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공방전

 

'''베를린 공방전'''
'''Battle of Berlin
Берлин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ня
Die Schlacht um Berlin'''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image]
폐허가 된 독일 국회의사당과 소련군[1][2]
[image]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 국기를 꽂는 소련 육군 장병[3]
'''날짜'''
1945년 4월 16일 ~ 1945년 5월 2일
'''장소'''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교전국'''
[image] 소비에트 연방
[image] 대독일국
'''주요 지휘관'''
'''제1 벨라루스 전선군'''
[image]게오르기 주코프

'''우크라이나 전선군'''
[image] 이반 코네프

'''제2 벨라루스 전선군'''
[image]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image] 바실리 추이코프
[image] 아돌프 히틀러(작전 중 자살)
[image] 하인리히 뮐러(작전 중 실종)
[image] 빌헬름 카이텔[4]
[image] 알프레드 요들
[image] 한스 크렙스(작전 중 사망)
'''비스툴라 집단군'''
[image]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image] 쿠르트 슈투덴트[5]
[image] 쿠르트 폰 티펠스키르히[image][6]
'''중부 집단군'''
[image] 페르디난트 쇠르너
'''베를린 방어군'''
[image] 헬무트 라이만[image]
[image] 헬무트 바이틀링[image]
[image] 에리히 베렌펭거(작전 중 사망)
[image] 빌헬름 몽케
'''병력'''
붉은 군대 약 250만 명[7]
- 전차 + 전투 차량 6,250대
- 항공기 7,527기
- 야포 41,600문
독일 국방군 76만 명
- 기갑 전투 차량 1,519대
- 항공기 2,224기
- 야포 9,303문
- 국민척탄병, 히틀러 유겐트[8], 국민돌격대[9]
소련군 포로, 강제 수용소에서 징집한 유대인[10]
추축군 잔존 세력[11], 경찰[12]

'''피해규모'''
총 사상자 361,367명
- 전사 및 실종 81,116명[13]
- 부상 280,251명
- 전차 1,997대 손실
- 야포 2,108문 손실
- 항공기 917기 격추
- 92,000 ~ 100,000 명 전사
- 부상 220,000 명
- 포로 480,000 명
- 민간인 22,000 명 사망
'''결과'''
'''소련의 승리'''
'''영향'''
'''나치 독일 패망'''
유럽 전역 종결
연합국 4독일 분할 점령
1. 개요
2. 배경
3. 전투
3.1. 젤로[14] 고지 전투
3.2. 포위되는 베를린
3.3. 나치 독일의 최후
3.4. 유럽 전선의 종결
4. 기타
4.1. 소련군의 전쟁범죄
4.2.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4.3. 모든 것을 쥐어짜다
4.4. 지하철의 비극
5. 이후
6. 관련 말
7. 대중문화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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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15]

파시스트의 소굴, 앞으로 50km - 소련군 전차의 낙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였던 1945년 5월 소련군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킨 전투이다. 독일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 함락이 임박하자 자살했고 히틀러에 의해 후임 독일 대통령[16]에 임명된 해군 원수 칼 되니츠 제독을 수반으로 하는 플렌스부르크의 독일 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

2. 배경


1944년 여름에 펼쳐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의 결과로 동부전선 독일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이 완전히 붕괴했고, 이에 따라 독일군은 벨로루시에서 철퇴하여 비스와 강을 경계로 소련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벌어진 소련군의 남부 공세 때문에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도 물러났고, 이때 독소전쟁 초기부터 독일군의 동맹국이었던 루마니아핀란드는 소련과 강화를 맺고 소련군 측으로 돌아서서 독일군을 공격하였다(라플란드 전쟁). 이러한 동부전선의 붕괴와 함께 설상가상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순식간에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접근했다.
소련군은 1944년 가을을 끝으로 공세를 중지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는 모스크바 전투 이후의 반격 작전과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강박감에 의해 공세종말점을 억지로 넘어가면서까지 진격을 고수하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군에 역습당해 참패하고 탈환한 영토를 다시 빼앗긴 전훈에 따른 것이었다. 문제는 히틀러가 이것을 가지고 전세를 오판한 것이다. 이 때문에 '동부전선에서는 우리 독일군이 소련군을 패퇴시켰다. 그러니까 서부전선에서만 영미군을 패퇴시키면 독일은 다시 영토를 되찾을 수 있다.'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급 문제로 진격이 둔화된 서부의 영미 연합군에 공세작전을 계획했다.
이것은 상당히 도박적인 작전이었는데 당시 기갑 웨이브로 무자비한 파상 공세를 펴던 소련군에 맞서고 있던 동부전선의 정예 기갑 부대를 빼내어 투입했기 때문에, 당시 동부전선의 총책임자였던 총참모장 하인츠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항의했다. 심지어 아르덴 대공세가 실시되기 전에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마저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슈페어는 일반인이라 군사적인 것은 잘 몰랐지만 동부전선은 중요했는데 히틀러의 전략은 동부전선의 방어를 포기하고 서부전선에 올인한 셈이며 이게 성공했다면 제3제국의 수명이 조금은 더 연장될 수 있었겠지만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제공권도 없었고 보급을 노획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략을 가지고 움직인 독일군은 참패했고 공세가 실패한 서부전선뿐만 아니라 이미 붕괴된 동부전선에 더욱 더 거대한 전력 공백을 초래했다.
한편 독일군의 서부 공세에 당황한 서방 연합국은 압력을 덜기 위해 소련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는 한편 전쟁 종결의 거대한 상징이 될 베를린 공략을 소련에 넘겨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서방 연합군의 피해도 적진 않았지만 소련과 붉은 군대의 어마어마한 피해에 비하면 보잘 것없는 수준이었고 서방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전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더 이상의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에 따라 베를린 공략은 소련군의 몫이 되었다. 독일 서부를 순조롭게 진격하던 서방 연합군은 베를린에서 약간 떨어진 엘베 강 인근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이것이 유럽 전선에서 서방 연합군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이후 젤로 고지 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문서 참조.

3.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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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국민척탄병과 국민돌격대의 최고 총사령관이자 제3제국의 수장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
병력 대부분이 소년과 중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즈음엔 독일 전역에서 젊은 남성들이 거의 전부 동원된 상태라 징병 연령이 15~60세라는 막장으로 치달았다.[17]
3개월 간의 대규모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4월, 스탈린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등 전선군 사령관들을 모스크바로 소집해 베를린 공략에 대해 논의했다. 모든 사령관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베를린 공략을 맡고 싶어했지만, 스탈린은 특정 사령관에게 베를린 공략을 맡긴다고 하지 않고 "베를린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전선군이 베를린 공략을 맡을 것이다."라고만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전선군 사령관들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신들의 사령부로 돌아가 부하들을 닦달하며 이 경쟁에 이길 생각만 했다.
베를린 주위에 포진한 소련군은 3개 전선군으로 구성되었고 병력은 약 250만 명, 전차 6,250대, 전술기 7,500대, 각종 야포 40,000문 등 많은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수비대는 70만 명의 병력과 1,519대의 AFV[18], 2,000여 대의 전투기, 9,000문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3:1 ~ 4:1의 전력 차이가 나고 있었고 그나마 저 독일군 병력 수치도 전부 멀쩡한 병력은 아니고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 병자, 지상 전투에 숙달이 덜 된 크릭스마리네루프트바페에서 차출한 병력, 그보다도 못한 전투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국민돌격대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소련군에 숫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에서도 확실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방 연합군이 담당한 서부전선에서도 연합군이 베를린 방면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렸다가 동부전선으로 복귀시키는 힘든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한편 독일군은 사령부는 서부전선의 마지막으로 남은 병력조차 베를린으로 데려오라고 시도했다. 대표적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서부 전선의 엘베강 방면을 담당하던 발터 뱅크 장군과 그가 지휘하던 제 12군[19]에게 베를린을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뱅크와 12군은 어찌어찌 포츠담까지는 진격해서 소련군을 격파했지만, 서부에서 미군의 뒷치기를 우려한 뱅크가 12군을 다시 서부 전선으로 보내버리면서 12군의 베를린 구원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 사실을 들은 히틀러는 분노하면서 뱅크에게 베를린 구원을 지속적으로 명령했으나, 뱅크는 '''더이상 한 개인의 운명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라고 말한 뒤 그대로 씹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후 12군의 병력들은 이후 제 9군과 연합해서 독일 민간인들과 부상병들을 탈출시키는 엘베강 방어 작전에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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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전투에서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들 사진 속 포로 대다수가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 장병들이다. 1,000여명의 해군을 포함해 꽤 많은 수의 해공군 인원들이 방어 전투에 육전대로 투입되었다.)[20]

3.1. 젤로[21] 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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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로 고지를 돌파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 육군의 T-34/85 중형전차)
사령부에 돌아온 원수들은 서둘러 공세를 준비하였고, 4월 16일 북에서 남으로 제2벨라루스(로코솝스키), 제1벨라루스(주코프), 제1우크라이나(코네프) 전선군들은 일제히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 작전들을 통틀어 '오데르-나이세 작전'이라고 한다.
북쪽의 로코소프스키 군은 오데르 강을 건너 25일 제틴을 탈취하고, 베를린의 동북쪽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의 코네프 군은 독일의 쇠르너 군을 쉽게 돌파하고 4월 25일 동진하던 미군과 엘베 강 연안의 레크비츠(Leckwitz)에서 조우했다.[22][23] 이로서 독일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로코솝스키 군도 영국군과 엘베강 연안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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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는 미군을 도와주는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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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 강에서의 미군과 소련군이다. 서로 헬멧과 모자를 바꿔 썼다. )
여담으로 엘베 강에서 미군과 소련군은 처음으로 병사 대 병사로 서로 조우하게 되는데, 서로를 보는 시각차이로 인한 에피소드가 몇개 있다. 미군 부대와 처음 조우한 소련군 부대는 탱크와 같은 중장비를 전혀 장비하지 않은데다가 모습도 후줄근해서, 이를 본 미군들은 "이런 녀석들이 어떻게 그 독일군을 이겨온거지?"라고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심지어 반공 사상이 강했던 몇몇 미군은 "저정도 수준의 녀석들이라면 우리가 쉽게 쓸어버릴 수 있다."며 얕보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동양계 병사들이 다수 소속된 소련군 부대를 보고 소련군 병사들은 훈족의 후예라고 생각한 미군 장교도 있었을 정도로 미군 병사들의 소련군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런 미국인들의 소련 멸시는 50년대까지 지속되다가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면서 제대로 박살나고 만다.
이와 반대로 소련군 병사들은 미군의 부유함에 크게 놀라면서도 미군의 행동이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대표적으로 방탄모를 들 수 있는데, 미군은 병사들 모두 방탄모를 썼던 반면 소련군 병사들은 대부분 군모를 쓰고 있었다. 사실 소련이 밀리던 독소전쟁 초반에는 많은 장비들을 잃고 공장들을 옮기느라 방탄모가 많이 부족했지만, 그 후 소련의 생산력이 나아지면서 소련군 병사들에게도 방탄모가 부족하지 않게 지급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이미 방탄모 없이 다니는데 익숙했던 소련군 병사들은 '어차피 방탄모 써도 몸통에 맞으면 끝장이고 괜히 무겁기만 하다.'[24]라는 핑계를 들며 방탄모 쓰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는데, 모두 다 철모를 쓴 미군 병사들의 모습이 그들에겐 이상해보였던 것. 또한 미군의 총검도 소련군 병사들의 주의를 끌었는데, 총검의 질에 모두 감탄했지만 미군 병사들이 총검을 근접전보다는 통조림 따는데 더 많이 쓴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는 실망했다고 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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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으로 향하는 소련군 )
문제는 전선 중앙에 있던 주코프의 제1벨라루스군이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점 작전에서 패주한 후 젤로 고지로 후퇴하여 포진하고 있던 독일의 비스툴라 부대였다. 이 부대는 독소전쟁 초반부터 수비의 달인이라고 알려져 있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3월 말에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지휘하고 있었으며, 병력 수는 소련군이 거의 10:1로 압도적이었으나 지형 면에서는 소련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쉬웠던 고지에 위치한 독일군이 훨씬 유리하였다.
하인리치는 공병 부대를 투입해 오데르 강의 연안의 저수지를 역류시켜 진격로를 습지로 만들어 놓았고, 이 뒤로 참호벙커, 대전차호로 이루어진 세 겹의 방어선을 만들어 놓고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조성된 인공적인 습지뿐만 아니라 봄철의 해빙까지 겹쳐 도로가 진창이 되는 바람에 소련군의 진격은 한층 어려워졌다. 하지만 주코프는 누구보다 베를린을 먼저 공략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고,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한 진격으로 이를 돌파하려고 하였다.
4월 16일에 소련군은 카츄샤 다연장로켓을 시작으로 10,000문이 넘는 각종 야포로 맹포격을 한 뒤 젤로 고지로 쳐들어갔지만, 습지 때문에 진격이 지체되었다.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심하게 느려지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전화를 걸어서 "동무, 왜 이렇게 느립네까? 코네프 동무가 대신 베를린 가도 됩네까?"라며 닦달했다. 주코프는 이 말을 들고 더욱 조급해져서[25]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예비 병력까지 투입하는 오판을 저질렀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를 하거나 조금만 기다렸다가 먼저 적진을 돌파한 다른 전선군의 도움을 받았으면 쉽게 공략할 수 있었던 곳에서 결국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이 때문에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사망자가 1만 여 명에 불과했던 반면, 소련군은 적어도 3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26] 병력 차이가 10:1인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이렇게 적군보다 더 큰 피해를 낸 것은 명백한 지휘 부실이며 주코프의 흑역사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이 거둔 마지막 승리다.
그러나 병력이 워낙 열세인 데다가 보급과 증원도 거의 없었던 독일군은 더 이상 소련군을 저지하지 못했고 소련군은 3일 간의 맹공과 큰 희생 끝에 결국 이곳을 가까스로 돌파하여 주코프가 베를린 공략의 주공을 맡게 되었다.

3.2. 포위되는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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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근교에서 소련군에게 항복하는 독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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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에서 중심지를 향해 포격을 하는 소련군)
4월 21일[27] 젤로 고지를 돌파한 주코프 지휘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 휘하 포병은 드디어 베를린을 무차별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 포격에 사용된 포탄 숫자는 서방 연합군의 폭격기가 대전기 내내 베를린에 투하한 폭탄보다도 더 많았다. 제1벨라루스 전선군이 동쪽에서 베를린으로 전진하는 동안 코네프 지휘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베를린의 남방을 우회하여 서진하였다. 주코프 군의 북쪽에서는 로코솝스키 원수의 제2벨로루시 전선군이 베를린 북쪽을 우회하여 베를린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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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근교에서 포격을 하는 소련군)
독일 중앙 집단군을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쇠르너는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바우첸에서 다시 선제공격을 해서 코네프 군을 저지하려 했다. 쇠르너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히틀러는 이것을 보고 여기서 더욱 더 대담한 계획의 명령을 내려서 주코프 군까지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미 그럴 만한 역량이 없었고 그런 무모한 작전을 벌이다가는 소련군에게 포위 섬멸당할 것이 명백했다. 이런 상황을 보다못한 하인리치는 히틀러의 부관들에게 직언을 하여 이를 막았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오데르 강변에 있던 부셰의 9군은 후퇴를 요청했지만 전선을 유지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결국 고립된다. 여기에 코네프 방면의 쇠르너가 말로만 히틀러를 안심시키고 측면에서 소련군에게 성공적인 공격을 했다고 허풍을 친 것도 히틀러의 오판을 도왔다. 한편 엘베강서 미군과 대치 중이던 벵크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이고 무장친위대 장성인 펠릭스 슈타이너 대장에게 새로운 부대를 창설해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것을 명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병력과 물자 모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명무실한 허세에 불과했고 히틀러는 제대로 보고도 받지 않은 채 이 부대가 이미 편제를 완료했다고 판단하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슈타이너에게는 그 때까지도 한 줌밖에 안 되던 병력 밖에 없었고, 사방팔방으로 밀려드는 소련군에 맞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호헨리헨에 있던 하인리히 힘러는[28] 항복 협상을 위해 자신의 무장친위대 병력 15,000~20,000명을 몰래 빼돌려 놨고 자신과 친한 슈타이너에게 히틀러와 사령부 명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했다.
4월 23일에 열린 작전 회의에서 슈타이너가 공격하지 않았던 걸 알고 욕을 퍼부으면서 직접 헤르만 페겔라인[29]을 파견한다. 참모진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슈타이너의 부대가 아직 제대로 편제도 되지 않았고 공격도 당연히 실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24일에도 슈타이너가 공격에 나서지 않자 히틀러는 "나는 전쟁에서 졌다!"고 소리쳤고 탈출하느니 차라리 자살할 것이라 말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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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독일에 남아있을 것이다'란 표어와 그것을 비웃듯 지나가는 소련군의 ISU-122 자주포)
이 와중에도 소련군의 각 전선군들은 베를린 포위 작전을 계속하였고 4월 23일에 히틀러는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을 최후의 베를린 수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4월 24일 주코프 군과 코네프 군이 베를린 남쪽에서 만나게 되자 이제 베를린은 소련군에 의해 몇 겹으로 포위되었고, 히틀러는 베를린을 탈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소련군의 포위를 저지해 보려던 쇠르너의 선빵은 소련군의 역습을 받아 박살났고, 이로써 베를린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그리고 4월 30일 히틀러는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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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처파우스트로 무장한 국민돌격대원들)
독일군은 사용 가능한 모든 장비를 다 동원했지만 제대로 된 게 있을 턱이 없었고 급히 모은 국민돌격대에게 지급해 줄 소총조차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들에겐 그나마 수량이 좀 많았던 판처파우스트만이 지급되었다. 판처파우스트를 지급받은 인원들은 사진처럼 구덩이나 건물에 숨어있다 접근한 소련군에게 기습적으로 발사하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이 때문에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군 전차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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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형에 처해진 시체)
베를린 시민들도 나치 독일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 정부는 병사들 사이에 퍼진 패배 의식을 막는답시고 민간인과 군인을 가릴 것 없이 패배주의자라며 거리에 목을 매다는 교수형을 남발했다. (민간인의 경우는 독일 드라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 등장하는 주인공 일행인 그레타가 술집에서 병사들에게 한 마디 했다가 바로 수용소로 끌려가는[31] 것으로 묘사되었고, 군인의 경우는 퓨리(영화)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배틀필드 V에서 묘사된다. 다운폴에선 아예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도, 심지어 다 끝나갈 때조차도 민간인을 처형하는 그라이프 코만도(Greifkommando)가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3.3. 나치 독일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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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독일군 시신이다. 시체 바로 위와 문 아래쪽이 어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소련에서 촬영, '''합성'''한 선전사진이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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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kfz250에 끼어 죽어있는 독일 민간인, 베를린 전투의 중요한 사진으로 취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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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상징인 독수리 장식을 밟고 올라선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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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에서 엔진을 제거하고 땅에 차체를 파묻고 고정 포대로 운용되던 5호 전차 판터, 전쟁 종료 후 재건 과정에서 뽑혀 치워졌다.)[33] 단 아래쪽 사진의 판터는 차체없이 포탑만 파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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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로 진입하는 소련군의 T-34/76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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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에서 교전 중인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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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를 주시하는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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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된 독일 국민척탄병.
아돌프 히틀러는 패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자 측근들의 탈출 요청도 거부하고[35] 자신은 베를린에서 죽을 것이라며 완강하게 버텼다. 또한 좀 더 많은 병력과 주민들을 보존하기 위해 후퇴해야 한다는 측근들이나 현장에 나간 지휘관들의 말을 무시하고, 모든 독일인들에게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에 항명하는 지휘관들은 모두 해임되었다.[36] 연이은 패배에 히틀러는 후퇴의 후자만 나와도 병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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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 사격하는 소련군의 SU-76 경자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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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소련군)[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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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IS-2 중전차)
소련군은 베를린에 본격적으로 진입해 소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최후까지 처절하게 저항하며 싸웠지만 소련군의 물량 공세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건물 하나하나를 청소하면서[39] 느리긴 했지만 계속 진격하기 시작했고 독일군은 점점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티어가르텐 중앙으로 몰리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히틀러는 4월 29일 비서에게 총통 직책을 다시 둘로 쪼개 칼 되니츠에게 독일 대통령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독일 총리 직위를, 페르디난트 쇠르너를 육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유서를 작성하게 했다.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겨 달라고 했다가 찍혀서 이미 신임을 잃고 있었고, 하인리히 힘러 역시 총통 몰래 친위대 병력을 빼돌려 스웨덴의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 협상을 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마찬가지로 승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어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4월 30일, 마지막 식사를 마친 뒤 그녀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 자살 직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시체는 유언에 따라 측근들에 의해 기름을 부어 화장되었다.
총통 벙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소련군은 계속 중심을 향해 진격하였고 4월 30일에 나치 독일의 심장이자 베를린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도달하였다. 총통 벙커가 있는 총통 관저도 제국의사당에서 가까운 곳 지하에 있었다. 제국의사당 구역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무장친위대의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였다. 이들은 몇 안되는 SS제 503 중전차대대 소속 티거 2 중전차와 3호 돌격포, 4호 전차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벌였다. 제국의사당 내부는 이 사단의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육박해 오는 엄청난 수의 소련군에 맞서 무려 12시간 동안이나 제국의사당을 방어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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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직후 촬영된 동물원 대공포탑. 사진으로만 봐도 매우 튼튼하게 생겼고, 실제로도 전화(戰火)의 한가운데 있었음에도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이 보인다.)
사실 일개 건물에다가 고작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던 제국의사당이 이렇게 의외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의사당 내부와 주변의 병력들이 필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티어가르텐을 사이에 두고 불과 2km 떨어진 베를린 동물원 자리의 일명 '동물원 대공포탑(Zoo flak tower)'의 화력 지원도 컸다. 이 대공포탑은 독일군 최강의 대공포였던 12,8cm FlaK#s-2 2연장 4정(총 8문)과 많은 중·소구경 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시의 대구경 대공포가 다 그랬듯이 12,8cm FlaK 또한 여차하면 대지 사격이 가능했는데,[41] 어떤 소련군 전차든 종류나 각도를 막론하고 2~3km 내에서 한방에 고철로 만들 수 있었다. 방어력 또한 강화 철근 콘크리트로 벽/천장 두께만 '''2.4m/1.5m'''로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진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라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소련군이 실전에서 사용했던 가장 화력이 강한 곡사포 203mm B-4로도 흠집조차 낼 수가 없었다.
베를린이 거의 다 점령된 상태에서도 소련군은 이 요새의 사각을 피해 다녀야 했는데 제국의사당은 그 사각에 고스란히 들어올뿐더러 사이에 있는 티어가르텐(공원)이 이 상태여서[* 왼쪽 위 작게 보이는 건물이 제국의사당이고 대공포탑은 사진엔 안 나왔지만 오른쪽 아래에 있었다] 은·엄폐가 될 리가 없었으므로,대공포탑이 건재한 이상 제국의사당을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끝내 파괴는 못하고 4월 30일에 소련군이 사절을 보내 항복시켰으며, 대공포탑이 항복하자마자 제국의사당이 함락되었다.
저런 초대형 콘크리트 요새는 현대의 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하여 당시 존재하던 기술력으론 지진폭탄이나 신형 16인치~18인치급 이상 전함의 함포사격, 열차포 정도를 동원해야 파괴할 수 있지 소련군이 현장에서 사용하던 곡사포, 자주포로는 쉽사리 파괴하는게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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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사당 내부의 독일군이 전멸함으로써 의사당은 함락되었다. 이들이 전멸한 직후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는 데 성공하였다.[42] 이 때가 5월 1일 오전 한밤중이었다. 소련군은 국기를 게양할 당시에도 독일군의 방해를 상당히 받았다. 깃발만 꽂는다고 그 순간부터 교전이 끝나지 않았다. 제국의사당과 그 주변에 있었던 독일군과 소련군은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을 했다. 일례로 국기 게양 직후 제국의사당 반대편에 있던 크롤 오페라하우스의 중전차대대 독일군이 티거 2 중전차를 이끌고 반격을 시도, '''일시적으로 크롤 오페라하우스를 재점거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양군의 교전은 매우 치열했다. 제국의사당 주변 독일군과의 교전은 국기를 정식으로 게양한 날의 낮이 되어서야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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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 맨 앞에 올린 사진의 원본. 이 사진에서 오른쪽 아래 장교의 오른 손목이 좀 이상한데, 원래 시계가 하나 더 있던 것을 사진가가 고위층들에게 험한 소리를 듣고 나서 사진을 수정해 지웠다. 점령군 군인이 시계를 2개 차고 있다는 건 '약탈'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실제로 약탈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실제로는 시계가 아닌데 오해를 받았다는 썰도 있다. 이 장교의 오른손에 있는 물건은 실제론 시계가 아니라 당시 소련군에서 흔하게 사용하던 휴대용 나침반(Adrianov compass)이었을 뿐인데 사진만 본 고위층이 이를 시계로 오해하고 수정했다는 설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일화가 더 있는데, 실은 이오지마 전투성조기처럼 적기를 2번째로 걸고 있는 사진이며 처음 게양했을 때는 전투가 치열하던 한밤중이어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고 처음 게양된 국기는 제대로 된 국기가 아니라 빨간 식탁보 3개를 이어붙여 급조한 깃발이었다. 전투가 종료되고 며칠 뒤 찍힌 사진은 연출된 사진이라 제대로 된 깃발을 걸고 있고 아래 보이는 거리도 소탕이 다 된 시점이라 한산해 보인다. 사진을 촬영한 칼데이 해군 중위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도 취재했다. 그는 유대인인데, 나치 전범들을 위한 소련의 특별한 배려일 수도 있다. 해당 위키피디아 항목 참고로 위에 있는 육군 병사는 그루지야 출신 밀리톤 칸타리야고 아래에 있는 장교는 러시아 출신인 미하일 예고로프다. 두 사람 모두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밀리톤 칸타리야는 이후 압하지야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회의 의원을 지내다가 소련 붕괴 이후 그루지야-압하지야 분쟁 중 고향에서 쫓겨나 트빌리시로, 다시 모스크바로 이주하던 중 1993년 12월 27일 사망했다. 미하일 예고로프는 유제품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다가 1975년 6월 20일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우상단에 서 있는 두 인물은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이다.
또한 사진의 국기는 굳이 따지자면 '고증오류'이다. 실제 소련의 국기에 있는 낫과 망치 위에 있는 별은, 금색 테두리에 붉게 칠해진 형태이어야 하지 저렇게 금색 전체로 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프로파간다 사진에서조차 틀리게 묘사할 정도로 소련 내에서도 이 규칙은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 않은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상징 문서 참조.
제국의사당 구역을 지키던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는 제국의사당을 방어하던 부대가 전멸하고 나머지도 격렬한 시가전으로 전부 소모되고 몇 안되는 잔존 부대만 최후의 티거 2 2량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이 티거 2 2량의 전차장이 각각 티거 2 항목에도 나와있는 SS제 503 중전차대대 소속 카를 쾨르너 SS 기갑원사(SS-Hauptscharführer)와 게오르그 디어스(Georg Diers) SS 기갑하사(SS-Unterscharführer)이다. 이들은 수많은 소련군 기갑차량들을 격파하면서 성공적인 분투를 하였으나[43]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들의 티거 2 중전차에 자폭으로 최후를 주었다.[44] 여기까지 남아있던 대다수의 장병들은 사살되거나 소련군에게 붙잡혔고 소수의 스칸디나비아 의용군들만이 살아서 엘베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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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한 독일군 장성급 포로, 제일 왼쪽 인물이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이다.)
제국의사당이 소련군에게 점령된 직후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이 소련군에 항복하였다.

1945년 4월 30일, 총통께서 자살하여 그에게 충성을 다하던 사람들의 곁을 떠났다. 모든 독일 군인들은 총통께 충성을 바쳤고 제한된 탄약공급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계속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즉시 사격을 중단할 것을 명령한다. 매 시간 교전이 계속될 때마다 우리의 상처와 베를린 시민들의 고통은 늘어갈 것이다. 동시에 소련군 최고사령부 또한 지금 즉시 전투를 멈추기를 바란다.

전 베를린 방어 사령관 포병대장, 헬무트 바이틀링.

이로서 공식적으로 베를린 전투가 끝났다. 5월 2일 낮, 헬무트 바이틀링은 소련군의 요청에 따라 시내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독일군에게 항복을 명령하는 방송을 하였다. 폐허가 된 베를린 시내 곳곳에 방송차량이 다니며 헬무트 바이틀링의 항복 명령을 전달했다. 이 명령을 듣고 항복한 병사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항복하지 않고 서부의 미/영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전투를 계속했다. 베를린 시내의 잔존 독일군과의 교전은 첫 항복 조인식이 열리던 5월 8일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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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사당 점령을 축하하는 제1벨라루스전선군 제3충격군 제79군단 제150 '이드리차' 소총병사단 소속 병사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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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종료 후 촬영된 독일 국회의사당(라이히스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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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종료 후 찍힌 독일 국회의사당 내부, 벽마다 소련군이 해 놓은 낙서로 빼곡히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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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회의사당 함락 장면의 기록화. 참고로 이 건물이 소련군 수중에 떨어진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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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벙커를 점령한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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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전투 직후에 촬영된 총통 벙커 내부.
히틀러가 죽은 직후인 5월 1일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이 제150 소총병사단[46] 병력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면서 사실상 베를린은 소련군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제국의사당이 넘어가기 직전에 독일 국방군 육군참모총장이었던 한스 크렙스 장군이 소련에게 협상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바실리 추이코프 상장의 사령부로 찾아갔지만 추이코프는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고 독일의 무조건 항복만이 유효하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협상 결렬 후 추이코프는 한스 크렙스에게 들었던 히틀러의 사망 소식을 스탈린에게 전했다. 괴벨스는 공군 중사로 전선에 나갔다가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양아들 하랄트 크반트를 제외한 자기 자식들을 모두 독살한 뒤 아내와 함께 동반 자살했고, 협상이 실패한 뒤 돌아온 크렙스와 그의 사관학교 동기인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대장도 마찬가지로 자살을 택했다.[47] 나머지 잔존 병력과 인사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48] 소련군에게 사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베를린 전투가 종료된 직후 수많은 피난민과 잔존한 9군 병력들이 베를린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서방 연합군의 점령지를 향한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였다. 엘베 강에 도달한 이들은 손에 잡히는 것 아무거나를 동원해 도강을 시작했다. 베를린에서 살아남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소수의 기갑 차량은 전부 이들의 후미 엄호를 맡았다. 이 방어전은 5량의 티거 2를 주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엘베 강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붉은 해일이 되어 밀려오는 소련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쳤다. 이들은 몰려오는 소련군을 상대하며 자신들의 목숨을 수많은 피난민의 목숨과 맞바꾸었다.[49]

3.4. 유럽 전선의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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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붉은 깃발을 걸고 있는 소련군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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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항복했다는 신문을 보고 있는 프랑스계 캐나다 여성)[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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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문의 반파된 동상에 붉은 깃발을 거는 소련군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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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사당 앞에서의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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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소련 해군 장병들을 촬영중인 미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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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감시 하에 이동 중인 독일군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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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빌헬름 보데빈 요한 구스타프 카이텔 OKW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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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2번째 항복이 이루어진 방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박물관에 있는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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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병사들에게 전쟁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 적힌 쪽지)
소련군은 공식적으로 베를린을 점령했지만 아직도 골목 등 일부 지역에서 항복을 거부하는 패잔병들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외곽 지역에선 한 명이라도 더 서방 연합군 점령지로 보내기 위해 저항하는 독일군 잔여 부대와 소련군의 전투가 지속되었다. 이후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5월 8일에는 서방 연합군에, 9일에는 소련군을 포함한 전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유럽 전선은 종결되었다. 이후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은 5월 8일을,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러시아의 5월 9일 전승 기념 행사에 미국, 서유럽 정, 관계 인사들도 초청받아 참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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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종료 후 히틀러 벙커 근처의 부서진 의자에 앉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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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모여 있는 소련군과 I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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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제국의사당 앞에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 독일군)
이 전투에서 소련군 병사 8만 여 명이 작전 기간 동안 전사했다. 그리고 이들 중 30,000여 명이 베를린 시가전에서 운명을 달리했으며, 그 외 28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중에서도 시가전인 만큼 기갑 전력의 피해가 특히 커서[52] 전투 기간 동안 약 2,000대[53]에 달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54] 한편 베를린에서는 소련군이 전투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물론 민간인의 피해도 심각해 45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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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을 가다가 소련군에게 접수된 독일 민간인들)

함락 직후 베를린의 모습. 승리를 축하하는 소련 해군 장병들과 폐허의 모습이 보인다.

전투 이후 뒤따라 베를린에 입성한 영국군의 소식을 알리는 영상. 전투 막바지에 '''203mm B-4 곡사포'''와 다양한 야포의 직사 사격으로 토벌전을 펼치는 소련군, 소련의 포고문을 읽고 잔해를 치우는 베를린 시민들, 히틀러가 화장된 구덩이를 살펴보는 연합군 장병들, 폐허 위에서 히틀러[55]와 그 추종자들을 따라하며 노는(...) 영국군 장병들 및 자국 관할 구역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영국군의 모습이 보인다.
나치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복했으나 동부전선에 잔존해있던 독일군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서부전선에 있던 독일군은 대체로 베를린 전투의 전후로 며칠 안 있어 전부 항복했지만 우크라이나 방면군을 비롯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항복 후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가기 싫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5월 11일까지 계속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독일군이 점령한 채 고립돼서 남은 지역인 미수복 지구의 독일군이 한동안 더 버텼다. 심지어 덴마크 보른홀름 섬에 주둔한 독일군은 항복 후 4개월이 넘게 지나서야 항복을 했다.[56]
베를린 시내에서 교전이 벌어질 당시 난데없이 코끼리얼룩말 등의 동물들이 시내를 뛰어다니는 일이 있었다. 교전 과정에서 베를린 티어가르덴 구역에 있는 동물원 우리가 부서져 우리 안에 있던 동물들이 뛰쳐 나온 것이다. [57]

4. 기타



4.1. 소련군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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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군이 여성의 자전거를 구입하려는 도중 발생한 실랑이를 찍은 사진으로(#) 실랑이 원인은 자전거를 구입하겠다는 소련 병사의 말을 독일 여성이 못알아들어서였다)

우린 점령지역에서 가끔 마주친 여자들을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잡아다가 강간하였다. 부대원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윤간하였다. 폴란드 여자는 집으로 돌려보내주었지만[58]

독일 여자는 폭행하고 학대했다. 마지막에는 총으로 쏘아죽였다.

-어느 소련병사의 증언

당신은 당연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었겠지요? 당신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가를 알겠죠? 그렇다면, 스탈린그라드에서 베오그라드까지 전우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주검을 넘어서 쑥대밭이 된 조국의 땅 수천 킬로미터를 지나며 싸워온 남자를 상상해 보았습니까? 그런 남자가 어떻게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참상 뒤에 그가 여자하고 재미 좀 보는 것이 뭐 그리 심한 일인가요? 당신은 붉은 군대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붉은 군대는 이상적이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붉은 군대가 독일과 싸운다는 것입니다.

- 이오시프 스탈린,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밀로반 질라스가 소련군의 유고슬라비아 여성 강간에 대해 항의할 때 한 말.[59]

소련군베를린을 점령한 뒤, 소련에서 독일군이 저지른 참혹한 학살극을 직접 보고 들으며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에 의해 수많은 약탈과 강간이 벌어졌다. '''역사가들은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여성은 최대 200만명, 베를린에서 10만 가량의 독일인 여성이 강간당했고, 1만명이 그 여파로 사망했다고 추산한다.''' 고아와 임산부들을 위한 자선단체인 하우스 데흘렘(Haus Dehlem)에서는 '''갓 출산을 끝낸 여성들과 임산부들까지 소련군에게 강간당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1945~1946년 사이에 전시강간으로 태어난 독일-러시아 혼혈 신생아가 3.7%라 집계될 정도였다.
소련군 사령부는 이런 비행을 알고 있음에도 대체로 눈감아 주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병사들의 비행이 지나치다고 판단되자 NKVD 소속 부대를 동원해서 단속에 나섰다. 강간범들은 피해자 앞에서 총살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유명한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인 소설 <수용소 군도>에 나오는 굴라그 감방동기 두명은 바로 이렇게 잡혀온 강간범이다. 소련군 사령부나 내무인민위원회가 주둔군 병사들의 비행을 스탈린에 불경을 범한 정치범(= 솔제니친)과 똑같은 중범죄로 다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역사가 노먼 나이마크는, 1945년에 가장 많은 강간이 일어났기는 해도, 1947-48년 겨울에 항구적인 부대 주둔지가 마련되어 부대장의 허가없는 외박이 금지될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됐다고 지적한다. '''강간 피해자는 최연소가 8세였고 최고령이 80세였다'''. 그냥 노소를 가리지 않고 독일에서 여자만 보이면 잡아다 강간한 것이다. 서독 수상 헬무트 콜의 영부인 하네로레 콜도 12세 나이에 모친과 함께 소련군에게 강간당해서 그 후유증으로 평생 고생하다 말년에 건강을 비관하여 자살했다.
전후 1950년대에 소련과 동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위해 방문하였으나 오히려 피해자들이 그 정도 해준 것만도 되려 고맙다고 말한 바 있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한 출처나 진위여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오히려 동독 민간인들은 소련이 베를린에 세워놓고 간 소련군 무명용사의 무덤을 "무명강간범(...)의 무덤"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자신들에게는 반성이 "강요"되고 소련군의 비행에는 면죄부가 주어진 것을 동독인들은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냉전 말에 소련과 동독 정부가 당시 피해자들 중 일부에게 어느 정도의 배상을 한 적이 있고, 전후 소련에서 배상은 못해도 사죄는 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일부 있긴 했다. 소련과 동독이 전후 배상하려 했다는 것을 두고 '이는 동독과 소련측의 주장이니 가려 들을 필요가 있다'고 악담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2차대전 당시에도 민간인 학살은 전쟁법과 전쟁 관습법에 의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연합군에게 대의가 있다고 해서 그들의 전쟁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소련군의 전쟁범죄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전쟁사학자 앤서니 비버는 소련군이 나치의 세계정복을 막아낸 공로를 높이 평가하는 학자이지만, 독일 여성들에 대한 소련군의 보복은 역사상 최대규모의 집단강간이었다고 혀를 찼다. 애초에 대의와 민간인 학살, 약탈, 강간은 무관하기도 하고.
그리고 소련뿐만 아니라 다른 서방 연합국도 규모는 작지만 강간이나 약탈을 저지르기는 마찬가지였다.[60]
그래도 어쨌든, 소련당국은 독일인들의 민심을 얻으려고 식량보급에 힘썼는데,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하자마자 점진적으로 식량을 배급하기 시작했으며 1947년에 본격적으로 식량을 배급했다. 영화 '베를린의 여인'에서 나오듯이 점령군에게 '''몸을 바쳐''' 배급이나 안전을 확보하려는 독일 여성들도 꽤 있었다.
소련군의 약탈에 재미있는 일화들이 상당한데 그 가운데하나는, 냉전시 영미측의 선전으로 부풀려진 것도 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병사들이 독일에 진입하고 나서 민가의 수도꼭지를 죄다 빼 갔는데 이를 본 장교들이 왜 그걸 빼 가냐 물었더니 병사들이 "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리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 수도꼭지만 있으면 물이 콸콸 나오는 거라고 알았던 것이다(...). [61] 이 외에도 무조건 큰 게 좋은 줄 알고 자기가 찬 손목시계를 괘종시계로 바꿔갔다거나 하는 일화들이 존재한다.

4.2.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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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사당 앞의 제150소총병사단 병력)[62]
베를린 공략을 직접 맡은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소련군 제62군이 개편된 제8근위군(1943.4.16 부로 개편)이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맹장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후에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은 그 이후에도 이 부대를 맡아 2년간 계속 지휘했고, 이 부대는 결국 베를린 공략 부대라는 소련군에서 가장 명예로운 역할을 맡았다. 이 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익힌 시가전 전술에 매우 능했으며, 그때 익힌 노하우를 적극 이용했다. 수류탄, 박격포, 기관총, 화염방사기를 갖춘 10여 명의 분대분대장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판단하에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건물에 돌입하여 적을 소탕하는 작전이었다. 이 부대는 종전 직후 그대로 베를린에 눌러 앉았고, 통일과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군으로서 남아 있다가 군사 협정 후 철수할 때까지 계속 주둔하였다.
한편 여기서 베를린 국회의사당을 직접 점령한 제150소총병사단은 오로지 제국의사당에 소련 국기를 게양할 것을 직접 명령받은 9개의 사단 중 하나로 그 위업이 특별시되어 쿠투조프 훈장 2급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지금도 승리의 날 퍼레이드 때 가장 처음으로 행진하는 의장대는 러시아 국기와 함께 이 부대의 깃발을 들고 행진한다.[63] 그야말로 소련군 전설의 부대[64]로 제150소총병사단은 전쟁 종결 직후인 1946년 해체되었으나 70년 후인 2016년 러시아군이 부활시켰다. 부활한 제150소총병사단의 정식 명칭은 '제150 이드리차-베를린 쿠투조프 훈장 2등급 기동소총병사단(150-я Идрицко-Берлинская ордена Кутузова 2-й степени мото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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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베를린에 세워졌던 소련군 전사자 추모 동상)[65]
사진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T-34/76 1대와 152mm ML-20 1문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통일 당시 헬무트 콜 수상은 소련에게 이 동상을 절대로 철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66] 다만 러시아와의 관계가 나빠진 현재는 이 동상의 의의를 소련을 배려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치 범죄에 대한 반성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이 강하다. 빈에도 비슷한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처음 부지를 선정하고 공사 시작할 때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나중에 베를린을 분할하고 보니 영국군 구역으로 설정되어 버렸다. [67] 이후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소련/동독의 양외지처럼 간주되었는지 서베를린 이었음에도 소련군 의장대원들이 경비를 섰다. 그리고 동독 학생들의 견학도 잦았다고 한다. 독일이 통일되고 러시아군이 철수한 후로는 사라진 풍경이고 러시아의 양외지도 아니다.[68]

4.3. 모든 것을 쥐어짜다


당시 독일은 야크트티거 등 일부 소모된 차량을 제외한 모든 기갑전력을 베를린 방어에 동원했다. 1호부터 6호 B형까지 제식 전차가 모조리 사용됨은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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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기의 유물이던 영국제 MK 전차도 독일군이 사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노획해 전시해 두던 물건이었다.
다만 실제로는 쓰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해당 사진에 있는 차량들은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사용하다가 적군에게 노획당해 스몰렌스크에 전시되었던 차량으로 스몰렌스크가 1941년에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다시 노획되어 베를린에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를린 전투 한참전에 찍힌 사진에서 해당차량을 발견할 수 있다.
A7V도 쓰였다고 하는데 1차 대전 유물까지 나온 마당이니 가능성은 높지만 A7V는 생산수가 21대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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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1호 전차의 포탑을 들어내고 그 위에 75mm PaK 40 대전차포를 올려서 급조한 구축전차도 소량이 사용되었다. 정확히 47mm 포를 탑재한 판저예거가 아니라 75mm 포를 올린 것이 맞다. 사진은 격파된 차량으로 보인다.
6호 전차 티거 선정때 헨셸 차량에 밀려 탈락한 포르셰의 VK 45.01(P)가 베를린 교외에서 격파되었다. 이 차량은 종래의 8.8cm KwK 36 56구경장이 아닌 8.8cm KwK 43 71구경장이 장착되어 있었다.[69] 소련군이 관심이 없던 탓인지 이 차량은 사진으로는 남아있지 않고 기록에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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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최후의 티거 2들. 베를린에 마지막까지 남은 티거 2는 여기 나온 단 두 량이었는데 무장친위대의 게오르크 디어스 하사와 카를 쾨르너 원사의 차량이다. 이 두 차량은 베를린 전투에 참가했고 두 차량 다 자폭으로 최후를 맞았다. 이외에도 5대가 살아남아 엘베 강으로 피난하는 패잔병과 민간인들의 후위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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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탑을 뒤로 돌린 베를린 최후의 티거 1인 323호 티거의 사진, 완전한 초기형은 아닌 대전 말에 남는 부품을 전부 유용해 만든 하이브리드/좀비 티거이다. 잘 보면 포탑에는 초기형 큐폴라가 달려있지만 차체는 중기형이다.[70] 뒤의 배경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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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베를린에 남아 있던 판터, 위 사진에 토치카로 쓰인 판터와 달리 치메리트 코팅조차 되어있지 않은 초기형이다. 훈련용을 꺼내 온 것으로 추정된다.[71]
최후의 엘레판트 구축전차 2량이 베를린 교외에서 격파되었다. 시제품이었던 VK 20.01 1대도 실전 투입되었다. 사진이 하나 남아있으며 이후 격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시제품이던 경 트랙터도 20mm 기관포를 달고 보병 지원용 전차로 투입되었으며 이후 T-34에게 격파되었다. 8호 전차도 투입되었으나 1호차는 베를린 근교에서 소련군에게 온전히 노획되었고 2호차는 실험장에서 14km 떨어진 장소에서 엔진 고장으로 승무원들에 의해 자폭하였다. 나중에 소련군이 1호차 차체에 2호차 포탑을 복원해 합체하는 방식으로 8호 전차를 복원에 성공, 쿠빈카에 가져다 놓는다. 지금도 쿠빈카에 가면 600mm 자주박격포 칼 옆에 전시된 8호 전차를 볼 수 있다. [image] 무장친위대가 노획한 Pz T-34/76 747(r)과 Pz T-34/85 747(r), Pz KV-1 756(r)도 투입되었다. 이중 Pz KV-1 756(r)은 이동 도중 교량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결국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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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베를린 전투가 아니라 다른 전투에서 찍혔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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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베를린 전투가 끝난 후 소련군이 격파된 독일군 전차들을 모아 둔 사진인데 아래에서 세번째를 보면 판터들 사이에 르노 FT-17 전차가 보인다. Mk.1과 마찬가지로 전시용이거나 프랑스 침공에서 노획한 것을 치안유지용으로 사용하다가 전투에 투입했던 것으로 추정.
기갑병기뿐 아니라 개인화기 쪽 사정도 처참했다. MG08, MG30, VG 1-5, MP18, Gew98, Gew88, Gew71, MP3008 같은 대전 후기에 급조된 무기들은 물론 1차 세계대전의 무기부터 화승총(...)까지 사용되었고 그 중엔 루이스 경기관총이나 MAS-36같은 프랑스 침공 때 상당수 노획한 무기도 지급했으며 이탈리아군카르카노를 독일의 7.92mm 마우저탄이 들어가게 개조한 것 등 온갖 것이 마구잡이로 지급되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소련군이 극소수의 EMP44를 들고 나온 국민돌격대와 교전한 일화도 있었는데 생김새가 당연히 이상한 까닭에 소련군은 그냥 무시했으므로 멀쩡히 남은 총기가 거의 없다. [72]
장비 외에도 인력도 쥐어짰는데 소련이 동부전선 초반에 그랬던 것처럼 베를린의 민간인들이 방어선 구축에 동원되었다. 노면 전차로 방어벽을 만들고 호를 구축했다. 물론 인력난은 심각해서 베를린에 설치된 대공포 조작 요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외국인, 소련군 포로가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대전 말 베를린에선 다음과 같은 블랙 유머가 나돌았다. '신사(패잔병, 늙은이), 숙녀(여자들), 어린이(히틀러 유겐트), 동무(소련군 포로) 여러분!'

4.4. 지하철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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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지하철에 진입하는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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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입구에서 전복되어 있는 소련군 T-34/85. 후진하다가 굴러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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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지하철 내부의 모습)
영화 다운폴에서도 나오다시피 이때 베를린 지하철은 민간인과 독일군의 방공호 내지는 간이 야전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4월 28일경 독일군 지휘부가 소련군의 지하 침투를 막는답시고 지하철의 터널을 폭파해 지하수를 유입시켜[73] 국회의사당 근처의 모든 지하철 구간을 침수시켜 버렸다. 이때 안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민간인들과 부상병들도 익사하고 말았다. 다만 터널을 폭파하기 전 독일군 수뇌부에서도 이들을 대피시켜려고 전령을 보냈지만 지하철로 가던 전령이 그만 유탄에 맞아 사망했고 결국 이런 대참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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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서 나오는 항복한 독일군, 밑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루프트바페 소속 공수부대인 팔쉬름예거도 베를린 전투에 동원되었다.)
반대로 소련군의 경우 별다른 큰 피해는 없었으나 독일군 소탕을 위해 지하철로 잠입한 별동대 1개 소대가 이들과 함께 익사했다.[74]

5. 이후


베를린을 점령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여전히 만족하지 않고 있었다. 스탈린은 연합군이 선수를 치기 전에 한 뼘이라도 땅을 더 차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5월 경, 이반 코네프가 지휘하는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예레멘코의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미군의 조지 패튼의 제3군과 함께 합동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했다. 소련군과 폴란드군은 5월 6일 부터 공세를 시작해 이틀 만에 드레스덴과 바우첸, 괴를리츠를 점령한 뒤 프라하로 진격했다. 프라하에는 소련군의 오랜 숙적인 독일 중부집단군 잔존병력 60만여명이 있었고[75]그렇기에 소련군은 이들을 기필코 멸절시켜야만 했다. 5월 10일 부터 프라하에 진주한 소련군은 중부집단군 병력 대부분을 소탕하거나 포로로 잡은 뒤 11일, 플젠에서 미군과 접선하게 되면서 '''소련군의 마지막 대독일 군사작전은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나치 독일은 공식적으로 연합군에 항복하여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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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베를린에 진주한 영국 육군 전차 승무원들, 땅에 고정된 판터의 포신에 타고 있다.)
(1945년 7월 무렵의 베를린 시가지)
(위 동영상에 4:21초에 보면 Riechs Kanzlei(수상의 집무실) 동판에 "Ну вот твою бабушку и мы здесь" 라고 적혀있다. 직역하면 "뭐 우린 여기에 너네 할머니하고 같이 있어". 의역하면 '너네 할머니랑 함'이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고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한 이후 독일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와 자를란트가 떨어져 나간 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분할 점령하였고, 수도 베를린 역시 4개국 각각 구역을 분할해 주둔하였다. 미국, 영국, 소련이야 연합군의 주축이었으니 당연하지만, 프랑스 침공 때 6주만에 너무나도 쉽게 털리고 항복하여 한동안 독일의 괴뢰국 노릇을 한지라 자신들도 승전국이니 몫을 할당해달라는 프랑스의 한심한 요구에 나머지 3개국은 응해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결국 영국과 미국이 자신들의 할당 구역의 일부를 나누어 주며 분쟁을 끝냈다.
종전 후 전범국이 된 데다 무조건 항복으로 그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던 독일인들은 1947년 마셜 플랜이 시작되기 전까지 전후를 힘겹게 살아가야 했는데 특히 엄청난 양의 폭격과 포격을 받고 시가전 와중에 대파된 베를린의 독일인들은 재건 과정에서 힘겹게 살아가야 했다. 이때의 독일 민간인들의 생활상이 독일 영화인 <독일 영년>에 잘 나와 있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베를린은 승전국들의 구역은 자연스레 서부 연합군의 서베를린, 소련군의 동베를린으로 나누어졌고 이후 미군과 소련군의 전차가 대치하는 베를린 위기 등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6. 관련 말


"증오가 아주 깊어졌다. 전쟁을 끝내고 싶어졌다. 우리를 죽이려 한 저들을 전멸시키자. 저들을 없애자. 1명도 빠짐없이!"

- 소련군 '요제프 프라우포프'

"절망적이다. 모두들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다."

- '막스 펨젤' 대장, 베를린 수비 방어선을 시찰한 후

"소련군이 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는 1시간이 걸릴 것이다. 허술한 방어선의 꼬락서니를 본 소련군55분 동안 웃으며 뒹굴다가 5분 안에 깨끗이 거덜내 버릴 것이니까..."

- 전투 당시, 독일군 사이에 퍼진 농담

"모든 병사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현재의 참호에서 최후를 맞으라.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게르만 민족도 사라진다."

- 아돌프 히틀러[76]

"그리고 나는 외치고 싶었다.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의 땅 속에 누워 있는 이들. 우리가 거쳐온 땅에서 영원히 잠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동무들, 우리가 해냈소!"

- 바실리 그로스만 (소련 종군기자), "전쟁의 해들(Годы войны, Years of the war)" 중


7. 대중문화


  • 독일 영화 다운폴(Der Untergang, 2004)은 베를린 전투 중의 독일 내부 사정을 잘 묘사하였다. 배우 브루노 간츠의 명연기를 통해 보이는, 파멸을 앞둔 히틀러의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은 당시 한 익명의 여성이 쓴 일기를 원작으로 한다. 소련군강간과 살기 위한 매춘 등이 묘사된 원작은 출간되자마자 독일과 여성에 대한 모독이라며 공격 받았고, 더는 출판되지 않았다. 작가의 사후에야 다시 재평가 받았다.
  • 베를린 1945(게르만의 기사에 수록)-유명 전쟁 만화가인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 베를린 전투를 매우 자세하게 묘사했다. 핀란드 의용사단인 '노르트란트' 소속 무장친위대 대위 하르츠가 주인공으로 나온다.[77] 베를린 전투 막바지에 부하들은 탈출시키고, 국회의사당 옥상에 소련기를 세우려는 소련군들에게 달려들어 같이 떨어지며 자폭한다.
  • 1981년작 TV영화 'Le Bunker' 또한 마지막을 앞둔 히틀러를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히틀러 역을 맡아 열연한다.
  •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Падение Берлина, 1949)은 총 두 편으로 된 영화로서 베를린 전투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 전반을 다루고 있다. 물론 마지막은 베를린 함락으로 끝난다. 스탈린이 함락된 베를린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신처럼 강림하는 마지막이 꽤 인상적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들어 스탈린이 베를린에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78] 실제로 스탈린은 포츠담 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오긴 했다. 단,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로 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나온 영화라 소련군 장비나 복장 고증은 꽤 충실하다. 여기서 괴링은 비단옷을 입고 보물로 집을 도배하고 다니는 등의 모습으로 나오지만 이 무렵엔 이미 괴링은 보물들을 대부분 팔아 치우거나 또는 파괴했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이미 피난민들의 대열에 합류하여 베를린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 영화는 스탈린의 우상화가 극에 달했을 때 제작된지라 스탈린이 거의 신처럼 묘사되는 선전 영화나 마찬가지였고, 스탈린을 다룬 영화의 단골 감독이었던 미하일 치아우렐리가 감독을 맡았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OST(...) 작곡을 맡는 등 소련 최고 스탭들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여담이지만 출연 배우들이 실제 인물들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1편, 2편 히틀러 역을 맡은 배우 블라디미르 사벨례에프(Vladimir Savelyev )는 그 광기나 억양을 러시아어로 재현하는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유튜브에서는 러시아어 원어버전도 있지만 북한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더빙한 더빙판도 보인다. 찬양 목적이 아니라면 불법이 아니니 코렁탕 걱정은 없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서는 마지막 미션으로 나온다. 독일 국회의사당(라이히스탁)을 점령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지만, 소련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게임 플롯상 영광에 찬 국기 게양 같은 건 없고 오히려 베를린 전투의 클라이막스가 되어야 할 국기 게양을 매우 허무한 일로 묘사하고 있어 플레이어에게 감동을 전혀 주지 못한다는 게 문제. [79] 독일 국회의사당은 중립 건물 블록이 여럿 합쳐진 거대한 건물로 묘사되며, 그 앞에 펼쳐진 참호의 밭을 무시무시한 손실을 각오하고 뚫어야 한다. 특이 사항이라면 독일 국회의사당 주변의 적을 정리하고 안심할 무렵 갑자기 티거가 2대 튀어나오는데, 미션 흐름상 대전차 전력을 그때까지 딱히 마련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확 쓸릴 가능성이 높다.
  •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는 콜 오브 듀티1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에서 베를린 전투가 묘사된다. 둘 다 소련군 마지막 미션이 제국 의사당 공격을 다루고 있다. 다만 콜옵1에서는 아쉽게도 주인공이 다른 병사가 의사당 건물에 붉은 깃발을 게양하는 걸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80]
  • 월드 앳 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첫번째 미션을 제외한 모든 소련군 미션이 베를린 전투를 다루고 있다. 젤로 고지 전투부터 시작하여 베를린 시가전, 그리고 제국 의사당에서의 최후의 전투가 묘사된다. 그리고 이쪽은 주인공인 디미트리 페트렌코가 직접 의사당 옥상에 소련기를 꽂는다!

▲ 유투브에 올라온 Attero Dominatus의 매드무비. 이 노래의 성격을 매우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 모바일 게임 SD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영미연합, 소련의 세 진영의 캠페인 마지막 시나리오로 등장하는데 구성 요소는 차이가 있다. 독일은 중앙에서 자원을 캐면서 동서남북에서 일정 주기로 쳐들어오는 소련군을 막는 디펜스 게임이고, 소련군은 독일 진영을 함락시키기만 하면 되는 정석적인 임무이다. 영미연합군은 소련 개입 이벤트가 발생하면 명령대로 공장지대를 점령할 것인지, 패튼답게 명령씹고 베를린으로 진격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가 생기는데, 공장지대를 택하면 정상적인 역사진행으로 흘러가지만, 베를린을 함락하면 소련군과 또 맞붙어야 한다. 패튼은 한 술 더 떠서 이 기세로 소련까지 박살내자고 폭주하지만, 독일더러 무조건 항복하라고 퇴짜놨던 아이젠하워가 역사에 없던 일이라며 츳코미를 건다.
  • 닌텐도 DS 게임 “탱크비트2”에서 소련군, 독일군 진영 양쪽에서 마지막 미션으로 등장한다. 소련군의 엔딩은 베를린 점령 이후 주인공과 전차 부대원을 전쟁 초기 때 부터 틈만나면 숙청할거라며 갈구던 정치장교가 파괴된 티거 위에서 자신만만해하다가 그 파괴된 티거가 유폭하는 바람에(...) 정치장교는 산산조각났고 주인공과 부대원은 이를 비웃으면서 끝난다. 독일군 진영에서는 티거 II로 이루어진 최후의 전차 부대들을 이용해 소련군을 막아내면서 피난민들이 서쪽으로 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버는 미션이다.
  • 1950년대 소련을 배경으로 한 영화 차일드 44(영화)에선 초반부에 이 당시 국회의사당 전투가 잠깐 묘사된다. 또한 국회의사당에 국기를 게양할 때의 장면도 각색해서 등장한다. 맨 처음 깃발 게양을 하려던 병사가 시계를 여러 개 차고 있자 사진을 찍으려던 간부가 이를 제지하고, 뒤에서 대기하던 주인공인 레오 데미도프를 불러다가 대신 깃발을 걸게 한다. 사진을 찍은 당사자인 칼데이 해군 중위도 등장한다.해당 장면

[1] 사진 우측에 나와있는 전차는 IS-2이고, 국회의사당 위로 나는 항공기는 Pe-2로 추정된다.[2] 참고로 이 사진은 합성 논란이 있다.[3] 소련 해군의 정훈장교 예프게니 칼데이(Евгений Ананьевич Халдей, Yevgeny Khaldei) 중위가 연출하에 찍은, 5월 2일 독일 국회의사당. 자세한 설명은 후술.[4] 유일하게 카이텔 장군이 작전 수립 및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유는 유능한 육군 장성급 지휘관들이 히틀러에게 해임 및 숙청당했고, 남은 육군 원수 계급을 가진 장교라고는 카이텔 밖에는 없었다. 결국 카이텔은 히틀러의 뜻에 따라 직접 작전 수립 및 직접 전투에 임했다.[5] 하인리치가 휘하 병력을 북부로 이동시킨 행위로 인하여 비스툴라 집단군 지휘관직에서 해임당하자 하인리치의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베를린으로 가던 중 영국군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집단군을 지휘하지는 못했다.[6] 쿠르트 슈투텐트가 영국군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바스툴라 집단군을 지휘했다.[7] 폴란드군 155,900 ~ 200,000명 포함[8] 당연히 대부분이 미성년자였다. 주로 전사한 군인들의 인식표, 유품을 회수하거나 시신을 옮기는 일을 했으며, 민간인 시신을 옮기며 사망자 명단을 체크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9] 웃기게도 얼마나 임박했는지 늙고 병들어서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할머니들도 강제 징집했다. 국민척탄병과 달리 지급해줄 물품이나 군복도 없어서, 평상복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지급해준건 그나마 수량이 많은 편이었던 판처파우스트와 조병창에서 불량품으로 판정된 탄약과 무기들 뿐이었다.[10] 베를린 방어를 위해 바리케이드토치카, 대전차 지뢰를 설치하기 위해 보내졌다.[11]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비시 프랑스, 폴란드 총독부, 동방 국가판무관부, 프랑스 군정청, 세르비아 구국정부, 알바니아 왕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그리스국, 벨기에-북프랑스 국가판무관부, 덴마크 보호령,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괴뢰국들, 그리고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등의 동맹국과 국민단결정부 등 그 지역을 점령하면서 꼭두각시로 세운 정부들.[12] 당시 나치 독일 경찰은 중무장을 했다. 또한 무기를 지급받아서 베를린 전투에 배치되었고 오스트리아(당시엔 오스트마르크 주) 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에도 소수가 배치되었다.[13] 폴란드군 2,800명 포함[14] 많은 자료들에서 젤로프라고 쓰고 있지만 Seelow에서 w는 o의 장음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음되지 않는다. 이 같은 발음법은 동부 지방의 지명이나 인명을 읽을 때 사용된다.[15] 두 번째 사진에 있는 전차는 IS-2 중전차 2대, T-34/85, ISU-152, Stalinetz S-65 트랙터와 203mm B-4[16] 총통이 아니다. 히틀러의 총통직은 나치 집권 직후 통과된 수권법으로 독일 대통령독일 총리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히틀러는 원래 총리였다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해 총통이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으론 칼 되니츠가, 총리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임명되었으나 괴벨스는 히틀러가 자살한 직후 부인과 하랄트 크반트를 제외한 어린 자녀 6명과 같이 자살했다.[17] 월드 앳 워에서 레즈노프의 입을 빌어 '''어린 놈, 늙은 놈, 병든 놈'''까지 끌고 왔다며 이를 조소한다.[18] Armoured fighting vehicle, 전차, 구축전차, 돌격포, 장갑차 등 장갑을 두른 모든 차량, 전차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당시 독일군 수중에 남아 있던 모든 전투차량이라는 것이다.) 독일군은 1945년 3월 봄의 새싹 작전에서 상당수의 남은 전차, 구축전차, 돌격포를 상실했기 때문에 이 1519대의 AFV 상당수는 장갑차였을 것으로 보인다.[19] 사실상 대전말기 북부 독일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력을 갖추고 있던 군단이었다.[20] 이 때 독일 해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또는 군함을 버리고 후퇴해서 민간인인 척 하며 육군에 입대하는 인간들도 있었다.[21] 많은 자료들에서 젤로프라고 쓰고 있지만 Seelow에서 w는 o의 장음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음되지 않는다. 이 같은 발음법은 동부 지방의 지명이나 인명을 읽을 때 사용된다.[22] 많은 역사서에 토르가우(Torgau)로 오기되어 있다.[23] 승전 30주년이 된 1975년에 진행된 역사적인 미/소 합작 우주 미션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서도 양측 우주비행사 알렉세이 레오노프토머스 스태퍼드는 이 엘베 강 상공에서 처음 악수를 할 예정이었으나 간발의 차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상공에서 만났다.[24] 사실 이 시대의 방탄모는 총알을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케블라를 압축해서 만드는 현대의 방탄모도 중량 등 실용적 이유로 권총탄 방호를 방호력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교전 거리 내의 소총탄은 못 막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대의 방탄모는 그저 파편을 막는 것에 의의를 두는 수준이었다. 다만 파편에 의한 사상자가 상당히 많았기에 이 정도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고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다.[25] 당시 스탈린이 주코프 군과 코네프 군의 전투 지경선을 없애 버리기까지 해서 경쟁을 더욱 부추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주코프는 이 때문에 여유 없이 굉장히 급한 상황이었다.[26] 많이 잡으면 7만 명까지 나왔다고 한다.[27] 우연히도 이 날은 히틀러의 생일(4월 20일) 바로 다음날이었다.[28] 베를린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베를린에서 탈출했다.[29] 총통 사령부에서 힘러의 연락장교이자 부관인 무장친위대 중장이었다. 힘러가 혼자 무단으로 스웨덴에 항복 협상을 하던 게 만천하에 드러나자 베를린에 남아있던 페겔라인은 히틀러에 의해 재판 과정도 없이 총살되었다. 이 사람은 에바 브라운의 매부였고 에바는 그를 살려달라고 히틀러에게 눈물을 흘리며 빌었지만 히틀러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30] 영화 '몰락'에도 나오는 그 장면의 실제 상황이다.[31] 이 때는 베를린 전투 때처럼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끌려갔다.[32] 시신 사진은 이걸 사용한 것으로 추정.[33] [image] 철거 당시 사진, 잘 보면 포방패가 굴곡져 있는 초기형 D형 포탑이다. 물론 독일군은 베를린에서 1차 대전 전차도 사용할 정도로 손에 있는 대로 다 넣었기 때문에 초기형 부품도 보이는 것이다. 어차피 고정 포대로 사용할 거긴 했지만 초기형 후기형 따질 때가 아닐 정도로 전황이 급박했으니...[34] 독일 공군의 유일한 여성 파일럿으로, 주로 전쟁이니 테스트 파일럿으로 활동했다. 그녀 자신은 무사히 살아서 베를린을 탈출했다.[35]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등이 모두 그에게 탈출을 권유했으나 거부했고 심지어 베를린 전투가 시작됐을 때 총통 관저 바로 앞에 비행기를 몰고 온 한나 라이치[34]의 간절한 요청도 거부했다. 이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탈출 권유를 했다.[36] 일례로, 이 때문에 잘 싸우고 있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자신의 병력을 북부로 이동시키던 중 후퇴한다는 누명을 쓰고 보직해임되었다. 하인리치가 베를린에서 얼마나 대활약했는지는 “젤로 고지 전투” 부분 참고.[37] 어차피 탈출해도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죽는게 조금 늦춰질 뿐이다.[38] 교전이 끝나고 정리된 구역이라 분위기가 한산하다. 앞의 시체는 군복의 칼라장으로 보아 무장친위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옆에 놓인 무장은 공수부대(팔슈름예거) 장비인 FG42로 보이며, 전황이 워낙 급박하므로 공수부대 소속이 아님에도 아무거나 쥐어주고 교전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민돌격대가 철모, 군복, 계급장이 부족해 잡다하게 섞인 복장을 한 경우가 많았지만 보급이 우선 순위에 있는 훈련받은 군인조차(사진 속 군인은 철십자 훈장도 패용하고 있다.) 자기 부대 편제가 아닌 장비를 쓸 만큼 베를린의 독일군이 막다른 곳에 몰렸음을 알 수 있다, 다운폴에서도 노획한것으로 보이는 '''미군''' 군복을 입은 독일군을 볼수있다.[39] 이 때문에 4월 21일에 베를린에 진입하고 30일에 제국의사당을 함락하기까지 1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스탈린그라드가 왜 지옥이었는지 기억해보자.[40]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에선 제국의사당 내부에 SS 의장대가 방어를 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게임과 마찬가지로 제국의사당은 이때 돔이 붕괴된다.[41] (12,8cm FlaK 문서 참조) 하나의 포로 대공/대전차 모두를 담당했던 88mm 대공포와는 달리 12,8cm는 대공포(12,8cm FlaK)와 대전차포(12,8 cm PaK 44)가 별개의 물건이었다. 12,8cm FlaK은 그대로 대전차포로 실전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크고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다. 88mm 대공포의 FlaK36과 FlaK44의 관계와 유사하다. 물론 일단 이 대공포탑과 같은 곳에 설치된 상태에서는 대지 사격에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처음부터 대지 사격도 감안해서 상하각도를 -3도까지 만들었기도 하고.[42] 다만 후술하겠지만 이 당시에는 교전 상황이 워낙 급박했기 떄문에 제대로 된 소련 국기가 아니라 식탁보를 이어붙여 만든 임시 소련 국기를 게양했다.[43] 대표적으로 카를 쾨르너 하사는 '''무려 30대가 넘는''' 소련군 기갑차량을 격파했다.[44] 일부 자료에서는 이동하던 도중 독일군 지뢰(...)를 밟아 기동불능이 되어 버려졌다고도 한다.[45] 제2차 세계 대전 승전을 기념하는 승리의 날 군사 퍼레이드에는 항상 이 부대 이름이 새겨진 소련 국기가 등장했다.[46] 제1벨라루스전선군 제3충격군 제79군단 소속.[47] 영화 다운폴에서 이 둘이 자살한 직후 이들의 시체에 수건을 덮어주는 로후스 미슈의 모습이 나온다.[48]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핫소 폰 만토이펠. 자신의 사령부로 침입한 소련군들을 직접 쏴죽인 다음 서방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했다.[49] 당시에 탈출에 성공한 독일군과 피난민이 엘베 강에 도달하여 도강을 대기하는 모습이 유튜브 영상에 몇개 있다. 강 반대편엔 미군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일부 미군들이 강을 건널 수 있는 부서진 철교와 인도교의 중간 지점까지 진출하여 강을 건너려는 독일군이 휴대한 무기를 압수하고 비무장 상태로 보낸다. 강 반대편에 도달한 독일군과 피난민은 몇명씩 무리를 지어 미군 점령지 후방으로 행군한다.[50] 신문 기사제목이 영어로 적혀있고 The Montreal Daily Star라고 써져있다.[51] 오른쪽의 두 명은 소련군 장교들이다.[52] 당시 국민돌격대와 독일군 병사들은 건물 잔해 뒤에 숨어 있다가 기습적으로 판처파우스트를 발사하는 전략을 썼는데, 여기에 당한 소련군 전차가 엄청나게 많았다.[53] 정확히는 오데르-나이세 공세부터 베를린 시가지 소탕 작전 완결까지의 총 전차 손실이 1,997대, 항공기 손실이 997대이다.[54] 일견 이해가 안될 수도 있는데 독일군이 아무리 상태가 안 좋았어도 독일군은 독일군이었고 전투의 형태가 소모가 극심하다는 시가전인 데다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이니만큼 절대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독일군은 방어자의 입장에서 되는 대로 온갖 준비를 하고 전투를 했다.[55] 칫솔 수염과 기름 바른 머리까지 재현했다.[56] 이들은 절대로 소련군에게는 항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영국군 장교를 데려오면 그때 항복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계속 항전하다가 소련군이 보른홀름에 대대적으로 폭격을 가한 뒤에야 항복했다.[57] 한국에서 이대영은 이를 소재로 한 디오라마제작하기도 했다. 다만 전투 전에 동물들을 살처분하여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는 게 정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논란이 되었다.[58] 이 증언을 한 병사의 부대에서는 부대장이 이런 원칙을 세워 폴란드 여성은 돌려보냈을 지도 모르나, 당시 소련군의 점령지역 약탈 및 강간은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기에 소련편이었던 국가 여성이나 나치독일에 당한 쪽인 국가 여성들도 소련군이 강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애초에 소련군 최상위 지휘부의 공식적인 원칙은 강간을 하지 말자는 쪽이었지만,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았고 부대 간부들의 성향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현재 조사된 기록상 독일계가 아닌 순수 폴란드계 여성도 최소 10만명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했다. [59]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351쪽[60] 냉전시절 소련군의 강간사건을 크게 선전한 미군측의 범행도 소련에 비해서는 적지만 상당히 많았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를 다룬 독일슈피겔지 영문 기사도 있다.[61] 하지만 이건 신빙성이 희박한 게, 당시 소련의 주요도시에는 상수도가 건설되고 있었으며, 하다못해 신병훈련소에서도 수도꼭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화가 나온 유일한 근거는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인데, 이 책은 영미권에서 냉전시대에 학자가 아닌 언론인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프로파간다적인 이야기를 검증없이 받아들인 면이 많다.[62] 해당 사진에 바로 앞에 있는 사람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스탈린그라드부터 살아남아 왔다는 추측들이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관련 사진에 저 아저씨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고 한다. [63] 정식 부대명칭은 붉은 군대 제1벨라루스전선군 제3충격군 제79군단 제150 '이드리차' 소총병사단이다.[64] 월드 앳 워의 소련군 미션 주인공인 디미트리로 플레이할 때도 미션 시작 시 이 부대 소속으로 표시된다.[65] 하술하겠지만 원래는 소련군 점령지역 이었을때 공사를 했지만 베를린을 분할하던 과정에서 영국군 구역으로 넘어가버리게 되었다.[66] 상술했지만 콜은 아내가 12살 때 소련군에게 강간당했었다![67]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서베를린 쪽으로 약간 더 들어가야 한다.[68] 하지만 소련의 외압으로 인한 동독의 공교육이 어쨌건 간에 베를린 전투와 소련군의 전시강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동독 장년세대는 이 기념물을 남몰래 "무명 강간범의 무덤(Tomb of unknown rapist)"(...)이라고 불렀다고 한다.[69] 월탱에서 포르쉐 티거를 풀업하면 나오는 사양이다.[70] 이렇게 적어놓으면 왠지 전투력이 떨어지는것 같지만, 불량품이 아닌 이상 어차피 다 같은 티거 전차 부속품들이라 저렇게 만들어도 전혀 하자는 없다.[71] 큐폴라와 포방패의 모양으로 보아 A형으로 보인다.[72] 대답해주자면 그랬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개조되었다고 한들 노획 무기의 한계인 호환 문제부터 다 망해가는 판국에 잔탄마저 제대로 남아있을 턱이 없고, 어찌저찌 긁어모아 탄창이나 클립으로 지급된 탄환은 안 맞거나 교전 초중반에 몇 발 못 쏘고 바로 소진되어 쓸모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73] 베를린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때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늪지대에 세워진 도시라 땅을 2~3m만 파도 지하수가 쏟아져 나온다. 오죽하면 이름부터 고대 슬라브 선주민의 언어로 "물기 많은 땅", 즉 습지라는 뜻이다.[74]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소련군 베를린 미션 중에서도 위 사건을 묘사한 장면이 나와 주인공과 레즈노프가 익사할 뻔한다.[75] 바그라티온 작전비스와-오데르 대공세의 여파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서 거의 전투불능이 된 상태였다.[76] 독소전쟁의 상황을 보면 1944년부터 독일군이 초반의 기세를 잃고 패퇴하게 된 데는 대부분 이 인간이 있었다. 물론 1943년에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로 이미 전세는 소련에게 기울어진 상황이었으나 아직까지는 상당한 전력을 갖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했을 때 기동 방어를 금지하고 무조건 위치 사수를 명령해 포위-섬멸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저런 지시가 없었어도 기동력의 차이로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44년 8월 19일 이후 이미 패전이 보이는 상황이기는 했어도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을 공세에 투입한다며 서부전선에 배치시켰다. 이 야심찬 공세는 연료 부족으로 인해 실패했고 패전을 몇 달 앞당기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버릇을 못 고쳤다. 덕분에 연합군은 보다 적은 피해로 보다 빠르게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77] 장갑척탄병의 주인공 프란츠의 친구. 프란츠는 베를린 1945에서도 잠깐 등장한다.[78] 진지한 밀리터리나 팩션 영화에서 고증미스는 치명적이다. 그것이 고의적일때는 더더욱.[79] 나치가 집권한 뒤로 쓰이지도 않던 건물이라는 식으로 묘사한다.[80] 모던 워페어 3에서는 (가공의) 베를린 전투가 벌어진다. 다만 이번에는 독일군을 돕는 미군이 되어 러시아군과 전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