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암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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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대성당의 완공 상상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 성지에 세워질 천주교 대성당. 천진암은 1779년 남인 계열 유학자 정약용, 이벽, 이승훈 등이 모여 천주교 서적을 읽던 장소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꼽히는 곳이다. 이승훈은 1784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세례성사를 받았다(세례명은 베드로).
1978년 천주교 수원교구 변기영 베드로 몬시뇰이 이곳에 100년에 걸쳐 세계 10대 성당에 들어가는 대성당을 짓겠다며 부지 35만 평을 매입하고 1985년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정초식은 1996년 6월 24일 거행되었다. 가로·세로 150 m, 높이 85 m의 초대형 건물로서 총 3만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을 예정이며, 건립지는 1500억 원으로 예상하는데, 철저히 일반 신자들의 성금으로 충당된다. 한국 가톨릭 전래 300주년인 2079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사실 현행 건축법상으로는 이렇게 공기를 길게 잡는 것은 불법이라고(…), 당국에서는 허가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한다. 그래도 어떻게 짓고 있는 모양이며 2012년 기준 기초 공사만 진행 중인데, 터를 일부러 수년 간 노출시켜 기반을 단단하게 다지는 작업이다.
사실 이곳의 가장 큰 문제는, '''천진암이 천주교 성지라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 상당수의 역사학자들은 '천진암 천주교 성지설'에 비판적이다. 이 문제는 가톨릭 계열 신문에서도 다뤘는데, 천진암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문헌 근거는 없다. 계속 언급되는 곳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던 사찰인 주어사이다. 주체가 된 인물은 권철신(암브로시오)[1] 이며, 묘비명을 남긴 정약용은 이 시기에는 세례를 받는 등 천주교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2] , 이 시기를 다룬 정약용의 글은 충분히 신뢰할 만한 자료인데, 여기서 천진암은 언급도 없다.
숨어든 곳이 왜 불교 사찰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숭유억불 기조를 유지한 조선시대에는 지방 양반들이 절에 가서 약탈하거나 물건 혹은 이런저런 편의를 강요해도 사찰에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찰에 대해 조금만 정중한 대우를 취하면, 승려들의 도움으로 외부에서는 쉬쉬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양명학이나 서학에 관심있던 자들은 모두 절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신유박해 때 이 절들도 폐허가 된다. 이런 부분과 천진암, 주어사의 천주교 성지화 + 일부 불교 유물들이 심지어 절두산 성지 성당에 들어가 있는 등의 이유로 불교 쪽도 이쪽에 대해서 말이 많다. 불교계 신문 관련 기사 물론 이쪽도 희생의 정도에 대해서 역사적 근거가 애매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종교 갈등과 한국 가톨릭의 역할- 천진암 성지 사업과 관련하여 -(불교포커스)
천진암 대성당의 완공 상상화
1. 개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 성지에 세워질 천주교 대성당. 천진암은 1779년 남인 계열 유학자 정약용, 이벽, 이승훈 등이 모여 천주교 서적을 읽던 장소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꼽히는 곳이다. 이승훈은 1784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세례성사를 받았다(세례명은 베드로).
1978년 천주교 수원교구 변기영 베드로 몬시뇰이 이곳에 100년에 걸쳐 세계 10대 성당에 들어가는 대성당을 짓겠다며 부지 35만 평을 매입하고 1985년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정초식은 1996년 6월 24일 거행되었다. 가로·세로 150 m, 높이 85 m의 초대형 건물로서 총 3만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을 예정이며, 건립지는 1500억 원으로 예상하는데, 철저히 일반 신자들의 성금으로 충당된다. 한국 가톨릭 전래 300주년인 2079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사실 현행 건축법상으로는 이렇게 공기를 길게 잡는 것은 불법이라고(…), 당국에서는 허가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한다. 그래도 어떻게 짓고 있는 모양이며 2012년 기준 기초 공사만 진행 중인데, 터를 일부러 수년 간 노출시켜 기반을 단단하게 다지는 작업이다.
사실 이곳의 가장 큰 문제는, '''천진암이 천주교 성지라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 상당수의 역사학자들은 '천진암 천주교 성지설'에 비판적이다. 이 문제는 가톨릭 계열 신문에서도 다뤘는데, 천진암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문헌 근거는 없다. 계속 언급되는 곳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던 사찰인 주어사이다. 주체가 된 인물은 권철신(암브로시오)[1] 이며, 묘비명을 남긴 정약용은 이 시기에는 세례를 받는 등 천주교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2] , 이 시기를 다룬 정약용의 글은 충분히 신뢰할 만한 자료인데, 여기서 천진암은 언급도 없다.
숨어든 곳이 왜 불교 사찰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숭유억불 기조를 유지한 조선시대에는 지방 양반들이 절에 가서 약탈하거나 물건 혹은 이런저런 편의를 강요해도 사찰에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찰에 대해 조금만 정중한 대우를 취하면, 승려들의 도움으로 외부에서는 쉬쉬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양명학이나 서학에 관심있던 자들은 모두 절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신유박해 때 이 절들도 폐허가 된다. 이런 부분과 천진암, 주어사의 천주교 성지화 + 일부 불교 유물들이 심지어 절두산 성지 성당에 들어가 있는 등의 이유로 불교 쪽도 이쪽에 대해서 말이 많다. 불교계 신문 관련 기사 물론 이쪽도 희생의 정도에 대해서 역사적 근거가 애매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종교 갈등과 한국 가톨릭의 역할- 천진암 성지 사업과 관련하여 -(불교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