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외인부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존재했던 독일 국방군 및 무장친위대 소속 외국인 병력에 대한 문서이다.
정식으로 독일군에 편입된 인원만 서술 대상이므로, 괴뢰군은 문서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나치 독일의 괴뢰군에는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군이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 외에도 프랑스의 밀리스 프랑세즈, 그리스의 타그마타 아스팔리아스, 알바니아의 발리 콤버타르 등이 있다.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은 사실상 전 유럽을 상대로 혼자서 싸웠다. 당연히 전쟁 내내 독일군은 병력 부족에 시달렸고,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가리지 않고 외국인 장병들을 다수 입대시켜 독일 편에서 싸우게 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병력 자원을 두고 각군간의 다툼이 심해지면서 외국인 부대를 육군에서 무장친위대로 강제 전속시키는 사례도 잇따르게 된다. 이는 국방군이 주도한 7월 20일 쿠데타로 인해 국방군이 정치적으로 열세에 처하게 된 영향이 크다.
독일군에 복무한 외국인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당연히 먼저 거론되는 이들일수록 선발 우선순위였다.
- 주로 동유럽에 거주하는, 독일계 외국인 : 이들은 독일어로는 폴크스도이체(Volksdeutsche), 영어로는 에스닉 저먼(ethnic German)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냥 독일인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애초에 "징병"된 경우가 많다.
-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네덜란드계 벨기에인[1] 등 북유럽계 외국인 : 독일인과 동족인 게르만족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역시 전쟁 초기부터 우대받았다. 나치는 장차 유럽을 정복하면 이들을 그냥 독일인으로 취급할 예정이었지만, 아직까지는 다른 나라 국민이므로 징병은 하지 않고 자원 입대자만 받았다. 다만 룩셈부르크는 독일에 합병되어 청년들이 독일군에 징집되었다.
- 기타 서유럽, 남유럽, 동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계 외국인 :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지만 병력 부족 문제 때문에, 또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상징적인 카드로 받아들인 병력이다. 국가별 항목에서 후술한다.
2. 국가별 상세
국가 기준. 독립국가가 없는 민족이거나, 별도 기술이 필요한 경우 별도 항목으로 독립시켜 서술한다.
소련 출신자는 출신 공화국 또는 민족별로 구분해서 서술한다. 각기 동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2.1. 그리스
2.2. 네덜란드
무장친위대 48의용장갑척탄병 연대 "자이파르트 장군", 49의용장갑척탄병 연대 "드 로이테르", 83/84 의용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레닌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다.
2.3. 노르웨이
반역자 비드쿤 크비슬링이 주도하여 편성. 무장친위대 23의용장갑척탄병 연대 "노르게"로 편성되었다. 레닌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다.
2.4. 다게스탄
동방부대 내 캅카스 무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 덴마크
무장친위대 24의용장갑척탄병 연대 "단마르크"로 편성되었다. 또 Frikorps Danmark 라는 외인부대도 만들어져서 운용됐다.
2.6. 라트비아
무장친위대 32/33/34/42/43/44 무장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42연대는 '볼데마르스 바이트', 43연대는 '힌리히 슐트'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
2.7. 러시아
소련 포로 출신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이 조직한 육군의 ROA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외에도 카민스키 여단 등 독일군 편에서 싸운 러시아인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전쟁 내내 독일군은 대부분의 러시아인 포로를 처형하거나 방치해서 죽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병력 부족이 심각해지면서 독일군에 지원하는 이들은 받아들여 활용했다. 다만 이들을 별도 부대로 편성한 것이 아니라, 미군이 카투사를 쓰는 것처럼 독일군 부대에서 보조요원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히비(Hiwi, Hilfswillige힐프스빌리게(부역자)의 약자)라고 부른다. 후방에서도 방공부대의 대공포 조작요원으로 투입된 수도 많다.
당연히 전투 중 독일군에 투항한 소련군 포로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독일군에 자원한 자들은 특수한 경우가 많았는데, 대부분 처음부터 프랑스나 독일 등지에 망명해 살고 있던 백계 러시아인들이나, 아니면 소련군 포로 중 정부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2.8. 레즈긴인
동방부대 내 캅카스 무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9. 루마니아
SS제2루마니아 연대로 편성함.
오토 슈코르체니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오데르 전선에서 자기 휘하에 루마니아인 연대가 있었는데, 적진에도 소련군 편에 선 루마니아군 연대가 있어서 루마니아군끼리 치열하게 동족상잔을 벌였다고 한다.
2.10. 리투아니아
2.11. 미국
독일 국방군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독일계 미국인이 있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등장한 독일군 포로처럼 미국이 참전하기 전, "조국인 독일이 싸우고 있으니까" 귀국하여 참전한 사례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게 문제였다. 이중에는 육군 제320보병사단 소속인 뉴욕 태생의 보이 리커머 보병소위[2] 처럼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용맹히 싸운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장친위대에는 미국인이 거의 없었다. 1940년 5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SS대원 5명이 있었던 것이 문헌으로 확인되나 그 이후에는 확실한 자료가 없다. 다만 SS에 소속되어 있다가 전사한 미국인은 최소 8명은 된다고 한다. 무장친위대 소속 미국인으로는 프랑스 의용군 부대 LVF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1945년에 전사한 피터 델라니(Peter Delaney) SS-Haupsturmführer(상급돌격대지도자. 국방군 대위에 상당한다)같은 사례도 있다.
독일군, 특히 무장친위대 복무자의 수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미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악착같이 무장친위대 복무자들을 색출해낸 영국 정부와 달리 나치 독일에 대해 별다른 원한이 없던 미국 정부는 이 문제로 전후 독일인들의 반감을 필요 이상으로 살 생각이 없었고, 애초에 핵심 전범들이나 반인륜 범죄에 자발적으로 가담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적당한 선에서 징역 한두 해 살리고 다 사회로 보내버리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석방했고, 나중에 미국으로 귀국해도 모른척했다. 그래서 누가 얼마나 복무했는지 확실한 자료가 없다.
다만 무장친위대 내 미국인 부대로 잘 알려진 조지 워싱턴 여단은 실제로 존재한 적도 없고, 미국인 부대 자체가 편성된 적이 없다. 별도 부대를 편성할 만한 인원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어차피 다 독일계니 그냥 독일인 부대에 섞은 듯하다.
2.12. 벨라루스
2.13. 보스니아
2.14. 불가리아
SS제1불가리아 연대로 편성함.
2.15. 세르비아
2.16. 스웨덴
개인 자격으로 무장친위대에 지원한 반공주의자가 100여 명 정도 되었다.
2.17. 스위스
2.18. 스페인
스페인 내전을 지원한 독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 그리고 공산주의 맹주 소련을 치는 데 대한 공감의 표시로 자원병을 파견하였다. 스페인인 부대는 높은 전투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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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은 '''청색 사단''' 문서 참조.
루프트바페에는 일부 조종사들이 의용비행대를 결성하여 참전하였다. 5차에 걸쳐 총 89명의 조종사가 참전했고 출격 3천회, 159기 격추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들은 전원 동부전선에서 싸웠는데, 소련군에 속해 있는 옛 공화정부군 소속 망명 파일럿들과 조우하여 서로 스페인어로 욕지거리를 퍼부어 가면서 공중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크릭스마리네에 입대한 인원들도 있다. 해군 함정 승조원으로 복무, 수병에만 머무르지 않고 원사 이상 상급 부사관까지 진급한 경우도 있다.
2.19. 슬로바키아
2.20. 아랍
- 독일-아랍 교도대대(Deutsche-Arabische Lehr Abteilung): 1941년 6월에 그리스 소니움(Sonium)에서 편성했다. 구성원은 주로 포로수용소에서 지원한 영국군이나 프랑스군 소속 아랍인 병사들이었고, 이 부대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아민 알 후세이니와 전직 이라크 총리 라시아 알 가일라니가 갈등을 벌였다.
1942년에는 287 특수임무부대(Sonderverband 287)에 편입되어 아랍 국가에 침투하는 작전을 위해 9월에 코카서스로 배치되었으나,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면서 11월에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로 이동했다. 1943년 1월에는 다시 튀니지로 이동해서 경비나 공사작업에 투입할 아랍인 보조부대[3] 를 모병하는 임무를 받았다. 5월에 튀니지 교두보가 항복할 때 이들도 모두 항복했다.
- 독일-아랍 845대대(Deutsche-Arabische Bataillon Nr 845): 북아프리카로 보내지지 않은 독일-아랍 교도대대 잔여병력을 기간으로 편성했다.
2.21. 아르메니아
동방부대 내 아르메니아인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22. 아제르바이잔
동방부대 내 아제르바이잔인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23. 알바니아
무장친위대 50/51 무장산악엽병 연대, 21 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알바니아 1사단)로 편성되었다.
2.24. 에스토니아
무장친위대 45/46/47 무장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총 복무 인원은 3만 명에 달한다. 이중에서 4명이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처음에는 비킹 사단에 배속된 나르바 대대 하나였으나 부대 규모가 증강되면서 추가편성되고, 궁극적으로는 20 무장척탄병 사단으로 확대된다. 마지막에는 체코 전선까지 밀려나서 체코 파르티잔에게 죽거나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에스토니아인들은 독일군 복무를 소련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여기는 무장친위대 복무 경력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
에스토니아인 대대의 군가. 원곡은 스페인내전에 참전한 독일공군 콘도르 군단의 군가인 <콘도르 군단의 분열행진곡>으로, 개사한 것이다. 가사 번역은 여기를 참조.
2015년에는 에스토니아에서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제작, 개봉하기도 했다. 제목은 1944. 에스토니아 독일군 부대 뿐만 아니라 소련군 소속 에스토니아 부대 또한 다룬다.
2.25. 영국
2.26. 왈롱
무장친위대 69/70/71 의용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2.27. 우즈베키스탄
동방부대 내 투르키스탄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28.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독립을 원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많이 참가했다. 국방군에서는 특수작전을 맡은 브란덴부르크 사단에 속한 우크라이나인 장병들이 많았으며, 무장친위대에서는 우크라이나인 지원병으로 1개 사단을 편성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29/30/31 무장척탄병 연대가 포함되었으며, 그외 상세한 사항은 14 무장척탄병사단 항목 참조.
그 외에 강제수용소 경비원으로 복무하거나 우크라이나 방위군 등 현지인들이 조직한 군사조직에 속해서 독일군에 협력하여 치안 유지 임무를 수행한 우크라이나인들도 많다. 이 "치안 유지"가 빨치산 토벌이나 유대인 학살 임무인 것이 문제. 동방부대 내 자유 우크라이나 군단으로 편제된 인원도 5만 명에 달하며, 무장친위대만큼 잔악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계 폴란드인 650명이 국방군 첩보부 휘하의 롤란트 대대에서 근무하였다.
2.29. 이탈리아
해군 장병 일부가 복무한 사례가 있다.
무장친위대 81/82 무장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2.30.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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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독일 내에 있는 인도인들로 군대를 편성해서 연합군과 싸우게 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 인도군단(Legion Freies Indien)이었다. 사실 이 부대는 정말 제대로 된 전투부대라기보다는 정치선전을 위한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생이나 기타 이유로 체류하고 있던 인도인들이 입대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구성할 숫자는 당연히 되지 못했다. 이에 독일군 당국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포로로 잡은 영국군 소속의 인도 병사들을 상대로 모병을 한다. 일단 선발된 27명의 장교가 베를린으로 불려갔고, 그 뒤에 포로들 중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6천명 규모로 부대가 편성되었다.
영국군 소속 인도인 부대가 인도인들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족별/종교별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데 비해서 자유인도군단은 모슬렘, 힌두, 자트, 마라타, 라지푸트 등 제민족을 혼합편성했다. 이는 인도 독립운동에서 무투파의 영도자였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강력한 주장에 의한 것으로, 이렇게 함으로써만 전 인도인의 단결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부대원의 2/3는 모슬렘이었고, 나머지가 힌두교도 및 기타 소수민족이었으며 시크교도의 비중이 꽤 컸다.
이들 인도인 부대는 실제 전투임무에는 거의 투입되지 않았다. 일부 분견대(보병 2대대 소속의 제9중대)가 이탈리아에서 파르티잔 소탕에 투입되어 종전시까지 버티다가 항복한 것 외에 주력은 노르망디 상륙 이전에는 독일 국방군 육군 소속으로 대서양방벽을 지키는 요새선 구축작업에 주로 동원되었고, 미영 연합군이 상륙한 후에는 무장친위대로 전속(44년 8월)된 후 약간의 전투를 겪으면서 내륙으로 후퇴하여 1944년 겨울에는 독일 본토로 들어간다. 사실 본래 예정되어 있던 이들의 임무 중에는 동부 이란에 낙하산으로 강하하여 지금의 파키스탄인 발루치스탄에 잠입, 선동과 테러, 사보타주를 벌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것 역시 제대로 되진 않았다.
하지만 다음해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이들은 갈 곳이 없어진다. 자유인도군단의 장병들은 논의 끝에 2.6km의 알프스 산길을 돌파하여 중립국인 스위스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미군과 프랑스군에게 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 소속 모로코 병사들이 포로가 된 상당수의 자유 인도 군단 병사들을 학살했는데 그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며, 이후 영국군에 인수된 장병들은 인도로 송환, 반역죄로서 재판에 회부된다. 인도국민군 장병들도 이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2.31. 잉구시
동방부대 내 캅카스 무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32. 조지아
동방부대 내 조지아인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33. 중화민국
장개석의 둘째 아들인 장위국이 독일 육군사관학교를 1936년에 졸업하고 독일 국방군에서 복무했다. 산악전 부대로 훈련을 받았으나 안슐루스에는 전차대를 지휘해서 참가했고, 폴란드 침공에도 투입 명령을 받았으나 출동하기 전에 본국으로 소환되어 독일군에서 나갔다.
2.34. 체르케스
동방부대 내 캅카스 무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35. 체첸
동방부대 내 캅카스 무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36. 체코
2.37. 카자흐
동방부대 내 투르키스탄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38. 카자크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볼셰비키에 의해 탄압받았던 카자크들은 처음에는 독일 국방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였고[4] 백군 출신 카자크인들은 나치 독일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포로가 된 붉은 군대의 장교들 가운데서도 카자크 출신 반공주의의 장교들이 있었고 대표적인 인물이 이반 코노노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우크라이나 방면에서 포위당하자 항복하고 자신의 병력을 독일과 함께 반공투쟁에 참여하고 싶은 의사를 내비쳤다.
카자크들 또한 슬라브인의 일종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전쟁 초기에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카자크뿐만 아니라 동유럽계열 민족의 지원자 부대를 회의적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점령지의 파르티잔의 문제가 계속 발생하자 중부후방집단군 사령관이었던 막스 폰 셴켄도르프 보병대장의 지원으로 이반 코노노프의 부대를 바탕으로 600 카자크 기병연대를 창설, 파르티잔 토벌에 활용하였고 파르티잔을 상대로 카자크 특유의 무자비한 방식으로 토벌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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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카자크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괴벨스
이후 파르티잔 토벌에의 카자크 기병대의 적합성 등의 이유로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카자크 부대의 정식 창설을 허락하게 된다. 특히 이들은 괴벨스에게 카자크인 부대의 창설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괴벨스는 선전용에 적합할 것을 고려하여 동의하였었다. 괴벨스는 선전을 위해서 카자크들은 물론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러시아 해방군을 조직하는 데에도 동의한 바 있었다.
적백내전의 패배 이후 독일로 도피·추방되어왔던 백계 카자크인 표트르 크라스노프, 안드레이 시쿠로 장군의 도움 속에서 헬무트 폰 판비츠 소장의 지휘 아래에 1943년, 제 1 카자크 기병사단을 창설한다. 이때 코노노프의 기병연대도 사단에 포함되었고 코노노프의 부대를 제외하고 제 1카자크 기병사단의 대부분이 일선 부대 지휘관은 카자크인이 맡았지만 연대장 이상은 독일인들이 맡았었다. 부대 구성은 거의 15000 여 명의 카자크인과 5000 여 명의 독일인으로 구성되었다.
- 제 1 카자크 기병사단
- 제 1 카자크 기병여단 "돈(Don)"
- 제 1 돈 카자크 연대
- 제 2 세르비아 카자크 연대
- 제 4 쿠반 카자크 연대
- 제 1 카자크 기마 포병 대대
- 제 2 카자크 기병여단 "코카서스(Caucasus)"
- 제 3 쿠반 카자크 연대
- 제 5 돈 카자크 연대 - 연대장 이반 코노노프 중령
- 제 6 테렉 카자크 연대
- 사단 직할대 - 55 정찰대대, 55 포병대대, 55 공병대대, 55 통신대대, 55 보급대대, 55 의무대대
- 제 1 카자크 기병여단 "돈(Don)"
주로 파르티잔 토벌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주요 공산 파르티잔의 수장이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추적하는 기사의 도약 작전(Unternehmen Rösselsprung)[5] 이 대표적인 참가 작전이었다. 역시나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마을들을 황폐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무자비함을 다시 한번 떨쳤으며 나중에 이러한 전쟁 범죄로 인해서 대부분 처벌 받는다. 다만 별개로... 전후 대부분 모스크바로 송환되어 대조국을 배신한 댓가로 죽는게 더 큰 이유였지만.
1944년이 되면서부터는 바그라티온 작전의 개시, 즉 독일군이 점차 서부로 몰려가면서 제 1 카자크 사단을 마냥 파르티잔 토벌에만 투입시킬수는 없었고 결국 크로아티아의 피토마차라는 곳에서 소련군 제 233보병사단과 교전을 펼쳐서 거의 궤멸상태로 방어에 성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44년 11월, 전쟁이 독일의 멸망으로 흘러가는 즈음 SS은 독일 국방군 내의 외국인부대를 SS 휘하로 두면서 1 카자크 기병사단을 2개 사단으로 증편하면서 15 SS 카자크 기병군단으로 재편한다. 하지만 사실상 SS에 속했던 기간은 2개월 정도에 불과하고 그 때문에 제복이나 계급체계 또한 기존의 국방군 예하에 있던 그대로 유지하였다. 1945년 4월, 다시 자유 러시아 군단의 소속으로 편제가 옮겨지면서 15 카자크 기병군단으로 변경되고 자유 러시아 군단 산하에 15 카자크 기병군단에서 분할되어 러시아 출신 니콜라예비치 도마노프 소장이 지휘하는 독립 카자크 군단이 형성된다.
하지만 거의 2차대전의 마지막 단계인 와중에 부대의 증편, 지휘 체계의 변동 속에서 별다른 활약없이 종전을 맡이하게 되고 저마다 소련으로 송환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서쪽으로 가서 영국군에 체포되었으나 얄타 회담에서 어느 정도 사전 협의를 봐뒀던 영국과 미국은 결국 카자크들을 대부분 소련으로 송환하였고 조국을 배신한 죄목으로 대부분 사형당하거나 굴라크에서의 노동교화형을 받는다. 소위 "카자크의 배신" "린츠 대학살" "카자크의 비극" 등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2.39. 크로아티아
13 SS산악사단 한트샤르가 "크로아티아 1사단"으로 불렸으나 주력은 보슈냐크인들이었고 크로아티아인은 일부에 국한됐다. 예하에 27/28 무장산악엽병 연대가 크로아티아 연대라는 깃발을 달고 있었다.
그 외에 무장친위대 55/56 무장산악엽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2.40. 키르기스스탄
2.41. 타타르
2.42. 투르크멘
동방부대 내 투르키스탄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43. 프랑스
1940년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먼저 항복한 후 독일에 병합된 알자스-로렌 출신자가 주를 이루었는데, 순수 독일계거나 부계 또는 모계 중 어느 한 쪽이 독일계인 경우가 많다. 잊혀진 병사의 저자 기 사예르에 따르면, 프랑스인 부모를 둔 자들은 전후 분류 과정에서 반역자로 분류되어 처형되었지만 자신처럼 독일인 어머니, 프랑스인 아버지를 둔 자들은 처형 대상으로는 분류되지 않고 프랑스군에 재입대하는 선에서 처분이 끝났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 혼혈이 아닌 진짜 프랑스인들도 상당수 독일군에 참여하였다. 독일군에 입대한 프랑스인들은 원래 극우 파시스트인 경우가 대부분이나, 그저 군대에 다시 들어가 전투를 하고 싶어서 입대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에 등장하는 한 프랑스인 장교는 "어느 군대건 상관없다! 내 휘하에 다시 포병 중대가 들어온다는 게 중요해!"라는 멘트를 남긴 바가 있다.
전쟁이 끝날 때 샤를마뉴 사단 소속 무장친위대원 일부가 자유프랑스군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에게 포로가 되었다. 르클레르가 이들을 심문하면서 "왜 독일 놈들 옷을 입고 있나!"하고 질책하자, 이들은 도리어 '''"그러는 댁은 왜 양키 놈들 옷을 입고 있소?"'''라고 패기 있게 대꾸했고, 이에 르클레르는 전원에게 총살형 선물을 제공했다.
무장친위대 57/58 무장산악엽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2.44. 플란데런
무장친위대 66/67/68 의용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2.45. 핀란드
핀란드와 독일이 같은 추축국이긴 했으나 핀란드가 독립국인 이상 핀란드군 자체는 독일군과는 독립된 명령체계를 유지했다. 다만 이와는 별도로 무장친위대인 노르트란트 사단에 소수의 핀란드인 병사들이 지원하여 복무하였다. 이들은 계속전쟁이 시작되면서 대다수가 핀란드군으로 복귀했으나, 소수의 신원 미상의 핀란드 장병들이 끝까지 무장친위대에 남아서 베를린 공방전까지 참전했다. 이들의 최후는 잘알려져 있지 않으나, 신분을 숨기고 도망친 극소수의 장병들을 제외하면 베를린에서 전원 전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2.46. 헝가리
무장친위대 61/62/63/64/65/85 무장척탄병 연대, 제1헝가리 돌격엽병연대로 편성되었다.
3. 한국인 독일군?
떠도는 풍설 말고, 진지하게 한국인 독일군이 있을 수 있었다는 의문을 제시한 매체는 호비스트가 출간한 플래툰(잡지)이 최초이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베를린의 한 지하실에서 무장친위대 제복을 입고 할복한 동양인 30여 명이 발견되었다는 서술과 함께 당시 이들을 발견한 소련군이 이 시체들을 일본인 또는 한국인으로 추측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독일군에 한국인이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노르망디의 한국인 항목을 참조할 것.
4. 말로
대개 조국에 대한 배신자들이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경우라도 그 말로는 대개 좋지 못하다. 조용히 숨어서라도 살 수 있으면 다행이고, 조국이 히틀러 때문에 쑥대밭이 된 나라라면 반역자로 처형당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영국 의용군과 프랑스 의용군들은 대부분이 처형되었고, 100만이 넘는 소련군 출신 독일군 부역자와 전향한 의용군들도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끌려갔다가 스탈린 사후에야 사면되었다.
다만 소련측의 부역자 처벌은 미국을 빼면 연합국 중에서는 놀랍게도 생각보다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에스토니아에서는 지금도 무장친위대 출신자가 존경을 받는다. '''소련 시절에 목숨을 건져서 살아남았다'''는 그 말이다.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3국은 소련/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워낙 컸기 때문에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이 조국 광복을 위해 독립군에 입대하는 정도로 취급되었다. 이 나라들은 무장친위대 복무 경력을 자랑스럽게 떠벌릴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에스토니아 영화 1944를 보면 이러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고국으로 귀환하여 무사히 살거나 독일, 미국등 타국으로 이민을 간 의용병들도 적잖다. 주로 무장친위대에 입대는 했으나 전쟁범죄나 원한 살 짓은 하지 않은 사람들이 해당되는데, 냉전시기 깃발 바꿔 다는 데 성공한 자들은 이전의 지위까지도 유지한다. 잊혀진 병사의 저자인 기 사예르는 고국으로 돌아가 회고록 집필을 하고 만화가로 살았으며 비킹사단에 의용군으로 참전한 핀란드인 올로프 라구스는 1943년 고국으로 귀환하여 핀란드군으로 계속전쟁에 참전하여 돌격포병으로 활약, 후엔 은행가로 생을 마쳤다. 심지어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했던 핀란드인 라우리 알란 퇴르니는 미국으로 귀화해 MACV-SOG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외 상당수의 의용군이 처형당하지 않고 평범한 말년을 보내고 생을 마쳤다.
5. 창작물에서의 등장
-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창작 만화들 중에 종종 등장한다. 대부분 실존한 부대지만, 작가가 확실히 꾸며낸 것으로는 해피 타이거에 등장하는 몽골인(사실은 일본인), 동아총통특무대에 등장하는 일본인 무장친위대가 있다.
- 잭 히긴스의 소설인 독수리는 내리다에는 하비 프레스턴이라는 영국인 출신 무장친위대 소위가 등장한다. 영국인 부대인 영국 자유군단 소속으로, 됭케르크 철수작전 때 낙오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전향했다. 독일의 승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는 진짜 부역자.
작중에 등장하는 가공의 작전인 처칠 암살작전에 "진짜 영국인으로 보일 대원"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차출, 팔슈름예거 특공대와 함께 투입되지만 원래 쓰레기에 가까운 인간이라 작전 중에 동료나 주민과 몇 차례나 트러블을 일으켰고, 결국에는 자기가 괴롭혔던 마을 주민에게 목이 졸려 죽는다.
- 후속편인 독수리는 날아오르다에서는 조지워싱턴 여단[6] 소속 미국인 조종사가 등장한다. 본래는 웨스트포인트까지 졸업한 미 육군 항공대장교였으나 술집에서 상급자인 소령을 구타하는 바람에 불명예 제대당하고, 집에서 놀다가 2차 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짐을 싸서 유럽으로 갔다. 상관을 폭행한 전력 때문에 영국군에서 입대를 거절당하자 겨울전쟁을 치르는 핀란드로 가서 의용군으로 참전, 소련기 7기를 격추한 에이스가 되었다.
분명 핀란드 공군 소속이지만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자 독일군에게 넘겨진다. 결국 동부전선에서만 복무한다는 조건부로 무장친위대에 입대했고, 조종솜씨가 너무 좋아서 전선 비행단에서 소련군과 싸우는 대신 높으신 분들을 태우는 연락 임무만 맡다가 차출되어, 전편의 처칠 암살작전에서 죽지 않고 포로가 되어 런던탑에 갇혀 있는 특공대 지휘관 쿠르트 슈타이너 중령을 구출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작전을 성공시킨 후 슈타이너와 함께 독일을 탈출, 아일랜드로 간다. 그 뒤의 운명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 상륙전 부분, 벙커에서 나와 살려달라고 하는 독일군 병사들이 체코인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6. 관련 문서
[1] 왈롱계는 네덜란드계와 구별되어 차별을 받았다.[2] Boy Rickmers, 1895~1957. 이 사람은 1933년에 나치당에 가입해서 친위대에 들어갔고, 1938년에 국방군으로 옮겨간 골수 나치이기도 했다. 1943년에 기사십자장을 수훈할 당시 소속 연대는 586 척탄병 연대였다.[3] 이들은 비시 프랑스군 군복과 소총을 지급받았다.[4] 물론 이후 독일군이 해방자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자 앞다퉈 소련군에 입대하거나 게릴라가 되었다. 이는 소련 내 타 민족들도 마찬가지였다.[5] 오토 슈코르체니도 이 때에 참여하였다.[6] 실존하지 않는 부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