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색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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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살 뭉치는 스페인 팔랑헤 주의의 상징으로 거기에다가 독일의 상징인 철십자와 하켄크로이츠를 겹친 것이다.
1. 개요
2. 역사
3. 전투력
4. 관련 문서


1. 개요


2차대전 당시 스페인의 의용군으로 편성된 나치 독일외인부대. 정식명칭은 제250보병사단이며 대략 4.5만명(이중 1000명은 포르투갈의 의용군)의 크기를 자랑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군을 2차대전에 참전시키지 않고, 동부전선에서 싸워줄[1] 의용병들을 모집했는데 이게 바로 청색사단. "청색 사단"이라는 이름은 자원병들이 독일에 도착했을때 입었던 푸른색의 팔랑헤 제복에서 유래하였다.

2. 역사


먼저 독일 육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직후에 청색 사단을 대소전에 파견하였다. 파병 인원들은 극렬한 반공주의자가 많았으며 대부분이 내전에 종군해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이었다. 극렬 반공주의자들을 전쟁터로 보내서 정권 안정에 보탬이 되지 않는 이들을 제거하려는 프랑코의 의도도 있었으며, 공화파에 연루된 이들이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지원한 케이스도 있었고, 심지어는 공화파의 포로가 러시아로 탈영하여 파시즘과의 싸움을 계속하려는 계획으로 지원한 경우도 있었다.#
주둔지였던 노브고로드레닌그라드 근교 주민들에 의하면, 폭력적이고 도둑놈들에 시끄러웠지만, 활기차며 나치마냥 잔인하지는 않았고, 주민들에 대해 일종의 연민을 느꼈다고 한다.[2][3] 하지만 원체 추위와 거리가 먼 스페인이 고향이었기 때문에 추위에는 매우 약했다고. 또한 상황이 악화되었을 경우 탈영 문제가 심했다고 한다.
청색 사단은 독일 육군 250보병사단으로 편제되어 동부전선에서 맹활약하였으나 차츰 전세가 연합군에게 유리해지자 영국 및 미국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프랑코 정권은 1943년 10월부로 이 사단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숙련된 전투원이 하나라도 간절했던 독일군은 프랑스-스페인 국경에 모병소를 설치하고 귀향하는 스페인인 병사들을 상대로 모병활동을 전개하여 약 3천 명에 달하는 스페인인들을 다시 모병했다.
독일군에 재입대한 스페인인들은 '''청색 군단'''으로 불렸고, 주목을 피하기 위해 독자적인 대부대를 편성하는 대신 121사단 예하로 배속되었으나 이들도 1944년 3월에 귀환 명령을 받았다. 이후에도 남아 있던 병사들은 소대 또는 중대 단위로 흩어져 일부는 국방군, 일부는 무장친위대에 배속되었다. 노르트란트 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스페인인 중대는 베를린 공방전까지 분투했다.
로테이션이 몇 차례 이루어졌으므로 스페인 파견군 참전 인원은 총원 47,000여 명에 달한다. 여기서 4,954명이 전사하고 8,7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포로가 된 인원은 372명이며 이들 중에서 286명이 생존했는데, 이들은 1954년이 되어서야 국제 적십자를 통해서 송환되었다.

3. 전투력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 핀란드군과 함께 싸웠으며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감탄한 히틀러는 청색사단 전용 메달을 제작.

4. 관련 문서



[1] 서부전선으로 보내면 이웃나라들과 싸우게 되므로 전쟁이 끝났을 때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이다.[2] 청색 사단에 대한 소련 주민들의 평가를 다룬 스페인 언론의 기사[3] 기사 내용을 보면, 1941년 여름부터 독일에서 소련까지 한 번도 씻지 않고 행군한 청색 사단은 겨울용 군복이 없는 상황에 겨울이 닥치자 지저분한 속옷을 버리고 주민들의 겨울옷을 뺏어갔다고 한다. 또한 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 , 그리고 고양이까지 먹었다고. 어떤 노부인이 스페인 병사들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군인들이 만든 '토끼고기 요리'를 먹고 남은 것을 키우던 고양이에게 주려고 할 때 방금 먹었던 음식이 바로 자신의 고양이였음을 알고 경악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