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랑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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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랑헤(공식 명칭: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에스파냐 팔랑헤''', 즉 팔랑스)[2] 는 스페인 제2공화국과 프랑코 정권의 극우 민족주의 정당이다. 무솔리니 본인부터 고대 로마의 파스케스를 국가 파시스트당의 상징으로 삼았던 만큼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 하악하악거렸던 파시스트들이니 유사하게 그리스 보병 전술 팔랑스에서 명칭을 따왔다.
2. 역사
팔랑헤는 예전 군부의 지도자였던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아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창당한 정당이다. 제2공화국 당시 다양한 우파세력 중 카를리스타들은 반동 복고적 가톨릭 전통주의, CEDA(정당) (스페인 자치 보수 연합)는 기존 부르봉계 왕정 복고와 유산 계급의 계급적 특권사수에 초점을 두었다면 팔랑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CNT 같은 좌파적 조직 문화와 뒤틀린 의미에서 인민주의적 초점과 기존 보수 우익 집단과 확연하게 다른 혁명적 이상주의까지 계승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그 오리지널 파시즘에 가장 가까운 집단이었다. 바야돌리드, 살라망카, 부르고스 같은 보수적이고 스페인의 경제, 사회적 근대화에서 소외된 카스티야 라 비에하 지방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으며, 상술한 좌파 혁명 조직들과 어느 정도 공유한 조직 문화적 코드 때문에 나머지 스페인 보수 우파들에 비해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 되었다. 반면 이러한 인민주의적 초점 때문에 특히 청년층 사이 대중 장악력에서는 확실한 힘을 발휘하여 카를리스타들의 군사조직인 레케테가 나바라, 바스크 지방을 비롯한 북부에서 국민전선의 전열을 모집하는 주축이었다면, 카스티야 지방에서 비슷한 대중 동원은 팔랑헤의 힘이 컸다.
반면 아버지의 강력한 후광과 본인의 카리스마, 매력을 통해 상류층 계급주의적 특권 의식에 민감했던 나머지 보수 우익과 지속적으로 정치적 연대를 유지할 능력이 있었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공화파에게 체포, 사형당하자 나치 독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테이크 같은''' (즉, 겉은 돌격대의 갈색이라도 속은 시뻘건) 팔랑헤의 이질성 때문에 다른 국민 진영의 우파 세력과의 마찰이 더 심해졌다. 결국 이런 우파 내 갈등은 1937년 경쟁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국민진영의 유일무이한 지도자가 된 프랑코가 각종 정치 단체들을 강제 통합하고, 여기에 반발했던 팔랑헤의 2인자 마누엘 에디야를 숙청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3] 이런 각종 우익 진영을 단일 정당으로 합치면서 팔랑헤 또한 강제 통합된 카를리스타들의 이데올로기적 포지션 또한 반영한답시고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에스파냐 전통주의자 팔랑헤''' (스페인어: 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 Sindicalista, 약칭으론 FET de las JONS) 이라는 쓸데없이 길고 복잡한 이름으로 강제 개명당했다 . 물론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적개심이란 점만 빼곤 오히려 서로 충돌했던 전통주의적 카를리스타, 혁명적 파시스트 팔랑헤, 기존 CEDA의 부르주아 자본가들을 강제로 쑤셔 넣으니 제대로 된 정치적 활동이 가능할리가 만무하고 결국 모든 정파세력들을 이데올로기에서 마비시키고 프랑코 개인에게 그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프랑코 정권 이전의 팔랑헤는 국민생디칼리슴, 혁명적 성향을 보여주었으나[4] , 프랑코 정권 이후에는 군부와 가톨릭 종교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전통주의적 파시즘 성향을 나타냈다. 이런 경향은 1950년대 이후로 확연해진다.
팔랑헤당은 프랑코가 죽은 이후인 1976년 6월까지 스페인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다. 스페인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아돌포 수아레스 내각에 의해 1977년 4월 13일 해산된다. 1976년 10월에 창당된 신 팔랑헤[5] 를 비롯해 팔랑헤의 후신을 자처하는 극우 정당들이 아직 남아 있지만 과거와 달리 존재감이 없다시피한 수준. 팔랑헤당의 지지기반은 이후 이합집산을 통해 국민당으로 이어졌다.
3. 관련 문서
[1] 원래는 없었으나 프랑코가 카를리스트들과 왕당파, 기타 보수 세력들을 통합시키면서 추가되었다[2] 위의 템플릿에 나온 당명은 1937년 이후 당명이다. 당명에 '전통주의자'가 추가되었다.[3] 나치도 1934년에 이러한 좌익 세력들을 숙청하였다. 다만 사살당한 에른스트 룀과 그레고어 슈트라서와는 달리 에디야는 1970년 스페인에서 사망할 때까지 천수를 누렸다.[4]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구 팔랑헤당은 금융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와 자본가가 협동하는 국민생디칼리슴과 국가가 임금 수준을 결정해야한다는 사회주의적 면모를 강조하였다.[5] 다만 이 팔랑헤는 프랑코가 강제로 통합한 이후의 팔랑헤가 아니라 리베라가 만든 초기 팔랑헤의 후신을 자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