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스틸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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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쑹메이링과 함께. 사진에서는 웃고 있지만 장제스와 스틸웰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1. 개요
2. 생애
3. 평가:유라시아 전선의 연합군 내부의 적
3.1. 군사적 무능함
3.2. 정치적 무능함
3.3. 성격적 결함
4. 대중 매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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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대장.

2. 생애


1883년 플로리다에서 출생했다. 1904년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이때의 화약고 폭발 사고로 눈에 큰 상처를 입었다.[1] 그 이후 톈진 조계지 주둔 미 육군 지휘관, 주중 미국 공사관 국방무관 등으로 중국에서 10여년을 복무했다. 이 덕분에 표준 중국어에 매우 능통해졌지만 계속된 내전으로 초토화되는 중국의 혼란상을 보면서 중국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가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는 육군 중장 계급에 있었으며, 퇴역을 앞두고 있었으나 전쟁이 발생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장제스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미중관계의 친선을 위해 미국인 참모장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중국어에 능통한 그가 중국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버마 전역에서 패배하는 등 대규모 부대를 다루는 경험 부족과 무모한 공세 성향으로 인해 전과가 좋지 않았고 중국은 물론 영국 및 같은 미국인들과의 마찰도 극심했다. 적을 너무 얕잡아보는 성향이 강하여 창더 전투, 대륙타통작전의 파멸적 피해를 야기한 바가 있다.
1943년 인도에서 육성한 중국 육군 정예군인 X군과 영국군, 미 육군 메릴 부대, Y군과 연합, 버마를 탈환함으로 그나마 설욕을 했지만 중국군 지휘권을 가지려는 욕심을 부리다가 분노한 장제스에 의해 해고당하고 앨버트 웨드마이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1944년 8월에 육군 대장으로 진급[2][3][4], 미 육군 지상군 사령관[5], 제10야전군사령관[6]등을 거쳐 종전을 맞이했고, 중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장제스에게 입국거부당했다. 이후 자서전을 집필하려 했으나 미완성 서문의 초고만 여러 개 만든 채 1946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중국 측에서도 어쨌든 함께 싸운 연합국 장군이었기에 칭호를 서훈했다.

3. 평가:유라시아 전선의 연합군 내부의 적


'''"만일 스틸웰이 중국 장군이었다면 추호의 의심도 없이 총살 집행대에서 끝장냈을 터였다."'''

- 클레어 셰놀트

스틸웰의 영웅적 지위를 논하자면 그의 용기와 중국 문제에 관한 식견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다. 타임의 시어도어 화이트는 뒤이어 스틸웰의 일기를 출판함으로 성인화 운동을 추진했다. 이 운동은 1970년 바바라 터크만이 스틸웰 전기를 출판해 퓰리처상을 수상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스틸웰의 전장 성과에 대한 기록으로는 그를 위대한 사령관으로 나타내기 어려웠다. 동시에 군사 정치 측면에서 그는 수행해야 할 사명을 완수하는 데 실패했고, 그가 장제스에게 제안한 것들은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없었다.''' 근본적으로 말해 스틸웰이 이루고자 했던 목적과 그가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방식은 불가능했다.

-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 532~533페이지

그(스틸웰)은 능력 있고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휘하 병사들을 거의 극한까지 내모는 일도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속이고 술수를 쓰고 무능한 것을 절대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한 공격적이고 조심성이 없으며 고집스럽고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싫어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중국에서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일을 하는데는 편견이 더 적고 외교적 수완이 더 많이 필요했다.

-리처드 번스타인,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능력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능력과 전혀 맞지 않는 곳에 보내졌고 극도의 세심한 외교적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외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직무에는 성실하였고 부하 장병들과의 연대심도 확실하였으나 기본적으로 군인이면서 정치에 너무 관여하였고[7] 실전 경험이나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는 경험이 떨어져[8] 중국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언론플레이의 능력은 확실했다. 1942년 버마에서 참패했을 당시, 걸어서 달아나는 처지에 동행한 기자들을 어떻게 구슬려 불굴의 장군이라는 영예를 얻었으며(!?) 전후에 시어도어 화이트 등을 비롯하여 서구권 기자들은 스틸웰 장군은 유능하고 강직한데 무능하고 부패한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이 모든 걸 망쳤다는 모함 기사를 써 댔고 라이프 2차세계대전사 등 서구권의 중일전쟁을 다룬 저서나 매체들도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었다.
이후 바바라 터크먼이 스틸웰 전기를 출판함으로 스틸웰 장군은 장제스에게 희생된 명장으로 알려졌고 중일전쟁 담론이 재평가되기 이전에는 이에 낚인 사람들이 미국은 미개한 중국을 도우려 했는데 부패한 국민당과 무능한 장제스가 모든 걸 망쳤다~라는 식으로 중일전쟁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의 과장되고 왜곡된 명성은 공고화되고 중국의 명예는 땅을 쳤다.[9] 이후 미 육군에서 남긴 스틸웰 장군의 평가는 그 기본적인 소스를 터크먼의 스틸웰 전기를 바탕으로 함에 따라 스틸웰을 매우 고평가하고 있다.
허나 스틸웰의 진가를 알아보고 이전부터 그와 마찰을 빚던 영국에서는 진작부터 스틸웰을 무타구치 렌야(!)와 동급인 인물로 폄하했고[10] 이후의 다른 연구들에서도 스틸웰 장군이 태평양 전쟁 중에 싸지른 거한 똥들이 발굴되면서 이제는 5열, X맨으로의 명성이 자자하다.
별개로 미국의 반중공 보수주의자들과 장제스 지지자들은 스틸웰 장군이 마오쩌둥의 집권을 도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스틸웰 장군이 공산당을 들먹이며 장제스를 길들이려고 한 것과 별개로 스틸웰 장군이 공산당에게 도움을 준 것은 한 차례의 의료품 수송이 전부였으니 스틸웰 장군이 공산당을 직접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아군을 망쳐놓는 것이 적을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것인데 스틸웰은 국민당군을 제대로 망치면서 공산당의 집권에 도움을 준것은 사실이다.[11] 스틸웰 장군은 무능한 작전으로 국민당의 주력 부대들이 파멸적 타격을 입고 국민당의 국제적 입지가 좁아졌으며 미국에서 반중 감정을 심화했다는 것에서 비판받는 것이다.
더군다나 중국 위협론이 대두됨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에 크게 일조한 스틸웰의 평가는 더 나락으로 추락중이다.
스틸웰 장군이 욕을 먹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3.1. 군사적 무능함


우선 스틸웰 장군은 군인이면서 전선에서 지극히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스틸웰 장군은 대규모 군대를 야전에서 지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아시아 전선을 총괄하는 어마어마한 자리가 떡 하니 주어진 것이었다.
미국이 스틸웰 장군에게 원하던 것은 그가 아시아의 연합군을 지휘하여 뭐 대단한 일을 해 보라는 것이 아닌, 루스벨트 행정부가 아시아의 연합국인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틸웰 장군은 생전 처음으로 대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능력 밖의 목표만을 세웠다.
그가 처음으로 친 사고는 1942년 버마 전투였는데 연합국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대하려 했던 장제스가 영국에 버마 방위를 돕겠다고 제안하자 자신이 버마 원정군 10만 명의 지휘관이 되어 버마로 달려가서 10만 명을 통째로 날려먹었다.[12] 중화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지형도 잘 모르고 민심도 험악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중국 입지가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영국이 지극히 비협조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13] 스틸웰 장군이 무리하게 공세 작전을 펼쳤다가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스틸웰 장군의 명령은 정상적인데 중국군이 무능해서 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우선 스틸웰 장군이 지휘하던 10만 명의 중국 육군은 장제스도 아끼던 정예병으로, 특히 쑨리런 휘하의 38사단은 대단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여 영국 육군들은 중국 육군을 노련한 베테랑이라 칭송했다. 또 이 10만 명은 중국 전선에서 4년 간이나 일본과 싸워오며 많은 전과를 올린 부대인데도 스틸웰 장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그리고 스틸웰 장군의 패배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무능한 군대로 매도당했다. 게다가 다 양보해서 중국군이 오합지졸들이라 해도 자신이 지휘하던 병력들의 상태도 점검하지 않고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다짜고짜 공세를 명령한 스틸웰 장군의 작전이 근본적 문제인 것이지 중국군들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오합지졸이래도 어느 정도 실전을 많이 경험하고 살아남으면 정예병이 되지만 아무리 훈련이 잘 된 정예군이라 하더라도 윗선의 지휘 체계 대혼란과 군기강이 해이해지면 오합지졸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스틸웰이 이렇게 동맹국들을 허구한 날 깔보고 무시나 해대니 동맹국인 중국군과 영국군이 스틸웰을 오만방자하고 전술전략도 모르는 천박하고 병신같은 양키 새끼라고 욕하고 험담하는 게 당연했다.
그 외에도 중일전쟁의 양상에 대한 이해도 없이 장제스와 국민당이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 위주의 전략과 지연전, 소모전을 채택했다고 싸울 의지가 없는 무능하고 소극적인 자들이라고 일단 비웃고 봤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의 소모전 위주 전략은 경험을 통해 얻어낸 전략으로 일본 육군의 진격을 저지한, 매우 유효한 작전이었다. 이는 비단 스틸웰 장군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 육군 참모들도 답습한 오류였다. 그래 놓고 자신은 일본 육군을 얕잡아보고 공세를 지시했다가 버마에서 박살났다.
또한 적을 근거 없이 깔보곤 했는데 그는 버마에 일본 육군 10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5개 사단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마구잡이로 병력을 돌진시켰다가 크게 고생을 했다. 대륙타통작전 직전에도 장제스가 일본 육군의 대규모 공세를 예고하자 50만이나 되는 일본 육군이 집결하는데도 장제스의 엄살이라 주장하며 장제스의 유일한 예비대인 Y군을 버마로 보내 버리는 희대의 자폭 행위를 저질렀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함이나 실수에 대해 죽어도 인정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남 탓만 하며 발악했다. 그런 주제에 야망은 커서 버마 탈환, 중국군 지휘권 박탈 등을 노리며 끈질기게 장제스를 괴롭혔고 심지어 '''장제스 암살 작전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다만 실전과는 달리 워게임은 잘해서 진주만 공습 후 LA에서 진행된 워게임에서 일본식 기동전을 응용해 일방적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그가 가고 싶었던 북아프리카 대신 중국으로 복귀하는 촌극이 벌어졌지만. 1941(영화) 참고. 탁상 위의 공론과 현실 군정은 전혀 다르다는 걸 입증하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3.2. 정치적 무능함


(스틸웰의) 방식은 미국인이 선언한 민주주의와 민족 자결의 약속을 단지 조롱거리로 만들 뿐인 신식민주의를 중국에 강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조너선 펜비

그런가 하면 자신이 기본적으로 동맹국에 파견된 일개 장군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 난폭하고 일방적인 행동만 일삼았다. 장제스는 스틸웰 장군의 해임을 요구하면서 스틸웰 장군이 동맹간에 보여야 할 기본적인 상호 존중과 배려를 전혀 보이지 않은 사람이라 비난했다. 스틸웰 장군은 자신의 일기장에 장제스를 땅콩, 독사라고 비난하는 글을 써댔고 인종차별주의와 편견으로 똘똘 뭉쳐서 중국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동맹국인 중국을 폄하, 모함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으니 장제스와의 마찰은 극도로 심화되었다. 먼저 파견되었던 소련이나 나치 독일의 고문들, 하다 못해 다른 미국인 고문인 미 육군 항공대 준장 클레어 셰놀트 장군이 장제스와 잘 지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스틸웰 장군은 장제스가 준 10만의 정예병을 말아먹고도 미안한 줄 몰랐으며 대륙타통작전 직전의 장제스를 무시해 놓고 중국군 50만 명의 목숨을 날렸을 때는 장제스는 당해야 정신을 차린다고 고소해하며 아마 장제스가 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해 일부러 져준 것이라는 음모론을 떠들고 다녔다. 그리고 장제스를 압박하기 위해 장제스에게 주어야 할 원조를 착복하며 장제스를 위협했고 공산당을 찬양하는 한편 본국에 장제스가 얼마나 한심하고 무능하고 망상에 찬 인간인지 헐뜯는 보고를 끊임없이 올림으로서 미국의 대중 여론까지 망쳐놨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스틸웰 장군이 미중관계를 '''조율해야 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더욱 막장성이 두드러진다.
일개 장군이 무슨 중미관계를 조율해야 하냐는 반박도 있지만 당장 그의 직책 중 하나는 중미 사이의 연락관이었고 루스벨트의 대중 지원은 스틸웰 장군의 판단에 좌우되는 경우가 강했다. 만약 셰놀트 장군이나 장제스가 직접 루스벨트에게 연락을 넣어 스틸웰 장군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으면 중국이 받을 지원은 더욱 줄었거나 아예 끊어졌을 것이다.
당장 스틸웰 장군의 해임만 해도 자기 자신이 자초한 것이었는데 스틸웰 장군은 장제스를 모욕하고 협박하면 장제스가 자신에게 지휘권을 바칠 것이라 확신했지만 실제로 장제스는 스틸웰 장군에게 지휘권을 주느니 그냥 미국과의 동맹을 끊겠다고 나왔고 잘린 것은 스틸웰 장군이었다. 바로 스틸웰 장군 옆에서 미국 특사 패트릭 헐리가 장제스를 자극해서 나올 것이 없다고 뜯어말린데도 날뛰다가 생긴 결과물이 자신의 해고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잘못해서 해고당했다는 생각은 못한 채 그저 해고당했다는 사실에 빡쳐서는 후임자인 웨드마이어에게 인수인계조차 하지 않은 채 인도로 떠났다.

3.3. 성격적 결함


스틸웰은 중국인들에게 성마르게 굴었고, 정도 면에서 그 성마름을 넘어서는 것은 자기의 협력상대인 영국인들에게 보이는 무례함 뿐이었다.

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820페이지.

스틸웰 장군의 별명은 Vinegar Joe, 즉 '초치는 조'[14]였는데 그는 딱 자기 별명대로 굴었던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태클을 걸고 보니 같은 미 육군 장교인 클레어 셰놀트 장군과의 사이도 심각하게 좋지 않았고 미 육군들인 메릴 부대[15]조차도 스틸웰 장군의 지휘에 대해서 격렬히 반발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으면 무조건 남만 비난했는데 예컨대 그가 계획하던 버마 탈환 작전이 영미의 비협조로 순조롭지 않자 장제스도 미군의 도움 없이는 중국군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스틸웰 장군이 장제스 최정예 부대 10만명을 날려 버린 것을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것이었고[16] 그런 일이 없다고 해도 자기 나라 군대만 피 흘려야 하는 상황을 대뜸 받아들이는 지도자가 미친 거다. 그런데도 스틸웰 장군은 장제스가 정신 나간 미친놈이라고 저주해댔다.
그리고 대륙타통작전으로 중국 전체가 박살이 나는 상황에서 장제스가 스틸웰 장군이 농간을 부려 뺏어간 Y군을 돌려 달라 하자 장제스를 잡놈이라 비난했다. 자신의 명예만 충족되면 그는 중국이 망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장제스로부터 지휘권을 뺏을 수 있다면 '배가 침몰 직전까지 가도 상관없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이기심에 쩔어 있었다. 이러하니 중일전쟁의 저자 권성욱 씨의 경우에는 스틸웰 장군이 불화만 불러오르는 사람이라 비판했고 장제스도 문제는 스틸웰 장군의 성격이라 지적한 바가 있다.

4.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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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1941에서 주연급 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
  • 역설사의 2차대전 배경 전략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에 미국 장군진으로 등장한다. 이전작인 3편에서는 알짜배기 트레잇에 전술 능력치는 4로 시작해 게임 내 최대치인 9까지 성장할 수 있는 최강의 지휘관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 반면 최신작 호이4에선 역사적 재평가가 반영되었는지, 모든 능력치가 1이고 사실상 페널티만 주는 트레잇만 있는 정말 쓸모가 없는 고증에 충실한 폐급 쓰레기 장군이다. 사실 4편에서 모든 장군은 같은 레벨에서는 기본적으로 같은 능력치를 가지며, 상한제한도 같기 때문에 조금 덜 큰 장군일 뿐이지 결코 쓰레기 장군은 아니다. 하지만 스틸웰에게는 안타깝게도, 미국은 기본적으로 장군이나 원수가 부족하지 않은데다 전쟁도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굳이 스틸웰을 키워 쓸 이유가 없는 것이 문제. 다만 워게임은 잘했다는 평가를 반영해서인지[17] 장관진에선 보급 소모율 8%를 줄여주는 꽤 쓸만한 장관이다. 다만 미국엔 더 좋은 장관들이 수두룩 하고, 미국은 딱히 보급 문제로 시달릴 나라가 아니다. Walking to Tiger에서 중화민국으로 미국과의 외교를 통해 지원받는 중점 트리를 통해 스틸웰을 장군으로 영입할 수도 있다.[18] 하지만 중화민국은 일본을 막기 위해 중점과 디시전을 통해 군제개혁을 마치고 군사 페널티를 먼저 줄여야 하며, 다른 장군들을 키워주면 되기에 중화민국이라고 굳이 스틸웰 중점을 먼저 갈 필요는 없다.
  • 위 게임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도 역시 장군으로 등장한다. 역시 모든 능력치가 1이고 트레잇도 폐급. 다만 미국 내전이 일어나면 다른 인종차별주의자나 남부 출신 장군들이 휴이 롱의 미주연합으로 가는 반면에 스틸웰은 남부 출신 + 인종차별주의자임에도 연방정부에 계속 남는다. 연방정부가 망하면 청나라로 망명한다.
  • 엠파이어 어스의 확장팩인 엠파이어 어스 아트 오브 컨퀘스트에서는 태평양 전쟁 캠페인의 미션 4가 Merrill's Marauders를 다루며, 스틸웰은 등장하지 않는다.

[1] 왼쪽 눈은 완전히 실명했으며 오른쪽 눈은 두꺼운 안경이 필요했다.[2] 여담으로 스틸웰은 2차대전 미 육군에서 임명된 전시 대장급 장성 16명중 진급서열 4위로 스틸웰 외에 전시 진급 선임자들은 더글러스 맥아더(남서 태평양 전구 사령관/41년 12월-최초 전시 진급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북서 유럽 전구 사령관/43년 2월), 헨리 아놀드(육군항공대-공군참모총장/43년 3월)이다. 이들 3명은 44년 연말에 원수로 진급했으니 스틸웰이 사실상 미 육군 4성장군 No.1였던 것이다. 나머지 대장급들(12명)은 45년이 돼서야 우르르 진급하는데 스틸웰이 먼저 진급한 것은 어떤 면에선 분명 능력이 있었는지 미국과 장개석간의 정치적 비중때문에 품계를 올려준 것인지 불투명하다.. 다른 여담으로 2차대전 대장급 전시 진급의 마지막 인물은 바로 조나단 웨인라이트 장군(45년 9월/전직 미군 극동 전구 사령관/42-45년 전쟁 포로)이었다.[3] 45년에 진급한 미 육군 대장들(진급순서와 진급일자, 당시보직/근무지)을 소개한다. 1. 월터 크루거(45년 3월/제6군 사령관-태평양) 2. 브레혼 소머벨(45년 3월/육군 근무군 사령관-미국 본토) 3. 조지프 맥너니(45년 3월/미군 지중해 전구 사령관-이탈리아) 4. 제이콥 데버스(45년 3월/제6집단군 사령관-프랑스>독일) 5. 조지 케니(45년 3월/남서태평양-극동공군(전구공군)사령관-태평양) 6. 마크 클라크(45년 3월/제15집단군 사령관-이탈리아) 7. 칼 스파츠(45년 3월/미군 유럽전구 전략공군사령관-영국) 8. 오마 브래들리(45년 3월/제12집단군 사령관-독일) 9. 토마스 핸디(45년 3월/육군참모차장-미국 본토) 10. 조지 패튼(45년 4월/제3군 사령관-독일) 11. 코트니 하지스(45년 4월/제1군 사령관-독일)[4] 기록을 보니 전쟁 전 전간기의 미 육군 대장 T/O는 오직 1개로 바로 육군참모총장에게만 할당되었으나 2차대전으로 미군의 조직이 어마하게 커지면서 관리를 위해 T/O를 대거 증설한 것으로 보인다. 진급 사유를 분석하면 기존 중장급들중에 특별히 연공서열이 높거나(+평균적인 능력), 전공, 과거/현재 직책의 비중과 동맹국 군대와의 격식 비중등이 있다.[5] 레슬리 맥네어 중장의 후임이었다.[6] 오키나와 전투 막바지에 전사한 사이먼 버크너 중장의 후임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단 실제 전투는 10군 예하의 3상륙군단장이었던 로이 가이거 해병중장이 스틸웰 부임 전 야전군사령관 대행으로 마무리지었고, 스틸웰은 전투 종료 후의 행정처리를 맡았다. 참고로 로이 가이거 중장은 유일하게 야전군을 지휘해본 해병대 장성으로 이름을 남겼다.[7] 기가 막한 것은 스틸웰 본인도 자신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서 카이로 회담 직후 '''정치를 하느니 차라리 쓰레기차 운전이 낫겠다고 한탄'''했을 정도임에도 이랬다는 것.[8] 스틸웰은 전쟁 초기부터 중후반까지 중국에 있었기때문에 정확히 지적하면 장개석의 연합군 참모장으로서 그에 걸맞는 중국 전선에 특화된 정치적 수완과 대규모 지휘능력이 없었다고 해야한다. 그는 미국이 진주만 기습 직전에 미국 본토 서해안에 주둔했던 미 육군 제3군단의 지휘관이었고 그가 속했던 미군 내부에서의 평가는 나쁘지도 않고 별다른 하자는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그의 지식은 최신화가 안되었고 중국군에 대한 편견과 제국주의 시대 수준의 인종차별적인 감정과 맞물려서 그의 중국 파견은 결과적으로 최악의 인선이 된것이다.[9] 당장 이 나무위키장제스 항목의 로그를 보면 조지프 스틸웰 장군이 아이젠하워 급 명장(!)이라고 주장하는 양반이 등장한 바가 있으며 이 항목을 장제스는 문제 많은 사람이니 믿을 수 없다고 폄하하던 사람도 있었다.[10] 윙게이트 여단 참모장이었던 데릭 소장의 언급. 그리고 영국 측에서는 클레어 셰놀트 역시 형편없는 장군으로 평가하긴 했다.[11]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라고 놀림받는 무타구치 렌야나 일본의 명장이라는 조롱을 듣는 원균과 비슷한 경우라고 보면 될것이다.[12] 이 숫자는 당시 중국군의 전략예비대의 ⅓에 달하는 엄청난 수다.[13] 여기에 중국군에게 온 트럭 150대와 거기에 실려있던 탄약 등의 랜드리스 물자 중 기관총 20정만 내주고 죄다 꿀꺽했다. 출저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 152쪽.[14] 번역이 다양하다. 신랄한 조, 삐딱한 조 등등...[15] 지휘관 프랭크 메릴 대령의 이름을 따 Merrill's Marauders로 불리던 버마 전선의 연대급 미육군 혼성부대로, 태평양 전선 각급 부대의 정글전 유경험자들의 자원을 받아 임시편성한 장거리 정찰 및 침투, 타격 전문 특수목적 부대였다. 전후 75연대로 흡수, 재편되어 제75레인저연대의 직접 조상이 되며, 그린베레, MACV-SOG 등 이후 미군 특수부대에 많은 영감을 준 전설적인 부대이자 미군 특수부대의 효시격인 고조할아버지급의 부대이다.[16] 원정군의 75%가 날아갔다.[17] 워게임 때문이 아니라 행정능력을 평가한 듯 하다(작전이 아니라 병참을 담당했어야 할 양반이란 뜻에서).[18] 만주국과 중국공산당은 미국와의 관계 향상 트리는 있지만(독/소/불/영/미/일 중점은 삼국 공용이다) 이념 및 다른 중점들을 먼저 찍어야 해서+이념(파시즘/공산주의) 문제로 중화민국이 아니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