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 사건
1. 개요
1791년(정조 15년)에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와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등이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
진산 사건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만화는 다음과 같다.[1]
1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68
2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99
3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53
4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71
5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45
6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44
2. 배경
16~17세기 동양에 대한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방식은 가톨릭의 교세 확장에는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으나, 일각에선 이들의 선교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등은 조상의 제사를 용인하는 예수회의 방식을 우상숭배라고 비난했고, 예수회는 동양의 제사란 우상숭배가 아닌 하나의 문화적 관습이라고 옹호했다.
교황청은 당초 예수회의 입장을 지지하다가 도미니코회의 주장을 용인하는 등 오락가락하다 클레멘스 11세 때 조상 제사를 금지하였다.[2] 그 결과 가톨릭은 중국에서는 박해를 받는 등 고난을 겪게 된다. 이는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제사가 금지되었음을 안 초기 천주교 신자들 중 양반 계층이 빠르게 이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3. 전개
윤지충(尹持忠)은 1759년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로, 정약용과는 내종사촌 관계이다. 24세의 나이로 진시에 합격한 윤지충은 이후 정약용의 권유로 중국에 갔다오게 돠고 거기서 견진성사[3] 까지 받고 온다.
고향은 진산(珍山)으로[4] 내려온 윤지충은 2년 뒤 1791년에 모친상을 맞게 된다. 천주교 신자였지만 유교적 관습을 하루아침에 버리기는 뭐했던 것인지, 처음에는 유교적으로 상을 치르고 조문을 받고 혼백도 모셨다. 외종사촌이자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인 권상연(權尙然)이 이를 보고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투의 말을 하자 윤지충은 생각을 바꿔 모친의 궤연[5] 을 뜯고 상복을 불태우고, 조상의 위패까지 전부 없애버린다. 얼마 뒤 권상연도 모친상을 맞고 그는 처음부터 조문객도 받지 않고 천주교의 방식대로 장례를 치뤘다.[6]
당시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가 다스리던 나라였고, 따라서 둘의 행동은 조선의 이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를 고발당한 윤지충은 도망쳤으나 자수하였고,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은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다시 상복을 입고 유교적 예를 갖출 것을 권했으나 그들은 뜻을 꺾지 않는다. 그래서 신사원은 이자들은 단단히 미쳤군이라 말하여 상관인 전라 감사인 정민시에게 전주로 압송시켰는데 정민시는 하관인 신사원의 보고를 듣고 단단히 화가 나서 윤치충과 권상연에게 불호령을 때렸는데 "도대체 천주교가 뭐길래 부모의 상을 치룰때 신주와 위패를 불살라버리는 짓을 하느냐?" 라고 묻자 윤지충이 “신주와 위패는 귀신이 붙은 물건이라 천주교에서는 우상숭배”라고 했고 정민시가 "닥쳐라!! 국가에는 법과 있고 예가 있다.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극형을 면치 못하리라!!"라고 일갈했지만 윤지충은 “나라에 법이 있듯이 저한테는 천주님이 있고 천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입니다. 감사 영감”이라 대답하자 정민시는 어이 없고 분노하여 "여봐라 이놈들을 잘못을 빌 때까지 매우 쳐라"라고 윤지충과 권상연 형틀에 매달아 놓고 곤장을 쳤는데도 윤지충은 뜻을 굽히지 않자 정민시는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결국 이 일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정조는 장계를 보고 "뛰어난 선비들이 이 지경이 됐는가?" 라고 한탄하였고 대사간 신기를 비롯하여 좌의정 채제공까지 "서학의 무리가 커지면 나라에 해가 될 것이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마침내 정조마저 이 일은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물론 천주교를 전파하는 이승훈 베드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수하, 홍낙민, 이기경 등도 체포해 문초하고, 진산군을 5년간 한 급이 낮은 진산현으로 낮춰부르도록 했다.
정조의 명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고 전주의 풍남문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들이 처형 당한 터에는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세워졌다.) 또한 진산 군수 신사원은 이 일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땅에 유배당했다.[7]
한편 같이 체포된 이승훈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주교 역할을 했던 권일신은 원래는 참형에 처해져야 하지만 대신 신자들에게 신앙을 버리게 하는 것으로 목숨은 살려주었다. 홍낙민, 최필공, 이벽 세례자 요한, 정약용,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신앙을 버리겠다는 상소를 올려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약종은 배교를 번복한 뒤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8]
이를 조선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辛亥迫害)'''라고 일컫는다.[9]
4. 결과 & 후폭풍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가 오랫동안 지배했던 국가였다. 당장 송시열의 의도야 어땠는지는 몰라도 그의 주장으로 윤휴, 윤증, 허목 등이 주자를 중시하지 않는다며 사문난적으로 불린 뒤, 아예 성리학적 예법을 거부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행동은 조선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진산 사건을 계기로 조선 사회는 천주교인들을 무부무군(無父無君), 즉 군주도 부모도 섬기지 않는 도리를 모르는 범죄자로 간주해 19세기 말까지 박해했다.[10] 정하상 바오로는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집필해 무군무부에 대한 해명 등을 시도하며 “사람은 자고 있을 때에도 술과 밥을 받아먹을 수 없는데 죽은 뒤에는 또 어떻겠느냐”며 천주교가 도리를 모르는 종교가 아니라는 인유론적 관점을 보여준다.[11]
5. 현대의 평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참고. 진산 사건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천주교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진산 사건은 대체로 조선 사회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한 두 천주교인의 의거로 평가받고 있다. 그 결과 2014년 8월 중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광화문 광장에서 이 둘을 포함한 순교자들이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가 있듯이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교황청이 반대한 제사라는 개념은 다른 종교에서도 행해지는 조상에 대한 예(禮)이자 공경하는 자세로 대하는 것이었다. 즉 그 나라만의 문화이자 기틀로 만들어진 것인데 교황청은 한쪽의 말만 듣고 조선의 모든 제사를 금지시키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 조선에서 제사가 금지된 것은 중국 선교에 있어 예수회와 도미니코회의 의견이 달랐던 것이 영향을 끼쳤다. 상류층 위주로 포교한[12] 예수회에서는 제대로 된 제사와 민간에서 행해지는 미신적인 제사 방식을 모두 보았으나, 하류층 위주로 포교한 도미니코회에서는 제사의 미신적 부분에 집중해 모든 제사가 다 똑같이 미신적인 행사인 줄 알고 보고했다. 그리고 교황청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했으며, 동양에서 가톨릭에 대한 시선을 나쁘게 만들어 버리고 대다수 신봉자들이 돌아서게 만들었다.
더 큰 문제점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너무 성급하게, 과격하게 행동한 점이다. 부모님의 신주를 불태우는 것은 엄연히 성리학 배경으로 만든 조선시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효(孝)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우리는 그냥 남몰래 천주교 식으로 제사를 지내자."라고 하면 되는 문제였으나 두 사람은 공공연하게 일을 벌였다. 당연히 그냥 서양에서 왔던 실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정조 재임 시절 조선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자 뒤늦게 개화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천주교 박해와 척화라는 부정적인 영향까지 일어나고 진산 사건처럼 신주를 불태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천주교 신자들까지 죽게 만들 정도로 너무 튀었다.
당시의 명군이라고 불렸던 정조도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서든 좋게좋게 처리하고 나머지 남인들 중 가운데 인재를 처형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믿지 마라"고 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지금 그 사건 때문에 너희들 목숨이 위험하니까 당분간은 안 믿는다고 해라."라고 한 것이다.[13] 그러나 이런 과격파들 때문에 조선에 꽃피우던 실학이 점차 사라지고, 척화와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박해를 낳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부정적인 시각의 근거가 된다.
[1] 단, 천주교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읽자.[2] 정작 비오 12세 때 가톨릭은 다시 조상 제사를 용인한다. 다만 '효'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용인한 것이지 조상의 혼이 음식을 먹는다 등의 전통적인 관점은 당연히 배제되었다.[3]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주교가 이마에 성유(聖油)를 바르고 성령과 은총을 주는 천주교의 의식. 세례성사가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면 견진성사는 어엿한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 성장했음을 인정받는 성사이다. 쉽게 말해 기독교의 성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는 누군가의 대부, 대모가 될 수 있다.[4] 현대의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진산면, 추부면. 당시에는 전라도 관할이었다.[5] 죽은 사람의 혼백을 넣은 궤와 거기에 딸린 물건들.[6] 이를 폐제분주(廢祭焚主)라고 한다.[7] 현대의 기준으로 따지면 엉뚱한 사람이 벌을 받은 격이지만, 조선시대에서 군수와 수령은 행정, 사법을 포함한 그 지역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권한을 가진만큼 책임도 막중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8] 이 때 큰아들 정철상 가롤로도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아내 유 체칠리아, 작은아들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순교했다. 정약종과 정철상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 유 세실리아, 정하상, 정정혜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시성되었다.[9] 조선 최초의 희생자는 명례방(현 명동성당) 공동체의 김범우 토마스이다. 다만 그는 국가 권력에 의해 순교당한 것이 아닌 귀양을 가서 사망한 것이기에 박해나 순교라고 보기 애매한 측면이 있다. 순교라면 순교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병사한 것을 순교로 볼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는 평. 순교는 자의든 타의든 종교를 지키고자 죽는 경우를 일컫는데 김범우는 신앙을 지키고자 고문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병사하였다. 물론 병사의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신앙을 지키려하다 고문을 당한 것이 이유지만, 여하튼 순교라고 확정내리기엔 애매하다. 그에 비해 진산 사건과 윤지충, 권상연에 대한 처형으로 요약되는 신해박해는 국가 권력에 대한 개입이 비교적 뚜렷해 조선 최초의 박해라고 부를 수 있다.[10] 그리고 황사영 백서 사건을 계기로 이러한 천주교 박해 의견은 또 한번 정당성을 갖게 된다.[11] 천주교의 도입 이후 천주교의 입장은 보유론(補儒論)과 인유론이라는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보유론이란 유학을 중심으로 그 미흡한 점을 천주교로 보충하는 것이다. 반면 인유론이란 천주교를 유학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측면이다. 즉 중심을 무엇으로 두고 있느냐의 차이다.[12] 유명한 마테오 리치(중국 이름은 이마두)가 예수회 출신이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현지에서 유교가 차지하는 위상이 종교뿐 아니라 철학과 생활 윤리까지 두루 미치고 있음을 경험한 뒤 기독교의 여호와를 유교에서 말하는 상제와 같은 개념이라고 동치시키며 기독교의 교리를 유교의 가르침을 통해 증명하는 방식의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폈고, 마테오 리치 자신도 중국식으로 유건에 도포를 입고 유학자라고 자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기억의 궁전이라 불리는 서양의 기억술을 소개한 것도 유교 사상의 강력한 영향 아래 살아가는 중국인들이 과거에 급제해 관리로써 출사하여 입신양명하고 부모와 집안의 이름을 빛내는 것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지상목표로 생각한다는 점을 노렸던 것. 이는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도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지만, 동시에 다른 선교사들의 질투와 시기를 사기 충분한 것이었고 도미니코회도 예수회를 시기하는 선교사 그룹의 하나였다.[13] 정조는 서학에 대해 "한 때의 유행일 뿐이니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우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