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전선
1. 개요
東部戰線
The Eastern Front
동부에서 형성된 전선을 일컫는다. 참고로 전쟁 중 여러 지역에서 전선이 형성된 경우에 다른 전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쪽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참전국 기준의 동쪽이 아니다. 서부전선도 마찬가지.
세계사에서 동부전선이라고 하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동유럽 지대에 형성된 대규모 전선을 일컫는다. 한국사에서는 6.25 전쟁 당시의 동부전선을 뜻한다.
2. 제1차 세계 대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동맹국과 삼국협상의 일원이었던 러시아 제국, 브루실로프 공세에 자극받아 1916년쯤에 전쟁에 뛰어들었던 루마니아와 같은 연합국의 전투가 벌어진 지역으로 서부전선 일대가 참호전으로 소모전이 벌어졌다면 이 지역은 기병과 열차를 이용한 기동전이 벌어졌다. 전쟁 초기 러시아군은 대군을 두 방면으로 나눠 프로이센 일대를 크게 포위해 쌈싸먹는, 독일의 슐리펜 계획과 비슷한 작전으로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려 했다. 그러나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 의해 처절하게 개박살이 나면서 시도는 좌절되고 동부전선은 러시아와 동맹국의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이때의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이탈리아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는데 독일군과는 달리 오스트리아군의 수준은 러시아군하고 크게 차이가 없었던 데다 1916년 브루실로프 장군의 공세로 병력 대부분이 날아가버렸기 때문에 원래라면 오스트리아군이 담당해야 할 전선도 독일군이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부전선도 서부전선과 마찬가지로 크게 변동이 없었던 기간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황후의 총애를 받는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니콜라이 2세가 휘둘려서 국정 운영이 개판이었고, 전선에서 싸우는 군대의 보급도 러시아의 후진 교통과 산업 능력, 황제의 무능으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장군들은 대체적으로 독일군에 비해 무능했으며 그나마 유능한 장군들도 라스푸틴의 입김으로 전선에서 소환되는 등의 막장스러운 팀킬로 개판 일보직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입장이라 공세적으로 나가기도 힘들었고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병력을 투입하면서 진격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터운 방어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제국은 계속된 전쟁으로 경제적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무능한 차르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갔다. 하지만 라스푸틴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니콜라이 2세는 내정은 완전히 팽개쳐버리고 전선에서 병력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결국 총체적인 문제가 쌓이면서 러시아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조차 식량이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자 분노한 국민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일으켜 제정을 붕괴시켰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군은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공산주의 지도부에게 치욕에 가까운 협상을 요구했고 이에 반발한 소련이 협상을 거부하자 다시 동부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군이 혁명의 여파로 전선을 떠난 상태라 막아낼 병력이 없어 결국 소련은 치욕적인 내용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내고, 종전 후에는 폴란드 건국을 손가락 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잃은 영토 대부분은 나중에 적백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다시 되찾게 된다. 그러나 냉전 붕괴 이후 이 영토들이 죄다 독립해버리면서, 현재 러시아의 땅은 1차대전 직후 러시아 땅보다 작아졌다.
2.1. 주요 전투
3. 제2차 세계 대전
Восточноевропейский театр военных действий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
Deutsch-Sowjetischer Krieg
프랑스 침공과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 야심에 찬 아돌프 히틀러는 겨울전쟁 당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던 소련군을 기억하고 있었던 터라 소련이 차지한 동유럽 일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해 소련을 침공했다.
초반에는 대숙청을 거치며 개판이 따로 없던 소련의 삽질 덕에[1] 나치 독일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단 6주 만에 우크라이나, 발트3국, 동부 폴란드까지 모두 빼앗고, 8월 10일에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불과 250km 떨어진 스몰렌스크까지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히틀러의 삽질로 인해 진격이 늦어지고, 거기에 끝없이 이어지는 소련군의 저항과 러시아 특유의 환경까지 겹쳐서 모스크바에서 불과 30km를 남기고[2] 후퇴한다.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불과 두 달 만에 스탈린그라드를 무려 90% 이상을 점령하고도 패하면서 소련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참패하면서 소련의 승리가 확인 사살되었고, 약 1년 뒤에 벌어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동유럽을 모두 상실하게 된다. 결국 1945년 4월 30일에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그의 야욕은 끝났으며, 5월 2일에는 16일 간의 마지막 혈전 끝에 베를린이 붉은 군대에게 점령당함으로써 동부전선은 소련의 승리가 확정지어졌다.
그리고 베를린이 함락된 지 6일이 지난 5월 8일 밤에 승자인 소련은 동맹인 서방 연합군과 함께 베를린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아 동부전선, 더 나아가 유럽 전선의 공식적인 종전을 맞게 했다.[3] 이후 승자인 소련은 미국과 맞붙을 만큼의 강국으로 떠오른 반면, 패배한 독일은 영국, 미국, 소련에 의해 국토가 분할된다.
더 자세한 설명은 독소전쟁 문서 참고.
3.1. 주요 전투
독소전쟁 문서 참고.
4. 6.25 전쟁
6.25 전쟁 당시 강원도 지역에 형성된 전선을 뜻한다. 중공군이 참전하고 38선 인근에 전선이 고착된 이후로는 수많은 고지와 능선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1군사령부를 거쳐 현재는 지상작전사령부가 담당하고 있다.
[1] 유능한 장교들이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죄다 굴라그나 총살대로 끌려갔다. 겨울전쟁 당시 손바닥만한 핀란드에 그렇게 얻어터진 것에도 저 내부 상황이 한몫했다.[2] 쌍안경으로 크렘린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고.[3] 여담으로 베를린에서 독일이 항복할 시간은 5월 8일 밤 10시 43분이었는데,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5월 9일 새벽 12시 43분이었다. 따라서 서방 연합군은 5월 8일을 2차대전 전승기념일로 삼지만 소련과 그 후신인 독립국가연합 대부분의 국가는 5월 9일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