예비 제 34사단: 사단장 오소아(吳嘯亞)
- 제 149사단: 사단장 임작정(林作楨)
- 예비 제 34사단: 사단장 오소아(吳嘯亞)
(3) 제 29집단군: 왕예서(王瓚緒) 지휘
1) 제 44군: 군장 왕택준(王澤浚)
2) 제 73군: 군장 왕지빈(汪之斌)
- 제 149사단: 사단장 하보항(何保恆)
- 제 150사단: 사단장 허국장(許國璋)
- 제 161사단: 사단장 웅집중(熊執中)
- 제 162사단: 사단장 손빈(孫黼)
- 제 150사단: 사단장 허국장(許國璋)
- 제 161사단: 사단장 웅집중(熊執中)
- 제 162사단: 사단장 손빈(孫黼)
2) 제 73군: 군장 왕지빈(汪之斌)
- 제 15사단: 사단장 양신육(梁祇六)
- 제 77사단: 사단장 곽여동(郭汝棟)
- 예비 제 5사단: 사단장 펜즈량(彭士量)
- 제 77사단: 사단장 곽여동(郭汝棟)
- 예비 제 5사단: 사단장 펜즈량(彭士量)
(4) 제 33집단군: 풍치안(馮治安) 지휘
1) 제 59군: 군장 유진삼(劉振三)
2) 제 30군: 군장 지봉성(池峰城)
3) 제 86군: 군장 주정경(朱鼎卿)
- 제 55사단: 사단장 무천달(武泉達)
2) 제 30군: 군장 지봉성(池峰城)
- 제 27사단: 사단장 허문요(許文耀)
- 제 30사단: 사단장 왕진(王震)
- 제 31사단: 사단장 멍쯔빈(乜子彬)
- 제 30사단: 사단장 왕진(王震)
- 제 31사단: 사단장 멍쯔빈(乜子彬)
3) 제 86군: 군장 주정경(朱鼎卿)
- 제 13사단
- 제 67사단: 사단장 나현달(羅賢達)
- 예비 제 32사단: 사단장 응우옌지(阮齊)
- 제 67사단: 사단장 나현달(羅賢達)
- 예비 제 32사단: 사단장 응우옌지(阮齊)
(5) 강 방위군: 우치웨이(吳奇偉) 지휘
1) 제 18군: 군장 나광문(羅廣文)
- 제 11사단: 사단장 후롄(胡璉)
- 제 18사단: 사단장 전도선(覃道善)
- 제 55사단: 사단장 무천원(武泉遠)
- 제 18사단: 사단장 전도선(覃道善)
- 제 55사단: 사단장 무천원(武泉遠)
(7) 제 6전구 직할부대 제 100군: 군장 시중성(施中誠)
- 제 19사단: 사단장 당백인(唐伯寅)
- 제 63사단: 사단장 조석전(趙錫田)
- 제 43사단: 사단장 이사림(李士林)
- 제 63사단: 사단장 조석전(趙錫田)
- 제 43사단: 사단장 이사림(李士林)
(8) 기타 부대
- 신편 제 23사단: 사단장 성봉요(盛逢堯)
- 제 118사단: 사단장 왕엄(王嚴)
- 제 5사단: 사단장 이시분(李則芬)
- 제 121사단: 사단장 데이지치(戴之奇)
- 예비 제 34사단: 사단장 라오관잉(勞冠英)
- 제 118사단: 사단장 왕엄(王嚴)
- 제 5사단: 사단장 이시분(李則芬)
- 제 121사단: 사단장 데이지치(戴之奇)
- 예비 제 34사단: 사단장 라오관잉(勞冠英)
(1) 제 27집단군: 리유탕 지휘
1) 제 10군: 군장 방선각
2) 제 99군: 군장 양한명(梁漢明)
- 제 190사단: 사단장 주악(朱嶽)
- 제 3사단: 사단장 주경상(周慶祥)
- 예비 제 10사단: 사단장 손명근(孫明瑾)
- 제 3사단: 사단장 주경상(周慶祥)
- 예비 제 10사단: 사단장 손명근(孫明瑾)
2) 제 99군: 군장 양한명(梁漢明)
- 제 92사단: 사단장 아이젠(艾靉)
- 제 197사단: 사단장 호대좌(胡大佐)
- 임시 제 54사단: 사단장 료샤오웨이(饒少偉)
- 제 197사단: 사단장 호대좌(胡大佐)
- 임시 제 54사단: 사단장 료샤오웨이(饒少偉)
(2) 제 20집단군: 오진(歐震) 지휘
1) 제 58군: 군장 노도원(魯道源)
2) 제 72군: 군장 장보(長傅)
3) 임시 제 2군: 군장 장고정(長古鼎)
- 신편 제 10사단: 사단장 소본원(蕭本元)
- 신편 제 11사단: 사단장 후진방(侯鎮邦)
- 신편 제 11사단: 사단장 후진방(侯鎮邦)
2) 제 72군: 군장 장보(長傅)
- 신편 제 13사단: 사단장 당소백(唐邵伯)
- 신편 제 15사단: 사단장 장타오(江濤)
- 신편 제 15사단: 사단장 장타오(江濤)
3) 임시 제 2군: 군장 장고정(長古鼎)
- 임시 제 7사단: 사단장 왕쭤화(王作華)
- 공군: 중미 공군 혼성단 군용기 200여 대
- 총병력: 제 6전구 소속 4개 집단군, 16개 군, 43개 사단 약 21만 명
4. 경과
4.1. 전투 초기
1943년 11월 1일 밤, 일본군 5개 사단이 3개의 진군로를 통해 일제이 출격했다. 제 39사단과 제 13사단은 좌익을 맡아 국민혁명군 제10집단군의 주력 진지를 공격했고, 제 68사단은 국민혁명군 양 집단군의 경계를 가로질러 츠리현을 공격하려 했으며, 제 3사단은 제 29집단군의 전면에서 강을 도하해 29집단군의 주력을 섬멸하려 했다. 또한 창더 작전의 주력인 제116사단은 둥팅호를 건너 국민혁명군 제 29집단군의 우측면에 착륙해 한개 부대는 제 44군을 견제하고, 다른 군대는 창더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이러한 기동전을 통해 국민혁명군을 포위섬멸하고 창더를 단시일에 제압하고자 했다.
제10집단군 사령관 왕징주는 적이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받자 일본군의 주요 공세는 난수로(暖水街)와 왕가창(王家厂) 지역일 거라고 예상하고 제79군과 제66군 주력을 난수로 및 왕가창에 파견해 그곳을 사수할 것을 지시했다. 79군과 66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11월 4일에 난수로로 후퇴해 난수를 통해 침입하려는 일본군의 공세를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6전구의 지원을 기다렸다.
11월 3일, 양쯔강 연안 일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국민혁명군 제 73군은 리현에서 일본군과 맞붙었고, 제 44군은 둥강에서, 제 79군은 가하시(街河市)에서 일본군 주력과 상대했다. 제6전구 사련관 쑨롄중은 적의 공세를 살펴본 후 적의 주력이 창더로 이동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11월 4일 저녁 74군장 왕야오우에게 전보를 보내 도원으로 향하게 했고 제 57사단에게 즉시 창더에 들어가 창더 외곽에 방어시설을 건설하게 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정말로 창더를 주요 목표로 삼았는 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쑨롄중은 일본군이 전투 초기에 샹시 지역에 기승을 부리자 일본군이 샹시 지역을 목표로 삼은 것일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일본군이 창더를 주공으로 삼았음이 명백해질 때까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고, 강 방어군 지휘관 우치웨이에게 진지를 고수하며 적을 경계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한편 6전구 예비군인 26집단군과 33집단군에게 대기 명령을 내렸다.
그러던 중 일본군 제 13사단의 전투 참모 사쿠라 중좌가 이동 중 국민혁명군에게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참모는 일본군의 창더 공세와 관련된 중요한 서류를 휴대하고 있었다. 13사단 사령부는 이 소식에 발칵 뒤집혀 사방을 수색해 문서를 회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국민혁명군은 이 문서를 통해 일본군의 주요 공세가 창더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월 7일, 제1선 병단 2개 집단군은 왕가창, 난수로, 홍묘 일선에 방어선을 형성했고 제74군 제 2선 병단은 후방의 도원을 점령했다. 일본군 제 3, 13, 39, 68사단의 주력 부대와 제 40, 58사단의 분대는 이 방어선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11월7일 오전까지 격렬한 전투를 벌인 79군 임시 6사단은 막심한 사상자를 낸 채 철수했다. 이에 제10집단군 사령관 왕징주는 전선 각 부대에게 전보를 보내 용감하게 역습하여 진지를 회복하라고 명령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전황은 갈수록 위급해졌다. 하지만 왕징주는 아직 구원부대가 오지 않는 상황에서 10집단군이 단독으로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공격적인 방어 전술을 채택했다. 즉, 왕가창과 난수로로 일본군을 끌여들인 뒤 외곽 부대로 하여금 적을 포위해 섬멸하기로 한 것이다. 왕징주는 패퇴한 6사단에게 난수로 수비를 맡겨 일본군을 끌여들이는 '자석' 역할을 맡게 했고 제 98사단과 제 194사단에게 정면의 적과 항전하며 시간을 끌게 했으며 제 199사단에게 난수로를 공격하는 적의 측면을 요격하게 했다. 이후 일본군은 제10군 방어선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했기 때문에 쉽사리 뚫지 못했다.
11월 12일, 일본군은 일주일이 넘게 10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전황은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이러다가 6전구의 지원 병력이 도착한다면, 일본군은 여지 없이 협공당할 것이다. 게다가 공격 부대의 사상자가 이미 3천여 명에 달해 사기가 침체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주공의 방향을 바꿔 신안과 석문의 전선으로 주력을 이동시켜 29집단군 정면을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난수로 쪽에는 제39사단 2개 연대만 남아서 국민혁명군 제 10집단군을 견제하게 했다.
제 10집단군이 전 전선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제 29집단군 역시 일본군과 교전하고 있었다. 일본군 제3사단이 강을 도하해 29집단군의 전면을 공격한 후, 제116사단 1개 부대가 둥팅호를 건너 빈후구를 점령해 29집단군의 후방을 급습했다. 29집단군은 적이 동시다발적으로 아군의 전면과 후위를 공격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6전구 사령관 쑨롄중은 급히 29집단군에게 전보를 보내 빈후구 지역을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석문과 리현 사이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29집단군 사령관 왕예서는 명령에 따라 병력을 퇴각시켰고 44군을 리현에, 제 73군 주력을 석문에 배치했다.
그런데 11월 13일, 왕예서는 44군이 거듭된 패퇴로 지칠대로 지쳤다고 판단하고 쑨롄중의 지시를 확대 해석해 44군을 리현에서 철수시켰다. 그러나 73군은 여전히 석문을 사수하고 있었고 왕예서로부터 아무런 명령을 접수받지 못했다. 게다가 73군 군장 왕지빈은 석문의 방어 상태를 보고 경악했다. 요새는 전혀 없었고 단지 20km에 달하는 참호만 파여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44군이 철수해버렸으니, 이제 그들은 아군의 엄호를 받지도 못하고 단독으로 이 형편없는 방어 시설에서 적과 대적해야 할 위기에 몰렸다.
왕지빈은 야전공사를 서둘러 실시했고 임시 5사단을 석문에 배치하고 제 77사단과 제 15사단을 석문 외곽에 배치해 어떻게든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11월 14일, 일본군은 석문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원래 44군이 맡았던 리현을 지나 73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 결과 석문 수비대 우익이 붕괴되는 등 전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한편,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73군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당황했고 군령부 차장 류페이(刘斐)는 제 6전구를 거치지 않고 29집단군 사령관 왕예서에게 전보를 보내 73군을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11월 14일 저녁,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73군 군장 왕지빈은 석문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대가 난수를 도하할 때까지 5사단에게 후위에서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때 일본군은 석문 후방으로 우회하여 73군이 강을 건너고 있을 때 요격했다. 이 갑작스런 역습에 당황한 73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왕지빈은 참모들만 이끌고 츠리현으로 퇴각한 뒤 그곳에서 잔여 병력을 수습했다. 한편, 석문에 배치된 임시 5사단 역시 아군의 맨 뒤에서 난수를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15일 해질 무렵, 일본군이 그들을 포위했다. 임시 5사단장 펜즈량은 결사적으로 항전하다가 전사했고 5사단은 완전히 궤멸되어 생존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4.2. 창더 외곽 공방전
석문을 공략한 일본군은 뒤이어 난수를 건너 29집단군 측면을 공격했다. 제29집단군에 속한 제44군 제150사단의 방어선은 삽시간에 무너졌고 제161사단 역시 일본군의 공격으로 부대가 절단되는 상황에 놓였다. 왕예서는 이 난국에 안전한 후방으로 사령부를 옮겼고, 44군 군장 왕택준은 전선이 너무 길어 일본군의 돌파구가 너무 많으니 방어선을 고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 전선의 44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73군은 츠리현에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있다가 상부로부터 츠리현을 사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1월 17일, 일본군 116사단 전체가 둥팅호를 건너 44군 우익을 공격했다. 여기에 제 3사단과 13사단이 29집단군의 정면을 공격했고, 17여단과 58사단 1개 부대가 연합하여 츠리현으로 진격했다. 또한 68사단은 수로를 통해 진군하여 곧장 창더의 측면 지대에 상륙했다. 이때 국민혁명군의 제1 방어선은 거의 붕괴되었고 제29집단군 전체 부대가 고전했고 측면이 공략당할 위기에 처했으며, 제10집단군 역시 39사단과 상대하는 동시에 116사단의 후방 공격을 받을 위험에 처했다.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국민혁명군 제6전구의 핵심 부대인 제10집단군과 제 29집단군이 포위 섬멸당하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때 일본군 13사단은 남쪽으로 진군했고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68사단도 삼선호를 건너 창더 동남쪽의 한수에 상륙했다. 한편 제10집단군과 맞붙었던 39사단은 수세에 몰려 10집단구을 견제하는 데 만족한 듯했고 제116사단은 창더로 곧장 진군하여 임야에 도착, 창더를 향한 진군로를 개척했다. 여기에 일본군은 제 3사단과 제 13사단으로 하여금 제74군과 제44군이 창더로 오는 것을 차단했고 제 26사단은 안향에서 배를 타고 곧장 한수를 건너 창더로 진격했다.
급기야 일본군은 도원에 낙하산부대를 투입했다. 11월 21일 저녁, 낙하산 부대가 투입되어 도원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다수의 낙하산 부대원들이 전사했다. 또한 제3사단의 주력과 116사단 109연대는 배산을 공략한 후 도원에 있는 제 150사단을 포격했다.
제 150사단장 허국장(許國璋)은 절대로 후퇴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 도원으로 접근하는 116사단을 상대로 항전했으나 거의 반나절 만에 150사단 병사들이 대거 사살되었다. 허국장은 일본군이 150사단을 거의 돌파했다는 것을 깨닫자 공병 중대를 급파해 방어시설을 보강하게 했지만 공병 중대는 30분 이내에 거의 죽거나 부상당했다. 이에 허국장은 450연대의 잔여 병력을 직접 인솔해 돌격했으나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후 150사단은 거의 전멸했다.
허국장은 중상으로 의식을 잃고 경위대에 의해 나룻배에 실려 후송되었다. 허국장이 깨어났을 때 이미 강을 건넌 뒤였고 부대는 대부분 섬멸되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허국장은 분통을 터트리며 외쳤다.
그는 바로 곁에 있던 호위병의 권총을 빼앗아 좌우에서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머리에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왕예서 29집단군 사령관은 전보를 보내 162사단 부사단장인 조옥광(赵璧光)이 150사단장 직무를 대행하게 했고, 150사단 잔여 병력은 제161사단과 함께 강을 건너 안전한 후방으로 철수했다."일이 이 지경이 되었거늘, 사단장으로서 어떻게 부대를 버리고 후퇴할 수 있겠는가?"
도원이 함락된 후, 국민혁명군 100군 제 19사단이 전장에 도착해 황스시에서 일본군 제3사단과 격전을 벌였다. 19사단장 당백인은 전황이 위급함을 고려하여 부대를 매일 70km 씩 강행군시켰다. 그리하여 황스시에 도착한 19사단 병사들은 지칠대로 지쳤으나, 뜻밖에도 일본군은 황스시 공격에 그리 열을 올리지 못했다. 이후 그의 부대는 창더 전투가 끝날 때까지 황스시를 사수했지만 전체 전황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1월 21일, 제10집단군은 군대의 방향을 돌려 석문 탈환에 나섰지만 석문 수비를 맡은 일본군 39사단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또한 제29집단군은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급급해 창더 방위를 위해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 일본군 제 3사단과 제 116사단은 도원을 지나 창더로 향했고, 제 13사단은 제 73군의 저항을 가볍게 무찌르고 츠리현을 공략했다. 또한 제 68사단은 22일에 한수를 점령했다. 이제 제 3, 13, 68, 116사단은 창더를 포위해 창더 공방전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한편, 국민혁명군 6전구 직할 군대인 제 74군은 창더를 구원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11월 16일 창더로 진군하고 있던 적과 교전을 벌였다.이에 일본군 3사단과 13사단은 11월 22일 명월산에서 야전 진지를 쌓고 있던 제 74군 소속 51사단을 급습했다. 51사단장 저우즈다오(周志道)는 1만 5천명에 달하는 적과 맞서 항전해 74군이 집결할 시간을 벌어줬다. 그러나 5차례에 걸친 적의 맹공에 중과부적으로 진지가 함락되었고, 저우즈다오는 전사했다. 이후 도원이 함락되어 측면이 위험해지자, 74군 군장 왕야오우는 칠가하 이남의 방어선으로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후 74군은 방어 시설을 건설하고 창더 구원을 위해 군세를 재정비했다.
이 무렵, 제29집단군 사령관 왕예서는 거듭된 패전으로 병력이 얼마 남지 않았던 73군에게 적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반면 44군은 왕예서의 배려로 전장에서 물러났다. 일본군 역시 44군을 격파한 뒤 더이상 추격하지 않고 창더에 집중했다. 이 때문에 제 44군은 창더 외곽 지역으로 철수해 일본군에게 섬멸될 위기를 모면했다.
4.3. 창더 시가전
창더를 수비한 국민혁명군 제 57사단은 5월부터 창더에 진주하여 방어시설을 건설했다. 제 576사단장 위청완(余程萬)은 창더 도시 외곽에 야전공사를 철저하게 실시했고 교외의 야전 요새와 성벽에 두번째 방어시설을 건설했으며, 모든 중요한 교차로에 콘크리트로 제작된 토치카를 쌓아 시가전을 대비했다. 또한 거리의 골목길을 최대한 활용해 지하 매복 시설을 건설해 도시에 진입한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격멸하게 했며 74군 포병연대 1개 대대와 전방포대 1연대, 고 제 42연대 1개 소대를 창더에 배치해 일반적인 국민혁명군 사단을 훨씬 뛰어넘는 포병 화력을 갖췄다. 또한 위창완은 169연대를 성 북쪽에, 170연대를 성 서쪽에, 171연대를 성 동쪽에 배치했고 성 남쪽엔 위안장을 뒤에 둠으로서 배수로로 삼았으며 창더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켜 일본군에게 해꼬지 당하는 일이 없게 했다.
11월 18일, 일본군 116사단과 제 68사단이 창더에 육박했고 57사단 전초기지가 적군 169연대에게 공격받았다.이 시각, 국민혁명군 제99군단은 일본군 제 40사단의 진군을 저지한 후 한수에서 68사단과 대치했다. 그리고 제44군은 창더 외곽의 타이양산(太阳山)에 주둔했고, 제 74군은 츠리현 이남의 칠가하(漆家河)에 방어선을 쳤으며 제 100군은 도원 이남에서 창더의 수비군에 호응했다.
11월 22일, 일본군 11군 주력부대가 창더 교외에 집결한 후 창더를 향한 맹공격을 개시했다. 특히 그동안의 전투에서 창더에 도착할 때까지 전력 보존을 위해 전투를 가능한 피했던 116사단이 주력을 맡아 창더를 앞장서서 공격했다. 그리고 68사단은 116사단의 좌익을 엄호해 국민혁명군의 지원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제 3사단과 13사단은 츠리, 도원 방면에서 제 74군과 39사단을 저지했으며, 17여단과 58연대 1개 부대는 제 10집단군의 공세를 저지했다.
제 100군 63사단 188연대는 창더 전투 초기 쑨롄중의 지시를 받고 덕산진을 선점해 창더 수비를 맡은 57사단을 지원했다. 이후 창더를 포위한 일본군이 덕산진을 덮치자, 188연대는 급히 응전했으나 하룻밤 만에 덕산진을 빼앗기고 100군에게 귀환했다. 덕산진이 함락된 후, 제 57사단의 후방이 차단되었고 외부와의 교통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11월 24일, 116사단은 강력한 포병을 동원해 57사단 외곽진지에 맹포격을 퍼부은 후 보병 돌격을 감행했다. 이에 57사단의 각 연대는 이를 막아내는 한편 역습을 감행했고, 수류탄 세례와 화공으로 적을 저지했다. 중국군은 결사적으로 일본군의 침임을 저지했고, 일본군 결사대는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116사단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결사대를 투입시켰으나 57사단의 각 연대는 맹렬하게 저항해 이들을 저지했다. 170연대장 장정림(张挺林)은 진지에서 용감하게 돌격했다가 7차례나 중상을 입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또한 중국군은 최루가스를 대량 방출해 창더 시내로 진입했던 일본군 116사단 제 109연대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했고, 109연대는 연대장 누노 대이치 대좌가 전사하고 절반이 넘는 부대원들이 목숨을 읺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11월 25일, 일본군 제 120연대가 국민혁명군 169연대를 공격했다. 120연대는 '무사도'를 실현하겠다는 서약을 맺은 후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했다. 그러나 이들은 169연대의 기관총 세례와 박격포 세례에 휘말려 수많은 부대원을 잃고 패주했다. 또한 국민혁명군 169연대는 창더 남쪽의 위안장을 도하하기 위해 지형을 정찰하던 나카쇼 오이치(中细卢一) 제3사단 6연대장을 저격해 중상을 입혔다.
이후 57사단은 사력을 다해 일본군에 저항했다가 성곽 수비가 뚫리자 시내로 후퇴하여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웠다. 이에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해지자, 일본군은 급기야 독가스를 마구 살포해 국민혁명군 병사들을 모조리 질식시켜 죽였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아군 병사들까지 독가스에 질식해 죽게 만들었다. 12월 2일 밤, 위청완 사단장은 불과 300명 밖에 남지 않은 병사들을 이끌고 중앙은행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했다. 이때 그는 33집단군 총사령관 풍치안(馮治安)과 74군장 왕야오우, 6전구 사령관 쑨렌중에게 전보를 보냈다.
위창완은 전문을 구술한 후 총을 들고 자살하려 했다. 그러자 주위에서 즉시 총을 뺏고 부대원들을 저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위창완은 자살할 생각을 버리고 104명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도시에서 탈출했다.[3] 12월 3일, 마지막 저항군은 소멸되었고 창더 전체가 함락되었다."폭탄은 소진되었고 병사들은 얼마 없으며 도시는 부서졌다. 사단장, 정치 부서장, 직원 등이 중앙 은행에 부처를 구성하고 각 부대원들이 저택을 지키며 최후의 저항을 펼쳤으며 죽음을 맹세하고 승리를 기원했다. 74군 만세! 장위원장 만세! 중화민국 만세!"
4.4. 국민혁명군의 창더 탈환 및 추격
일본군은 10여 일에 걸친 창더 공방전 끝에 마침내 창더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이 시기 제6, 9전구 소속 중국군이 사방에서 압박하기 시작했고 후베이성 북부에서도 천청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하고 일본군의 인프라를 파괴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12월 11일 중국의 포위 전선이 펼쳐지기 전에 철수했고, 중국군은 그들을 맹추격해 잃어버린 모든 영토를 되찾았다. 이로써 창더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일본 측은 자국군이 창사 작전에서 1,274명 전사, 2,977명 부상의 손실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반면 중국 측은 일본군이 4만명을 상회하는 사상자를 냈다고 발표했다. 학계에서는 두 주장 모두 숫자를 왜곡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창사 작전을 집행했던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이 훗날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창사 전투 때 18%의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이 창사 전투에 약 6만 가량의 병력을 파견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일본군의 손실은 적어도 1만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일본측은 자신들이 국민혁명군 2만 9천명을 사살하고 1만 4천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발표했으며, 국민혁명군 측은 제 6전구에서 4만 5천명, 제 9전구에서 1만 5천명, 제 5천구에서 3천명 등 총 6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제5사단장 펜즈량, 10사단장 손명근, 150사단장 허국장(자살)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6. 영향
일본군은 창더 전투에서 국민혁명군을 상대로 탁월한 전투력과 전략 기동을 선보이며 승전을 거듭했고 창사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이 악착같이 버텼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고 겨우 창더를 공략한 후에 국민혁명군이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사방에서 포위하자 어쩔 수 없이 창더를 포기해야 했다. 이후 일본군은 수만 정도의 군대로는 남방작전을 성사시키기가 힘들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달았고 1944년 4월 50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 대륙타통작전을 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