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Battle of Stalingrad
Сталинградская битва
Die Schlacht von Stalingrad'''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image]
스탈린그라드와 그 주변 지역의 지도
[image]
볼가 강 서안에 도하하는 소련군 해군 육전대[1]
[image]
▲ 폐허를 넘어 진격하는 소련 육군 보병대
[image]
▲ 항복 후 포로로 끌려가는 독일 제6군 장병들
[image]
▲ 스탈린그라드 중앙 광장에서 소련 국기를 흔드는 소련군
'''날짜'''
1942년 8월 21일 ~ 1943년 2월 2일
'''장소'''
소련 스탈린그라드
'''교전국'''
<^|1>[image] 소련
<^|1>[image] 나치 독일
[image] 헝가리 왕국
[image] 이탈리아 왕국
[image] 루마니아 왕국
[image] 크로아티아 독립국
'''지휘관'''
<^|1>[image] 니키타 흐루쇼프
[image]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image] 게오르기 주코프
[image] 하지 아슬라노프
[image] 바실리 추이코프
[image]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image] 안드레이 예료멘코
[image] 세묜 티모셴코
[image] 로디온 말리놉스키
<^|1>[image]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image] 헤르만 호트
[image]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image] 에리히 폰 만슈타인
[image]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결과'''
소련의 결정적 역전승
'''영향'''
동부전선 전세의 전환점
'''병력'''
[image]약 170만 명
- [image]스탈린그라드 전선군
- [image]남서 전선군
- [image]돈 전선군
약 50만 명 + 지원군
- [image]독일 제6군
- [image]독일 제4기갑군
- [image] 이탈리아 제8군
- [image]루마니아 제3군
- [image]루마니아 제4군
- [image] 헝가리 제2군
'''피해규모'''
[image]총 사상자 1,129,619명
- [image]전사 및 포로 478,741명
- [image]부상 650,878명
- [image]최소 4만 명의 민간인 사망
총 사상자 85만 명(포로 91,000명 포함)
- [image]독일군 40만 명
- [image]루마니아군 20만 명
- [image] 이탈리아군 13만 명
- [image] 헝가리군 12만 명
1. 소개
2. 1942년 동부전선
4. 양측의 편제
4.1. 소련군
4.1.1. 소련군 총사령부
4.1.2.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4.1.3. 돈 전선군
4.1.4. 남서 전선군
4.2. 추축군
5. 소련군의 대응
6. 추축군의 공격
6.1. 시 외곽의 전투
6.2. 여기는 지옥 한복판
6.3. 쥐떼들의 전투(Rattenkrieg)
7. 소련군의 반격
7.1. 천왕성 작전
7.2. 독일군의 대응
7.3. 천왕성 작전 개시
7.4. 히틀러식 비극
9. 독일군의 항복
10.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의의
11. 기타
11.1. 폰 파울루스? 파울루스?
11.2. 이후 독일 육군에 끼친 영향
11.3. 참전한 한국계 인물
12. 전투 이후 독일 국내에 미친 영향
13. 관련 작품


1. 소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7초에 한 명씩 독일군이 죽고 있습니다.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 7초. 방금 또 한 명이 죽었습니다.'''[2]

모스크바라디오 선전 방송 중

'''어제 가 필사적으로 볼가 강을 수영해서 건너는 걸 보았다. 가장 강인한 동물도, 가장 단단한 돌도 이 곳에선 버틸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버틸 뿐이다.'''

어느 신원 미상의 독일 국방군 병사의 일기 중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스탈린그라드(現 러시아 연방 볼고그라드)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추축군의 대격전.
제1차 세계 대전베르됭 전투가 있었다면 제2차 세계 대전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었다. 독일(각각 독일 제국나치 독일)의 공세로 시작되어 독일이 거의 목표 달성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역습을 받고 패퇴했다는 점과 방어하는 쪽[3]이 더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결국 승리했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쿠르스크 전투가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의 전투라면,[4]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추축국은 80만명, 그 중 독일군은 40만명 정도가 죽었는데, 이는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미국,영국 등과 싸우며 잃은 총 군인의 수와 비슷하다. 소련군 사상자는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전투가 상당히 치열했는데, T-34전차를 몰 승무원이 부족해지자, '''공장 노동자들이 직접 탱크를 타고''' 싸우기도 했고,[5] '''초등학생'''정도만 되어도 전선에 투입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6] 여담으로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들의 평균생존시간은 '''24시간.'''
같은 해에 벌어진 과달카날 전역과 더불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환점'''이었다고 평가받는 전투 중 하나로서[7] 제2차 세계 대전의 무수한 전투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공방전이다. 각종 대중 매체에서 사용되는 최고의 떡밥 중 하나이며, 그 인지도에 걸맞은 전투답게 스케일 또한 남달라서 민간인 희생자들을 포함해서 무려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어지간한 '''전쟁'''에서 발생할 수준의 사상자 수를 한 '''전투'''에서 기록한 셈.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상대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던 독일군의 소련 정복 계획, 더 나아가 나치 독일세계정복 계획을 백지로 만들어버린 전투이며, 여러 전역을 통틀어서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환점이라고 할 만하다. 냉전 때문에 소련군의 분투를 폄하하던 서방에서조차 스탈린그라드가 전환점이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고 다만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등이 스탈린그라드에 맞먹는 전투라고 자뻑하는 수준에 그쳤다. 물론 소련에선 황당하기 짝이 없다란 반응이었지만. 야전군 1~2개 정도인 20-30만 명 정도가 동원된 엘 알라메인 전투와 '''거의 200만 명'''이 동원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같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전략적으로도 북아프리카의 야전군급 독일군을 몰아낸 정도였을 뿐인 엘 알라메인 전투와 소련으로 들어온 집단군급 독일군을 거덜내고 독일 본토로 반격해 들어갈 계기를 만든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격이 다를 수 밖에 없다.[8][9]

2. 1942년 동부전선


1941년 가을 모스크바 점령(태풍 작전)에 실패함에 따라 당초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독일 국방군의 목표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고, 12월부터는 오히려 소련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모스크바 일대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여전히 모스크바가 점령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고 초기 반격에서 축출하는 데 실패한 르제프 돌출부에 대대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르제프 전투에서 소련군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독일군의 전술에 말려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을 뿐 돌출부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연이어 데미얀스크에서 포위된 독일군이 방어에 성공하며 독일 중부집단군은 대타격을 받긴 했지만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전선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3. 청색 작전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image]
▲ 청색 작전을 설명한 지도
이런 상황에서 1942년 봄 독일군 장성들은 모스크바 재공격을 건의했지만 아돌프 히틀러캅카스 유전 지대를 점령하여 소련군의 연료를 고갈시킴과 동시에 독일군의 고질적인 연료 문제를 해결하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활동하던 에르빈 롬멜 원수아프리카 기갑군과 양쪽으로 중동의 영국군을 쌈싸먹은 후 합류하는 것으로 42년 하계 공세의 방향을 잡고 청색 작전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세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아프리카에서 우크라이나 남부까지의 거리는 프랑스독일을 합친 것보다 길고 중간에 터키가 있으며, 터키와 러시아 사이의 험준한 산맥을 돌파해야 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 중부와 북부를 놔두고 남부로 대폭 들어가는 위험한 계획이었다.
여기서 롬멜의 역할이 있었다고 하는데 터키를 무력으로 점령하거나 끌어들여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다.[10] 그러면 터키군과 합심해서 캅카스까지의 진격로가 확 열리는 건 기본이고 보급로가 대폭 줄어드는 것은 옵션이지만, 롬멜은 거의 1년 넘게 영국군과 전략 전술VS물량 공세로 제자리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에즈 운하도 점령 못했는데 그 머나먼 소련까지 대체 어떻게 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11] 물론 롬멜에게 물자가 가면 되겠지만, 그 물자들이라는 것들이 전부 지중해 바다 속과 러시아로 가고 있었다. 그나마 롬멜이 엘 알라메인까지 진격할 수 있던 것도 토브룩 점령 당시 영국군이 미처 폐기하지 못한 대량의 물자를 노획할 수 있던 덕분이고 그 후에도 독일 본국의 지원은 부족해서 엘 알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 돌파는 끝내 실패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마디로 지원도 제대로 못해 주면서 지원 빵빵해도 힘들 결과물을 히틀러는 당연시하고 있었다는 것.[12]
일본 제국은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승리할 경우 일본이 소련을 공격한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13]
남부집단군에 하달된 하계 공세의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1. 제4군은 보로네즈 전선의 소련군을 격파한 후 1기갑군과 돈 강으로 진격하여 소련군을 축출한다.

2. 루마니아군 1군과 4기갑군, 17군은 로스토프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여 볼가 강과 돈 강 사이에 형성된 전선의 간극을 매우며 소련의 주요 석유 수송로를 차단한다.

[14]
이후 작전 계획에 따라 형성된 방어선을 지키면서 1기갑군과 17군은 캅카스로 진격, 소련의 석유 자원을 고갈시키고 주요 산업 기반을 탈취한다.
이게 당초의 계획이었으나 여전히 소련군이 호구로 보였던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한 후 전선을 재편성하고 캅카스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단숨에 우주적 스케일로 확대시켰다. 1942년 7월 23일부터 남부집단군을 A와 B, 2개의 집단군으로 나눠 A집단군(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은 캅카스로, B집단군(막시밀리안 폰 바익스)은 스탈린그라드로 각각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최고사령부 명령 제45호).결국 스탈린그라드 주위에 형성되는 엄청나게 넓은 방어 구역을 루마니아이탈리아 같은 한 수 아래의 전력을 보유한 동맹국이 담당해야 한다는 뜻이고[15] 이는 이후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서 그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한편, 1942년 초에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라이헤나우는 독일 육군 내에서 열렬한 친나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히틀러도 정권 장악 초기부터 군부의 협조를 얻는 데 라이헤나우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의 의견을 무조건 거부만 할 수는 없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야전군 지휘관으로서도 뛰어난 장군이었다. 즉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군으로서, 결과론적 가정이지만 만약 라이헤나우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스탈린그라드 주변에서 제6군이 포위되었을 때 히틀러의 사수 명령을 무시하고 탈출시키고도 남았을지도 모른다.[16]
청색 작전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곳에서 스탈린이 직접 감독한 소련군의 춘계 공세도 시작되었고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중심으로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75만 명의 병력이 5월 먼저 공세를 시작했다.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이라고 불린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초반에 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등 선전했으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독일군은 당초 청색 작전 투입이 예정되어 있던 병력으로 기동 방어를 실시, 소련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약 27만 명의 병력을 날렸고 패주한 병력은 볼가 강 서안으로 도주했다.[17]
독일군은 이 여세를 몰아서 6월 말에 하계 공세를 시작했다. 이는 대성공이었다. 스텝 초원을 관통하는 독일군을 소련군은 거의 저지하지 못했고 저지선을 형성하려는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제대로 된 저지선을 형성하지도 못한 채 하르코프와 로스토프에서 포위된 소련군은 궤멸당했고 7월 말이 되자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포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와중에 섬멸당하거나 포로로 잡힌 소련군만 '수십 만'에 달해 소련군은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4. 양측의 편제



4.1. 소련군



4.1.1. 소련군 총사령부


  • 총사령관대리: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 [19]
  • 포병대장: 니콜라이 보로노프 포병대장
  •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대장

4.1.2.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 제8항공군(티모피 크류킨)
  • 제28군(드미트리 랴비셰프)
    • 제34소총병사단, 제248근위소총병사단
    • 제52특수여단, 제152특수여단, 제159특수여단
    • 제6근위전차여단
    • 전선 예비대: 제330소총병사단, 제85전차여단
  • 제51군(니콜라이 트루파노프)
    • 제15근위소총병사단, 제91소총병사단, 제126소총병사단, 제302소총병사단
    • 제38특수여단
    • 제254전차여단
    • 제4기계화군단, 제4기병군단(천왕성 작전 추가 병력)
  • 제57군(표도르 톨부힌)
    • 제169소총병사단, 제422소총병사단
    • 제143특수여단
    • 제90전차여단, 제235전차여단
    • 제13기계화군단(천왕성 작전 추가 병력)
  • 제62군(바실리 추이코프)
    • 제13근위소총병사단, 제37근위소총병사단, 제39근위소총병사단, 제45소총병사단, 제95소총병사단, 제112소총병사단, 제138소총병사단, 제193소총병사단, 제244소총병사단, 제284시베리아소총병사단, 제308시베리아소총병사단, 제10NKVD사단
    • 제93해군육전여단
    • 제42특수여단, 제115특수여단, 제124특수여단, 제149특수여단, 제160특수여단
    • 제4기계화군단, 제4기병군단(천왕성 작전 추가 병력)
  • 제64군(미하일 슈밀로프)
    • 제36근위소총병사단, 제29소총병사단, 제38소총병사단, 제157소총병사단, 제160소총병사단
    • 제154해군육전여단
    • 제66특수여단, 제93특수여단, 제96특수여단, 제97특수여단
    • 제13전차여단, 제56전차여단

4.1.3. 돈 전선군


  • 사령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제16항공군(세르게이 루덴코)
  • 제24군(이반 갈라닌)
    • 제49소총병사단, 제84소총병사단, 제120소총병사단, 제233소총병사단, 제260소총병사단, 제273소총병사단
    • 제10전차여단
  • 제65군(파벨 바토프)
    • 제4근위소총병사단, 제27소총병사단, 제40소총병사단, 제23소총병사단, 제24소총병사단, 제252소총병사단, 제258소총병사단, 제304소총병사단, 제321소총병사단
    • 제121전차여단
  • 제66군(알렉세이 자토프)
    • 제64소총병사단, 제99소총병사단, 제116소총병사단, 제226소총병사단, 제299소총병사단, 제343소총병사단
    • 제58전차여단

4.1.4. 남서 전선군


  • 사령관: 니콜라이 바투틴
    • 제2항공군(콘스탄틴 스밀노프)
    • 제17항공군(스테판 크라솝스키)
    • 제1근위군(드미트리 렐류셴코)
      • 제1소총병사단, 제153소총병사단, 제197소총병사단, 제203소총병사단, 제266소총병사단, 제278소총병사단
      • 전선 예비대: 제1근위기계화군단
    • 제5전차군(프로코피 로마넨코)
      • 제14근위소총병사단, 제47근위소총병사단, 제50근위소총병사단, 제119소총병사단, 제159소총병사단, 제 346소총병사단
      • 제1전차군단, 제26전차군단, 제8기병군단(천왕성 작전 추가 병력)
    • 제21군(이반 치챠코프)
      • 제63소총병사단, 제76소총병사단, 제96소총병사단, 제277소총병사단, 제293소총병사단, 제333소총병사단
      • 제4근위전차연대, 제1전차연대, 제2전차연대
    • 제4전차군단, 제3근위기병군단(천왕성 작전 추가 병력)

4.2. 추축군



4.2.1. 독일 국방군 (6군)



  • 직할대
    • 공군 제9방공사단(볼프강 피케르트)
    • 제14전차사단(요하네스 베슬러)

  • 제4군단(에르빈 예네케)
    • 제29차량화보병사단(에른스트 폰 라이저)
    • 제297보병사단(막스 페퍼)
    • 제305보병사단(베른하르트 슈타인메츠)
    • 제371보병사단(리하르트 슈템펠)
    • 루마니아 제20보병사단(니콜라에 타타라누)
  • 제8군단(발터 하이츠)
    • 제76보병사단(칼 로덴부르크)
    • 제113보병사단(한스-하인리히 직트 폰 아르민)

  • 제11군단(칼 슈트레커)
    • 제44보병사단(하인리히 데보이)
    • 제376보병사단(에들러 폰 다니엘스)
    • 제384보병사단(프라이허 에카르트 폰 가블렌츠)
  • 제14기갑군단(한스 후베)
    • 제16전차사단(귄터 안게른)
    • 제3차량화보병사단(헬무트 슐로머)
    • 제60차량화보병사단(한스-아돌프 폰 아렌스토르프-오일레)
    • 제94보병사단(게오르그 파이퍼)
  • 제51군단(발터 폰 자이들리츠-쿠르츠바흐)
    • 제24전차사단(아르노 폰 렌스키)
    • 제71보병사단(알렉산더 폰 하르트만)
    • 제79보병사단(리하르트 폰 슈베린)
    • 제100엽병사단(베르너 잔네)
    • 제295보병사단(오토 코르페스)
    • 제305보병사단(베르나르트 슈타인메츠)
    • 제389보병사단(에리히 마그누스)

4.2.2. 지원군



4.2.2.1. 루마니아군

  • 제3군(페트르 두미트레스쿠 대장)
    • 제1기병사단(콘스탄틴 브라테스쿠 준장)
    • 제7기병사단
    • 제5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9보병사단, 제11보병사단, 제13보병사단, 제14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
    • 제1장갑사단
    • 그외 다수 포병연대
  • 제4군(콘스탄틴 콘스탄티네스쿠-크랩스 중장)
    • 제1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제4보병사단, 제18보병사단
    • 제20보병사단(니콜라에 타타라누 소장)
    • 제5기병사단, 제8기병사단

4.2.2.2.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 (CSIR)

  • 이탈리아 제8군 (지오바니 메세)
    • 제5보병사단 "토리노"
    • 제9보병사단 "파수비오"
    • 제3기병사단
    • 제1장갑사단
    • 제30포병연대

4.2.2.3. 크로아티아 의용군

  • 제369연대(빅토르 파비치치 → 마르코 메시치)

5. 소련군의 대응


[image]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는 이오시프 스탈린 대원수의 이름이 직접 붙은 도시[20]인지라 그 상징성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또한 도시 자체가 상당히 큰 산업 도시인 데다[21] 독일군 입장에선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캅카스로 진격 중인 A집단군의 안전을 도저히 확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절대 사수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패퇴하던 부대를 수습하여 62군으로 재편성하고 근처 64군과 합류하여 스탈린그라드 방면군을 편성, 독일군의 공세에 대비하도록 했다.
또한 스탈린그라드는 현재의 명칭인 볼고그라드에서 알 수 있듯이 볼가 강에 위치해 있는데, 이 볼가 강은 모스크바 북서쪽에서 시작해서 남동쪽으로 흘러 카스피 해로 들어가는 강으로서 캅카스 지방의 유전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비롯한 소련 남방의 자원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공업 지대로 운반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애초에 독일의 작전 계획에서 볼 수 있듯이 최초 계획은 스탈린그라드를 '무력화'하여 볼가 강의 운반 통로를 차단, 소련이 전시 경제를 지탱하고 전선의 소련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자가 운반되는 것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여기서 패배하면 '''일본이 참전해 전선이 하나 더 생기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에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8월,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에 티모셴코 대신 안드레이 예료멘코 상장을 임명했다. 티모셴코가 무능한 건 아니었지만 독소전쟁 이래 패배가 따라다니던 그에게 스탈린그라드의 방어를 맡긴다는 것은 왠지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예료멘코는 독소전쟁 이후 부상을 두 번이나 당했으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기에 스탈린은 그를 전선군 사령관으로 내려 보낸 것이다. 그리고 예료멘코의 정치장교는 후대에 서기장으로 임명되는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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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전의 주역인 62군, 64군을 예하부대로 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고위 지휘관들. 독일 6군을 포위한 직후인 1942년 12월 1일 촬영. 맨 왼쪽이 흐루쇼프 중장(정치장교), 키르첸코 소장(정치장교), 추야노프 소장(정치장교), 맨 오른쪽이 전선군 사령관 예료멘코 대장.
전선군의 예하 부대로서 스탈린그라드 시내에는 62군과 64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62군의 사령관 안톤 로파틴 중장은 예료멘코와의 면담에서 매우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언동을 보였고[22] 이런 패배주의자를 데리고는 도저히 스탈린그라드를 수비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예료멘코는 64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를 62군으로 옮기고 21군 사령관이었던 미하일 슈밀로프 중장[23]을 64군으로 전임시켰다.
미국의 군수 산업은 1942년 후반에 병기를 뽑아내기 시작했고, 이 병기들을 무기대여법에 의해 1943년에야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으므로 그 동안까지 소련은 스스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6. 추축군의 공격



6.1. 시 외곽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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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공격에 앞서 루프트바페에 스탈린그라드를 폭격하여 완전히 폐허로 만들 것을 요청했고 스탈린그라드는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25] 2천여 기의 슈투카 및 융커스 폭격기로 대규모의 폭격이 이루어졌고 스탈린그라드는 불바다가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도시 방어에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시민들이 피난하는 것을 금지해 버렸고 이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다. 독일군은 쾌조의 진격을 계속해 선도 부대인 16기갑사단이 볼가 강 북서쪽에 성공적으로 진출했고 마침내 완전히 불바다가 된 스탈린그라드에 16기갑사단을 선두로 진입을 시작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여군 지원병[26]으로만 이루어진 소련군 제1077대공포연대였으나, 이들은 육상 목표에 대한 훈련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멸할 때까지 싸웠으며, 이들을 섬멸한 독일 16사단 병사들이 앳된 소련 여군들의 시체를 발견하자 불길한 예감이 뇌리에 스치기 시작했다.[27] 다시 말해, 이것은 독일군에게 '''"이제 니들은 우리 소련의 모든 인민과 싸워야 할 테니까 각오하라!"''' 란 무언의 통보였던 것이다.
2016년에 올라온 실제 참전용사 할머니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이 전투에서 1077연대의 생존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현대전에서 '전멸'이라는 말이 글자 뜻과는 달리 부대가 전투 능력을 상실할 정도의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쓰인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부대 자체는 스탈린그라드 이후에도 있다가 1945년 종전에 해체되었으며, 생존한 참전용사들은 전후 훈장까지 주렁주렁 받고 지금까지 잘 살아계신다고 한다. 기사엔 참전용사들의 자세한 증언이 실려있는데 처음엔 겨우 75명정도가 투입되었지만 나중엔 지원이 와서 전차와 장갑차의 지원도 받아가며 싸웠고, 한 할머니에 따르면 본인이 있던 중대엔 20명의 소녀 포병들이 있었는데 모두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웠다고.
또한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28]앞 대로까지 진격하자 새로운 반격에 직면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T-34 전차들이 시가지 내에서 끊임없이 출현한 것이다. 정찰부대에서 스탈린그라드 내부의 소련군의 대규모 전차부대에 대해선 통보받은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 전차들의 등장은 미스터리였다. 이들은 도색과 기관총 장착도 못한 미흡한 상태로 그대로 나온 미완성된 전차들이였으며, 공장의 작업자들은 공장 안까지 총탄이 날아드는 상황에서도 전차를 조립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후방의 아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이 만든 전차에 스스로 전차 승무원이 되어 전차를 몰고 독일군을 향해 돌격한 것이다. 더 나아가 T-34를 생산할 강철과 조립 부품이 다 떨어지자 ''' 노동자들은 소총을 들고 끝까지 맞섰다.''' 시작부터 끝까지 저항을 한 셈 #
그리고 이때부터 마냥 호구로 보였던 소련군은 독일 공군이 파괴한 건물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격렬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16기갑사단은 오히려 역습을 받고 후퇴해야 했다. 강력한 저항에 진입하는 데 실패한 독일군은 서쪽에서도 진입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도 소련군의 저항에 막혀 성공하지 못했다. 남쪽에서 4기갑군이 진격을 시도했지만 이조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뚫다 보면 결국 길은 열리는 법.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지리에 익숙해진 독일 4기갑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 남쪽에서 소련 64군의 좌익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때를 틈타 독일 6군이 진격을 개시, 스탈린그라드 북쪽을 방어하던 소련 62군의 방어선을 삽시간에 무너트리고 스탈린그라드 외곽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제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같이 보였으나... '''이제부터가 처절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6.2. 여기는 지옥 한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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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상징하는 바르말레이 분수(Barmaley fountain).[29]
방어의 중핵인 62군과 64군 외에도 21군, 28군, 38군, 57군, 63군, 1전차군, 4전차군 등 총 병력 '''50만 이상'''의 전력이 집결된 상태였는데 이들은 외곽 방어선이 붕괴되자 시내에 집결하여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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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전의 주역인 62군 지휘부. 오른쪽부터 정치장교 쿠즈마 구로프 중장,[30]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31] 참모장 니콜라이 크릴로프 소장.[32]
게다가 북·서·남쪽은 독일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고 볼가 강을 건너 도망가려는 병사는 '''즉결 처분'''하라는 스탈린의 명령이 하달된 상태였다.[33] 이런 상황에서 소련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소련군 병사들에게는 그저 필사적으로 싸우는 길밖에 없었다. 그 결과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소련군 신병들은 '''평균 생존 시간 24시간'''이란 신화적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독일군 또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시가전에서는 자신들의 장기인 제병 협동[34] 전술 같은 유연한 기동전을 전혀 구사하지 못하고, 그저 소규모 보병들의 근접 전투를 치루는 수밖에 없었고,[35] 그 결과 수많은 독일군 부대가 투입된 후 며칠 안에 깡그리 전멸하기 일쑤였다. 이는 추이코프가 제안한 시가전 전술, 즉 소련군 부대를 독일군과 가까이 붙여 독일군의 장점인 우세한 화력을 함부로 남발하지 못하게 하고[36] 건물 하나하나 병력을 배치해 강제로 백병전을 일으키는 보병 전술의 결과물이었다.[37] 어차피 어떤 희생이 있던지 도시는 사수해야 했고, 여러 면에서 당시의 소련군은 독일군보다 열세였다. 특히 제병협동 면에서 독일군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미숙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제병협동이 가능한 공간을 내주는 것은 목을 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추이코프는 그런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자신에게 남은 소련군 소부대들을 독일군 전선에 바짝 붙여서 배치했다. 게다가 소련군은 병력 개개인의 화력은 이 놈 덕분에 독일군보다 뛰어나서 중화기를 활용하기 어렵게 만들면 흐루쇼프의 생각대로 숙련도는 떨어지더라도 독일군에게도 무시못할 손실을 안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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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한 아시아계 소련 병사.
소련은 병력을 확충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시베리아에서도 거국적인 징집[38]을 행했고, 소련군에는 아시아계 병사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이 시기 소련에게 인종 구분은 사치였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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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에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고, 동방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소련군 피해는 상당했으며, 심지어 소년병까지 스탈린그라드에 배치된 상황이었다. 대개 독일군의 공격으로 가족을 잃은 전쟁 고아들이었으며, 고아원 등 아동을 맡을 시설들도 파괴되었거나 차라리 군대를 따라다니는 것만도 못한 상태인 경우가 많아 많은 고아들이 소년병으로 자원했다. 중고생 정도면 총을 들고 전투에 투입되었고 초등학생 수준이라면 잡역을 도왔고, 그마저도 못하는 대여섯 살 꼬맹이들은 정신이 피폐해진 군인들의 힐링을 책임지는 마스코트처럼 군인들을 따라다녔다. 물론 이 꼬마들도 상황에 따라 '''스스로 몸을 지켜야 했다.''' 물론 소련군 내에서도 소년병들이 있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고려하는 것조차 사치일 정도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더 나아가 독소전쟁 자체가 생지옥과 같았다는 이야기.

6.3. 쥐떼들의 전투(Rattenkri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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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독일군과 20m 앞까지 대치한 적도 있었습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죠. 여기에는 제가 있고 저기에는 독일군이 있고... 먼저 수류탄을 던지는 쪽이 이기는 거였죠.[41]

- 히스토리 채널, '2차 대전의 잊혀진 증거 - 스탈린그라드 전투' 편

독일군은 시내 점령이 비교적 간단하게 끝날 것이라 예상했으나 막상 시가전에 들어가자 상황이 그야말로 현시창이라는 걸 오래 걸리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완벽한 제병협동으로 훌륭한 단위 전투력을 자랑하던 독일군도 폐허가 된 시내 곳곳에서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보병 위주의 시가전에선 딱히 소련군보다 나을 게 없었고 이리 진격하면 저기서 튀어나오고 다시 저쪽으로 가면 또 다른 곳에서 튀어나와 집요하게 공격하는 소련군을 일일이 제압하다 보니 삽시간에 사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탈린그라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목표였다. 결국 독일 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오랜 시간과 병력의 소모를 감수하더라도 하나하나 다 때려잡아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기관단총, 권총, 수류탄, 총검, 야삽, 대검, 소총, '''저격수''', '''화염방사기''' 등 보병 간의 전투에서 쓰일 수 있는 모든 것이 동원된 '''지독한 소모전'''으로 흘러갔다. 양군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특히 소련군의 피해는 시내 방어전의 중핵이었던 62군이 삽시간에 병력이 줄어들고 다시 보충되는 패턴이 무한 반복되어 정원보다 사상자가 더 많은 안습한 상황에 처할 정도였다. 아무리 초월적 동원력을 자랑한 소련이라도 그런 사상자를 완전히 보충하기란 역부족이여서, 스탈린그라드의 62군은 갈가리 찢겨나간 사단들의 잔해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다. 추이코프는 이런 부대들을 긁어모아 모아 전투를 수행했다. 강 건너편에서 예료멘코는 사상자를 보충하기 위해 취사병까지 전방으로 내보냈다.
후방에서는 소련군의 포격 지원이 가세했다. 독일군이 특히 싫어한 것은 카츄샤 다연장로켓으로, 10에이커(약 40,468.6 m²) 면적에 4톤 정도의 폭약을 쏟아낼 수 있었다.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은 이런 소련군의 포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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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마이 언덕 전투에서 맹활약한 소련 육군 제13근위사단장 알렉산드르 로딤체프 장군(당시 소장, 가운데 철모를 쓰지 않은 사람)과 부하 장병들. 이 사단은 시베리아에서 달려왔으며 그래서 아시아계로 보이는 병사도 보인다.
이 와중에 소련군의 가용한 병력이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스탈린그라드 전선에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볼가 강과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42]
하지만 소련군에는 용맹을 떨치던 정예부대도 있었으며, 위에 나온 제13친위(근위) 사단은 시베리아에서 전출하여 62군으로 배속되어 62군 휘하의 최정예 부대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추이코프는 종전 후 참전원수들이 나와 격전을 회고하는 방송 시리즈에 나와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회고하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한 13사단의 한 소대장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추이코프는 위급할 때 직접 최전선에 나가 독려하기도 했는데, 독일군에 의해 기차역이 함락되자 마침 지나가던 13사단 소속의 한 소대장을 붙잡고 독일군 대대급 병력이 지키고 있는 기차역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다고 한다. 이는 그냥 죽으라는 명령과 다름 없었음에도 그 소대는 용감히 싸워 기차역을 탈환했다고.. 하지만 그 소대장의 행방은 묘연했고, 추이코프는 방송에서 기차역으로 달려가던 그 소대장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하며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방송을 듣고 그 전투에서 중상을 입어 후방으로 후송되었지만, 그때까지 살아있던 그 소대장(안톤 쿠즈미치 드라간 중위)이 추이코프를 찾아와 상봉이 성사된 일화도 있다.
위 사진 속의 13사단장 로딤체프 장군도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한 지 딱 두 시간 만에 참모 두 명은 독일군 총에 맞아 전사하고 자기도 죽을 뻔하고 독일군에 몰리고 몰려서 볼가 강을 등지고 한 변이 수백 미터 정도 밖에 안 되는 삼각형 진지 안에 자신의 사단과 함께 완전히 포위된 적도 있다. 교전 중에 불이 붙은 휘발유가 사단 지휘소까지 흘러들어온 적도 있다니 전투의 치열함이 더 말해 무엇 할까.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볼가 강 교두보를 유지하기 위해 소련군은 군대에 처음 들어온 신병부터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내전을 겪어본 노병까지 정비병, 행정병, 수송병, 취사병 같은 지원 병과까지 여유가 있는 인력이라면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아 볼가 강을 건너게 했으며 정예 병력도 많이 투입했다. 특히 시베리아에서 달려온 사단들과 흑해 함대에서 급조된 해군 보병대[43]는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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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이 언덕[44]과 붉은 10월 제철소, 기차역[45] 등을 비롯한 공장 지대에선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가 연일 계속됐고 수 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이곳에서 녹아 버릴 정도로 양군의 전투는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로딤체프 장군의 13근위소총사단을 비롯한 소련군의 저항은 매우 완강했고 독일군의 피해는 이제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격전 끝에 독일군은 비록 엄청난 피해를 입긴 했지만 10월에는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90% 이상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소련 62군은 10월 말엔 양단되어 볼가 강 서쪽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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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격전지로는 스탈린그라드 곡물 창고와 소연방 영웅 광장 옆에 있는 백화점이 있었다. 곡물 창고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지어진 요새 수준의 구조를 자랑했다. 높기도 높아서 하나의 성이나 다름없었는데, 독일군은 이 건물을 점령하기 위해서 탱크, 포격, 폭격까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40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의 저항은 무너지지 않았다. 2정의 맥심 기관총과 경기관총 1정, 2정의 대전차소총으로 무장한 부대는 중간에 92독립소총여단 소속 18명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지원이 있은 다음날 독일군 장교가 항복 권유를 위해 찾아왔지만 퇴짜를 맞았고, 정찰기와 전차까지 동원된 10번의 공격을 격퇴하는 등 독일군의 전진을 저지한다. 이들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물도 부족하여 항시 갈증에 시달렸지만, 싸움을 지속하다가 종국에는 보급품 부족으로 탈출하게 된다.
백화점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백화점이었고, 소련군 병사들은 지하실에서 저항하다 전멸한다. 이곳은 파울루스의 지휘소가 된다.
그러나 소련군은 볼가 강을 통해 끈질기게 보급과 보충병들이 계속하여 볼가 강 교두보를 사수했고 11월, 독일군은 교두보를 끝장내기 위해 총공세를 시작했다. 이 순간이 소련군 최악의 위기였지만 처절한 사투 끝에 62군은 결국 교두보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종래의 수많은 접전처럼 엄청난 수의 양군 병사들이 녹아 내렸다.
한편 처절한 사투가 계속되는 동안 소련군 최고 사령부(stavka)는 길고 긴 전투를 끝장내고 남부 러시아에 진출한 독일 2개 집단군을 섬멸하기 위한 대반격 작전을 입안했고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게 되는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7. 소련군의 반격



7.1. 천왕성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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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성 작전 개요도.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처절한 전투가 계속되던 1942년 가을의 어느날, 총사령관 대리 게오르기 주코프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크렘린에서 열린 스타프카 회의에서 이런 축차적인 병력 투입으로는 방어가 한계일 뿐 독일군을 격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스탈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럼 무슨 다른 좋은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되물었고, 두 장군들은 며칠 안에 다른 방안을 찾아오겠다고 스탈린에게 대답했다.
며칠 후 소련군 총참모부에서 여러 참모들이 세부 논의 끝에 확정한 작전안은 그동안의 소극적인 수비를 떠나 대규모의 공세를 통해 B집단군에게 타격을 가하고 남부 러시아 전선의 전세를 뒤집는다는 계획이었다.[46] 바실렙스키는 '''독일 6군의 좌익과 우익이 독일과 소련에 비해 장비가 변변찮은 루마니아군에 의해 방어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주코프와 작전을 의논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독일 6군을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붙잡아두고 양 측면으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돈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 전선군의 협격을 통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골자의 '''천왕성 작전(Operation Uranus,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Ура́н')'''을 입안했다.
이에 따라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던 볼가 강 교두보에는 최소한의 방어만 가능한 수준의 병력 보충을 했고 스탈린그라드 북서쪽과 서남쪽에 대규모의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에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든 명령은 구두로 전달되었으며, 무선이나 문서를 사용한 명령은 금지되었다. 심지어 기밀 유지를 위해서 작전 개시 직전까지 당시 스탈린그라드의 예료멘코와 추이코프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무조건 사수하라는 명령만 내렸다.
게다가 당시 시점에선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 추가적인 병력 및 물자 보충을 하고 싶어도 곤란해진 상태였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볼가 강에 얼음이 얼기 시작한 것이다. 강이 완전히 얼어서 얼음이 단단해지면 간편하게 육상 보급로를 운용할 수 있지만, 그 전에 얼음이 떠다닐 때는 기존의 선박을 이용한 수송이 곤란해진다. 즉 당시 예료멘코와 추이코프를 비롯한 볼가 강 교두보의 소련군은 얼음이 완전히 얼고 천왕성 작전이 진행될 때까지 부족한 병력과 물자로 버티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당시 보급난이 심해졌을 땐 장병들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주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랜드리스로 들여온 미국산 허쉬 초콜릿은 넉넉해서 장병들에게 지급이 가능했다고.
그리고 11월 10일, 소련군은 5개 야전군 규모의 대병력의 집결을 완료했다. 이렇게 집결한 병력은 '''90만'''[47]에 가까운 대병력이었다.

7.2. 독일군의 대응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수비는 루마니아군 3군과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부분의 방어선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고[48] 루마니아군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꾸준한 정찰을 통해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 대규모의 소련군 부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기에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전력으로 집결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마니아 3군은 즉각적인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정보 분석을 통해 루마니아 3군이 보고한 북부에 집결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로 들어가는 철도선을 차단하기 위한 제한된 공세를 위한 병력이라고 판단하였고, 루마니아 3군의 요청을 거절했다.
독일군이 이런 전략적 실수를 범한 것은 소련군의 현란한 기만책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가을 내내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에게 소소한 공세를 꾸준히 가했고, 더하여 스타프카는 겨울부터는 방어에만 집중하라는 장문의 가짜 명령을 연일 무선 통신으로 뿌려댔다. 마지막으로 전략 예비대는 모스크바 주변에 꽁꽁 숨겨서 독일군의 정찰을 회피했다.
독일 육군총사령부 동부정보국은 소련군의 전략 예비대 규모[49]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였으나, 앞서 언급한 스타브카의 기만책에 대차게 낚여 이들이 동계 반격 작전에는 투입되지 않고, 방어에 전념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OKH[50]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는 히틀러에게 주의를 촉구했으나, 히틀러는 "그런 헛소리는 개도 안 믿겠다"고 하며 할더를 해임하고 중장이었던 제1기갑군 참모장 쿠르트 자이츨러를 2계급 진급시켜 상급대장으로 임명한 후, 총참모장에 임명하는 것으로 답했다.
결국 '''B집단군 북방 200km에 이르는 전선은 매우 취약한 상태로 적에게 노출됐고''' 방어를 담당한 루마니아군은 B집단군 사령부에 계속적으로 병력 증원과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사령부는 48기갑군단을 파견했지만 이 정도 전력으로 소련군의 작정하고 준비한 공세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측면 구역을 독일군이 담당해야 했으나, 소련군을 얕잡아 본 독일 육군총사령부의 오판으로 인해 작전 규모가 지나치게 확대됐고 결론적으로 캅카스와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동시에 유지한다는 것은 당시 독일군의 역량으로는 무리였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7.3. 천왕성 작전 개시


"우리는 환호했습니다. 이제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전황이 바뀐 겁니다. 지금까지는 독일군이 이기고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이길 차례라고요."

- 러시아 참전 용사들의 회고.

1942년 11월 19일, 소련 남서 방면군이 포병의 격렬한 지원 사격을 업고 출진했다. 총 '''24개 사단, 11개 여단'''으로 구성된 소련군의 대병력 앞에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던 루마니아 3군은 삽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려 5개 군단으로 구성되었던 루마니아 3군 중 일부만이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고 예상을 웃도는 소련군의 대공세에 놀란 독일군은 48기갑군단에게 루마니아 3군을 지원하라고 명령했지만 동계 장비 부족과 고장으로 인해 기동 가능한 전차들은 얼마 되지 않아 구원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51] 결국 루마니아 3군은 완전히 분쇄되고 말았다.
11월 20일에는 돈 방면군이 스탈린그라드 남동쪽에서 발진, 6군의 우익을 담당하던 독일 4기갑군과 루마니아 4군을 몰아붙이며 진격을 개시했다. 삽시간에 루마니아 4군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독일 4기갑군은 양단되었다. 그리고 11월 22일, 스탈린그라드 서쪽에서 소련군 남서 방면군의 선도 부대와 돈 방면군의 선도 부대가 스탈린그라드 서쪽 카라치에서 조우했다.[52] 작전 개시 3일 만에 천왕성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소련군은 작전 중에도 자신들의 장기인 기만술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대표적으로 공격자, 방어자 양쪽에게 대단히 중요한 길목인 칼라차 교량을 소련군이 공격할 때, 대담하게도 5대의 T-34를 밀집대형으로 배치한 뒤 한밤중에 모든 전조등을 환하게 밝히고 교량으로 접근시켰다. 공교롭게도 독일군의 노획 T-34 부대가 항상 이 다리를 지나쳤기 때문에 보초는 소련군의 T-34가 다리를 건널 때까지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나중에 T-34가 다리를 다 건넌 다음에야 독일군 보초는 이 부대가 아군이 아닌 소련군 부대인 줄 알아챘으나 중과부적. 소련군은 가장 힘든 전투가 되리라고 예상했던 다리를 피해 없이 확보를 했다.
소련군은 사실 약 10만 명 정도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상은 소수를 제외한 6군 대부분과 양단된 4기갑군의 상당수 병력, 약간의 루마니아군 등 총 33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포위망 안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 이는 사실상 B집단군 전체 병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결국 B집단군 전체가 소련군의 포위망에 갇혀 버린 셈이다.

7.4. 히틀러식 비극


독일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 완전히 포위되자 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OKH에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고 소련군의 전력이 더 보강되기 전에 아직 빈약한 서쪽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파울루스는 6군이 포위당하긴 했지만 현재 전력이면 방어선을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B집단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도 이에 동의하여 6군이 서쪽 포위망으로 진격한다면 B집단군의 잔여 병력을 동쪽으로 진격시켜 6군을 포위망에서 탈출시키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OKH는 이러한 현지 지휘관들의 판단을 존중하여 히틀러에게 6군의 후퇴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허나 당시 히틀러는 '''후퇴'''라는 말만 들어도 개거품을 물면서 ''''게르만족슬라브족 따위에게 패배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실로 중2병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데미얀스크 포켓에서 공중 보급으로 방어에 성공한 기억을 떠올리며 공군참모총장 한스 예쇼네크에게 성공적인 공중 보급 가능성에 대해 질문했다. 예쇼네크는 '''매우 단기간이라면''' 하루에 300톤 정도는 가능하다고 대답했고 히틀러는 이에 고무되어 6군은 현재 위치를 사수하란 명령을 내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1개 군단 규모였던 데미얀스크와 1개 야전군(그것도 일반적인 규모보다 훨씬 거대해진) 규모인 스탈린그라드의 보급 문제를 동일하게 생각한 것 자체가 멍청하기 짝이 없지지만 거기에 당대의 허세왕 헤르만 괴링도 공중 보급만으로도 6군에게 충분한 물자를 보급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실책을 범했고 파울루스와 바익스의 의견은 상큼하게 씹혀 버리고 말았다. 직접 보급 작전을 담당하게 될 4항공군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도 현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작전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고집불통에 남의 말 안 듣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양반들인지라''' 이 의견도 당연히 씹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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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그라드에 나타난 Ju 290Fw 200. 수송 작전에 동원되는 항공기는 주로 He 111였으나, 상황이 다급하자, 독일은 유일한 4발 수송기인 Ju 290을 보급 작전에 투입하고,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까지 희생시켜 가며 훈련이 부족한 승무원을 무선 장비와 항법 장비조차 설치되지 않은 수송기에 탑승시켜 수송 작전에 투입시켰다.
그러나 6군이 매일 필요로 하는 물자는 500톤에 달하는 데 반해 수송기, 활주로 등 모든 조건이 열악했던 독일 공군이 수송할 수 있는 물자는 최대 300톤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최상의 조건이 갖춰 졌을 때'나 300톤의 수송이 가능했다.[53] 당연히 스탈린그라드의 날씨가 매일 항공기가 뜨기 좋게 항상 개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동률 문제, 악천후에 장거리 수송, 거기에 사용 가능한 비행장이 간이 비행장 단 2곳뿐이라는 이런 조건에서 이 물자 공수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21세기 현대의 기술력으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베를린 봉쇄 때 미군이 이를 실현한 적은 있지만, 이 때는 기상 상태도 나쁘지 않았고 템펠호프 공항이란 탄탄한 인프라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소련군의 방해도 없었다. 스탈린그라드 때와 동일하게 비교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이 때문에 평균 수송량은 필요량의 10%도 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6군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소련 공군이나 지상 대공포 등이 가만히 있을 이유도 없었고, '''가만히 있지도 않았다.''' 소련 공군은 고사포를 밀집시켜 방공 구역을 치밀하게 구축했고, 지상에서 관제하는 요격기 부대를 운용했다. 더하여 야간 전투기 부대를 투입하고, 시간에 관계없이 투입할 수 있는 별동대까지 편성했다. 결국 포위 내내 독일 공군은 소련 대공포 부대와 소련 공군에게 사정없이 털렸다.[54] 스탈린그라드는 독일 육군뿐만 아니라 독일 공군에게도 대참사였다.
마지막으로, 12월 23일 소련군 제24전차군단이 방어 수단이라고는 '''대전차포 몇 문이 전부인 타친스카야의 독일 공군 비행장을 공격'''함으로써 막타를 날렸다. 이로써 가뜩이나 부족한 보급이 더욱 줄어들었다.[55] 이로써 비행장 방어를 위해서 제6장갑사단이 구출 부대에서 빠지고 말았고 당연히 악전고투를 치르면서 전진하던 구출 부대의 작전은 망했어요.
한편 전체적인 작전 진행의 어려움에 비하면 사소하지만(?) 6군의 병사들을 추위와 배고픔으로 더 이끄는 요소가 있었으니, 이런 대규모 보급 작전에서 꼭 생기기 마련인 행정/기술적 착오이다. 헤르만 괴링이 다스리던 공군은 특권을 이용하여 육군의 보급장교가 수송 물자를 체크하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엄청난 병크를 저지르게 된다. 대규모 물자들을 긴급히 수송하다 보니 6군에게 꼭 필요한 식량, 연료, 방한 물자들이 제대로 수송되지 않은 경우가 존재했던 것. 춥고 굶주린 병사들이 공수된 상자를 열었더니 신품 철모치약이 나오는 경우, 심지어는 그 상황에서 전혀 필요 없는 '''콘돔'''(!)이 비행기 하나 가득 실려 오기도 했다.[56] 혹은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물자를 떨궜더니 병사들이 받지도 못하고 상자가 그대로 부셔져 버리거나 소련군이 노획해 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거기에다가 보급되는 물자의 상당수는 '''식량이 아니라 연료'''였다.[57]
11월 23일 시작된 첫 항공 수송으로 '''첫째 주'''동안 350톤의 물자를 날랐는데 그중 식량은 14톤이었고 둘째 주에는 512톤을 날랐지만 식량은 24톤이었다.[58] 포위된 인원이 29만 명에 가까웠다는 것[59]을 생각하면 항공 수송으로 받은 식량은 1인당 1주일에 100g밖에 안 되는 극소량이어서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했다.[60]
파울루스는 포위망에 걸리고 한 달 뒤인 병사들에 대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대가 보유한 수송용 말의 도살을 허가했다.[61] 그러나 이것도 잠시, 그나마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기갑 부대들은 고기는커녕 주변의 다른 부대에서 말뼈다귀나 얻어 와서 스프나 끓여 먹는 신세였다. 게다가 이것도 며칠 못 갔고 독일군은 계속 쫄쫄 굶게 되었다. 한번은 비행장 사수 등의 공을 세워 파울루스에게 철십자 훈장과 함께 특식을 받은 부대가 있었는데, 그 특식이란 게 고작 빵 한 덩이와 청어토마토 소스 통조림 몇 통뿐일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결국은 굶주리다 못해 '''시체를 파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의 피해자는 보로포노보와 굼라크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3,500명의 소련군 포로들이었다. 독일군에게 배급할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어떠한 식량도 제공되지 않았고 이런 관료적 잔혹 행위로 인해 크리스마스 전 하루 평균 20명이던 사망률이 폭증했다. 1월 말 소련군 병사들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생존자는 단 20명에 불과했다.[62]

8. 겨울폭풍 작전


독일 남부집단군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몽상 같았던 보급 작전은 당연히 실패했고 6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보급이 필요하다며 여러 차례 보급을 요청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B집단군과 협의하여 스탈린그라드 남서쪽을 돌파하여 탈출할 수 있는 작전의 재량권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게다가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6군이 겨울 동안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할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이대로 스탈린그라드의 6군과 남서 방면군의 맹공에 밀려나고 있던 B집단군의 잔여 병력마저 섬멸한다면 이미 캅카스에 진출한 A집단군도 고립될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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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인 3월 만슈타인의 사령부를 방문한 히틀러, 방한복을 입은 만슈타인의 모습이 낯설다. 사진 오른편으로부터 제4항공군 사령관 리히트호펜 공군 원수, 총통 전용기 기장 한스 바우어 SS 중장, 만슈타인, 히틀러.
이에 히틀러는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를 돈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스탈린그라드 남서쪽을 돌파하여 6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허나 이 돈 집단군이라는 것이 새로 투입된 몇몇 부대와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4기갑군의 일부 병력을 제외하면 사실상 패잔병 집단과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편제는 거대했지만 실제 사용 가능한 병력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애초에 소련군의 포위망을 분쇄한다는 임무는 돈 집단군이 감당하기엔 불가능한 임무였다. 새로 편성한 호트 기갑집단과 홀리트 파견군, 루마니아 4군이 놀라운 투혼을 발휘한 끝에 호트 기갑집단의 선도 부대인 6기갑사단이 스탈린그라드 50km까지 진출했으나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리였다. 만슈타인은 파울루스에게 남서쪽으로 탈출하여 돈 집단군과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고 몇몇 장교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남서쪽 포위망을 뚫어 탈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며 설득을 시도했지만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다.
사실 만슈타인 회고록을 주요 사료로 쓰는 일부 전사가나 만슈타인빠들이 파울루스에게 구출 실패의 책임을 떠넘기면서 파울루스를 희대의 무능아로 묘사하곤 하나, 이 시점에서 6군의 능력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일단 6군은 소련군에게 2-3중으로 포위되어 있었던 데다가 여름부터 싸워 왔던 62군과 64군은 시내에서 건재했기 때문에 건물 하나하나마다 소련군 병력과 대치하고 있던 6군이 갑자기 철수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제대로 된 동복도 걸치지 못하고 실탄마저 부족했던 6군 장병들이 도보로 눈덮인 설원을 수십km를 걸어서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한다는 것도 무리였다. 여기에 위에서 말했듯이 독일군의 수송을 책임졌던 말을 식량부족으로 모조리 잡아먹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설령 철수한다고 해도 중장비는 모두 두고 가야 했다. 즉, 만슈타인은 구출 작전 실패의 책임이 자신의 탈출명령을 거부한 파울루스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파울루스군은 그럴 실행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만슈타인에게도 6군에게 철수를 요구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만슈타인이 소련군 포위망을 뚫고 6군에게 접근할 수는 있지만, 6군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만슈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더이상 없다. 만슈타인 부대가 6군 전체를 업고(...) 돌아오기라도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겨울폭풍 작전 자체가 히틀러의 망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일차적인 책임은 파울루스나 만슈타인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리한 블라우 작전을 실행하고, 스탈린그라드에 집착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불가능한 구출 작전을 명령한 '''히틀러에게 있다.'''
만슈타인은 구출 작전이 실패하자 6군의 고난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 히틀러에게 6군의 항복을 허가해 줄 것을 탄원하지만 히틀러는 '''당연히 거부한다.'''
한편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스타프카는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을 굳힐 작전인 '토성 작전' 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돈 집단군이 겨울폭풍 작전으로 밀고 들어오자 돈 집단군에 대한 반격 계획인 '소(小) 토성 작전'으로 작전을 변경해 돈 집단군을 밀어붙였다.
결국 소련군 51군을 상대로 분전하던 루마니아 4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소련군 2친위군과 5전차군의 공격에 돈 집단군마저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 예하 부대에 작전을 중지하고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이제 6군이 탈출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겨울폭풍 작전은 6군을 구출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나마 다행히 캅카스에 진출한 A집단군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 줬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 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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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상황이 절망적이 되자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교들을 비행기로 탈출시키기 시작했다. 독일군 수중의 마지막 비행장인 굼락(Gumrak)에서는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려는 광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장교들은 비행기에 올라타려고 뇌물을 주고 매수하려고 들기도 했다. 장교들만 빼온 것은 아니고, 열등한 슬라브인들에게 강간당하는 수모를 막는다며 히틀러가 직접 철수시킬 것을 명한 간호사 등 여성 보조원들, 도하 작전 지원을 위해 왔다 할 일이 없어진 크릭스마리네 하천함대 소속 해군 장병 등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아예 사단 예하 부대는 남겨두고 사단장과 참모장교, 기타 중요 인물 몇몇만 탈출시킨 경우도 있었다. 기병사단에서 개편되었기 때문에, 제복에 기갑 병과를 뜻하는 분홍색이 아닌 기병 병과의 금색 부착물을 단 것으로 유명한 24기갑사단이 대표적. 부대 자체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했으나, 참모진 등을 수송기편으로 빼와 후방에서 그들 및 구 24기갑사단 출신 타 부대 전출자나 회복된 부상병 등을 모아 재창설했다. 물론 대다수는 신병들이었다. 하지만 사단장인 아르노 폰 렌스키 소장은 다른 부하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종전 후 동독에 정착해서 동독 의회 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의 공중 봉쇄로 이렇게 어렵게 탄 비행기편마저 사실 안전하지 못했다. 스탈린그라드 전역에서 독일군은 수송기 488대, 승무원은 1천 명 이상을 잃었다.
물론 이것도 비행장이 수중에 있을 때 이야기였고, 비행장이 점령당하자 탈출할 길은 완전히 사라진다.

9. '''독일군의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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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복 이후 포로로 끌려가는 독일 제6군 장병들

1943년, 해방되는 스탈린그라드를 담은 영상. 전투 막바지의 모습과 항복하는 파울루스 원수와 그 참모진, 포로로 잡힌 독일군 장병들의 모습이 담겼다.

'''"보헤미아의 상병을 위해 죽을 수는 없지."'''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항복이라는 말은 절대 쓰지 마라. 우리 군대가 보급품을 받을 수 없어서 공격을 이기지 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희생이라고 해야 한다.'''

-아돌프 히틀러

모든 탈출 가능성을 상실한 독일 6군은 기아와 추위에 전투 의지를 빠르게 상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면 처참하게 죽을 뿐이라는 두려움에 독일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포위망은 점점 좁혀들었고 실탄마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 1943년 1월, 소련군은 6군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이대영의 책인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에서는 소련군이 빵을 들고 찾아와 항복을 권했다는 서술이 있으나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닌 도시전설이다. 그래서 공식 항복 이전에 개별적으로 항복한 병사는 매우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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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 위장복을 입고 철통 같은 포위망을 구성한 소련군 병사들. 숨어있는 곳에서 밖으로 한발짝만 나와도 고깃조각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듯이 8명 모두 PPSH를 들고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반대로 헐벗고 굶주린 6군의 병사들은 실탄은 커녕 움직일 힘조차 없는 상황.
소련군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대장과 레오니트 고보로프 대장의 공동 명의로 독일군에 공식적으로 항복 권유 문서를 전달하고 심리전 차원에서 이 문서를 수만 장 인쇄하여 전선에도 뿌렸다. 이 항복 권유서는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 보장과 환자에 대한 의료 지원, 정규 식량 지급 등 '''소련군 입장에선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했다.[63]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1월 12일 소련군은 고립된 독일군에 대해 대공세를 개시했다. 6군은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모든 희망은 사라졌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질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부상자는 방치되고 식량 지급이 중단되었다. 이렇듯 상황이 끔찍했기 때문에 1월 16일 제295보병사단의 1개 대대 전체가 소련군에게 투항하는 등 개별적인 항복이 점차 늘어갔다. 1월 18일 파울루스는 연료와 탄약이 바닥났기 때문에 6군이 앞으로 며칠밖에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전문을 보냈으나 1월 22일 히틀러의 전문을 받았다.

'''항복은 있을 수 없다. 병사들은 마지막까지 싸운다. 가능할 경우, 여전히 전투를 할 수 있는 병사들로 축소된 요새를 사수하라. 서방문명을 구하고 요새를 지킨 장병들의 용기와 끈기는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따라서 제6군은 독일의 역사에서 실로 커다란 족적을 남길 만한 역사적 공헌을 했다.'''

그리고 1월 30일[64]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켰다. 역대 독일 육군 원수 중 적에게 포로가 된 원수는 없었기에 파울루스를 육군 원수로 진급시킨 것은 '''자결하여 명예를 지키라'''는 암묵적인 명령인 셈이었다. 또한 같은 날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는 독일 제6군의 처절한 상황을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스파르타 군대의 상황과 비유하는 라디오 연설을 방송했다.[65] 하지만 매 순간이 지옥과도 같던 제6군 장병들에게 그런 연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냉랭한 반응만이 돌아왔다.
즉 파울루스의 원수 승진과 괴링의 라디오 연설은 모두 파울루스로 하여금 '''히틀러식 비극'''의 주연 배우가 되라는 것인데... 파울루스가 이런 속셈을 못 알아볼 사람도 아니라서 결국 히틀러의 기대를 쌩까고 '''다음날 소련군에 항복했다.''' 파울루스는 여름부터 자신들의 숙적이었던 스탈린 전선군과 그 휘하의 추이코프군에 항복한다는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12월부터 들어와 포진해 있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상장의 돈 전선군에 항복했다.
파울루스 원수의 명령으로 제6군의 연락 장교는 항복 의사를 전선에 맞닿은 돈 전선군 최전선 부대에 알렸다. 처음에는 소련군 소위 가 항복 문서를 접수하러 왔으나, 독일군은 격이 너무 낮다며 이를 거부했다. 이후 소련군에서는 영관급 정치장교를 다시 보냈고, 독일군은 그를 폐허가 된 백화점 지하에 마련된 6군 사령부까지 안내하여 파울루스의 항복 의사를 확인했다.[66]
이렇게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에 남아있던 독일 제6군은 대부분 항복한다. 30만에 이르던 대병력은 이제 기력을 잃고 죽어가는 9만 1,000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67]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최소 7천 명에서 1만 1천 명 정도의 독일군이 제6군 사령부가 공식적으로 항복한 직후에도 무장해제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했다. 이들은 나중에 진압당한다.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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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가 된 독일군 지휘부. 가운데가 파울루스. 사병들과는 달리 포로가 된 장성급 포로 20여 명은 소련에서 괜찮은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독일 본토에서 이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제6군의 성스러운 저항이 단 하나의 겁쟁이 때문에 치욕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이후로 그 누구도 원수로 승진하지 못한다!"''' 라며 노발대발했다.[69]
독일군은 최소한 얘네들처럼 아예 참패를 감추지는 않았다. 비록 육군 야전원수와 정예병들로 구성된 제6군 전체가 궤멸되었다는 사실은 감추었으나, 괴벨스는 되려 이를 이용해 그 유명한 총력전 연설(스폴트팔라스트 연설)을 발표해 전황을 고조시킨다.
한편 수십 만 독일군 전사자 대부분은 전장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그렇듯이 한 곳에 모아 놓은 다음 화장한 뒤 잔해를 그대로 매장했다. 소련군이 적군과 아군 유해를 모두 챙겨줄 여력도 안 됐을 뿐더러, 당시에는 땅이 얼어 붙어서 시신을 일일이 매장도 하기 힘들었고 치명적인 티푸스(장티푸스보다 훨씬 무섭고 치사율이 훨씬 높다)가 돌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처리해야 했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눈이 녹기 시작하면 식수마저 오염시켜 수인성 전염병까지 돌기 때문.[70] 그 광경을 목격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한번 가 봤지만 다시는 가 보고 싶지 않았다" 고 그 처참한 광경을 자신의 회고록에 남겼다.

10.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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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야전군 규모의 독일군이 포위-섬멸당한 최초의 전투로 일방적인 독일의 공세로 진행되던 독소전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이 시점에서 소련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독일군을 넘어서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이 전투 이후 자신감을 회복한 소련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된다. 더구나 여기서 항복한 독일 6군은 독일군 정예 중의 정예로 동부전선에서 큰 활약을 하였던 부대였기 때문에 이후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에서 그 공백의 크기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독일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탈출이 가능했는지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겨울폭풍 작전 당시 1달 정도 포위되어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한 독일 6군은 식량 및 연료가 부족해서 전차의 기동 능력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고 운송 수단인 말을 전부 도축한 상태이기 때문에 탈출을 시도한다 해도 장비를 전부 버리고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문제는 도보로 이동해야 할 장병들도 식량이 부족해서 기아 상태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독일 6군의 상당수를 잃을 수 있는 탈출 작전에 파울루스가 소심하게 굴었던 것을 이해할 수도 있다.[71]
소련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점도 있었는데, 6군이 소련의 군대를 스탈린그라드에 묶어두고 있을 동안 캅카스에 진출했던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간발의 차이로 포위망을 탈출해 버렸다. 만약 6군이 일찍 항복했다든지 아니면 일찍 탈출해 버렸으면 A집단군은 소련군의 포위망에 걸려 6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더 칭송해야 될 판국.
한편 B집단군이 거의 전멸해 버린 독일군은 남부 러시아 전선 자체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됐지만, 르제프 전역에서의 소련군의 공세(화성작전)와 뒤이은 하르코프에서의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 생명 연장의 꿈을 꾸게 되지만,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망상으로 끝난다.
또한 소련군 저격 전설의 시작도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소련군 전설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와 독일 국방군 저격학교 교장 에르빈 쾨니히의 초인적인 저격수 대결을 묘사했다. 러시아에선 바실리의 회고록에서 나온 내용이니 진짜라고 하지만 서방 측은 물론 심지어 독일에서도 바실리가 거물급 저격수들을 해치운 것은 사실이나 에르빈 쾨니히나 하인츠란 이름의 저격학교 교장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 에르빈 쾨니히나 하인츠 토르발트라는 이름은 전투가 끝난 후 독일 저격수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름들이고, 당시 격전에서 독일군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이체프가 사살한 독일 측의 특급저격수가 누구인지는 오리무중이다.

'''"Я умираю, но не сдаюсь! Прощай, Родина."'''

'''"나는 죽어가지만 항복하지는 않는다! 조국이여, 잘 있거라."'''[72]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연합군 반격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실제로 서구 전사학자들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시작으로 나치 독일의 패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11. 기타


  • 추축군의 피해 : 사상 76만 명 및 포로 9만 명[73]
  • 소련군의 피해 : 사상자 110만 명 추정[74]
전후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소련에서는 거대한 동상 어머니 조국상을 세웠는데, 자유의 여신상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전쟁 기간 중 노획한 독일군 철모를 녹여 만든 고철들도 재료로 투입되었다. 전체 높이는 자유의 여신상보다 낮지만 인물상의 크기는 이쪽이 더 크다. 지금은 볼고그라드(구 스탈린그라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또 전투 패배 후 포로로 수감된 독일군 군의관목사 쿠르트 로이버(Kurt Reuber, 1906-1944)가 전투 중 그린 스탈린그라드의 성모도 독일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상기시키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 당국의 프로파간다는 더욱 험악해지게 된다. 종전의 소련 프로파간다는 나치, 파시스트를 비롯한 이념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지만 스탈린그라드를 시작으로 아예 특정 민족과 국가를 겨냥하여 '''독일놈을 죽여라'''라는 식의 프로파간다들이 등장한다. 이건 독일이 먼저 자초한 일이니 소련이 잘못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먼저 독일인들은 슬라브인들이 열등한 인종이기 때문에 박멸해야 한다고 선전했고, 실제로 그렇게 죽였으니... 이러한 기조는 1943년 소련의 유대계 언론인이자 시인인 일랴 에렌부르크(Илья Григорьевич Эренбург, 1891-1967)가 '독일인은 인간이 아니다!' 나 '죽여라! 독일인 시체만큼 통쾌한 건 없다!' 등의 노골적인 반독일 선전 문구가 든 시를 발표하며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전쟁 종결 직전인 1945년 4월 소련 공산당 당기관지 프라우다에서 에렌부르크의 반독 경향을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식의 증오에 기반한 선전은 수그러들었다. 소련 공산당과 정부에서는 2차 대전 승리 후 독일 점령 지구의 민심을 다독이며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큰 그림을 미리 그려놓았기 때문에, 승리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저런 식의 선전은 해롭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1943년 새해를 맞은 6군 사령부 높으신 분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지셨다. 어느 간 큰 병사들이 사령부 벽에 "우리는 집에 가고 싶다", '''"히틀러는 지옥에나 가라"'''라는 낙서가 그려졌기 때문이라고.[75]

11.1. 폰 파울루스? 파울루스?


독일군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를 귀족 출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제법 많은 2차 대전 관련 서적에서(대표적으로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 그를 폰 파울루스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 그는 귀족이 아니다. von 칭호 자체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시민 명사들에게도 간혹 주어지곤 했지만 파울루스 가문은 그런 호칭을 받은 적도 없다. 그저 평범한 시민 계급, 정확하게는 교사의 아들이었다. 오히려 시민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히틀러 및 나치당 치하에서 더욱 진급이 유리했다.
영미권에서 나온 많은 책들이 폰 파울루스라고 언급하고 있고 이걸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데 이는 원저인 영미권 서적들의 오류로 추측된다. 실제로 독일에서 나온 관련 서적에는 폰 파울루스라고 언급되는 경우가 전혀 없다.

11.2. 이후 독일 육군에 끼친 영향


[image]
▲ 1943에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에게 노획당한 독일의 전차들.
독일 육군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실전에서 강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2차 대전의 패배를 통해 교육 훈련이 실전에서 한계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간 육군이 확신했던 "실전과 같은 훈련"의 개념이 모호했다는 판단에 따라 2차 대전의 여러 전투들에서 원인과 교훈을 찾아내었고, 이를 토대로 육군 전투원-참모-지휘관의 교육 훈련 체계를 다시 정리하였다.[76]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육군이 얻은 개념은 아래와 같다.
  • 지속적이지 못한 정찰
정찰보다는 병력과 화력 집중에 노력
  • 소규모 지휘관의 역할 수행 부족 및 불충분한 교육 훈련
1943년 1월 한 젋은 장교는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후방 지역을 돌파할 때 독일 제6군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관찰 기록했다. "모두에게 전투 의지와 방어 의지가 부족했다."
어느 중대가 볼가로 이동하던 중, 305보병사단의 패잔병이 중대와 함께 싸우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중대는 노획한 PPSh-41과 모신나강 그리고 Kar98K로 무장한 305보병사단 소속 상병을 합류시켰고, 해당 상병은 중대가 이동하는 동안 혼자서 소련군 저격수들을 모두 제거. 소련군 전차 12대가 공격 준비 중인 것을 발견한 조준수는 사수에게 견제 사격으로 적의 주의를 끌게 했고, 적 전차가 해당 방향으로 대응하는 틈을 타서 자신은 정면에서 대전차포를 사격하여 소련군 전차를 무력화.

11.3. 참전한 한국계 인물


한때 6.25 전쟁 당시 북한측 휴전협상 대표였던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남일이 장교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남일은 세계대전 중에 소련 변방에서 교육공무원을 하고 있었으며, 독소전쟁 전체에 걸쳐 참전한 바가 없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독립군 홍범도 장군이 병력이 달렸던 소련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홍범도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한 것은 사실이고 소련이 워낙 다급한 나머지 나이고 인종이고 가릴 것 없이 징집한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시 74세의 고령이었던 홍범도 장군까지 징집할 수는 없었다.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 카자흐스탄의 정착지에서 사망한다.
김일성이 소련군 소속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는 설이 해방후 나돌았으나, 김일성은 관동군의 토벌작전 때문에 만주에 있는 것이 어려워지자 소련령으로 도피, 극동의 하바롭스크에서 88여단에 소속으로 훈련받고 있었다.[77]
오히려 이런 명사들 이외에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려인들 가운데 참전 용사들이 있다. 예컨대 황동국(ХВАН, Дон Гук, 1918년생)은 1942년 9월에 소련군에 자원입대하여 대전차포병으로 활약했는데, 정확히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및 포위에 투입된 것은 아니나 천왕성 작전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 로스토프-나-도누 해방전에 참가하였다.
이밖에 노르망디의 한국인이 참전했다는 설이 있으나, 노르망디의 한국인 자체가 신원이 불분명하므로 신빙성은 떨어진다.

12. 전투 이후 독일 국내에 미친 영향


http://dk01337.egloos.com/m/4440547[78]

13. 관련 작품


  •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9년 소련판 영화
소련에서 만들어진, 소련군 입장의 전쟁 영화. 이 무렵의 소련 영화들의 상당수가 그렇지만 엄청난 물량빨을 보여준다. 대규모의 소련군 부대를 투입하여 찍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제작 시기가 시기인 만큼,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당시 3호 전차나 하노마크 등의 실제 장비들이 부대 단위로 출연했으며, 소련군과 독일군이 포격으로 대파되어 올라갈 수 있는 계단과 방과 복도 몇개만 남은 건물 안에서 서로 두들겨 패고 서로를 집어던지고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세 낮추면서 본능적으로 총까지 쏴대는 등 싸우는 시가전투 연출, 각종 대규모 롱테이크 씬, 눈덮힌 평야를 가득 메우고 최소 편대단위의 압도적인 CAS를 받으며 독일군 정면으로 돌격하는 소련군의 기갑 웨이브+인민 웨이브가 압권이다. 하이라이트 영상.
독일에서 만들어진 독일군 입장의 전쟁 영화. 흔치 않은 위치만큼이나 영화 자체는 수작이다. 다만 치열한 전투 장면보다는 전선에서의 병사들의 현시창 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데 더욱 집중하고 있는 반전 영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죽어가는 독일군의 심정과 무의미한 침략 전쟁에 희생당하는 일개 병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93년 독일 영화는 전장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이 영화는 그냥 러시아판 배달의 기수다. 이외에도 러시아의 스탈린그라드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이것들의 공통점은 파이트 구도가 이 영화와 더불어 지나칠 정도로 소련군에게만 유리하게 전개된다는 사실. 이를 보면 그저 국뽕 영화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전투는 한국으로 치면 명량해전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러시아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스탈린그라드가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블루레이판이 출시되었다.
하지만 명량해전은 역사책에 그대로 실려 있는 상황이기라도 하지, 그것과 달리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실질적 손실은 독일이 많았지만 잠재적 사상자는 소련이 더 많았던 것에 반대되는 몇 가지 왜곡 현상들이 존재한다. 감독의 생각이야 어떨지 몰라도 일단은 러시아에서도 평가가 상당히 좋지 않았으며 실제 역사적 배경은 간접적으로 묘사해 놓고 정작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 보이던 소련군 병사들조차도 어느 순간 모두가 싸움신이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일부러 도탄을 내서 독일군 탄약고를 격파하는 등 존재하지도 않았던 상황을 가지고 전투를 유리하게 묘사한 것은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을 저하시켜 버려 딱히 옳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인 듯하다. 무엇보다 배경의 핵심은 다루지도 않고 대장정의 막이라고 보기엔 결국은 그 배경의 일부에 한한 영화이며 그 일부마저도 영화의 끝이 독일군의 항복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니 관중의 실망이 컸던 작품이다. 한마디로 초점을 이상적으로만 맞춘 바람에 와 닿지 않는 셈.
2011년에 나온 스탈린그라드 속의 저격수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영화인데도 저급한 화질과 흔한 더빙 방식의 음성 지원으로 같은 러시아 영화인 즈베즈다와 같은 의도적 성향을 띠고 있다. 고증으로나 BGM으로나 그냥저냥 볼 만한 것 같지만 납득할 수 없는 친러시아적 연출이 들어간 작품이다. 중간중간 소련군의 불확실한 엄호에도 픽픽 쓰러지는 독일군들과 특히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러시아 저격수가 독일 저격수에게 끔찍하게 안 맞는다. 반면에 러시아 저격수는 끔찍하게 잘 맞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소련군 저격수와 대치하고 있는 독일군 저격수 앞에 대놓고 유도하는 소련군의 속임수 공작에 속는 독일 저격수의 묘사가 상당히 안타까워진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유명해진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가 주인공인 영화. 주드 로와 에드 헤리스 등의 명배우들이 출연한다. 영화 자체도 수작이고 이게 나름 실제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초반의 소련군의 참상을 너무 심하게 묘사하는 바람에 러시아 참전 용사들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처참하진 않았다, 우리는 전차와 포병대의 지원을 받아가며 싸웠어 시벌'이라며 분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총이 없어서 2명 당 한 정씩만 총을 주는 장면의 경우 소련군 중에서도 일부 전선, 그나마 형벌 부대 정도만이 그런 식으로 싸워야 했다. 확실히 좀 과장된 상황.
후일담에서 루돌 폰 슈트로하임이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한다. 슈트로하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런 괴물을 대체 누가 죽인건지는 불명. TV 애니에선 그 전사 직전의 모습이 영상으로 추가되었다.
특히 2편의 부제가 '스탈린그라드의 영웅들'인 만큼, 스탈린그라드에서의 격전을 실감나게 표현해 낸 게임이다. 총을 조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탄젠트 조준기를 조절해서 거리에 맞게 영점을 맞춰서 쏴야 하는 등 괴악한 현실성을 자랑하는 게임이다.
9.4 버전부터 스탈린그라드 맵을 추가했다. 볼가 강을 옆에 두고 있는 완전히 박살난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엄폐물과 벽이 꽤 많은 데다가, 무너진 흙더미로 미니맵을 주시 하지 않는다면, 공격 찬스를 놓칠 뿐더러 길까지 잃어버릴 수 있는 꽤 복잡한 구조이다.
블리츠크리그 게임이 없어도 실행되는 스탠드얼론 게임이며 멥 하나하나가 실제 스탈린그라드 시가지 구조를 보며 만들었다.
치열했던 전투답게 유저에게 수많은 유닛들이 주어지며 그만큼 어렵다. 하지만 탄탄한 미션구성, 충실한 고증,이미 인정받은 게임성 등이 시너지를 일으켜 스팀에서의 평가는 좋은편.
  • 그 외 2차 세계대전기의 소련군을 다룬 여러 게임들, 예를 들어 콜 오브 듀티 시리즈1편, 2편, 5편 등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루었고[79],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서는 DLC로 스탈린그라드 캠페인 미션이 추가되었다.
  •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흑해의 바쿠 유전지대와 분리해 석유 공급을 차단하여 승리한다.
  •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는 상황이 약간 다르게 진행한다. 블라우 작전이 초기에 잘 진행되어서 스탈린그라드의 점령 자체는 격렬한 시가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천왕성 작전으로 인한 포위를 막지는 못한다. 이 때 제6군을 후퇴시키려면 그렇게 할 수는 있었으나, 제6군이 실제 역사보다 일찍 빠져버리면 바쿠 유전 근처까지 진격했던 A집단군이 후퇴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캅카스 회랑에 갇혀버린다. 이에 히틀러(로 빙의한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제6군으로 하여금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며 A집단군의 퇴로를 확보하게 했다. 대신 새로운 공군의 수장이 된 밀히에게 공중 보급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하도록 하고 만슈타인의 구출 작전을 A집단군의 탈출 직후로 앞당기며 6군에게도 만슈타인의 작전에 호응하며 후퇴하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공중보급이라는 게 원래 말이 안 되는 것인지라 실제 역사보다 효율적으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6군의 전력 저하를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병력은 전체의 10% 남짓인 3만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후퇴 과정에서 편제도 차량도 화포도 모두 날려먹은 알보병 3만. 주인공은 이러다 역사대로 자기가 죽게 된다며 멘탈붕괴에 빠진다.
연합군 11번째 미션이다. 육군전력에서 여전히 소련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밀려[80] 연합군 해군 순양함이 볼가강으로 순간이동 하여 소련군의 발목을 크게 잡는다.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 간략히 언급되는데 소련 정부는 1946년 항복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자체는 1947년에 끝났다고 나온다. 심지어 정부가 항복했는데도 스탈린 본인은 사라져버렸고, 48년 이후까지도 소련 영토 내에서는 사실상 전쟁중이라는 언급이 있다;


[1] 이 부대는 세바스토폴 공방전 이후 전투에 참가했다.[2] 추축군 총 사상자 수를 85만명으로 잡을경우 16.8초에 한명꼴로 죽었다. 소련군의 사상자를 113만명으로 잡을 경우 12.6초에 한명꼴로 죽었으며, 추축군 소련군 사상자를 도합 200만명으로 잡을 경우 7.1초로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즉 라디오에서 7초마다 독일군이 1명 죽었다 했지만, 실상은 7초마다 양측이 번갈아가면서 죽고있었다.[3] 각각 대영제국프랑스 제3공화국(협상국), 소비에트 연방(연합국)[4] 이쪽은 양군 통틀어서 병력 200만명 동원에 전차는 무려 6,000대, 항공기는 4,000대가 동원되었다.[5] 심지어 전투가 지속되어 전차를 생산할 강철이 다 떨어지자, 노동자들은 '''소총을 들고 끝까지 맞섰다.'''[6] 다만 초등학생들에게도 총을 쥐어준 건 아니고 부대 내 마스코트 역할이나 식량 보급을 맡았다. 위에 나온 총을 든 채 죽은 소년병은 시체에서 총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렇다고 이들도 안전한 건 아니고 보급을 위해 독일군의 식량을 홈치다가 걸려 죽은 사례가 많다. 또한 저건 초등학생의 사레이고 중고등학생들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실전에 참전했다. 특히 고등학생들은 거의 준성인 취급받았으니.[7] 흔히들 서방권에선 과달카날 전역이 아닌 미드웨이 해전이 전환점이라고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공세를 막은 것이지, 실질적 전환점은 아니다. 유리했던 일본 제국에게 미국이 기적의 동점골을 넣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전역 문서 참조.[8] 처음부터 독일에게 북아프리카는 별 관심도 없는 전선이었다(...)말하자면 동맹인 이탈리아가 털리고 있으니 프랑스에서 활약한 에르빈 롬멜 한 명 보내서 대충 생색낸 수준. 독일에는 롬멜 외에도 하인츠 구데리안이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발터 모델처럼 대소련 전선을 맡을 명장들이 널려 있었다.[9] 차라리 미국이 정말 스탈린그라드에 맞먹는 전투를 자랑하고 싶었다면 미군식 물량의 정점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적극적으로 홍보했어야 했다.[10] 터키에서도 친독 성향이 높긴 했다. 실제로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튀르크 제국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과 한패로 참전하기도 했고 2차 대전 이후로도 한국과 함께 서독에 노동자를 보낼 정도로 당시에는 상당히 친한 나라다. 즉 그거 하나 믿고 터키를 추축군에 참전시키는 것.[11] 이미 태풍 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독일군 장성들이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본인은 친애하는 장군들이 이 작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이 유감이오"라면서 작전을 강행했고 이것이 이번에도 이어진 것이다.[12] 물론 방어가 주목적인 주제에 보급선이 늘어나는데도 신경 안 쓰고 그저 전진만 한 롬멜의 책임도 부정할 수는 없다. 롬멜의 공세를 통한 적의 격멸 시도 및 그 판단 자체가 결코 나빴던 건 아니긴 하다.[13] 하지만 시기상으로 볼 때 1941년의 소련도 아니고 진주만 공습이라는 빅똥을 싼 일본이 대륙에서 중국과 싸우랴, 미국이랑도 싸우랴 급급한 상황에 대 소련 전쟁에 참전해도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의 무시무시한 기갑 웨이브에 패배한 적이 있던 일본은 소련을 매우 경계시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공방전 이전 소련은 일본이 중국에서부터 침공해 올 것을 우려해 극동 지방에 군대를 배치해 놓았다고 1941년 9월 14일, 일본에 있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은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낸 덕분에 소련은 극동 지방의 부대 중 정예 일부를 모스크바 전선에 투입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 역시 일본을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독소전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고 소련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상황에서도 최소 30개 사단은 극동을 지키고 있었다. 1941년 말-42년 초 상황도 그러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지는 상황에 43년까지 승패가 결정이 날지도 불확실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결과를 가지고 일본이 대 소련 전쟁에 참여했을지는 의문이다. 일본군의 역량을 생각하면 한창 중국에서 발목을 잡힌데다 미군이 이를 가는 상황에서 유의미한 규모의 병력을 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기껏해야 연해주나 사할린 근처에서 국지전 정도를 일으켜 놓고 생색이나 냈을 가능성이 높다.[14] 볼가강과 돈강 사이의 전선 간격을 좁히라는 말만 있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라는 직접적인 지령은 후대에 전달된 거다. 애초에 계획상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너머에 있기에 볼가강 방위선 구축에 불필요하고 대도시 공세가 매우 힘들고 오래걸린다는 건 레닌그라드전선에서 뼈저리게 배운 독일군이 처음부터 작전 개요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즉 주공이 되는 청색A집단군이 캅카스로 진격하는 동안 볼가강과 돈강을 경계로 6군이 포함된 청색B집단군은 방위전만 해줘도 되는 거였고, 그랬으면 쓸데없는 희생도 없었다.[15] 하지만 사실 이 방어선도 독일이 담당할 생각이었는데 동맹국이 전적 쌓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 주제에 장비는 그저 안습[16] 무엇보다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라이헤나우 휘하에서 참모로서의 역량을 절정까지 발휘하였고 그의 6군 사령관 임명도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라이헤나우의 의중대로 움직일 수 있는 야전군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있어도 라이헤나우의 명령은 거부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17] 이 전투의 패배로 티모셴코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나서 두 번 다시 일선 지휘를 맡지 못했다.[18] 헝가리군의 당시 편제는 나오지 않는다.[19] 총사령관은 당연히 강철의 대원수이었지만, 블라우 작전 이후 자기의 군사적인 무지를 깨닫고 상징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었고, 그 아래인 총사령관대리인 주코프가 실질적인 총지휘를 맡았다. [20] 그 외에도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은 많았지만, 러시아 내전 시기 남부 지역에서 식량 조달 조직 책임 인민위원으로 임명된 스탈린이 식량 공급을 안전히 하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처음으로 유의미한 군사권을 행사한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는 차리친(제정 시절 명칭) 사령부에서 북캅카스 전선을 지휘하며 모스크바에서 레프 트로츠키가 귀찮은 간섭을 하는 것 이외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출처: 《스탈린:강철 권력》 14장 '내전 속으로', 로버트 서비스[21] 소련군 군수 산업 생산량의 4분의 1을 담당했으며, 소련군 주력 전차 T-34의 주요 생산 기지 중 하나였다.[22] 이건 예료멘코와 추이코프의 주장이다. 반대로 게오르기 주코프는 로파틴이 정비 태세를 잘 갖춰 놨다고 자기 회고록에 기록했다. 주코프와 추이코프가 사이가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추이코프의 공적을 깎아 내리기 위해 주코프가 이렇게 써 놨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23] 이상하게도 슈밀로프는 시가전에서 추이코프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임무를 맡았는데도 서방 전사에서는 거의 언급이 안 된다. 1996년 1월호 월간조선에서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전적지 탐방 기사를 냈는데 러시아인들은 이런 이유에 대해 슈밀로프가 손실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격전에서 언급이 잘 안 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24] 이 독일 육군 중위의 총기가 소련군의 PPSh-41임을 주목. PPSh-41은 많은 장탄수와 강력한 위력으로 독일군에게 노획품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고질적인 생산량 부족에 골머리를 앓던 독일군 당국은 이를 MP717(r)로 명명하고 수리 키트를 제공해 제식 채용하기도 했다. 반대로 소련군은 자기네 기관단총을 좋아하는 정도만큼이나 MP40에 대해 호평하고, 노획도 많이 했다.[25] 물론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신나게 두들겨 맞았고, 서부에 대한 방어가 필요했기 때문에 생각만큼 충분히 공군을 활용하지는 못했다.[26] 주로 고등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27] 여군들은 모두 비전투병과 보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전투병으로 활동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물론 이스라엘 같은 나라는 여군이 야전병으로 참전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국가의 특성상 그런 것일 뿐이다.[28] 볼가 강을 따라 스탈린그라드 외곽 북동쪽에 위치한 공장으로, 독소전쟁이 터지자 군수공장으로 징발되어 T-34전차를 가장 많이 찍어낸 공장들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소련군 기갑전력의 든든한 반석이었다.[29] 여러 매체에서 나오는 유명한 동상으로, 1950년대에 철거되어 사라졌다가 2013년 8월에 다시 만들어졌다. 브이 포 벤데타시계태엽 오렌지에서도 나오고, 소련군의 유명한 저격수바실리 자이체프를 그린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초반부에 바실리가 총알 다섯 발로 독일군 다섯 명을 저격하는 장면에서 바실리가 숨어 저격한 분수도 바로 이곳이며, 이 장면을 오마주한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소련군 첫미션에서도 나온다. 게임 코만도스 3의 러시아 첫 임무에도 이 분수가 등장한다.[30] 1901-1943,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인 1943년 9월 심장마비로 사망. 어쨌든 구로프는 지휘권에 간섭하지 않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62군의 사기를 계속 유지시켜 정치장교로서 이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62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모두 원수로 승진했기 때문에, 전후까지 생존했으면 원수진급이 유력했을 듯. [31] 신경성 습진 때문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32] 1903-1972, 이후 5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극동 군관구와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 전략로켓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재임 중이던 1962년에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했다.[33] 제227호 명령. Ни шагу назад! / Ni Shagu Nazad!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그리고 악명 높은 형벌 부대의 창설도 포함되어 있었다.[34] 이 군사용어에 대해서 여러 번역들이 있는데 국군은 제병협동을 쓴다. 연합은 나라 단위로 다른 경우(예: 한미연합)에 주로 쓰고 합동은 기관별로 다른 경우(예: 육해공 합동작전, 민관군 합동훈련)에 쓴다. 제병협동은 보통 같은 육군 소속 보병, 포병, 전차 등 여러 병과 부대의 전술행동에 대해 쓰는 말이기 때문에 협동이라고 하는걸로 보인다.[35] 독일군은 맹폭을 퍼부어 시가지를 박살냈는데 이는 시가전에서 건물의 잔해들로 인해 차량의 진입을 막는 장애물과, 방어하는 소련군에게 많은 엄폐물을 제공하는 등 악수로 작용했다.[36] 아군이 소련군과 가까이 있는 상태에서 함부로 공격했다가는 팀킬의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37] 추이코프는 이 전술을 적 껴안기(Hugging the enemy)라고 불렀다. [38]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도 원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군 태평양 함대 행정 부사관으로 근무하다 흑해 함대, 그리고 해군육전대로 전속되는 서류상 절차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39] 다만 공산당 정부는 공식적으로 모든 사람, 모든 민족은 평등하다며 인종차별에 반대했지만 아무래도 인민 대중의 인식을 전부 바꾸진 못해서 백인 병사들이 황인 병사들 보고 몽골놈이라고 인종차별하거나 보직에 불이익을 주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40] 소년병들이 들고있는 무기가 독일군 노획무기인데, 정규군에게 지급할 무기도 부족한 판이니 노획무기를 지급한 걸로 보인다[41] 안토니 비버의 저서 피의기록 스탈린그라드에 의하면 레이어 케이크마냥 건물 한 층은 소련군, 한층은 독일군 또 그 위층에는 소련군, 그 위에는 또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42] 이런 장면은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초반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물론 지원을 충분히 받고 공세를 했다는 점에서 고증오류가 있기는 하나, 처절했던 것은 사실이다. 보태서 도강 과정에서 배타고 가던 소련군 보충병들이 독일군 뇌격기에 걸려 떼죽음을 당한 건 팩트 맞다.[43] 정식 편제도 아니고 세바스토폴 공방전크림 반도에서 혈전 속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수병들과 극동의 태평양 함대 수병을 싹 긁어모아서 육전복만 나눠 준 식이었다. 독소전쟁 초창기엔 해군 보병대 편제가 발트 함대(그런데 이들은 본진 지키기도 바빴으니...)에만 형식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 세바스토폴에서도 수병들이 수류탄 던지고 육박전 벌이면서 죽어나갔다.[44] 몽골인들의 요새가 위치했던 스탈린그라드의 고지대로 일종의 감제고지였다. 당연히 이곳을 차지하는 쪽이 스탈린그라드를 훤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45] 하루에 주인이 12번 바뀐 적도 있다.[46]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니콜라이 바투틴 중장이라고 알려져 있다.[47] 일부 자료에서는 '''115만'''이라고 한다.[48] 주 장비라는 게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에서 노획한 구형 장비에다 그 수마저도 적었다. 이것이 독일군 장성들이 동맹군을 개무시하는 사례 중 하나였다.[49] 73개 소총병사단, 86개 전차여단 및 기타 전투 지원 부대.[50] 독일 육군최고사령부, 늑대굴(Wolfsanze:볼프샨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51] 들이 배선을 갉아 먹어서 작동하지 않은 전차도 많았다고 하지만 이는 순전히 도시전설이다. 당시 독일군 48기갑군단 소속 22기갑사단의 전투 이전 전차 손실은 거의 전부 소련군의 공세를 대비해 부대를 이동시킬 때 행군 중 고장으로 주저앉은 것이었다. 당시 확실히 쥐에 의한 피해로 기록된 것은 전차 몇 대의 전조등 배선을 갉아먹은 것뿐이라고 한다.[52] 이때 소련군 전차는 단 한 번도 발사하지 않고 손쉽게 독일군 방어선을 뚫었다. 독일군이 왜 적극적으로 반격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나, 대부분 군사 전문가들은 이곳을 방어하던 부대가 급조된 부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53] 수송 작전에 동원된 He 111의 최대 적재량이 1톤이었다. 그러므로 이는 He 111이 하루에 300번 소티를 해야 한다는 조건인데, 이것은 하루에 주야간 합해서 약 5분에 한 대 꼴로 착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규모 수송이 간이 비행장에서 가능할 리가 만무하다. 수백 대의 수송기를 보유한 현대의 천조국도 악천후가 아닌 상황의 현대적인 대형 공항에서나 단기간에서만(활주로 보수 등을 감안하면 이런 짓은 오래 못한다) 가능한 수치다.[54] 소련군은 676대의 Ju-52기를 격추시켰음을 주장했고, 전쟁 중후반기에 가서는 손실 보고와 격추 보고에 대한 왜곡을 일삼던 독일 공군조차 266대의 손실을 인정했다.[55] 타친스카야 비행장은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융커스 52의 주요 기지였는데 여기가 공격당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더 멀리 있는 비행장을 이용해야 했다. 날아가는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연료를 더 실어야 했으므로 가뜩이나 부족한 수송량이 감소해 버렸다.[56] 처절한 전투 현장에서 여자에 신경쓸 사람은 없다. 군인을 상대로 한 매춘은 전투현장이 아니라 전투가 끝나고 지역 통제가 확고하게 이뤄진 지역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57] 외부에서 날아오는 전투기들이 하늘을 계속 지켜 줄 수는 없으니 비행장 방어를 위한 전투기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전투기용 보급 물자의 우선순위가 높았다.[58]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2012), 412페이지[59]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2012), 398페이지[60] 여담으로 이러한 공중 보급의 한계는 연합군도 똑같이 겪었는데 마켓 가든 작전 당시 고립된 영국군을 지원하게 위해 공중 보급이 시행되었고 사상자까지 발생하면서까지 이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보급 상자에서 나온 것은 베레모였다.[61] 말 따위가 뭐 대단한가 싶지만 당시 독일군에게 있어서 말은 물자 운반 및 인원 수송용으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한 말의 도살을 허가했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기계화보병/기갑부대에서 방한대책으로 연료를 빼다 태우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62]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2012), 491페이지[63] 결과적으로 지켜지진 않았다. 안전보장은 독일군처럼 죽게 놔둔 수준만 아니었다 정도지 수용소에 집어넣고 일부러 죽일 목적으로 심하게 굴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게 소련식 안전보장이었고, 의료지원과 식량배급은 애초에 줄 물자가 없었다. 어쩌다가 물자가 가더라도 소련 경비병이나 민간인이 "우리 가족이 굶고있는데 우리 모국을 침략한 더러운 파시스트에게 줄 보급품은없다."라면서 뺏어갔다.[64] 히틀러가 총리가 된 날이다.[65]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한 6군을 '아시아의 위협'(나치나 히틀러의 망상에 의하면 유대교과 볼셰비즘을 아시아적 비문명으로 간주했다.)에 맞서 유럽 문명을 지키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스파르타 300명의 용사로 만들어 정신승리 선전을 하는 것이었다.[66] 이 때 파울루스가 머물던 은신처의 상태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은신처를 방문한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쓰레기와 오물덩어리가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고. 최고사령관이 있던 곳이 그런 상태인데 일반 사병들이 있던 곳은 얼마나 끔찍했을지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긴다. #[67] 이들 중 파울루스를 포함한 단 6천 명만이 10년 후 독일로 귀환했다. 말이 9만 명이지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다 죽어가던 상태에서 항복했기 때문에 항복 직후 이송 과정에서도 사상자들이 쏟아졌고, 1943년 봄 포로수용소에 티푸스가 돌면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독일 포로들의 처우가 보다 개선된 건 소련군이 승기를 잡으면서 보급 상황도 좀 나아졌고 독일군 포로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서방 세계의 눈치가 보이게 된 1943년 말 이후이다. 독소전 초반 소련군 관리 하의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은 30%에 달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는 10% 이하로 떨어진다.[68]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부대는 전멸 직전 마지막 통신을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우리는 의무를 다했다."[69] 그러나 캅카스로 진격했다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로 포위망에 갇힐 뻔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A집단군 사령관은 포위망을 탈출한 공적으로 원수로 승진했다. 후퇴 작전의 성공으로 원수로 승진했다는 점에서 독일군에 있어서는 불길한 징조였다.[70] 독일군만 그런 것도 아니고 소련군 시신도 똑같이 처리됐다.[71] 출처: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2012년[72] 이 문구는 개전 초기에 소련과 독일의 국경에서 30일 동안 버텼던 브레스트 요새에 새겨진 글이다. 1944년에 브레스트에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알려졌고 곧 소련의 선전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73] 이탈리아군루마니아군, 헝가리군을 포함한다. 이 3국 군대의 희생은 사망/부상/포로를 합쳐 37~38만 명이다.[74] 민간인은 제외. 민간인은 순수한 스탈린그라드 거주 민간인 희생자만 5만 명을 넘는다. 또한 전투 개시 이전 인구 30만 중 5만 이상은 의용군으로서 전투에 참가하였고 이들에 대한 통계는 불확실하다.[75] 출처: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76] 1960~70년대 대한민국서독 간 군사 교류가 이뤄지면서 독일의 실용적인 교육 훈련 개념이 상당 부분 육군에 도입되게 된다.[77]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홍범도와 김일성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만나는 것으로 그려진다.[78] 다만 원전이 증언이나 증거 자료 같은 1차 사료가 아닌 히틀러 평전이라는 것은 감안할것[79] 특히 1편에서는 위에 언급된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오마주하여 첫 전투에 임할 때 총 대신 모신나강 클립 하나를 받고 맨몸으로 전쟁터에 내몰린다. 5편에서도 해당 영화의 분수대 저격 씬을 오마주.[80] 비록 독소전쟁이 없었고 소련이 중화민국을 침공하는 1946년까지 큰 전쟁도 없었고(유럽전선은 1950년의 토룬 대학살로 개전되었다.) 프랑스 침공시기에 대숙청을 한번 더 했으며 미국이 극동지역에서 발목을 잡아줘도 순수 육군전력은 여전히 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