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삼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동삼
金東三 | Kim Dong-sam'''

'''출생'''
1878년 6월 23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천전리[1]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사망'''
1937년 4월 13일 (59세)
서대문형무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정요인 묘역[2]
'''본관'''
의성 김씨[3]
'''본명'''
김긍식(金肯植)
'''이명'''
김종식(金宗植)
'''자'''
한경(漢卿)
'''호'''
일송(一松)
'''직업'''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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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김계락(金繼洛)
어머니 영해 신씨
'''배우자'''
박순부(朴順夫)
'''가족'''
아들 김정묵(金定黙)
며느리 이해동(李海東)
'''종교'''
유교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clearfix]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서간도에서의 행적
2.3. 최후
3. 여담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김동삼은 1878년 6월 23일 경상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천전리(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유학자 김계락(金繼洛)과 영해 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긍식(金肯植)으로, 동삼(東三)은 서간도로 망명한 후 지린성, 봉천성, 흑룡강성 등 동삼성(東三省)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의 단결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기원하고자 개명한 이름이다.
그는 학봉(鶴峰) 김성일의 후손으로, 영남의 저명한 유학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제자인 김주병(金周秉)에게 한학(漢學)을 배우면서 한학자로서 성장했다. 경사유방(景泗流芳)에 따르면, 김동삼은 어릴 때부터 기골이 준수하고 두뇌가 명석하였으며, 기량이 관홍하여 여러 사람을 통솔할 지도력을 가졌다고 한다. 또한 한학에 정진하여 이미 소년기에 사서삼경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도 섭렵했다고 한다.
이렇듯 한학자로서 역량을 쌓아고 있던 그는 류인식과 접촉하면서 뜻을 달리 먹게 된다. 류인식은 을미의병을 일으킨 적이 있던 위정척사파 인사였지만, 1904년경 신채호, 장지연과 교류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고 머리를 깎은 뒤 '혁구종신(革舊從新) 열심교육(熱心敎育)'의 기치를 내걸며 신사상을 익힐 것을 호소했다. 김동삼은 그런 그의 뜻에 감화되어 신사상을 익혀 민중을 계몽시키는 것이야말로 구국의 길이라고 판단했다.
1907년, 김동삼은 의성 김씨 문중을 설득하여 각 문중의 대표자인 이상룡, 류인식, 김후병(金厚秉), 하중환(河中煥) 등과 함께 경북 최초의 근대적 사립 교육기관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다. 그를 비롯한 협동학교 발기인들은 협동학교 설립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 우리 안동의 인사이시여! 우리 안동은 옛날부터 학문을 쌓은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찍이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기대하던 희망이가장 두터운 고을이었다. 그러한 즉 우리 안동인사는 국가에 대한 책임이 가장 무겁지 아니한가, 우리 안동인사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여, 다른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개화를 소리치고 있는데, 우리는 홀로 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겠는가!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앞서 나와 이끌고 있다. 우리 안동인사는 홀로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지 말라."

또한 협동학교의 권면문(勸勉文)에도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켜 구국을 위한 기초로 삼기 위해 설립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모든 것이 때에 따라 변한다.’ 했고, ‘성인(聖人)의 도(道)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이것은 경도(經道)와 권도(權道)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 것이 예나 오늘에 있어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중략) 다행한 일이다. 뜻있는 선비가 시국을 통찰하고, 공립 사립학교를 열심히 세워 나아가고, 또 발전과 희망이 엿보이는 듯하니, 곧 우리나라 개화의 길과 구국의 한 가닥 밝은 빛이 되는 듯하다. (중략)

우리는 뜻을 같이한 동지들이 약속을 하고 설교(設校)할 것을 발기하니, 이름을 협동학교라 하고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켜 나라의 기초를 삼으려고, 이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중략) 지금 비록 늦었다고 그만 둘 수 없는 일이다. 훗날 깨닫고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할 즈음에 심장과 허파가 쪼개어지는 듯한 아픈 가슴으로 동포에 알리노니 따라오라. 그렇지 않으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 되리라.

김동삼을 비롯한 협동학교의 발기인들은 전통적 유림의 본고장인 안동지방이 그 폐쇄성으로 인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낙후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을사조약의 체결로 인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혁신 유림으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협동학교 권면문에서는 서구의 선진문명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이러한 서구의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여 개화하는 길만이 구국의 길임을 강조하고, 그 실천방안으로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협동학교는 보수유림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초대 교장에 취임한 류인식은 부친 류필영(柳必永)으로부터 부자절연까지 당했다. 또한 1909년 협동학교 교직원과 학생 30여명의 단발 단행은 보수유림들의 심한 비난을 받았으며, 1910년 7월 18일에는 한명만이 이끄는 예천 지역 의병들이 협동학교를 공격하여 교감 김기수(基箕壽), 교사 안상덕(安商德)과 회계 이종화(李鐘華)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협동학교는 이러한 극심한 반발로 인해 폐교 위기까지 몰렸지만, 김동삼을 중심으로 김하정(金夏鼎)․김철훈(金轍勳) 등 청년교사들이 끝까지 학교를 위해 헌신하고 초기에 반대하던 백하(白下) 김대락이 뜻을 돌려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면서 가까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1911년 3월 30일, 협동학교 23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중에는 유림 등 훗날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도 있었다.
한편, 김동삼은 1909년 3월 이상룡, 류인식과 함께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했다. 안동지회는 매월 2회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중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하고 회보를 통해 홍보 활동을 강화했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서양 근대사상과 제도를 수용하면서 민주주의를 훈련함으로써 민족을 계몽시키는 데 그 주된 목적을 두고 있었다. 또한 항일 무장 투쟁을 염두에 두고 군사단체 조직을 위한 의용병 양성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학교에서는 군대식 체조훈련을, 공장과 회사에서는 작대법을, 지방자치를 시행하는 향촌사회에서는 단련제(團練制)를 실시함으로써 징병령이 시행될 때 무장한 군인이 될 준비 대책을 마련하였다.
또한 김동삼은 1909년 10월 안희제, 서상일, 이원식, 남형우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했다. 단원은 전국적으로 구성되었지만, 영남지역 인사들이 가장 많이 참여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4]에 가담하고 있던 계몽 운동가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2.2. 서간도에서의 행적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김동삼은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를 건설해 국권을 회복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이상룡, 김대락 등과 함께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했다. 이때 그와 함께 망명한 의성 김씨 문중 인사들의 숫자는 15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1911년 4월, 김동삼은 삼원포의 대고산에서 300여 명을 모아놓고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했다. 이후 자치조직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이상룡을 추대했으며, 내무부장에 이회영, 농무부장에 장유순,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류인식을 추대하고 자신은 조직과 선전을 맡았다. 이상룡은 경학사 설립 취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모른다고 하지 말라. 내가 나의 공산(公産)을 잊어버리고 있거늘 저들이 어찌 빼앗지 않겠는가.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가 나의 천직(天職)을 버리고 있거늘 저들이 어찌 엿보지 않겠는가. 칼을 빼어 자결을 한다면 도리어 자신을 혐오하여 죽임으로써 적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곡기를 끊어 굶어죽고자 해도 차마 나라를 팔고 이름을 팔 수 없으니 장차 눈물을 흘리며 하늘이 다하는 치욕을 받겠는가. 힘을 축적해서 마지막 결과를 보아야 하며, 만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다시 백절불굴의 뜻을 일으키며 힘써야 할 것이다."

또한 김동삼은 동지들과 함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여 동포들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12년 6월 경학사를 해체하고 부민단(扶民團)이 설립되면서 그 본부가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지자, 신흥강습소도 그곳으로 이전되었다. 이어 1913년 5월 신축교사의 준공과 더불어 그 명칭을 신흥학교로 고치고 본격적으로 무관을 양성하는 무관학교로 출범했다. 석주유고(石洲遺稿)에 따르면, 김동삼은 각 처에 소강당을 개설하고 합니하의 한 요지를 점하여 신흥중학교를 설치하고 군사과를 두어 일본 병서를 몰래 구입하여 그것을 강습하게 하였다고 한다.
1914년, 김동삼은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개설했다. 그는 신흥학교를 거치면서 배출된 학생들을 정예군으로 조직하기 위해 비밀 병영으로 쓸 곳을 마련하기로 했다. 백두산 서쪽 깊은 산속에 자리 잡았다고 ‘백서’라는 이름을 붙이고, 군대조직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농장’이라고 위장했지만, 사실은 비밀리에 병력을 수용하여 훈련시키면서, 스스로 농사를 지어 생활을 꾸리고자 설치한 비밀병영이었다. 그는 직접 장주(莊主), 즉 독립군 군영의 최고 지휘자가 되어 군대를 교육하고 훈련시켰다. 백서농장은 1919년까지 운영되었고, 이곳에서 훈련된 병사들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활약했다.
1919년 3.1 운동이 국내에서 발발하자, 삼원포에서도 3월 13일에 대대적으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김동삼은 이상룡 등 39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는 등 만세운동의 확산을 적극 후원했다. 또한 그해 4월에는 유하현, 통화현, 흥경현, 환인현, 집안현 등 남만주 각 지역의 지도자들과 함께 유하현 삼원포에 모여서 부민단을 모체로 하여 각 지역의 자치단체를 통합한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했다. 한족회 총재에 이상룡이 선임되었고, 참모부장엔 김동삼, 독립군 사령관에 지청천이 선임되었다.
1920년, 김동삼은 지청천과 함께 소속 부대를 안도현 밀림으로 이동시켜 제2의 군사기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해 11월에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합세해 밀산 및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독립군의 희생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1922년 1월, 한족회는 대한독립단, 광한단 등의 대표들과 회동하여 각자의 조직을 해체하고 통합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김동삼은 대한통군부가 출범되었을 때 교육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대한통군부에 참가하지 않은 단체들이 많았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완전한 통합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만주와 연해주 각지를 돌며 통군부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다.
1922년 8월 23일, 군정서, 대한독립단, 관전동로한교민단, 대한광복군영, 대한정의군영, 대한광복군총영, 평안북도독판부 등 8단, 9회의 대표 71명이 환인현 마권자에 모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김동삼은 대한통의부의 총장이자 중앙행정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대한통의부에서 무장투쟁을 담당한 기관은 의용군이었는데, 이들은 주로 김동삼이 길러낸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이었다.
1923년 1월, 김동삼은 상하이로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상화를 위한 논의에 참여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참가 대표들의 자격을 조사, 심의하여 의결권을 가진 대표를 선정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1월 18일에는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의장으로서 각 파벌의 주장을 수렴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자는 창조파의 극심한 대립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의장직을 사임하고 서간도로 돌아갔다.
서간도로 돌아온 김동삼은 1924년 3월 하순 이상룡, 양기탁 등과 함께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해 7월 대한통의부를 대표하여 10개 단체 대표들과 함께 통합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의장에 선출된 그는 통합 작업에 박차를 가했고, 11월 24일 전만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정의부(正義府)를 발족하기로 합의했다. 그는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 외무위원장, 학무위원장, 교육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정의부의 결성에도 불구하고 참의부(參議府)와 신민부(新民府)가 별개의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김동삼은 3부 통합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4월, 그는 북만주로 가서 신민부를 방문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광복의 제1요(第一要)인 혈전의 숭고한 사명 앞에는 각개의 의견과 고집을 버려야 할 것이며, 독립군이 무장하고 입국하여 광복전(光復戰)을 수행하기 전에 3부의 군부가 합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합작은 지상명령이니 여하한 장애가 있더라도 합작하여야 한다."

1928년 5월 12일, 3부의 통합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18개 단체의 대표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 김동삼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전민족유일당 조직을 추진했다. 그러나 회의는 조직 방법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졌다. 한편에서는 기존 단체를 중심으로 조직하자는 '전민족유일당협의회'를 주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 위주로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를 주장했다. 김동삼이 속한 정의부는 전자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김동삼은 기존 단체를 그대로 두고 통합한다면 완전한 통합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정의부를 탈퇴하고 3부의 통합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3부의 통합은 갈수록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신민부와 참의부는 정의부가 주도하는 것에 반발하여 3부를 해체하고 촉성회와 협의회의 분규를 타파해 전만주 일반의 대당주비(大黨籌備)를 실행하여 유일당을 새로 조직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의부는 현재의 각 단체를 기본으로 하는 단체 중심 조직론을 고집했다.
게다가 신민부 내부에서 민정파와 군정파간의 내분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민정파와 군정파는 각각 대표를 따로 파견하면서 자신들이 정식대표이고 저 쪽은 반동분자라고 주장했다. 또한 참의부는 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소하를 밀정으로 간주, 사형 선고를 내리고 정의부에 집행을 위탁했으나, 참의부 간부 김승학이 김소하가 밀정이라는 것을 부인했다. 이에 참의부는 대표 전부를 소환했고, 이로 인해 통합 논의는 장기간 미뤄졌다.
이에 김동삼은 1928년 12월 하순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여 3부 통합을 추진하려 했다. 여기에는 정의부를 탈퇴한 김상덕, 김원식, 지청천, 신민부의 김좌진, 황학수, 김시야, 최호, 정신, 그리고 참의부의 김희산, 김소하 등이 가담했다. 혁신의회는 군정부를 세우는 데 목표를 두고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는데, 김동삼은 혁신의회 의장이자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의회를 이끌었다. 또한 그는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30년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피살되면서 통합 계획은 차질을 빛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해 7월 한국독립당에 가담해 고문을 맡아서 통합 논의를 지속했다.

2.3. 최후


1931년 10월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이에 김동삼은 항일공작을 추진하다가 하얼빈에 숨어 지내던 중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국내로 압송되었고,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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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김동삼에게 보내기 위해 촬영된 가족 사진. 앞줄에 두번째 여성이 며느리 이해동(李海東)이고, 가운데 흰색 저고리를 입고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은 아내 박순부(朴順夫)다.
1933년, 김동삼은 아내 박순부(朴順夫), 맏아들 김정묵(金定黙), 그리고 며느리 이해동(李海東) 등 가족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에 그의 가족은 단체 사진을 찍어 감옥으로 회신했다. 그후 1937년 4월 13일, 김동삼은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

김창숙은 김동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애도했다.

공이 살아 계실 적엔 나라가 든든 터니

공이 돌아가시니 만주 땅까지 텅 비었네.

비상한 뜻을

한그루 소나무속으로 거두어 가버렸네.

공이 떠나시니 지기하나 없고

온 천지가 텅 비었네.

내 살아 있다한들 아무 낙이 없어

바닷가 움막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네.

서대문형무소 측은 유족에게 시신을 찾아가라고 통보했지만, 일제의 감시를 받을 것이 두려워서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때 한용운이 몸소 찾아가서 시신을 거둬들인 뒤 자신이 머물던 성북동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그의 유언대로 화장하고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한용운은 생전에 눈물을 딱 한 번 흘렸는데, 그것이 김동삼의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동삼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 국립서울현충원 임정요인 묘역에 그의 묘소를 조성했다.

3. 여담


김동삼의 손녀 김복생, 김갑생 할머니는 궁핍한 삶을 노인연금 월 20만원으로 연명하는 처지라고 한다. 그나마도 김갑생 할머니는 3급 지체장애를 앓고 있어 연금의 절반 이상을 통원 치료비로 써야 한다고 한다. 이들이 이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은 현행 독립유공자 유족 예우에 관한 법률상 손자녀 중 1명만 보상금을 받을 수 있어 오빠만 독립유공자 예우를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1]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김길홍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2] 가묘이다.[3] 32세 '''식(植)''' 모(模) 병(秉) 동(東) 림(林) 상(相) 항렬.[4] 1908년 3월 15일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교육 진흥을 위해 조직된 교육계몽운동 단체. 교남(嶠南)은 영남남(嶺南)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