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북
1. 개요
북인에서 분당한 소북에서 다시 분당하여 대표적인 반유영경 인사인 남이공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청소북이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북인 계열 중 힘 좀 쓴 붕당.[1]
청북(淸北), 남당(南黨)이라고도 한다.
2. 상세
선조 후반에 소북은 두 영수인 남이공과 유영경 사이 갈등 때문에 청소북과 탁소북으로 다시 분당되었다. 1608년 광해군일기 사론에
고 하였으며"유영경이 나라의 권력을 잡았을 때는, 김신국(金藎國)·남이공이 모주(謀主)가 되더니만, 영경이 패한 뒤에는 김신국과 남이공이 맨 먼저 제창하여 창을 거꾸로 잡고 공격하면서 깊이 희분(希奮)과 결탁하여 날뛰고 기탄없이 굴었다. 청북(淸北)이니 탁북(濁北)이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 내어 영경과 다르다는 것을 보였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4월 21일)
1610년의 실록 기사에는,
고 하여, 비록 수장 유영경은 1608년 사망하였으나 그의 영향력으로 탁북의 형성 이유를 기록하고 있고 반유영경 세력의 형성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실록에는 "소북 중에는 또 청북과 탁북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는"당초 유영경의 당(黨)을 소북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소북 중에 또 청북(淸北)과 탁북(濁北)이 있었다. 대개 그 중에서 다소 강직하여 스스로 염치가 있다고 하는 자를 사람들이 청북이라고 칭하고, 그 나머지 무리를 탁북이라 이르니 김대래와 같은 무리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3월 9일)
고 하여, 남이공과 유영경의 정치적 대립이 소북 분당, 즉 청소북과 탁소북 분당의 주요 원인임을 기록하고 있다."임인년(1602년)에 유영경이 정승으로 들어와서 등용한 것은 모두 소북이었다. 정권을 잡은 7년 동안 남이공 등은 다시 기용되지 못하다가 영경이 패하게 되자 이공 일파가 미리 그 기미를 알고 대립하는 형상을 취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공의 무리를 청소북(淸小北)이라 하고 영경의 무리를 탁소북(濁小北)이라 지목하였다."
또한 실록에는 남이공을 ‘청북의 괴수’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3월 23일).
청소북의 영수이자 광해군의 처남이기도 했던 유희분은 대북의 이이첨과 손을 잡고 광해군 초기에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대북이 권력을 독점하자 청소북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가 인조반정 당시 대북과 함께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임진왜란 이후 남북 분열이 확실시된 이후로는 별 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북인 정권 내에서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서인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며 조정에서 여러 자리를 차지했지만 광해군 때 대북의 날조로 일어난 옥사로 몰락하자 대북의 전횡에 대해서 역시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고 훗날 인조반정의 조짐이 보이는데도 방관하면서 사실상 그들에게 동조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북의 분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중북과 함께 남인에 흡수되었으며, 중북과는 다르게 남인 내에서 힘을 좀 썼다. 또한 광해군 초기 대북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던 탁소북의 송사리 몇몇은 아예 서인 정권에 참여하며 전향했다.
3. 주요 인물
- 남이공
- 김시국(金蓍國)
- 남이신(南以信)
- 박이서(朴彛敍),
- 임연(任兗),
- 임장(任章)
- 유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