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북
1. 개요
小北
조선 시대 붕당의 하나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인의 한 계열. 학문적으로는 조식이 뿌리이다. 2. 역사
1599년(선조 32) 이조 판서 이기가 홍여순(洪汝諄)을 대사헌으로 천거하자 남이공이 반대하였다. 홍여순과 남이공의 대립으로 북인 내에 분열이 생겼고 남이공을 지지하는 북인의 일부가 모여 형성된 당파가 소북이다. 선조의 후계 자리를 놓고 영창대군과 광해군이라는 선택지에서 소북은 영창 대군을 지지하였다. 다만 소북이라고 모두 광해군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남이공이 유영경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소북 내에 유영경 파와 남이공 파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고, 결국 다시 갈라졌다. 전자는 탁소북 후자는 청소북이라고 한다.
위와 같이 소북이 영창대군을 지지해 많은 사람들이 소북 세력이 선조 후기에만 아주 잠깐 정권을 잡았다가 광해군 즉위와 동시에 멸문을 당한 줄 알지만, 이 정도의 된서리를 맞은 것은 적극적으로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1] 한 유영경 일파(유당, 혹은 탁소북) 뿐이며 청소북의 영수이자 광해군의 처남이기도 했던 유희분은 대북의 이이첨과 손을 잡고 광해군 초기에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즉 북인 정권 내에서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서인, 남인[2] 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며 조정에서 여러 자리를 차지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대북이 권력을 독점하자 광해군 때 대북의 날조로 일어난 옥사로 몰락하자 대북의 전횡에 대해서 역시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고 훗날 인조반정의 조짐이 보이는데도 방관하면서 사실상 그들에게 동조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당시 대북과 함께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인이 주도한 반정 공신들의 거센 반대에도 인조가 유희분의 참형을 감행한 것.
광해군 초기 대북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던 탁소북의 송사리 몇몇이야 서인 정권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고 말 그대로 미미한 세력이 되어 남인 계열로 흡수되어 숙종 이후가 되면 완전히 잊혀진 정치 세력이 되고 만다...고는 하는데 이건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인조반정 이후에 공서파의 도움으로 부활해 사실상 '''소북이 남인으로 간판만 바꿔단 상태'''가 된다.[3] 대표적인 사례가 사람들이 흔히 숙종 시기 남인의 영수로 알고 있는 윤휴. 이익과 유형원, 실학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정약용도 가계의 배경이 소북이다.
여담이지만 그나마 유영경 등 탁소북 일파들이 인조 반정 이후 서인들에 의해 복권됐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을 수 있으.. 려... 나...? 아래는 최명길이 소북 집권 시기를 평가한 글이다.
유영경은 7년 집권하는 동안 권리를 독차지하고 자당(自黨)의 기반을 굳혔으나, 그 때에 기강이 대략 잡히고 조야도 비교적 평온하였으며 사림에 화를 끼친 죄도 없었다.
3. 주요 인물
[1] 아닌 게 아니라 왕의 교지까지 숨겨버릴 정도였으니, 목숨을 구하길 바란 거 자체가 무리수다.[2] 남인 역시 같은 동인계열이라 서인보단 나은 대우를 받았으나 소북보단 대우가 낮았고 후에는 같은 이유로 인조반정을 은근슬쩍 동조(방조)한다.[3] 이들을 가리켜 서울-경기지방에 대다수 거주하는 남인들이라고 하여 근기남인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황 계열의 남인들은 영남남인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