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국

 


1. 개요
2. 국방에 대한 남다른 식견
3. 광해군 시기
4. 인조 시기
5. 평가


1. 개요


金藎國, 1572년 ~ 1657년
자는 경진, 호는 후추, 본관은 청풍이다.[1] 소북 계열이며 아내는 윤씨며 같은 소북인 남이공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다.[2] 학문은 이산해, 이지함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국방에 대한 능력도 좋고 경제 브레인이며 화폐 시행도 주장하는 등 꽤나 이력이 좋은데도 어째 김육에게 밀리는듯하다.[3]

2. 국방에 대한 남다른 식견


병법에 밝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권율, 이덕형으로부터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당이 달랐던 유성룡조차도 그의 병법이나 진서에 대해서 밝다는건 인정했다.[4][5] 산성 농성 전략을 비판한적이 있다.

3. 광해군 시기


1613년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어 후금의 침략을 예고하고 7가지의 막을 계책을 제시했다. 또한 이후엔 비변사 당사에도 강홍립과 함께 추천되었고 폐모론에 찬성하지 않았다.[6] 1619년 호조 판서에 제수되어 인조반정 때까지 맡는다.

4. 인조 시기


초기엔 광해군 때 받은 훈작도 박탈되고 유배길에 오르지만 1623년에 평안도관찰사에 올랐다. 서인 세력이자 이귀와 함께 인조 반정 양대 공신 중 하나인 김류 덕분이었는데 김류와는 김신국이 평안도관찰사이던 시절 그의 밑에 있으며 교분이 생겼다. 김신국 외에 윤휘, 이경전, 남이공, 정온 등 인조 정권 연착륙에 성공한 북인계 실무관료들은 대부분 김류 줄을 타고 내려왔다. 인조는 그가 지조가 없다는 둥 폐비 자리에 참석했다는 둥 사치를 한다는둥의 이유로 꺼림찍해 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이괄의 난이 터졌을 때 역모 관련자 혐의를 받지만 다행히 벗어나고 1625년 호조판서에 제수되는데 광해군 때 경제 정책을 잘 맡아 했다는 얘기가 많다. 호조판서가 되면서 먼저 한 일이 '''화폐 도입'''[7][8] 그는 고려 성종 때부터 화폐를 쓴 것부터 이전에 화폐를 써 온 일을 예기하며 쌀이나 무명으로 거래하면 나라가 망하고 고려 때처럼 백성들이 돈 쓰는 맛을 알게 해야 나라가 잘 살게 된다고 했다. 1627년에는 은광 개발을 주장한다.[9] 병자호란 시기에는 최명길 등과 함께 청나라의 진영을 찾아 세자가 나올 것임을 알렸다가 충격적인 얘기를 싣고 돌아온다.[10] 163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어 강화도에 대한 형세를 보고한 후 강화 유수에 제수된다.[11] 1657년에 사망했다.

5. 평가


실무형 엘리트 관료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비슷한 인물을 꼽자면 김재익이 있다. 북인에 속하긴 했지만 정인홍, 이산해 등과 달리 특정 학맥에 속하지 않는 신진관료였고 당색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정쟁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일이 없었고 광해군 시기 폐모론에 참여하긴 했지만 강하게 지지하지도 않았다. 대신 전문 분야인 국방, 경제 관련 업무만 충실히 수행했다. 이 덕분에 반정 이후에도 서인들의 미움을 크게 사지 않았고 능력을 인정받아 오래도록 중용받을 수 있었다.
왜란과 광해군의 폭정, 이괄의 난, 호란이라는 어지러운 시기를 보낸 조선에서 국방과 경제전문가인 그의 능력은 꼭 필요한 것 이긴 했으나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거치며 형성된 공안정국의 살벌함을 고려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도 별 다른 잡음 없이 중용받은 김신국의 처세와 실무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1] 청풍명월, 청풍면할 때 그 청풍이 맞다. 원래 제천보다 컸는데 1914년 제천군에 포함되었다.[2] 사실 김신국과 남이공은 쌍콤비로 소북의 영수로 활동했다.[3] 김육의 경우엔 김신국처럼 화폐 주장을 했지만 너무 넘사벽적으로 알려진데다가 끈질기게 주장한 법이 있어서 살짝 밀리는 듯하다. 애초에 김신국은 항목도 없었다.[4] 병법과 진법을 가르칠 인물로 유성룡이 천거했다. [5] 물론 유성룡이 당에 관계없는 활동을 많이 해서 유성룡조차도란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6] 하지만 결정하는 자리에 참여해서 인조반정 후 유배된다.[7] 목적은 재정을 충당하고 국부를 증대하는 것이다.[8] 이전의 화폐 도입과는 꽤 진일보한 모습을 보이는데 세종 대에 화폐 도입은 꽤나 '''맛갔다.''' 걍 억지로 쓰게 하라고 하면서 안쓰면 '''가산 몰수 + 곤장 + 벌금'''로 문제는 '''가산을 다 몰수해놓고 벌금을 내라고 하니''' 결국 화폐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또한 처음부터 전국 실시를 했는데 하지만 이때는 그 당시 많이 사용하는 쌀과 무명을 돈으로 바꾸어주는 일종의 환전소를 마련하고 대도시에 시범 적용을 하고 조금씩 확대해서 화폐 정책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두 번의 호란으로 결국 실패한다.[9] 당시 세계는 은으로 거래를 많이 했고 뭣보다도 재정을 충당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당장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이 연은분리법으로 재정을 충당한 것을 생각하자[10]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그 안에 있던 봉림대군 부부, 세자빈 등이 포로처럼 붙잡혔다.[11] 1625년 ~ 1638년까지 자그마치 13년 ~ 14년이나 호조판서를 역임한 셈인데 이러한 경력이 생길수 있는 데에는 조선 자체가 호조판서 같은 경제 담당 자리는 꽤 오래 앉혀놨다. 이유는 경제 정책을 연속성 있게 하기 위함인데 이러한 이유 덕인지 6조 중 제일 선호하는 이조판서는 재임 기간이 평균 9개월인데 호조판서는 25개월이다. 다만 그래도 한 직책에 10년넘에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문만큼 꼭 호조판서 자리가 오래 있는 직책이라서보다도 능력이 좋아서인듯 하다.